이상돈
 
 
 
 
 
  마크 컬란스키, 바스크 세계사 (1999년) 계속
2010-12-19 23:02 2,537 이상돈


<계속>
마크 컬란스키, 바스크 세계사 (1999, 펭귄 북스, 387쪽, 16달러)
Mark Kurlansky, The Basque History of the World (1999, Penguin Books, $16.00)


프랑스 혁명과 바스크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에 조직된 국민의회는 프랑스 내의 바스크 지역을 단일한 행정구역으로 통합했다. 1804년에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내의 바스크 지역도 그들의 전통법을 포기하고 나폴레온 민법전을 따르도록 했다.

1793년에 프랑스에 공화정부가 선포되고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이 소식을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를 경악시켰다. 스페인 국왕은 2만 명 병력을 국경지대에 파견하자 프랑스 군대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스페인으로 진격했다. 마드리드의 중앙정부는 바스크에 대해서도 프랑스에 맞서 싸우도록 요청했지만 바스크 지역은 미온적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을 침공했고, 산세바스티안은 전투를 하지 않고 항복했다.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스페인은 바스크를 의심의 눈으로 보게 됐다.

바스크 지역 중에도 산세바스티안은 프랑스에 항복했지만 산간 지역은 프랑스에 대해 저항하는 등 바스크 지역 간에 내분이 지속됐다. 1808년 2월, 나폴레온의 군대가 빰쁠로나까지 내려오자 스페인의 샤를르 4세는 퇴위했고, 나폴레온은 자기의 동생 조세프로 하여금 스페인을 통치하도록 했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프랑스에 저항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결국은 영국과 포르투갈이 스페인 편에 서서 프랑스와 싸우는 스페인 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그러자 나폴레온은 바스크 지역에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1813년에 스페인-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프랑스 군대를 몰아냈다. 빰쁠로나를 마지막으로 지키던 프랑스 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항복했다.

칼리스트 전쟁

프랑스 군은 스페인에서 물러났지만 통일된 스페인을 남겨 놓았다. 마드리드의 리버랄들은 프랑스를 본 받아서 시민의 자유가 보장된 통일된 스페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는데, 이들은 바스크를 고루한 국왕주의자들로 보았다. 지역의 독립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던 바스크 지역과 까탈란 지역은 자신들의 자치를 지키려 했다. 이들은 또한 마드리드의 리버랄을 위험한 무신론자(無神論者)로 생각했다.

1833년 페르디난드 7세가 사망하자 그이 유언에 따라 당시 3살이던 어린 딸 이사벨라가 후계로 지명되고 이사벨라의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후견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페르디난드 7세의 동생인 칼로스가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여성은 국왕이 될 수 없다는 프랑스의 법을 들면서 칼로스의 왕위계승을 주장했다. 이들은 이사벨라아와 크리스티나가 반(反)교회적이고 국왕을 약화시키는 리버랄 정책을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로스의 국왕계승을 주장하는 세력은 바스크, 아라공, 까탈루나, 그리고 발렌시아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마드리드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지역으로 국왕은 존재하되 자신들의 고장은 독립성을 향유하기를 원했다. 사망한 페르디난드 7세와 달리 칼로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여서 이들은 칼로스가 무신론자 개혁세력인 리버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산세바스티안과 빰쁠로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바스크 지역이 칼로스의 편에 섰다. 

