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고든 골드스타인, 재앙의 교훈 (2008년)
2011-01-16 00:02 2,377 이상돈


고든 골드스타인, 재앙의 교훈 (2008년, 헨리 홀트, 300쪽, 25달러)

Gordon M. Goldstein, Lessons in Disaster (2008, Henry Holy & Co., 300 pages, $25.00)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입혔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한 첫 전쟁이었고, 미국 사회를 심각하게 분열시켰다. 당시 국방장관으로 전쟁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베트남 전쟁을 후회하고 사과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1995년에 펴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 정책을 수립하는데 깊숙히 간여했던 맥조지 번디는 전쟁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계속 침묵을 지켰다. 30대 젊은 나이에 하버드 대학원장을 지내다가 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된 번디는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탐이 말한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최고이자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의 대표격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맥조지 번디는 자신이 안보보좌관으로 미국을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이끌어 갔던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었나를 정리하고 싶었다. 1995년 봄, 그는 젊은 정치학자 고든 골드스타인에게 자신과 함께 이 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1996년 9월 16일, 번디는 심장마비로 별안간 사망했고, 이 작업은 중단됐다. 그리고 10년 세월이 흘렀고, 골드스타인은 베트남 전쟁에서 맥조지 번디의 역할과 그로부터 배워야 하는 교훈을 자기의 저서로 펴냈다. 이 책은 나오자 마자 미국 조야(朝野)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고, 특히 오바마 대통령은 외교정책 팀에게 이 책을 필수적으로 읽으라고 지시해서 화제가 됐다. 이는 물론 이라크에서 미국이 베트남에서 했던 실수를 또다시 저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自省) 때문이다.

맥조지 번디

1919년 3월 30일에 전형적인 부유한 ‘동부 이스태블리쉬먼트’(‘Eastern Establishment’) 가정에서 태어난 맥조지 번디는 보스턴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예일 대학과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저명한 변호사였고 공화당원이었다. 번디는 유명한 기숙 사립고등학교인 그로톤을 다녔는데, 1등으로 졸업했을 뿐 아니라 교지 편집장을 지냈고 토론 팀을 이끌었다. 예일에 들어간 그는 수학을 전공했는데, 학내 신문에 논쟁적인 이슈에 대해 칼럼을 쓰고 정치적 모임에서 연설하는 등 활동이 많았다. 번디는 예일의 전설적인 해골협회(The Skull and Bone Society)의 멤버였고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과시했다. 1941년에 예일을 졸업한 번디는 보스턴 시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는데, 의외로 낙선하고 말았다. 그 후 번디는 정치에 대한 생각을 접고 학자로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하버드의 연구원 협회(Society of Fellows)라는 독특한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다. 이 과정은 수업, 시험, 논문도 없고 학위도 주지않는 단지 자신의 학문적 관심사를 연구하는 특이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번디는 입대했으나 시력이 나빠서 전투임무에서 배제됐다. 번디는 시력표를 암기해서 육군 통신부대에 배속을 받았고, 헨리 스팀슨 국무장관과 친분이 있는 부친의 영향력으로 해군제독의 보좌관을 지냈다.

하버드로 돌아온 번디는 심장마비로 건강이 나빠진 헨리 스팀슨의 회고록을 집필할 기회를 갖게 됐다. 이렇게 나온 스팀슨의 회고록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실질적인 저자로 알려지게 된 번디는 여기저기서 좋은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안을 물리치고 1948년에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토머스 듀이 뉴욕지사를 돕기로 했다. 그는 대외정책을 자문하고 연설문 작성 일을 했으나 예상과 달리 듀이는 트루먼에게 패배했다. 그 후 번디는 워싱턴의 외교관계위원회(The Council of Foreign Relations)에서 잠시 일했고 1949년엔 하버드에서 외교사 등을 가르쳤다. 번디는 박사학위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강의는 유명해서 수강생이 많았다. 번디는 보스턴의 부유한 명망가 집안의 딸과 결혼했고, 2년 후 하버드의 정부학과는 번디에게 정년보장 교수직을 허용했다. 정치학이나 정부학을 전혀 수강한 적이 없는 학사학위 소지자가 젊은 나이에 하버드 정부학과의 정년보장 교수가 된 것이다.

