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조지 W. 부시, 결정의 시점들 (2010년)
2010-12-27 16:14 2,351 이상돈


(*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c.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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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결정의 시점(時點)들 (2010년, 크라운 출판사, 497쪽, 35달러)
George W. Bush, Decision Points (2010, Crown Publishing, 497 pages, $35.00)

조지 W. 부시의 회고록은 잘 읽힌다.  제목 ‘Decision Points’는 ‘결정의 시점(時點)들’이란 의미이지만 ‘중요(points)’와 ‘결정(decision)’이란 두 단어를 함축하기도 할 것이다. 부시는 결혼과 금주(禁酒), 주지사 출마와 대통령 출마,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전쟁 등 그가 내린 모든 결정에 대해 일말(一抹)의 후회가 없어 보인다. 그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책도 직선적이고 솔직하다. 때로는 너무 솔직한 부분도 있어 보인다.
 
책 전반을 통해서 부시의 인간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자기를 도와서 일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는 정말 대단하다. 그런 것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외국 지도자에 대해서도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과 슈레더 전 독일 총리에 대한 평가는 아찔할 정도다.

부시는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에 관한 언급이 너무 없다. 이라크 침공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에 이른 과정이 성급했고, 전쟁 계획이 서툴렀다는 비판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라크 전쟁에 좌절해서 국무장관을 그만 둔 콜린 파월, 그리고 전쟁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CIA 국장 조지 테닛에 대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간단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이라크 전쟁을 기획했던 폴 울포비츠 국방차관 등 네오콘에 대해서도 언급이 거의 없다. 

부시는 자신이 앤도버의 필립스 고교와 예일 대학을 다니게 된 결정은 솔직하게 가족의 전통이라고 했다. 금연과 금주, 기독교에의 귀의(歸依), 로라와의 결혼, 그리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은 그 자신의 결정이었다. 부시는 자기 인생의 롤 모델은 아버지라고 했다. 아버지의 대통령 선거를 도운 후에 부시는 다시 텍사스로 돌아가서 텍사스 레인저를 인수해서 운영했다. 1992년 대선에서 아버지가 빌 클린턴에게 패배하자 부시와 동생 제브는 각기 텍사스와 플로리다 주지사에 출마해서 당선됐다. 부시는 아버지가 재선에 성공했더라면 자기가 텍사스 주지사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부시를 주지사로 만들고 나중에 대통령으로 만든 정치참모는 칼 로브였고, 홍보참모는 카렌 휴스였다. 부시는 자신과 로라가 2000년 대선 출마를 두고 18개월 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에 부통령 후보 지명 등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딕 체니를 부통령으로 지명한데 대해 조금도 후회가 없다고 했다. 콘디 라이스는 아버지가 소개해서 알게 되어서 결국 안보보좌관으로 기용했고, 라이스의 추천에 따라 포드 행정부에서 젊은 나이에 국방장관을 지낸 럼스펠드를 국방장관으로 지명했다고 한다. 콜린 파월이 사임한 후 라이스를 후임으로 임명한 부시는 안보 부보좌관이던 스티브 해들리를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는데, 해들리에 대한 부시의 신임이 매우 깊었음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부시는 자신이 퇴임할 시기가 다가오자 여러 군데에서 사면을 요청하는 부탁이 많았다면서 자신은 법무부의 공식채널을 통하지 않은 사면 부탁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부시는 체니의 비서실장을 지내던 중 ‘리크 게이트’에 연루되어 위증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스쿠터 리비에 대한 사면을 거부했는데, 그 때 체니는 “어떻게 전장(戰場)에 쓰러진 동료를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있느냐?”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고 한다. 부시는 체니가 자기에게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했던 때가 없었다고 했다. 법치주의를 존중한 부시는 퇴임 직전에 사면권을 남용해서 ‘사면 장사’를 했다는 비난을 들은 빌 클린턴과 비교된다.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9-11 테러는 오늘날의 부시를 있게 한 사건이다. 9-11 당일 초등학교에서 현장수업을 하던 부시에게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했다는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칼 로브였다. 곧 이어 콘디 라이스가 그것이 제트 여객기였다고 알려주었다.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자 앤디 카드 비서실장이 “미국이 공격 받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장은 그것이 알 케이다의 소행이라고 보고했다. 부시는 9-11 후 의회가 통과시킨 ‘애국법’(The Patriot Act)이 뉴욕, 버지니아, 오리건, 및 플로리다에서 활동하던 잠재적 테러 조직을 분쇄하는데 기여했다고 본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포로로 잡힌 알 케이다 대원은 제네바 협정에서 말하는 포로가 아니며, 이들을 미국 영토가 아닌 관타나모 수용소에 가두고 군사법정으로 하여금 재판하도록 한 조치는 2차 대전 때 선례가 있던 것으로 합헌적이며 정당한 조치라고 강변한다. 부시는 또한 워터보드라는 일종의 물고문을 통해 포로로 잡힌 알 케이다 요원들의 진술을 얻어내서 테러를 예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부시는 9-11 테러의 진원지인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문제를 다룰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합참의장 휴 셀튼 대장은 “바다에 면해 있지 않은 산악지대인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보내는 데는 시간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스티브 해들리 안보부보좌관은 “전쟁이 파키스탄에까지 번지는 사태가 가장 걱정스럽다”고 했다. 조지 테닛은 “알 케이다가 생화학무기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때 네오콘 그룹인 폴 울포비츠 국방차관이 “탈레반을 공격할 때 이라크도 같이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이라크를 다루어야만 테러와의 전쟁을 치룰 수 있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콜린 파월은 이라크를 치게 되면 유엔과 이슬람 국가들, 그리고 나토의 지지를 상실하게 된다”고 반대했고, 테닛은 “지금 이라크를 치면 실수할 것이다. 첫 타깃은 알 케이다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딕 체니는 사담 후세인의 위협이 문제이지만 “지금은 그 일을 할 때가 아니다”고 했다.