1833-1839년 동안 1차 칼리스트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바스크 지역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벌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마드리드의 리버랄을 편들었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러시아는 칼로스파(派)를 지지했다. 칼로스는 바스크로 잠입해서 전쟁을 지휘했다. 칼로스파 군대는 빌바오를 점거하기 위해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발렌시아를 장악했던 칼로스파 군대는 다시 밀려서 나바라로 패퇴했다. 1839년 8월에 내전을 종식하기 위한 협정이 맺어졌고 리버랄은 스페인을 장악했다. 이때 칼로스 편에 섰던 수천명의 바스크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1844년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치안군(Guardia Civil)이란 국가경찰을 창설했다. 바스크와 치안군과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바스크에서 칼로스파의 패퇴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영국 자본이 유입되어 빌바오에 제철소가 세워지고 이를 기반으로 빌바오는 공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1857년에 빌바오 은행이 세워지는 등 빌바오는 공업 뿐 아니라 금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69년에 세속적 결혼제도가 도입됐고, 종교의 자유가 선포됐다. 그러자 바스크 지역은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1872년에는 2차 칼리스트 전쟁이 일어나서 바스크와 바스크가 다시 싸우게 됐다. 1876년에 이 내전이 종식되자 바스크는 스페인 중앙정부에 세금을 내고 병역을 이행하게 됐다. 

두 차례 전쟁에서 패배하자 바스크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을 추구하는 바스크 르네쌍스 운동이 일었다. 1891년에 최초로 바스크 문법책이 출간되었고, 바스크 노래와 바스크 합창이 성행하는 등 바스크 사람들의 자의식이 싹텄다. 바스크 지역의 부족장들은 게르니카의 오래된 오크 트리 앞에서 의식을 치렀는데, 1876년에 바스크가 스페인에 속하게 되자 바스크 지도자들은 게르니카의 오크 트리 앞에 모여서 바스크의 전통법을 수호하기로 약속을 하는 관행이 생겼다.

사비노 아라나

바스크 지역의 열렬한 칼리스트이던 부유한 상공인 산티아고 아라나는 칼로스 군대의 부상당한 장군을 숨겨 주었는데, 리버랄 군대가 이를 알고 수배하자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프랑스 바스크로 도망을 갔다. 나중에 그의 가족도 프랑스 바스크 지역으로 건너갔는데, 가장 어린 아이 사비노 아라나는 당시 7살이었다. 프랑스 바스크 지역에서 사비노는 그의 형과 함께 제수이트 학교를 다녔는데, 사비노는 바스크 언어에 깊은 관심을 갖고 바스크 언어를 가르치기 위한 책을 썼다. 바르셀로나에서 잠시 법률을 공부한 후 다시 바스크 지역으로 돌아온 사비노는 바스크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했고, 바스크는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파했다. 

1893년 6월 3일, 사비노는 바스크 민족주의를 선언하는 시위를 조직했고, 1895년 7월 31일에 바스크 국민당을 지하조직으로 결성했다. (7월 31일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축일이다.) 사비노는 15살 때 중병으로 거의 죽을 뻔했는데, 기적적으로 소생한 후 자신이 성모 마리아의 힘으로 살아났다고 믿었다. 그는 바스크 순혈주의를 주장했고, 바스크의 전통은 농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순수한 바스크 혈통의 농촌 처녀와 결혼했다. 그는 바스크 국가(國歌)를 작곡했고, 형의 도움을 받아 바스크 국기(國旗)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바스크 지역으로 유입하는 인구가 늘었는데, 특히 1850년에 인구 2만 명이던 빌바오는 1900년에는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영국, 독일 등 북유럽의 기업인들이 빌바오로 찾아와서 투자를 했고, 자연히 일자리가 늘어났다.

1898년에 일어난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은 패배했다. 스페인은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이 탐험으로 획득한 필리핀, 쿠바, 푸에르토 리코 등 해외영토를 상실했다. 스페인은 그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898년 세대’라고 부르는 작가와 예술가들은 이제는 축소된 스페인을 성찰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바스크 지역에서도 미구엘 누나무노 같은 작가들이 그런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사비노에게 스페인은 여전히 바스크를 억압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1902년 5월, 사비노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쿠바가 압제에서 해방되었음을 축하하고, 미국이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 정의와 자유의 힘을 행사하고 있다면서 유럽에 그런 기운이 돌면 바스크가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미국의 역할에 감사를 표했다. 전신국 직원은 이 전문을 워싱턴 백악관으로 발송하지 않고 당국에 신고했고, 사비노는 체포됐다. 38세인 사비노는 건강이 매우 안 좋아서 반년 만에 풀려났다. 그는 프랑스의 바스크 마을인 세인트 장 드루즈로 도망가서 건강을 회복하고자 했지만 병세가 악화된 그는 바스크로 돌아와서 1903년 11월 25일에 사망했다. 사비노  아라나는 바스크에게 국기, 언어와 그리고 정당을 남기고 짧은 삶을 마쳤다.