1951년에 번디는 당시 국무장관이며 자신의 형인 윌리엄 번디의 장인이기도 한 딘 애치슨의 연설문과 기고문을 정리한 책을 펴냈다. 1953년에 하버드 총장은 번디를 대학원장에 임명했다. 34세 학사학위 소지자가 하버드의 대학원장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의 대상이었다. 대학원장으로서 번디는 교수들과 학과 사이의 복잡한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 갔고, 데이비드 리스먼, 스탠리 호프먼 같은 유명한 교수를 초빙했고 헨리 키신저가 정년보장 교수가 되도록 도왔다. 하버드 대학원장으로서 번디는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의원이던 존 F. 케네디와 알게 됐는데, 케네디의 은사인 존 케네스 걸브레이스 교수와 케네디 집안과 교류가 있었던 아서 슐레진저 교수가 번디를 케네디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번디를 안보보좌관으로 기용했다. 많은 사람들은 번디가 그런 영향력 있는 자리에 가게 된 것은 당연하고 잘 된 결정으로 생각했다. 번디는 케네디 대통령과 뒤를 이은 존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5년 동안 일하면서 베트남 전쟁 정책에 깊숙이 간여하게 됐다. 번디는 1966년에 안보보좌관직을 사임하고 포드 재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그 시점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책결정은 이루어졌지만 그로 인한 희생과 비용은 알려지기 전이었다.

포드 재단 이사장으로서 번디는 많은 일을 했지만 베트남 전쟁에서의 그의 역할은 계속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번디는 베트남 전쟁을 확대시킨 조치가 정당했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그의 그러한 견해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1979년에 번디는 뉴욕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초빙됐는데, 24명의 교수가 공개적으로 그의 임용에 반대하는 항의를 했다.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탐이 번디에게 “베트남 전쟁에 확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번디는 “확전에 대해 유보적이었지만 나의 의견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65년 시점에서 베트남을 그대로 두고 빠져 나올 방법은 없었다고 본다”고 답했다.

1995년에 로버트 맥나마라가 베트남 전쟁이 이길 수 없었던 잘못된 전쟁이었음을 인정하는 회고록을 내자 번디에게 “맥나마라의 견해에 동의하는가?” 하는 질문이 쏟아졌다. 맥나마라의 책을 주제로 한 TV 프로에 참가한 번디에게 “맥나마라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당신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와서 번디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번디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자신의 회고록을 남기고자 했지만 얼마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케네디 행정부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번디에게 국무부 행정담당부차관이란 직책을 제안했으나 번디는 대학에서 행정직을 충분히 했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그러자 케네디는 안보보좌관을 제안했고 번디는 이를 받아드렸다. 케네디는 폴 니츠에게 안보보좌관직을 제안했지만 국방부 고위직을 원한 폴 니츠가 고사해서 번디가 안보보좌관이 된 것이다.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를 확고한 냉전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케네디가 이어받은 첫번째 과제는 쿠바였다. 1961년 2월, 번디는 리차드 비셀 CIA 부국장이 준비한 쿠바 침공작전 계획과 국무부 중남미 부차관 토머스 만이 작성한 침공반대 의견서를 갖고 케네디에게 브리핑을 했다. 번디는 그로톤 고등학교 동문이고 예일대 경제학 교수 출신인 비셀의 침공작전을 지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서 슐레진저 대통령 특보는 다시 한번 토론할 것을 제안했지만 번디와 부보좌관 월트 로스토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참모는 자문을 하고, 대통령은 결정한다”

1961년 4월 17일, 쿠바 난민 1300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쿠바 남부 피그스 만(灣) 해안에 상륙했으나 기다리고 있던 쿠바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로스토우, 비셀, 합참의장 렘니처 장군, 해군참모총장 버크 제독 등은  백악관으로 달려가서 미군 병력을 보내야 한다고 케네디를 다그쳤다. 그러나 케네디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합참과 CIA는 일단 일을 벌이면 케네디가 미군을 파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케네디는 CIA와 군부의 그러한 움직임을 예견하고 단호하게 거부하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피그스 만 사건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번디는 책임을 느끼고 사표를 제출했는데, 뜻밖에도 케네디는 번디를 자기와 더 가까운 백악관 집무실 지하 사무실로 옮겨 오도록 했다. 케네디는 피그스 만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CIA 국장 앨런 덜레스와 부국장 비셀을 해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번디는 케네디가 냉정하고 소신이 있는 지도자임을 알게 됐다.

