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마크 컬란스키, 바스크 세계사 (1999년)
2010-12-19 23:05 3,505 이상돈


마크 컬란스키, 바스크 세계사 (1999, 펭귄 북스, 387쪽, 16달러)
Mark Kurlansky, The Basque History of the World (1999, Penguin Books, $16.00)

이 책의 저자 마크 컬란스키는 코네티컷 출신으로 1970년대부터 유럽과 멕시코 등지에 거주하면서 마이애미 헤랄드, 인터내셔널 헤랄드 트리뷴 등에 기고를 했고, 20권에 달하는 책을 펴냈다. 그 중에도 ‘대구’(Cod)와 ‘소금’(Salt)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을 뿐더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저자는 프랑코 독재하의 스페인에서 바스크가 저항한데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바스크 지역을 자주 여행했고, 결국 바스크의 역사에 관한 이 책을 펴내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1970년대에 스페인과의 접경지대인 프랑스의 생 장 드루즈의 에스쿨라두나 호텔에 자주 묵었는데, 당시는 프랑스내의 바스크 지역에서도 바스크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적으로만 은밀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바스크 언어로 말하면 즉시 체포되던 공포의 시절이었다. 제2차 대전 때 독일에 저항하던 레지스땅스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에스쿨라두나 호텔은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이자 피난처였다. 

바스크 사람, 바스크 언어, 바스크 지방
 
많은 사람들은 ‘바스크’라고 하면 완고하고 세련되지 못한 독특한 집단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실제로 바스크 사람들은 세계를 자기 중심으로 보는 성향이 있다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바스크 세계사’로 붙였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은 잘못됐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바스크 사람들은 세계사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유럽이 유럽 밖의 세상을 탐험하기 시작하던 시대에 유럽과 북미, 중남미,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와 연결하는데 앞장섰다. 자본주의와 국가간 교역이 생성될 즈음에 바스크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유무역을 실천했다. 실제로 식민시대의 미국 보스턴은 바스크와 많은 교역을 했고, 존 애담스는 바스크 사람들의 진취성을 칭찬했다. 유럽이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혼란스러울 때도 바스크 사람들은 종교와 민족성을 굳건히 지켰다.
 
흔히 ‘바스크’라고 부르는 지방은 ‘바스크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지리적으로 본다면 피레네 산맥 넘어서 프랑스의 아두르 강 건너서 스페인의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에브로 강에 이르는 지역을 바스크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넓은 지역은 스페인의 4개 지방 즉, 비스카야, 구이뿌스꼬야, 알라바, 나바라와 프랑스의 3개 지방을 포함한다. 바스크 지방이나 바스크 사람을 규정하는 정의는 언어이다. ‘바스크 사람’은 ‘바스크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고, ‘바스크 지방’은 ‘바스크 언어가 통용되는 지방’이다. 바스크어(語)는 바스크 언어로 ‘유스케라’(Euskera)라고 부르며, ‘바스크 사람들’은 바스크어로 ‘유스칼드런’(Euskaldrun), 즉 ‘유스케라를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바스크 지방’은 ‘유스칼 헤리아’(Euskal Herria), 즉 ‘유스케라를 말하는 사람들의 땅’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처럼 바스크 사람들에게는 언어가 사람과 그들의 고장을 규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스크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독특하다. 바스크 사람들은 문자문명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기원전 3세기에 로마인들이 그 지역에 도달할 때에 이미 독특한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어떤 인류학자는 바스크 사람들이 크로마뇽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전하고 있다고 본다. 프랑스 사람들과 스페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몸집이 작았지만 바스크 사람들은 골격이 훨씬 컸다. 따라서 바스크 사람들은 현재 유럽인들과는 그 뿌리가 다르거나, 또는 유럽인들이 진화하기 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바스크어(語)도 다른 유럽 언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학자들은 바스크아가 대부분의 유럽언어의 뿌리인 인도-유럽어(語)와 다르다고 본다. 유럽어 중 항가리, 핀란드, 그리고 에스토니아의 언어만이 인도-유럽어에서 유래하지 않았다고 보는데, 바스크 언어는 이들 언어와도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한다. 바스크어가 이처럼 미스터리이기 때문에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현존 언어가 바스크어이며, 아담과 이브가 사용했던 언어가 바스크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외부 세력에 저항했던 바스크 지방