게르니카

사비노 아라나가 남긴 바스크 국민당은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의 구심점이 됐다. 1904년에 태어나서 제수이트 학교에서 공부한 호세 안토니오 아기레는 바스크 국민당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아기레는 마드리드에 좌파 공화정부가 들어서자 이에 접근해서 바스크의 자치를 인정 받고자 했다. 하지만 마드리드의 중앙정부는 자치정부 구상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았고 분리주의자들이 득세할 것을 우려해서 예정된 지방선거마저 취소했다.

1936년 7월, 프랑코에 의한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다. 처음에 쿠데타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였으나 전위대와 치안군이 프랑코를 지지하자 여기에 동조하는 지역이 생겨났다. 아기레가 이끄는 바스크 지역은 공화정부에 충성했고 까탈루나 지역도 그러했다. 하지만 알바와 나바라 지역이 프랑코 반란군을 지지하고 나서자 상황은 바뀌었다. 바스크와 까탈루나 지방이 스페인의 암적 존재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위기에 몰린 공화파 중앙정부는 바스크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치를 허용하겠다고 했다. 공화파 중앙정부는 프랑코 반란세력을 지지한 나바라를 제외한 3개 지역이 중앙정부의 자치허용을 승인했고, 32세 밖에 안된 아기레가 자치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아기레는 게르니카의 오크 트리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자치권을 획득한 바스크는 바스크 언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1937년 초 상황은 프랑코의 반란군에게 좋지 않게 돌아갔다. 바티칸은 바스크 지역은 독실한 가톨릭임을 들어서 프랑코에게 바스크 자치정부와 협상으로 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프랑코는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면서 바티칸의 제안을 거부했다. 프랑코 군대의 몰라 장군과 프랑코 군대를 도우려 와 있는 독일군 지휘관 스펠리 장군은 빌바오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독일군 콘도르 군단의 참모장은 몰라 장군에게 독일 공군력을 사용해서 적에 공포심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3월 31일 아침, 바스크 남쪽의 두랑고라는 작은 마을에 독일 공군이 공습을 가해서 마을을 파괴했다. 주민 258명이 죽었는데 프랑코의 본부는 외국 기자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아는 바 없으며 아마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공습이 있었음에도 프랑코 군대는 바스크 지역을 조금도 장악하지 못하자 독일군은 빌바오를 폭격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코는 빌바오의 산업시설을 그대로 접수하고자 했다.

프랑코 군대와 독일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바스크 지역의 젊은이들은 베레모를 쓰고 구식 무기를 들고 나왔다. 프랑코 군대와 독일군의 포격에 쫓긴 사람들은 게르니카로 몰려 들었다. 4월 26일 새벽 4시 40분, 독일 공군의 신형 헹켈 111 폭격기 한대가 게르니카 상공에 나타나서 저공비행을 하더니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갔다. 곧 이어서 헹켈 폭격기 3대가 더 나타나서 폭탄을 투하했고, 이어서 구형 융커 폭격기 23대, 헹켈 폭격기 4대, 사보이아 폭격기 3대, 도르니어 폭격기 1대, 피아트 폭격기 12대 등이 나타나서 폭탄과 소이탄을 평화로운 마을에 퍼부었다. 게르니카는 불타는 생지옥으로 변했고, 나중에 1,645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흘 후 프랑코 군대는 게르니카에 입성했다. 게르니카에 있던 영국 등 외국기자 4명이 이 비극적인 사태를 기록했으나, 프랑코 정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잡아뗐다.