케네디가 다음으로 해결할 문제는 공산 게릴라에 시달리는 라오스였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을 물러나면서 동남아가 공산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케네디는 라오스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 보다는 중립화를 지지했다. 군부는 물론이고 전문가들도 라오스가 공산화되면 베트남과 타일랜드도 공산화될 것이라고 했지만 케네디는 이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케네디는 백악관의 스태프와 자신의 상식적 판단, 그리고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라오스 문제는 제네바 협상을 통해 결국 중립화로 매듭지어졌다.

케네디 행정부의 다음 과제는 베트남 문제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프랑스 군이 디엔비엔푸에서 패배한 후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군을 베트남에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고, 케네디도 같은 생각이었다. 베트콩의 공세로 남베트남(越南)의 고딘디엠 정권이 흔들려도 케네디는 비정규전 능력을 고양할 수 있는 군사고문단을 보내는 것 이상의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었다. 남베트남의 상황이 나빠지자 합참은 미군을 파병할 것을 백악관에 요청했다. 월트 로스토는 북베트남에 대해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서 공격할 것을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건의했다. 백악관 군사보좌관이던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보다 단호한 군사개입을 선호했다. 알렉스 존슨 국무차관은 지상군 파병을 주장했다. 케네디는 이 같은 참모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보다 더 논의해 보자고 했다. 이런 움직임이 새나가서 뉴욕타임스는 행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 케네디는 테일러 장군에게 현지 사정을 살펴 보고 오도록 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테일러는 군사 태스크 포스를 파견할 것을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마이크 맨스필드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베트남에 대한 파병 논의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11월 들어 국방부는 동남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장에 대처하기 위해선 미군 6개 내지 8개 사단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번디도 뒤늦게 파병 논의에 뛰어 들어서 케네디에게 “1개 사단을 보내도록 의견을 모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메모를 작성했다. 행정부에서는 조지 볼 국무차관만이 파병에 반대했고 백악관 참모들은 모두 파병을 주장하고 나서자 케네디는 아서 슐레징거에게 “베트남 전쟁은 저들의 전쟁이라야 이길 수 있다. 그것이 백인들의 전쟁이 되면 우리도 프랑스처럼 패배할 것이다”고 말했다. 국방부와 합참, 그리고 자신의 참모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결코 뜻을 꺾지 않았다.

“관료가 잘하라고는 결코 믿지 말라”

1962년 10월 15일 저녁에 번디 부부는 자기 집에서 디너 파티를 열고 있었다. 이 때 CIA 부국장 레이 클라인이 번디에게 전화를 걸어서 소련제 중거리 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됐음이 확인됐다고 알려줬다. 놀랍게도 번디는 그 전화를 받고도 파티를 계속 했고 다음날 아침 8시에야 이 일을 케네디에게 보고했다. 케네디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외교 국방관리와 전직 고위관리를 소집해서 위원회를 만들어서 토의하도록 했다. 번디는 제한된 공중 폭격을 제안했고, 딘 애치슨 전 국무장관은 번디의 주장에 동조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들의 제안에 극력 반대했다. 맥나마라는 외과적 폭격은 불가능하며 폭격은 전면적인 미군의 침공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회의가 사흘째 되던 18일, 번디는 저녁에 아내와 칵테일을 하러 나갔다가 백악관으로 다시 돌아와서 회의에 참석했다. 번디는 별안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방법도 고려해 보자고 제안했는데, 다른 참석자들은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날 밤 위원회 멤버들은 11대 6으로 해상봉쇄를 채택하기로 했고, 번디도 해상봉쇄안에 동의했다.