바스크 지역은 남쪽에 험준한 산맥을 두고 있어서 외적(外敵)이 침범하기 어려울 뿐더러 바스크족(族) 자체가 용맹한 전사(戰士)인 탓에 바스크 지역을 정복하려는 집단은 항상 강력한 저항에 봉착했다. 지리적 여건과 바스크 사람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외부세력은 바스크 지역을 굳이 정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외부 정복자들은 바스크족의 그러한 용맹성을 높이 사서 이들을 용병으로 이용하곤 했다. 바스크 용병은 카르타고 편에서 로마군과 싸웠으며,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을 때엔 한니발 군대의 일익을 담당했다. 바스크족은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배한 후에 당한 처절한 복수를 보고 로마의 힘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한다.

바스크 지방이 외부세력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지리적 여건이다. 피레네 산맥 건너편에서 보거나 이베리아 반도 남쪽에서 볼 때 산맥 넘어 있는 바스크 지방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외부 정복자들은 피레네 산맥 아래 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의 에브로 강 남쪽의 대평원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로마도 바스크족은 로마법이 아닌 그들만의 관습법을 지키도록 허용했고, 이런 이유로 바스크 지역은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지킬 수 있었고, 로마 시대에 바스크 지역은 평온할 수 있었다. 

서기 400년 즈음해서 무너지는 로마 제국은 골(Gaul)(지금의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던 로마화된 게르만 부족인 비시고스족(族)에게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해 줄 것을 부탁했다. 서기 415년, 비시고스족은 까탈루나를 침공했고, 결국에는 에브로 강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장악했다. 이들은 남부 프랑스 뚤루즈에서 통치하다가 507년에 골 지역을 프랑크 왕조에게 상실하자 수도를 이베리아의 똘리도로 옮겼다. 비시고스족은 똘리도에서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치했는데, 이들이 바스크 지방을 정복하려고 하자 바스크족은 치열하게 싸워서 그들의 땅과 문화를 지켰다. 서기 711년, 북아프리카의 무어족(族)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바스코스족 사이에 균열이 생겨서 그 중 한 부족이 무어족과 내통했기 때문이었다. 서기 714년이 되자 침공한 무어족은 이베리아 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무어족은 바스크 지방에 근접했으나 자연경관을 보고 그 지방을 정복할 흥미를 잃어 버렸다. 그 후 무어족은 빰쁠로나를 정복하는 등 바스크 지방을 침공했으나 그 때마다 산간지역에서 출몰하는 바스크 전사(戰士)들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서기 732년,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하던 아브달 라만은 대군을 일으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깊숙이 진격했으나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 마텔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 무어족이 프랑크 왕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바스크족은 그들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바스크족은 어떤 때는 무어와 협력하고 어떤 때는 프랑크 왕국과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독립을 지키려 했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크 왕국의 영향을 받아 바스크 지방에 기독교가 전해 졌다고 보기도 한다.

서기 778년에는 지중해 해변을 통해서 프랑크의 샤를마뉴 황제가 침공해서 바르셀로나 등지를 장악했는데, 샤를마뉴의 군대는 빰쁠로나를 파괴해서 바스크족의 분노를 샀다. 샤를마뉴의 군대가 프랑크로 돌아가기 위해 피레네의 좁은 계곡을 지나게 되자 주변의 숲에 매복하고 있던 바스크 전사들이 일제 공격을 해서 샤를마뉴의 군대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해 8월 15일 하룻동안에 있었던 이 전투는 샤를마뉴가 패배한 유일한 전투인데, 프랑크에선 이 전투를 기록해 놓지도 않았다. 바스크족의 이 전투로 인해 빰쁠로나는 다시 무어족의 통치에 들어갔고, 바스크족은 계속되는 전쟁에 대비해서 자신들의 고장에 성채(城砦)를 세웠다. 마을마다 있던 군대가 독자적인 지역부족장 조직으로 발전했고, 군 지휘관들이 바스크의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 중의 한명인 이니고 이니게즈는 9세기 초에 나바라의 왕이 되어 33년간 통치했는데, 나바라 왕국은 최초의 바스크 왕국으로 1512년까지 지속되었다.   