바스크 망명정부와 저항운동

게르니카의 비극은 빌바오에 영향을 미쳤다. 빌바오를 방어하기 위해 도시 외곽에 방어선을 쳤던 바스크 민병대는 자신들이 독일 공군에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숨어 들었다. 8월 26일, 프랑코 군대는 빌바오에 입성했다. 수천명의 바스크 사람들이 프랑스의 바스크 지방과 쿠바와 남미로 망명했고, 아기레와 측근들은 항공기편으로 프랑스의 바스크 지방 도시인 비아리츠로 가서 바스크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바스크 망명정부를 승인했다.

프랑스 내의 바스크 망명정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치 독일이 네델란드와 프랑스를 점령함에 따라 아기레는 가짜수염을 달고 변장을 한 후 프랑스를 탈출해서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뉴욕에 바스크 망명정부를 세웠다.

스페인 접경지역인 프랑스의 세인트 장 드루즈에는 바스크 가족이 운영하는 에스쿨라두나 호텔이 있었는데, 이 호텔 지하층 카페는 바스크 사람들의 비밀연락처가 되었다. 프랑스의 바스크 사람들은 독일군에 의해 격추된 영국군 조종사를 구해서 안전하게 다시 영국으로 보내는 위험한 일을 했다. 미국에 있던 아기레는 200명 규모의 소규모의 바스크 부대를 게르니카 대대라고 명명해서 연합군의 일환으로 노르만디 상륙작전에 참가하도록 했고 이 부대는 프랑스에서 독일군과 용감하게 싸웠다.
 
프랑코 시대

스페인 내란에서 독일의 도움으로 승리한 프랑코는 자신에 항거한 바스크 지역을 탄압했다. 바스크 언어의 사용을 금지했고, 바스크 국기도 그러했다. 프랑코는 자신 덕분에 스페인이 2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서 전쟁의 참화로부터 스페인을 지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다. 독일과 이태리의 군사력에 매료된 프랑코는 독일과 이태리와 함께 유럽을 지배하는 데 참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독일군 장성들은 프랑코의 군대가 낙후되어 있고 프랑코도 지휘능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에 스페인이 독일과 함께 영국에 대해 전쟁을 하려 한다면 독일은 스페인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공급해야 하고 더 나아가 스페인 국민들을 먹여 살려야 할 지경에 처할 것으로 생각했다. 히틀러 자신이 전쟁에 참여할 기회에 달라는 프랑코의 간청을 누차에 걸쳐 거절한 것도 이 때문이다. 히틀러와 프랑코는 1940년 10월 23일에 스페인 국경 지대 엔다에 근처 기차역에서 만났다. 훗날 프랑코는 참전해 달라는 히틀러의 부탁을 자기가 거절했다고 주장했지만 독일측 기록은 그날 히틀러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프랑코에게 짜증을 냈다고 한다.

하틀러에게 무능하게 보여서 참전 기회를 잃어버린 프랑코는 운이 좋았다. 만일에 프랑코가 히틀러 편에서 참전했다면 연합군은 스페인을 침공했을 것이고, 그러면 바스크는 독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페인은 결과적으로 2차 대전에 중립을 지켰지만 스페인은 독일군에 총기와 군복 등 군수물자를 공급했고, 자원병으로 구성된 사단규모 부대가 독일군 휘하에서 복무했다.

바스크 국민당은 프랑코 집권 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21,780명의 바스크인이 처형됐다고 주장한다. 이 숫자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프랑코는 산세바스티안 해안의 감옥에서 거의 매일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을 총살했다. 1944년 여름에 연합군 휘하의 바스크와 까딸루나의 군대가 스페인 접경으로 집결하자 스페인 내에서는 이들이 스페인을 침공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들은 연합군과 함께 프랑스 내의 독일군과 전투를 했다.