10월 19일, 케네디는 백악관에서 신임 합참의장 테일러 장군과 다른 멤버들을 만났다. 이들은 케네디에게 총 800회에 달하는 공중폭격 작전을 명령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번디는 다시 생각을 바꾸어 공중폭격에 찬성했고, 케네디는 이렇게 생각을 바꾸는 번디에 짜증을 냈다. 케네디는 합참의 요구를 거절하고 해상봉쇄를 명했고, 결국 미국은 터키에 배치되어 있는 미사일을 철수하고 소련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도록 비밀협상을 이룰 수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소련은 쿠바에 핵탄두 162개를 배치해 놓고 있었고 그 중 90개는 미군의 공격에 대응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63년 여름 들어서 베트남 문제가 또 다시 현안이 되었다. 6월 11일, 베트남에선 나이든 승려가 분신을 하는 일이 일어났다. 고딘디엠 대통령의 제수(弟嫂)인 마담 누는 이를 조롱해서 파문을 더 크게 만들었고, 승려 7명이 이어서 분신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8월 24-25일 주말에 맥나마라, 러스크, 그리고 CIA 국장 조지 매콘이 휴가차 워싱턴을 떠나 있고 케네디는 히아니스의 본가에서 쉬고 있었다. 백악관 참모 마이클 포레스탈은 그날 케네디를 만나서 고딘디엠을 제거하는 것을 승인하는 듯한 훈령에 대해 승인을 얻고 사이곤 주재 미국 대사 헨리 롯지 2세에게 보냈다. 마이클 포레스탈은 1949년에 자살한 제임스 포레스탈 전 국방장관의 아들로 애버렐 해리먼 가족에 의해 보호를 받은 유능한 변호사로 해리먼의 추천으로 백악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애버렐 해리먼과 국무부 아태 차관보 로저 힐스먼은 고딘디엠을 아주 싫어 했다. 이 훈령을 받은 롯지 대사는 고딘디엠을 제거하는 쿠데타 계획을 밀고 나갔다. 번디는 당시 자신의 별장에서 쉬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는 주말에 아무도 상의하지 않고 포레스탈과 몇몇 사람들이 대통령을 빙자해서 쿠데타를 승인했다고 썼는데, 해리먼은 케네디가 분명하게 동의했다고 반박했다.

케네디는 남베트남의 정치적 혼란에 대해 러스크 국무장관이 아닌 맥나마라국방장관에게 의견을 구했다. 케네디는 분명한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러스크에 좌절해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맥나마라에게 의견을 구했다. 맥나마라와 테일러는 미군 고문단이 1965년 말에는 철수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고딘디엠 정권에 대해 염증을 느꼈다. 10월 29일, 번디는 사이공에 있는 롯지에게 쿠데타 후에 전투가 지연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11월 1일, 트란반돈 장군의 군대가 사이공으로 들어가서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고딘디엠과 동생 고딘누에게 국외로 떠날 것을 요구했다. 디엠과 동생 누는 베트남 군 장갑차 속에서 피살된 시체로 발견됐고, 그 소식을 들은 케네디를 충격을 느꼈다.

11월 22일 오후, 번디가 백악관에서 베트남 문제를 다루는 회의를 주재하고 있을 때 케네디는 댈라스에서 피살됐다. 1961년과 1962년에 쿠바 문제를 다룰 때와는 마찬가지로 케네디는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을 요구하는 관료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고딘디엠 문제에 대해서 케네디는 안보 관료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정치는 전략의 적(敵)이다”

텍사스 출신인 존슨 대통령과 번디는 문화적으로 차이가 많았다. 존슨은 정치적 동물이었다. 케네디가 죽자 아서 슐레징거가 먼저 사표를 냈다. 존슨은 참모들에게 머물러 달라고 했다. 존슨은 케네디의 참모들이 한꺼번에 사임하는 모습이 좋지 않게 비칠 것을 우려했다.

존슨은 취임 첫날부터 베트남 문제에 집착했다. 존슨은 맥나마라에게 베트남에 대해 일종의 강의를 했고 미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했다. 맥나마라는 사이공 주재 롯지 대사가 현지 미군 지휘관들과 원만하게 협력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존슨과 맥나마라는 롯지를 교체하고자 했지만 롯지는 사임할 의사가 없었다. 1964년 1월 말에 합참은 베트남에 공중폭격을 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군부는 베트남 전쟁을 ‘미국화’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존슨은 그 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때까지는 결정을 미루고자 했다.

대통령 후보를 지명할 전당대회가 다가오자 존슨은 부통령 후보를 지명해야만 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부통령 후보가 되기를 원했지만 존슨은 그것이 현명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존슨은 번디를 통해서 로버트 케네디에게 존슨이 로버트를 원치 않고 있음을 알려주도록 했다. 번디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로버트 케네디는 번디가 케네디 가문을 배반했다고 분노했다.