아프간 침공계획에 분주할 때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서 러시아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이해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부시는 자신이 아프간을 점령한 후에 민주적 체제를 세우기 위한 플랜을 세우라고 지시했다고 전한다. 아프간 침공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부시는 아프간 전선에서 최초로 전사한 CIA 요원 마이크 스팬의 가족에게 위문편지를 썼는데, 퇴임하기까지 거의 5000번 가까이 이런 편지를 써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파키스탄과의 협력이 중요했다. 부시는 2006년 9월에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악수도 거절하는 등 냉냉해서 자신이 회담을 괜히 주선했나 하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이라크 전쟁

부시는 아라크 침공을 명령한 2003년 3월 19일 아침의 상황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백악관 상황실에서 국가안보회의가 열렸고, 비디어 스크린에는 사우디의 미군기지에 가 있는 토미 프랭크 대장과 미군 수뇌부가 연결되어 있었다. 프랭크는 “대통령 각하, 군은 준비되어 있습니다”고 보고했고, 부시는 럼스펠드 장관에게 “장관, 세계 평화와 이라크 국민의 자유를 위해 ‘자유 이라크 작전’을 시행하도록 명합니다. 우리 군에 신(神)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고 했다. 프랭크 대장은 경례를 하면서 “대통령 각하, 신(神)이 미국을 가호할 것입니다”고 했다. 중압감을 덜기 위해 부시는 홀로 백악관 남측 잔디 정원을 걸었는데, 정원에 나와있던 애견 스팟(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을 할 때 백악관에서 태어나서 부시를 따라 텍사스에서 살다가 다시 백악관으로 따라 들어온 스파니엘 종자)이 반갑게 다가와서 마음의 위로가 됐다고 한다.

부시는 이라크 침공이 정당하다고 확신한다. 비록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전까지 모든 정보는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숨겨 놓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었고, 후세인이 테러리즘을 조장하고 지원해 온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부시는 유엔안보이사회에서 이라크에 대한 제재에 반대한 푸틴,  시라크, 그리고 슈레더는 단지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본다. 부시는 총리를 그만 둔 슈레더가 러시아 국영에너지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회사의 대표가 됐다고 꼬집었다.

바드다드를 점령한 후 군정장관으로 파견된 폴 브레머에 대해서도 부시는 브레머와 그의 팀이 훌륭한 일을 했으며, 단지 이라크 군대를 해산해서 직장을 잃은 이라크 군인들이 순니 민병대가 되어 미군을 공격하게 만든 조치는 경솔했다고 말할 뿐이다. 부시는 또한 바그다드를 점령한 후 성급하게 미군 병력을 축소했던 것이 큰 실수였다고 인정한다.