1945년 들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은 스페인이 세계평화를 위협하지 않는 한 스페인 내정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뉴욕에 있던 바스크 망명정부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바스크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생각했다. 아기레가 이끄는 망명정부는 독자적인 무장 독립투쟁을 하기 보다는 무장을 해제하고 미국이 바스크 독립국가를 세워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바스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말았다. 1948년에 체코 프라하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쿠데타를 계기로 동유럽이 소련의 수중에 떨어졌고, 한국에선 전쟁이 일어났다. 세상은 별안간 공산주의 대(對) 반공주의로 갈라지고 말았다. 미국은 반공정권인 프랑코 정부에게 원조를 주기로 했고, 프랑스는 바스크 망명정부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고 자신들을 나치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일조를 한 바스크인들을 파리에서 추방하고 망명정부가 사용하던 건물을 프랑코 정부에게 돌려주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스페인을 방문해서 프랑코와 나란히 사진을 찍었고, 그 해 9월 미국과 스페인은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스페인 여러 곳에 미 공군기지를 세우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코 체제는 건재하게 되었고, 바스크 사람들은 미국과 프랑스의 배신에 분노했다.

ETA

이런 배경을 뒤로 하고 보다 과격한 바스크 지하조직이 탄생하게 됐다. 미국의 배신과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바스크 국민당에 실망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처음에는 ATA(‘조국과 자유’)라는 단체를 비밀리에 세웠는데, 얼마 후 ETA(‘유스카디와 자유’)로 명칭을 바꾸었다. 바스크 국민당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축일인 7월 31일을 그들의 창립일로 삼았다. 빌바오에 있는 유서 깊은 제수이트 계열의 듀스토 대학은 이런 젊은이들의 온상이 되었다.

1959년 말에 ETA는 200-250명 수준의 멤버를 확보했는데, 이들은 무장 해방운동에 관심을 두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영국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는 테러활동을 한 이르군을 모델로 생각했다. 이들은 금지된 슬로건인 ‘고라 유스카디’(‘바스크 만세’)를 벽과 동상 등에 그려서 민족감정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프랑코의 친위대 격인 치안군 건물을 폭파하는 등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

1961년 7월 18일, ETA는 프랑코 군대 쿠데타를 기념하려 산세바스티안으로 향하던 기차를 탈선시켰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프랑코 정부는 100여명의 관련자를 검거해서 투옥하고 고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ETA의 지휘부는 프랑스의 바스크 지역으로 옮겨갔다. 바스크 국민당은 철저하게 반공적인데 비해 ETA는 점차 사회주의 인민전선 노선을 추종하게 되었다. 이들은 마오쩌뚱과 체 게바라를 우상으로 생각하고 과격한 활동을 했고, 프랑코 정부는 치안군을 동원해서 이들을 추적했다.

1968년 6월 7일, ETA의 리더인 엑스테바리에타와 동료가 타고 가던 자동차가 치안군의 검문을 받자 치안군 대원을 사살하고 도주했다. 치안군은 그를 추적해서 결국 사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ETA는 그 해 8월 2일 산세바스티안의 경찰국장을 집 앞에서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코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민병대는 바스크 전 지역을 뒤져서 ETA 간부 16명을 체포해서 재판에 회부했다. 부루고스에서 열린 재판에서 3명의 간부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빌바오와 빰쁠로나 뿐 아니라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도 일어났고,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유럽국가 정부와 바티칸이 사형집행을 하지 말라고 항의를 했다. 결국 프랑코는 이들을 종신징역으로 감형시켰다.

프랑코 시대의 종말

1970대 후반에 접어들어 건강이 나빠진 프랑코는 자신의 후계자로 카레오 블랑코 해군제독을 지명했다. 블랑코가 경호원 한두 명만 대동하고 같은 시간에 같은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들이는 것을 알아차린 ETA는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1973년 12월 20일 오전 9시 30분, 블랑코가 탄 승용차가 지나가는 도로 밑에 ETA가 설치한 160 파운드나 되는 다이나마이트가 폭발해서 자동차는 주변 건물 꼭대기 만큼 올라갔다가 떨어졌고 블랑코는 즉사했다. 블랑코 암살은 프랑코 체제의 종말을 예고했다. 