고래잡이

바스크족은 비스케만(灣)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북쪽 바다를 바스크해(海)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 바다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어업을 해서 살아왔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바스크족의 식생활에서 바다 생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바스크 사람들은 도미, 정어리, 오징어 등을 잡아서 먹었고, 적당하게 말려서 두고두고 먹었다. 바스크 사람들은 인류 최초로 고래를 잡았다. 어업에 자질이 있는 바스크 사람들은 겨울에 따듯한 바다를 찾아 비스케만에 내려온 고래를 잡았는데, 이들은 7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적 포경(捕鯨)이라고 할 정도로 고래를 많이 잡았다. 포경업이 성행하게 된 데는 가톨릭 교회의 영향이 컸다.

가톨릭 교회는 매 금요일과 각종 성스러운 날에는 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이런 날에도 차가운 피를 갖은 생선은 먹을 수는 있었다. 고래가 소나 돼지 같은 뜨거운 피 동물인지 생선과 같은 차가운 피 동물인지가 모호했는데, 교황은 고래가 차가운 피 동물이라고 판정을 했다. 매 금요일과 각종 성스러운 날을 합하면 연중 절반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됐는데, 고기 맛을 들인 유럽인들은 소나 닭은 먹지 못하는 날에는 고래 고기를 먹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선 고래 고기 수요가 폭증했고, 바스크족은 고래잡이로 많은 수입을 올렸다. 파리 등 유럽의 도시민들은 고래의 혀를 특히 좋아했는데 오늘날 프랑스령 바이욘느에선 바스크 상인들이 고래 혀를 독점적으로 공급해서 큰 돈을 벌었다. 북쪽 추운 지방에 사는 바이킹들은 그들이 좋아 하는 대구를 잡아서 추운 겨울에 말려서 두고두고 먹었는데, 바스크족은 대구에 소금을 가미해서 말려서 오래 보관하여 먹었다.  

조선과 항해의 천재

바스크 사람들은 어선, 포경선, 상선 등 모든 종류의 선박을 건조해서 유럽 각국에 공급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바스크족이 유럽인으로선 북미 대륙에 처음 도착했다고 하지만 그런 증거는 없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북미에 도착하기 500년 전에 바이킹이 캐나다의 뉴펀들런드에 도착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바스크족이 북미에 도착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바스크 사람들이 조선과 항해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바다 넘어서 탐험을 할 때 이들은 바스크의 조선술과 항해술에 의존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북미에 도달했을 때 타고 있었던 산타마리아호(號)도 바스크에서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콜럼버스의 선단에 탔던 항해사들 중에도 바스크 사람들이 많았다. 기록에 의하면 1493년에 바스크에서 건조된 6척의 범선이 베르메오 항구를 떠났는데, 이 선박에는 많은 바스크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항해를 하다가 필리핀에서 원주민들에 의해 살해된 후 남아 있는 배를 이끌고 항해를 해서 세비야에 돌아 온 엘까노도 바스크 사람이었다. 이처럼 스페인이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바스크가 큰 역할을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바스크의 성인(聖人)

16세기 초에 무어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었고, 스페인에는 아라공 의 페르디난드 왕과 까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의 가톨릭 왕권이 확립되었다. 페르디난드와 이사벨은 포르투갈과 나바라의 바스크 왕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장악하고 이교도인 무슬림과 유태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바스크족 중에서도 부유한 귀족계층은 페르디난드 왕에 충성을 했고, 페르디난드 왕은 바스크 지역에 자신들만의 관습법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했다.