교육, 의료복지, 허리케인
 
부시는 자신의 임기 중 내정에 관한 치적으론 ‘노 차일드 레프트 비하인드 법’(No Child Left Behind Act)의 제정과 65세 이상의 노년층에 대한 연방정부 의료보장 제도인 메디케어(Medicare)를 개정해서 처방의약품 구매비용 부담을 경감시킨 것을 든다. 메디케어를 확장하는데 대해선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가 많았고 자신이 이들을 설득했다고 말한다.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존 케리는 자신보다 더 많은 정치헌금을 걷었고, 마이클 무어가 선거 캠페인 영화를 도큐멘터리로 가장해서 만들었고,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는 케리에게 헌금을 많이 했고, CIA 내에서 정보가 새나가서 행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부시는 쓰고 있다. 민주당의 그 같은 캠페인의 결과가 CBS 앵커 댄 래더의 오보(誤報) 파동을 초래했다고 부시는 말한다.

2005년 9월,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부시 행정부에 타격을 주었다. 연방정부가 미증유의 재난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거센 비난이 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부시는 그 책임의 대부분이 당시 루이지애나 주지사 캐스린 블랑코에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상황을 수습할 책임과 권한은 뉴올린스 시장이 아니라 루이지애나 주지사에 있었는데, 블랑코 주지사는 아무런 대책을 취하지 못하고 사흘을 보냈다는 것이다. 전용기 편으로 뉴올린스로 내려간 부시는 블랑코 지사에게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연방정부에 권한을 넘기라고 독촉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폭동과 약탈이 발생했기 때문에 대통령은 내란통제법에 의해 주지사의 요청이 없이 연방군을 투입할 수 있지만 공화당 남자 대통령이 민주당 여자 주지사를 묵살하고 연방군을 흑인 거주지역에 투입하게 되면 정치적 후폭풍을 맞게 될 것이 뻔해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부시는 무능하다고 비난을 많이 받았던 연방비상관리청장 마이크 브라운이 2004년에 6주 동안에 4개의 허리케인이 플로리다를 덮쳤을 때 자기 동생인 제브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와 협력해서 상황을 훌륭하게 극복했다고 반박한다. 부시는 공화당원인 미시시피의 할레이 바부어 주지사와 빌록시의 홀로웨이 시장이 재난을 훌륭하게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이라크 병력 증파

2006년 가을이 되자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 의회 지도자들은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들은 부시에게 찾아와서 이라크에서 병력을 부분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민주당은 전면 철군을 주장하고 있는 등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전국에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2006년 2월에 이라크 사마라에 있는 시아파 이슬람의 성지인 황금 사원(골든 모스크)이 폭파된 다음 순니와 시아 사이의 분쟁은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라크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 들었고 미군 전사상자 수도 늘어가기만 했다. 부시는 어떤 결정을 해야 만 했다.

안보보좌관 해들러는 군사전문가인 프레드 케이건, 언론인 로버트 카플란, 전직 CIA 요원 등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서 부시에게 브리핑을 하도록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현지에 충분한 병력이 있는지를 물었고 비정규전에 치중할 것을 주문했다. 부시는 해들리를 통해 이라크의 현지 지휘관들의 의견을 전달 받았는데, 이라크 군대를 훈련시키고 철군해야 한다고 보는 이라크 주재 사령관 케이시 대장과는 달리 추가병력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그 중에도 베트남 전쟁 당시 현장 지휘관들의 견해가 대통령과 국방장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은 ‘임무 포기’라는 책을 쓴 바 있으며, 당시에는 북부 이라크에서 여단을 지휘하고 있는 맥마스터 대령의 의견이 부시의 눈길을 끌었다. 부시는 비정규전을 전공한 데이비드 페트레이우스 소장과 스탠리 맥크리스탈 소장의 성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부시는 이라크에 병력을 추가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한 후 럼스펠드가 물러나자 부시는 로버트 게이츠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했고, 이라크 주재 사령관에 페트레이우스 장군을 임명했다. 의회에서 존 매케인, 조 리버만, 린지 그레이엄 등이 병력증강에 찬성했고, 결국 육군 5개 연대와 해병 2개 대대가 추가로 파견됨에 따라 이라크의 상황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란, 시리아, 북한