그 후로도 ETA와 치안군은 서로 암살을 자행하는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했다. 1975년 9월 27일, 프랑코는 ETA 간부 2명을 포함한 5명의 사형수를 총살하도록 지시했다. 이들에 대한 총살집행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인과 세계는 이제 프랑코의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 해 11월 20일, 프랑코는 사망했다. 젊은 국왕 후완 카를로스는 아리아스 나바로를 총리로 지명해서 민주정부로의 이양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ETA는 테러를 계속해서 1976년 한해 동안 18명을 암살했다.

1977년 선거가 치러졌고, 펠리페 곤잘레스가 이끄는 사회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해서 그가 총리가 됐다.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고, 바스크와 까딸루나는 각각 자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바스크 사람들은 이 정도의 자치에 만족할 수 없었다. ETA는 테러를 계속해서 1978년 말에서 1980년 초까지 80명을 암살했다.

1981년 2월 23일, 치안군 20명이 마드리드의 의회 건물에 난입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국왕의 기민한 대처로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는데, 그 주모자는 산세바스티안의 치안군 지휘관으로 있다가 직위가 해제된 장교였다.

1980년대 –1990년대

프랑스 정부는 스페인의 바스크 사람들이 정부 당국의 단속을 피해 프랑스로 넘어 오는 데 대해 너그러웠다. 스페인에서 테러를 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것이 스페인 국내에 국한된 것이면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스페인과 접경지대에 살고 있는 프랑스의 바스크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코가 사망함에 따라 이 같은 프랑스 정부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프랑스 정부는 더 이상 스페인을 적대적으로 볼 필요가 없어졌고, 따라서 바스크를 우호적으로 봐야 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1979년에 프랑스 정부는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 온 바스크 사람들을 정치적 망명객으로 간주해온 정책을 포기했다. 1981년 프랑스에선 사회당 소속의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이듬해에 스페인에는 사회당의 펠리페 곤잘레스가 총리가 됐다. 그러나 스페인에 들어선 사회당 정권도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정책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곤잘레스 정부는 바스크에 우호적인 잡지와 언론인을 탄압했다. 암네스티 인터내셔널 같은 인권단체는 스페인 정부의 인권탄압을 비난했지만, 스페인 내의 우익정당은 사회당 정부가 테러에 미온적이라고 비난했다.

1983년 10월, 프랑스 내에 머물고 있던 바스크 망명자 두 명이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그 후 발견되지 않았고 시체도 찾지 못했다. 12월에는 프랑스 접경지대에서 바스크 사람이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는데, 납치범들은 프랑스 정부가 바스크 사람을 납치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체포해서 구금하고 있는 스페인 경찰관 4명을 석방할 것으로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가 이들을 풀어주자 납치된 사람도 풀려났다. 그를 납치한 단체가 ‘반(反)테러 해방그룹’을 의미하는 GAL이라고 밝히자 GAL의 배후가 스페인 우익세력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 GAL은 또 프랑스의 바스크 지역에 머물던 바스크 망명객을 살해했다. 1986년까지 GAL은 27명을 살해하고 활동을 중단했다.

우연한 교통사고를 계기로 스페인의 고위 경찰관이 GAL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고, 두 사람은 결국 10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 이태리의 네오 파시스트 대원 등 극우 행동대원들이 돈을 받고 GAL을 위해 활동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많은 사람들은 곤잘레스 정부의 내무장관인 호세 부리누에부가 GAL의 배후라고 생각했다. GAL의 행동대원들이 엉뚱한 사람을 납치한 사건을 계기로 호세 부리누에부가 배후임이 밝혀져서 검찰은 이들을 기소했다. 이들은 각각 징역 10년씩 선고받았다.