원래 바스크족에게는 귀족 계층이란 것이 없었고, 단지 나바라 지역에서만 나중에 왕국이 생겨났다. 스페인, 즉 까스티야 왕들이 바스크의 부유층에게 귀족 타이틀을 부여하였고, 이들이 무장을 할 수 있게 했다. 구이뿌스꼬아의 중부에 자리잡은 아즈뻬이티아의 로욜라 가문도 그런 경우였다. 1331년에 까스티야의 왕이던 알뽕소 12세가 자기를 도와서 무어족과 싸운 로욜라 가문에게 그런 특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로욜라 가문의 후손인 벨트란은 아즈뻬이티아에 있는 자신의 성채를 세웠다. 1491년에 오늘날에 나중에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로 알려지게 되는 이니고 로뻬즈 로욜라는 벨트란의 직계 후손으로 이 성채에서 태어났다.

이니고(Inigo)의 조부는 무어족과 싸웠고, 부친은 페르디난드와 이사벨에 충성을 맹세하고 프랑스 군대와 싸웠다. 로욜라 가문은 전투의 대가로 국왕으로부터 토지와 특권을 부여 받아서, 이니고가 태어날 당시에 로욜라 가문은 막대한 부(富)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니고의 부모는 아이를 13명을 났는데, 이니고는 막내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사망해서 이니고는 유모의 품에서 자랐다. 이니고의 형제들은 모험을 통해서 부(富)를 축적한 가문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이니고의 큰 형은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에 참가했고 나중에 프랑스와 해상전투에서 전사했다. 다른 형은 나폴리에서 전투 중 사망했고, 또 다른 형은 미주 대륙에 도착해서 인디언들과 싸우다가 사망했다. 형제 중 한명은 가톨릭 사제가 되어 마을 교회를 운영했다.

이니고는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랐으나 세속적인 권력과 부에 관심이 많았고, 결국에는 까스티유의 재무관이던 후완 벨라스케즈의 시종이 되었다. 페르디난드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은 스페인에서 이교도를 박멸하기로 결정했고, 이교도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죽거나 했으니, 이것이 종교재판이란 이름으로 행한 무슬림과 유태인 대학살이다. 이사벨라 여왕은 1504년에 사망했는데, 남편이 페르디난드 왕에게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사벨라 여왕은 남편 페르디난드 왕과의 사이에 나중에 신경증 증상이 있어서 흔히 광녀(狂女)로 불린 후아나 라 로카라는 딸을 두었는데, 후아나는 필립공(公)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인판타 까탈리나가 태어났다. 후아나는 자신의 딸 인판타 까탈리나를 어두운 성채 속에서 유폐시켰는데, 나중에 스페인 국왕이 된 그녀의 오빠가 어린 동생을 구출해서 로욜라 가문의 성채에 잠시 머물도록 했다. 젊은 이니고는 어린 인판타 까탈리나를 속으로 좋아했으나 그녀의 어머니 후아나가 딸을 돌려 주지 않으면 굶어 죽겠다고 해서 다시 어머니의 옆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런 인연을 계기로 이니고와 인판타 까탈리나는 평생토록 친구가 되었다. 이니고도 당시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그러했듯이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1516년에 페르디난드 왕은 심한 우울증 끝에 사망했는데 재혼한 부인 게르마나가 이상한 약을 먹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페르디난드는 자신이 사망한 후에 플란더스에서 살고 있어서 스페인어(語)도 하지 못하는 손자 샤를르가 왕이 되면 자신이 통일한 스페인이 또다시 분리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 다음 해에는 페르디난드 왕이 신임했던 후안 벨라스케즈도 사망해서, 이니고는 막강한 후원자를 상실했다. 25세가 된 이니고는 자신의 4촌인 나바라 왕국의 백작을 추종하기로 했는데, 나바라 왕 딸브레와 왕후가 연속해서 사망해서 나바라 왕국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1517년에 샤를르는 스페인에 돌아와서 스페인의 각 지역을 순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의 조부인 맥시밀리안 황제가 사망하자 샤를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이런 틈을 타서 나바라의 바스크족이 독립을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프랜시스 1세는 군대 12,000명을 모아서 나바라로 보내서 나바라의 마지막 왕의 아들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나바라의 바스크족들은 프랑스 군에 대항하지 않고 이들을 환영했다. 그러자 스페인에 우호적인 구이뿌스꾸아의 바스크족들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 지휘관은 이니고의 형인 마르뗑 데 로욜라였다. 이니고는 나바라의 뽐쁠로나에서 프랑스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죽으려고 했는데, 프랑스 군의 포탄이 주변에 떨어져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프랑스 군은 이니고가 죽을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고향 로욜라에 돌아온 이니고는 고통스런 수술을 하고 자기 방에서 몇 달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병석에서 이니고는 기사(騎士)들의 전기를 읽다가 가톨릭 성인들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에 관해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니고는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곰곰이 생각하게 됐는데, 그러면서 어느날 밤 성모 마리아와 어린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됐다. 그 다음날부터 이니고는 성모 마리아의 기사(騎士)가 되었다.
이니고는 다리 부상에서 치유되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몇 인치 짧아져서 그 후 계속 다리를 절어야만 했다. 이니고는 예루살렘과 로마로 순례를 했고, 라틴어를 배운 후에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파리 대학에서 신학 학위증을 이니고의 라틴 이름인 ‘이냐시오’로 받아서 그 후에는 이냐시오로 아예 이름을 바꾸었다. 파리 대학에서 이냐시오는 바스크 출신인 쁘란치스꼬 하비에르를 만났는데, 이냐시오는 자신보다 더 젊고 학식이 높은 하비에르를 설득시켜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참가하도록 했다. 1534년 8월 15일,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 7명은 흔히 제수이트라고 부르는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결성했다.