부시는 자기 임기 중에 이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부시는 2007년에 있었던 시리아 핵시설 폭파에 관한 숨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리아에 북한의 영변 핵시설과 똑 같은 흑연 감속로 시설이 가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올메르트 총리는 부시에 전화를 걸어서 미국이 이 시설을 폭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시는 CIA에 정보를 확인해 보도록 지시하면서 올메르트 총리에게 “우리 정보에 의해 핵무기 시설임이 확인되지 않는 한 주권국가를 폭격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올메르트는 “시리아의 핵 무기 개발계획이 이스라엘에 야기하는 위험은 현존하는 것”이라면서, “솔직히 말하건대 당신의 전략을 이해할 수 없오”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해 9월 6일, 이스라엘 전폭기들은 시리아의 이 시설을 폭파했다. 그 후의 미국의 위성정보는 시리아가 폭파된 시설의 잔해를 은폐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부시는 시리아 정부가 유엔에 대고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은 것은 이 시설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준다고 했다. 부시는 또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미국의 동의가 없이도 자신의 안보를 위해선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북한에 대한 부시의 평가도 흥미롭다. 부시는 북한이 어린아이 같다고 했다. 자기 딸 바버라와 제나가 어릴 때 주목을 받고 싶으면 음식을 바닥에 일부러 쏟고, 그러면 로라와 자기가 그것을 치우면서 애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과 같다고 했다. 부시는 김정일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본다. 중국의 장쩌민은 “북한은 당신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복잡하다”고 자기에 말했다고 전한다. 부시는 6자 회담이 북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며, 궁극적으론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했다.

2008년 경제위기와 선거 

“대공황 이후 최악의 위기란 말이요?”라고 부시가 묻자, 연방준비제도 이사장 벤 버냉키는 “그렇다”고 답했다. 부시는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데 화가 났다고 했다. 부시는 주택 시장이 계속 활황일 것으로 생각한 소수의 금융가들이 문제를 만들었다고 분노했다. 부시는 자기의 경제정책이 건전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감세(減稅)정책은 부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이득과 배당에 대한 세금을 경감해서 경제성장을 증진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기이다. 2003년 감세법안이 통과되고 난 후 실업률이 줄어들었으며, GDP에 대비한 재정부채도 이전 정부 시절에 비해서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처방약에 대한 메디케어 보장 등 재정지출을 늘여 놓고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골드만 삭스의 최고경영자였던 행크 폴슨을 재무장관에 기용하고 그린스펀의 후임에 벤 버냉키를 기용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부시는 두 사람이 경제위기를 잘 헤쳐나갔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이들이 만든 위험자산구제프로그램(Troubled Asset Relief Program ; TARP)이 공화당의 반대로 처음에 무산되는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침공하고 허리케인이 텍사스를 덮치는 등 임기 말에 나쁜 일이 연달아 생긴 것을 안타까워 했다. 자신은 1979년에 카터 대통령이 크라이슬러 자동차에 구제금융을 준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GM 등 빅 스리가 파산할 위험에 처해서 구제금융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2008년 선거는 공화당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시는 자기가 존 매케인을 돕고 싶었으나 매케인이 사양했다면서, 그것은 매케인의 결정이라고 했다. 매케인은 훌륭한 정치인이었으나 1992년에 자신의 아버지와 1996년에 밥 돌이 처했던 것처럼 젊은 후보가 유리한 세대 정치(generational politics)에서 매케인은 불리한 쪽에 서있었다고 부시는 말한다. 

고향에 돌아 오다

임기 마지막 날인 2009년 1월 20일, 부시는 집무실 쪽인 웨스트 윙을 돌아보고 이라크 침공을 명하던 날 스팟과 함께 걸었던 남쪽 잔디 정원을 거쳐서 주거 공간인 이스트 룸에서 자신을 위해 일했던 스태프에게 인사를 하고 오바마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마지막으로 전용기에 올라 고향 텍사스 미들랜드에 도착했다. 부시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전쟁에서 희생을 한 장병의 유가족을 만나는 일이 가장 가슴 아팠지만 많은 유가족들이 남편과 자식이 조국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부시는 자신이 시작한 전쟁이 미국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기여했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결정은 나중에 역사에 의해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부시는 원래 책을 좋아 했는데,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도 많은 책을 읽은 것으로 보인다. 전시(戰時) 대통령에 걸맞게 부시는 링컨과 트루먼의 전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는데, 참혹했던 남북전쟁을 이끌었던 링컨의 고뇌로부터 위안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전기인 ‘황제 시어도어’, 러시아 출신 이스라엘 정치인 샤란스키의 ‘민주주의’, 북한 수용소를 탈출한 강철환의 ‘어항 속의 금붕어’를 읽은 소감을 언급하고 있다. 부시는 또한 재임 중 제럴드 포드와 로널드 레이건의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읽은 것이 영광이었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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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골드스타인, 재앙의 교훈 (2008년) 
마크 컬란스키, 바스크 세계사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