바스크 지역은 인구에 대비해서 경찰관이 매우 많은데, 스페인 중앙정부는 그런 경찰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치안군과 국가경찰을 더 많이 파견해 놓았다. 바스크 사람들은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이런 보안조직을 적대적으로 보았다. ETA 대원들은 일을 저지를 때면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고, ETA를 지지하는 시위자들도 얼굴을 마스크로 가렸다. 그러자 치안군과 국가경찰들도 자신들의 신분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경비에 나서게 됐고, 테러 관련 사건을 다루는 판사들도 법정에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1996년 총선에서 호세 아즈나르가 이끄는 우파 연합이 승리하자 마드리드 중앙정부에는 바스크에 대해 강경책을 써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해 졌다. 아즈나르 정부는 ETA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헤리 바타수나당(黨) 간부 23명을 전원 체포했다. 이들은 마스크를 쓴 경찰관들에 의해 언론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기소되었는데, 1997년 1월에 스페인 대법원의 법관들이 마스크를 쓰고 법정에 나와 이들에게 각기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이런 조치에 대해 인권단체들은 강력히 비판하자 스페인 정부는 ETA가 800명 이상을 암살했다고 반박했다.

바스크의 일반 주민들이 ETA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ETA에 반대하는 시위도 벌어지지만 한편으로는 ETA를 지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에서는 바스크 자체가 ETA 테러와 동일시되고 있는데 따른 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 후에 당명을 ‘유스칼 헤리타록’(‘우리는 바스크 사람’이란 의미)으로 바꾼 헤리 바타수나당은 20대와 30대의 분노한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바스크 국민당은 ETA의 테러 활동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998년 9월, ETA는 더 이상 폭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바스크 지방은 중앙정부에 대해 치안군을 철수하고 중앙정부와 바스크 지방의 관계를 설정하는 헌법 조항을 개정해서 보다 많은 자치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바르셀로나가 있는 까탈루나, 그리고 갈라시아 지방도 같은 요구를 하고 나서서 마드리드 중앙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바스크와 따탈루나는 스페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 두 지역이 자치령으로 분리해 나가면 나머지 스페인은 가난한 제3세계 국가가 되고 말 것이다.

구겐하임 미술관

한 세기 이상 세월 동안 영국 화물선이 분주하게 드나들던 빌바오의 부두는 프랑코가 몰락한 후에 폐쇄되었는데, 이제 그 자리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이 들어섰다. 빌바오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들어서게 된 경위는 바스크 국민당의 내부적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소유 운영하는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은 날로 나빠지는 재정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갖고 이를 유치할 도시를 물색하고 있었다. 구겐하임 재단은 자신들은 한푼도 지출하지 않고 새로 세워진 미술관으로부터 수익을 올릴 수 있기를 기대했다. 도쿄, 오사카, 모스코바, 잘츠부르그 등을 접촉했지만 이 도시들은 수익성이 없어 보이는 프로젝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구겐하임 재단은 바스크 정부라는 데가 미술관을 세울 의향이 있다는 이상한 소식을 듣게 됐다.

빌바오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한 장본인은 바스크 국민당이었다. 바스크 지방정부 지사와 빌바오 시장이 모두 바스크 국민당 소속이었기 때문에 당의 결정이 곧 지방정부와 시 정부의 결정이었다. 바스크 정부가 구겐하임 미술관 건립에 지출한 비용은 약 1억 달러로 바스크 주민 1인 당 56달러를 지출한 셈이다. 바스크 정부는 미술관을 건립한 후에도 구겐하임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고, 구겐하임 재단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미술품을 대여해주기로 했다. 새 미술관을 설계할 건축가로는 프랭크 게리가 선정되었는데, 게리는 바스크 문화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 완성된 미술관은 전세계 건축계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빌바오는 별안간 유명한 도시가 됐다. 하지만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물이라기 보다는 조각에 가깝다. 더구나 이 미술관은 바스크의 문화를 반영하는 전시를 하지 못했다. 미술관을 개관할 때 바스크 정부는 마드리드의 소피아 여왕 미술관에 있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를 빌려서 전시하고자 했으나 스페인 중앙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게르니카’가 바스크에 가면 마드리드로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copy; 이상돈


마크 컬란스키, 바스크 세계사 (1999년) 
데보라 에이모스, 순니의 몰락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