1964년 7월 30일, 남베트남 해군 경비정 두 척이 북베트남 영토인 작은 섬 두개를 공격한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CIA의 비밀작전의 일환이었다. 사흘 후인 8월 2일, 통킹 만(灣)을 경비항해 중이던 미 구축함 매독스호(號)에 북베트남 경비정 3척이 “어뢰를 발사할 것 같은 기세”로 다가왔다. 매독스호와 인근에 있던 항모 타이콘데로가호(號)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반격에 나서 북베트남 경비정 한 척을 파괴하고 두 척에 손상을 입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새벽 5시에 러스크 국무장관의 집에서 국무차관, 국방차관, 얼 휠러 합참의장 등이 모여서 이 문제를 의논하고 오전 9시에 존슨 대통령에게 브리핑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이동했다. 이들을 맞이 하면서 존슨은 맥조지 번디와 윌리엄 번디가 보이지 않자 “이들은 그들의 여자 섬, 마샤스 빈야드에 갔을 거야. 거기서 테니스를 하고 있을 거야.”하고 빈정거렸다. 실제로 맥조지 번디는 맨체스터에 있는 별장에 가있었고, 윌리엄 번디는 마샤스 빈야드에서 가족과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존슨은 통킨 만 사태에 대해 참모들에게 상세하게 물었다. 번디 형제는 백악관으로 돌아오라는 통지를 받고 돌아왔다. 롯지의 후임으로 사이곤 주재 대사로 부임한 맥스웰 테일러는 즉각 보복공격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존슨은 하노이에 항의서한을 보내고 구축함 한 척을 추가로 보내서 매독스호와 같이 초계를 하도록 했다.
8월 4일, 매독스호는 구축함 터너 조이호(號)와 함께 다시 통킹 만으로 진입했다. 11시 경 매독스호와 터너 조이호를 향해 9발 또는 10발의 어뢰가 발사됐고 이에 구축함들이 응사해서 북베트남 어뢰정 두 척이 침몰했다는 상황보고가 백악관에 보고됐다. 하지만 이 보고는 애매한 점이 많았다. 그날 오후 6시 15분에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맥나마라는 보복공격을 제안했고 존슨은 북베트남 경비정 기지와 유류 저장고에 대한 40회 공습을 명령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두 번째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8월 4일 통킨 만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2005년에 공개된 미국의 기밀문서는 그날에 백악관에 보고된 사실에는 오류가 많았으며 애매한 부분이 삭제되어 보고됐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통킹 만에서 미국 함정이 실제로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은 존슨은 이를 이용해서 의회로부터 동남아에서의 미군의 작전을 정당화하는 결의를 얻어내고자 했다. 8월 4일 백악관에서 존슨은 맥나마라, 러스크, 얼 휠러가 참석한 자리에서 통킹 만 사건은 의회에 전쟁권한을 요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역설했다. 8월 7일, 상원은 불과 8시간 토의를 한 끝에 대통령에게 동남아에서 군사작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를 88대 2로 통과시켰다. 하원은 416 대 0으로 통과시켰다. ‘통킹만(灣) 결의’가 통과되고 24일이 지난 8월 31일, 번디는 남베트남 근해에서의 미 해군의 증강과 라오스 접경지역에 대한 미 공군기의 활동을 강화하고 베트콩에 대해 미 지상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존슨에게 보고했다. 번디는 지상군을 투입한다고 해서 한국전쟁과 같은 것이 재연되지는 않을 것이며 몇 개 여단을 6주일 정도 투입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번디의 제안은 전투목적의 지상군 투입을 최초로 제안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1964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존슨은 자신이 미 지상군을 베트남에 보낼 의도가 없다고 약속했다. 존슨은 합참에 대해 선거 전에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는 일도 있어서는 안되고 미군이 전면전쟁에 휩쓸리는 경우도 없어야 한다고 했다. 선거가 끝나기 전까지 현상을 유지하라는 주문이었다. 1964년에 정치는 전략의 적(敵)으로 기능한 것이다. 번디는 나중에 존슨의 그러한 정치적 술수에 놀랐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번디 또한 존슨의 술수에 일역을 담당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버드 대학원장을 지낸 브레인이지만 번디는 당시 성행했던 ‘도미노 이론’에 대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미노 이론’은 1954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제기한 것으로 베트남 문제에 대해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번디는 나중에 “자신은 도미노 이론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또한 “도미노 이론은 국내 정치용이었다”고 했다. 1964년 6월, CIA는 “라오스와 베트남이 공산화 되더라도 아시아의 다른 지역이 공산화되는 일을 없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도미노 이론의 종언(終焉)’이란 보고서를 만들어서 배포했고 번디에게도 전달되었지만 번디는 그것을 무시했다.