예수회는 당시의 종교개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에 대하여 충성을 약속했다. 이냐시오는 가톨릭을 전세계에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첫 과업으로 하비에르를 아시아에 보내기로 했다. 1541년, 당시 34세이던 하비에르는 리스본을 떠나서 일본, 몰루카 군도, 말레이지아 등지에서 가톨릭 선교를 했고 중국으로 향하던 중 질병으로 1552년에 사망했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충실한 동료인 하비에르를 다시 보지 못하고 1556년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예수회에는 1,000명 이상의 사제가 속해 있었다. 이냐시오가 젊었을 때 좋아 했던 인판타 까탈리나는 포르투갈 왕과 결혼했는데, 이냐시오가 사망한 후에도 예수회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수회는 오늘날 훌륭한 교육기관을 세계 곳곳에 세워서 운영하는 등 가장 강력한 교단이 되어 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가장 위대한 바스크 사람이라고 할 만하며, 로욜라에는 그가 태어나고 또 성모 마리아를 본 성채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를 기념하는 큰 성당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에수회는 그들의 상징으로 태양에서 빛이 나가는 원형을 채택해서 사용해 오고 있는데, 이는 원래 태양신을 숭배했던 바스크 민속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스크 사람들이 가톨릭을 받아드린 시기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많이 늦었지만 일단 가톨릭을 받아드리자 이들은 가장 경건한 신자가 되었다. 바스크 지역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지나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기원 800년 이베리아 반도 서북쪽 끝에 위치한 갈리시아 지역에 은둔하던 수도자가 한밤에 하늘에서 내리 비추는 빛 줄기를 보고 그것을 따라 갔더니 로마 시대의 묘지에 다다르게 됐다. 빛 줄기가 머무는 곳에서 그는 높이 자란 잡초 속에 숨겨있는 작은 영묘(靈墓)를 발견했다. 그는 이 영묘가 사도 요한의 형인 야고보(스페인어로는 ‘산티아고’)의 묘라고 생각했다. 이 묘지는 별빛이 머문 곳, 즉 깜푸스  스텔레(Campus Stellae)라고 알려졌고, 나중에 콤포스텔라(Compostela)로 불리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이베리아 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왔다가 실패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데, 결국 헤롯에게 붙잡혀 참수를 당했고, 기독교인들이 그의 유해를 대리석 석관에 넣어서 사람이 타지 않은 조각배에 태워서 바다로 흘려 보냈고 그 배가 갈라시아와 바스크 중간 지점에 도착했다는 것인데, 그 유해가 이렇게 발견됐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 수도자의 발견을 확인하고 그 지점에 성당을 건축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콤포스텔라에 큰 성당이 세워졌다.