1964년 봄에 국무부는 북베트남에 공습을 하더라도 그들은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한 비밀 보고서를 냈다. 합참은 ‘시그마 I’과 ‘시그마 II’라는 비밀보고서를 내서 북베트남에 대한 공중폭격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에 대한 분석을 했다. 분석관들은 두 번 모두 공중폭격이 가져올 결과가 미미하며 오히려 북베트남의 결의를 강화시킬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런 보고서도 물론 번디에게 전달되었지만 번디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64년 11월 선거에서 존슨 대통령은 압승했고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에서 모두 압도적 다수를 확보했다. 선거가 끝나고 3개월이 지나서 번디는 존슨에게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자고 공식으로 건의했다.

“정연(整然)하지 않은 확신은 재앙으로 가는 전략이다”

70 나이를 넘어선 번디는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싸우고 있었다. 그는 서재에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과 자료, 기사를 쌓아 놓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의 자신의 역할에 관한 기사와 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과연 당시에 어떻게 해서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게 됐는지에 대해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번디는 자신을 비판한 사람들에 대해 적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번디를 비판한 기자 중 몇 명은 번디가 하버드 대학원장을 할 때 알았던 학생들이었다. 당시 하버드의 학내신문인 ‘크림슨’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번디를 종종 만났던 데이비드 핼버스탐과 A. 랭거스는 뉴욕타임스 기자가 되어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다. 핼버스탐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취재로 퓰리처 상(賞)을 탔다. 핼버스탐은 1969년에 하퍼스지(誌)에 ‘매우 비싼 맥조지 번디의 교육’이란 긴 글을 발표해서 주목을 받았다. 핼버스탐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는 과정에서 번디의 역할을 다룬 글을 두 차례 더 발표했고, 이것을 토대로 ‘최고이자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하드커버가 18만 권, 페이퍼백이 150만 권이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핼버스탐은 “어떻게 해서 금세기에 미국 정부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북전쟁 이후의 최악의 비극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 냈나”는 문제를 이 책에서 제기한다고 했다.

핼버스탐은 “군에 대한 문민통제는 환상이고, 현실에선 항상 군이 정책을 압도한다”고 썼다. 핼버스탐은 합참, 일선의 장성급 지휘관들, 그리고 번디, 맥나마라, 러스크 같은 민간인 참모들이 대통령으로부터 베트남 전략을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번디는 베트남 전쟁을 진정으로 기획한 사람은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이고 그 외의 모든 사람은 조력자들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번디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남기고자 했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사망하고 말았다.
 
196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베트콩은 사이공의 미국 장교 숙소를 폭파해서 미국 장병 2명이 죽고 38명이 부상을 입었다. 12월 28일 번디는 보복 공습의 장점과 단점을 정리해서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존슨은 텍사스의 자기 농장으로 번디와 러스크 국무장관을 불러서 이 문제를 논의한 후에 보복 공습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존슨은 공중폭격의 효율성에 의문을 갖고 있었고, 대신에 지상군을 파견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존슨은 테일러 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도 자신은 베트남 전쟁이 공중폭격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베트남 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웨스크모얼랜드는 육군과 해병대 34개 대대와 지원부대로 구성된 75,000명 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테일러 대사는 지상군이 반군(叛軍)을 제압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테일러는 게릴라에 상대하기 위해선 게릴라 숫자 보다 열 배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그런 지상군 병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테일러는 공군력을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대통령과 4성 장군 출신 현지 대사의 견해가 충돌한 것이다.

1965년 1월 말에 번디와 맥나마라 장관은 ‘기로에 선 베트남 전략’이란 보고서를 만들어 존슨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군사력을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협상을 통해 해결할지를 이제는 결정해야 한다고 결정을 촉구했다. 존슨은 이제 결정을 해야 했다. 존슨은 “내가 더 많은 군인 아이들을 보내면 더 많이 죽을꺼야”하고 친구에 탄식조로 말했다고 전해진다. 2월에 번디는 베트남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번디는 남베트남의 정치 군사지도자들을 만나서 이들에게 미국은 그들을 도울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번디는 남베트남 군대는 서로간에 내란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소감을 CIA 국장에게 전달했다.

번디가 베트남에 머물던 마지막 날인 2월 7일, 캄보디아와 라오스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 플레이쿠의 군사기지를 공격해서 미군 9명이 사망하고 137명이 부상당하고 나머지 76명이 철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플레이쿠를 방문해서 처참한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사이공으로 돌아온 번디는 북베트남에 대한 즉각적인 공습을 존슨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존슨은 북위 17도 북쪽 60Km에 위치한 북베트남 군사시설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번디는 지속적인 공습을 기대했지만 존슨은 보복 공격을 한 번 하는데 그쳤다. 존슨은 “호지민은 결코 공습에 항복하지 않을 꺼야”고 자주 이야기 했다.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 정책을 두고 극심한 분열을 보였다. 번디와 테일러 대사는 공습을 주장했고, 존슨 대통령과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조지 볼 국무차관은 어떠한 전략을 써도 실패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인데 아이젠하원 전 대통령은 미국은 이미 베트남에 개입해 있다면서 공산군의 팽창을 막기 위해 과단한 조치가 필요하다면서 존슨을 압박했고, 러스크 국무장관은 아이젠하워의 견해를 지지했다.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미국이 아시아에 다시 개입할 필요가 없다면서 대통령에 반기(叛旗)를 들었다. 화가 난 존슨은 다시는 험프리 부통령이 베트남 전략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번디가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으로 마음을 정하자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번디를 움직여서 다낭에 있는 미군 공군 기지를 보호하기 위해 해병원정여단(expeditionary brigade)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테일러 대사는 이런 결과는 베트남 전쟁의 미국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테일러는 지상군이 도착하게 되면 더 많은 지상군이 필요하게 될 것이고, 남베트남 군은 그들이 했던 작전을 미군에게 돌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테일러의 반대는 묵살되었고, 3월 8일 해병 3,500명이 다낭에 상륙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번디는 존슨에게 테일러 대사를 경질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상황은 테일러 대사가 우려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베트남 현지를 방문하고 돌아온 해럴드 존슨 육군참모총장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선 미군 50만 명이 필요하다고 브리핑을 해서 존슨 대통령과 맥나마라 장관을 충격에 빠뜨렸다. 번디는 도대체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고 메모를 작성했다. 번디는 “베트남에서 미국이 패배하면 세계에서의 미국의 신뢰성과 국내에서의 존슨 행정부의 신뢰성이 훼손되기 때문에 베트남을 나중에 잃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개입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버드 로스쿨 교수를 하다가 국방차관으로 발탁된 게임 이론의 대가인 존 맥노튼은 “베트남에서의 미군의 역할은 70%가 패배를 피하는 것이고 20%는 남베트남의 영토를 보존하는 것이고 10%는 남베트남 국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함”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4월 13일, 존슨은 제131 공수여단을 베트남에 파견하는 조치를 승인했다. 테일러 대사는 이런 일방적 결정에 항의했다. 4월 19-20일에 웨스트모얼랜드 장군과 테일러 대사 등 관계자들은 호놀룰루에서 모여서 베트남 주재 미국 병력을 33,500명에서 82,000명 수준으로 올리는 데 합의했다. 이런 움직임이 있음에도 존슨 대통령은 언론에 대해선 베트남에 대한 정책이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5월에는 베트남에서 쿠데타를 일어 나서 민간 정부가 무너졌다. 쿠엔 카오 키와 구엔 티우 가 주도한 이 쿠데타로 소장파 군인들이 정부를 장악했다.

번디는 5월 15일에 열리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토론회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존슨은 번디에게 도미니카 출장을 명해서 번디의 토론회 참석을 막았다. 6월 들어 테일러 대사는 북베트남에 대해 공습을 한다고 해도 북베트남의 공격을 약화시킬 수 없다면서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어 지상군 증강에 동의했다. 6월 7일, 웨스트모얼랜드는 82,000명 규모 지상군을 175,000명 규모로 증강해 줄 것을 요청했다. 확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나중에 번디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되돌아 보았다. 번디는 적을 과소평가했고, 미국의 대응전략을 검증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존슨 행정부의 가장 탁월한 브레인인 그가 전략의 목적과 수단을 평가하는데 충분히 엄격하지 않은 우(愚)를 범했던 것이다. 번디는 미국이 ‘종이 호랑이’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데 집착하고 있었고, 그런 집착으로 인해 냉정한 분석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당시 북베트남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은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오히려 북베트남 인민들이 전에 없이 단결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중간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지 말라”