예루살렘이 무슬림에서 점거 당하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지 못하게 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곳을 순례하게 됐는데, 콤포스텔라가 가장 유명한 순례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인 순례자가 많았는데, 자발적인 경우도 있지만 죄를 저지른 경우에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순례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순례는 필연적으로 바스크 지역을 지나가게 되어 있다. 오늘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전세계인이 찾는 명소가 되어 있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종교재판(Inquisition)은 아라공에서 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무슬림이 최종적으로 패퇴하게 되자 까스티유에 도입되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교황청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에 있었던 종교재판과 구별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패퇴시킨 이사벨라 여왕은 종교재판장을 임명했는데, 종교재판은 재판관이 지휘하는 비밀경찰과 관료조직, 그리고 비밀감옥을 갖게 되었다. 1492년 3월,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공의 페르디난드 2세 공동국왕은 칙령을 내려서 모든 유태인들에게 4개월 내에 스페인을 떠나라고 했다. 30만 명의 유태인이 포르투갈, 모로코, 바스크 등지로 떠났고, 종교재판관은 숨어 있는 유태인과 무슬림을 색출하기 시작해서 가혹하게 처형했다. 종교재판관은 프랑스와의 국경지대에서 걸쳐 살던 바스크 사람들이 유태인을 숨겨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태인과 무슬림 외에도 집시도 종교재판관에 의해 박해를 당했다.

16세기 말에 접어 들자 종교재판관은 농촌의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하는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바스크 지역은 마녀재판의 직접적인 타깃이 되었다. 프랑스 바스크 지역의 종교재판관은 그 지역의 전체 인구가 마녀라고 의심하고 박해했다. 종교재판관은 마녀는 신체에 작은 악마의 표지가 있다면서 여자 뿐 아니라 남자와 아이들도 신체를 검사하고 침으로 찔러서 피가 나오지 않는 작은 부분이 나오면 마녀로 단정하고 불에 태워 죽였다. 1609년 대구를 잡으러 대서양으로 나갔던 바스크 선단의 어부들은 자신들의 아내, 어머니, 딸들이 벗겨지고 몸을 검사 당한 후 집단으로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계획보다 빨리 항구에 돌아 왔다. 이들은 몽둥이 등 무기를 들고 마녀로 판정받고 화형장으로 향하던 여자들을 구해내고 마을을 장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녀사냥을 중단되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바스크 여자들이 마녀로 몰려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프랑스 문헌을 600명 정도가, 그리고 스페인 문헌은 80여명이 죽었다고 쓰고 있다. 1672년에 프랑스 국왕은 칙령을 내려서 마녀사냥을 중단시켰다.
 
자유무역의 선구자

다른 유럽인들은 자기 나라 일에만 신경을 쓸 때 바스크 사람들은 그들의 우수한 항해술에 힘입어 아메리카에 진출해서 무역을 했고, 칠리 페퍼 같은 중남미 산물을 유럽에 수입해서 전파시켰다. 바스크 사람들은 초콜릿을 널리 보급시켜서 그 가격을 떨어뜨렸고, 아메리카로부터 가져온 레드 빈(붉은 콩)을 유럽에 보급시켰다.

바스크 어민들은 영국 등 다른 나라들의 어선에 타고 조업을 했고, 이렇게 다른 나라가 고래잡이와 대구잡이에 나서고 영해를 선포하자 바스크 어민들은 어업을 잃어 버린 대신 아메리카로부터 물자를 수입해서 다른 유럽국가에 팔았다. 아담 스미스는 바스크 사람들이 유럽에 물자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보고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을 집필했다. <계속>

(c) 이상돈


조지 W. 부시, 결정의 시점들 (2010년) 
마크 컬란스키, 바스크 세계사 (1999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