1996년에 번디는 베트남에서의 실패를 되돌아 보고 어떻게 해서 존슨 행정부가 인내심 경쟁에서 지고 마는 전쟁에 몰입하게 되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번디는 미 지상군은 전통적으로 영토를 장악하기 보다는 소모전(war of attrition)을 해왔다고 판단했다. 번디는 이렇게 함으로써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미군의 주된 전략이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당시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베트남에서의 미군의 전략이 소모전이라고 생각했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미군이 북베트남의 전력(戰力)을 소모시켜서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1965년 여름에 조지 볼 국무차관은 지상군을 투입해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지상군 증강에 찬성하는 등 존슨 행정부 내에서도 논쟁이 뜨거웠다. 번디는 존슨 대통령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고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이자 안보보좌관직을 물러나려고 마음을 먹었다. 번디는 6월 21일 CBS 방송 주관으로 열리는 베트남 전쟁 TV 토론에 참석하기로 했다. 번디의 상대방은 시카고 대학의 한스 모겐소 교수였다. 모겐소 교수는 미국은 베트남에 대해서 중요한 국가적 이익을 갖고 있지 않으며 도미노 이론은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입장이었다. 번디가 TV 토론에 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존슨은 노발대발했다. 존슨은 공보비서 빌 모이어스는 불러서 “내 파자마를 입고 가서 번디를 파면하라”고 지시했다. 백악관 지하층으로 번디를 찾아간 모이어스는 번디가 이미 퇴근했음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존슨은 모이어스에게 다시 “번디를 찾아가서 파면하라”고 지시했다. 모이어스가 그런 말을 전하자 번디는 “또 그러나” 하면서 그냥 하던 일을 계속했다. 존슨과 번디는 게릴라 전쟁 같은 신경전을 하고 있었다.

존슨은 번디가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는 월터 리프만과 조지프 앨섭을 조용하게 해 줄 것이란 헛된 기대를 했었다. 번디는 번디대로 존슨의 정책 결정과정에 짜증을 느꼈다. 번디는 존슨이 상원 원내대표를 지내면서 상원의원들을 설득하는 방식처럼 러스크 장관, 맥나마라 장관, 웨스트모얼랜드 장군 등의 의견을 듣고 설득하려 했다. 베트남 주재 대사로 사이공에 부임한 헨리 캐봇 롯지는 남베트남 정부가 기능마비 상태에 있다고 한탄했고, 존슨은 베트남에서 이길 수 없다는 조지 볼 국무차관과 확전을 주장하는 맥나마라 국방장관과의 토론을 듣고 있었다. 1965년 여름, 번디는 하버드 총장을 조용히 만나서 대학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그러던 중 포드 재단이 이사장직을 제안해서 번디는 1966년 초에 번디는 워싱턴을 명예롭게 떠날 수 있었다. 존슨은 후임으로 도미노 이론을 신봉하는 부보좌관 월트 로스토를 임명했다. 

안보보좌관으로서 번디는 불확실하고 주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군사력을 투입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번디가 백악관에서 일을 했을 당시에는 신뢰라는 관념이 베트남에서의 군사전략의 다른 어느 측면보다 중요했을 수 있다. 승리할 현실적인 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군사적 조치를 주장했던 번디는 아마도 승리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단지 미국에 대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번디는 소모적 전투를 통해 베트콩과 북베트남 군의 사상자가 많다고 말했다. 번디는 1965년 10월에 이아드랑 고지에 있었던 전투에서 미군이 대량 폭격을 통해 1500명의 북베트남군이 죽였지만 미군은 200명이 전사한 경우를 들어 소모전이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먼저 포기한 측은 하노이가 아니고 워싱턴이었다.

“군사개입은 대통령의 선택이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케네디가 암살되고 그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존슨이 확대시킨 베트남 전쟁이 결국에는 미국의 패배로 끝나자 “만일에 케네디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베트남에 대해 어떤 정책을 썼을까 ?” 하는 가설이 많이 논의됐다.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들은 번디는 공개 석상에서는 케네디도 베트남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번다는 1964년에 콜럼비아 대학 연구진과의 비공개 인터뷰에서 이미 “케네디는 도미노 이론이란 지적인 족쇄에 포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번디는 또한 “케네디가 남베트남 정부군의 비정규전 능력을 증진시키자는 로버트 케네디의 주장을 지지했다”고 했다. 말년의 번디는 케네디와 존슨의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을 돌아보았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번디는 “케네디였다면 베트남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았을 것이며 베트남 전쟁을 미국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1961년 여름에 케네디는 더글라스 맥아더를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몇몇 고위관료와 함께 베트남에 대한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맥아더는 “아시아는 끝이 없다. 우리가 아시아에 백만 대군을 보낸다고 해도 우리는 중과부적(衆寡不敵) 사태에 봉착할 것이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있다가 케네디에 의해 인도 주재 대사로 발탁된 존 케네스 걸브레이스는 1962년에 케네디에 보낸 서신에서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면 기약 없고 길고 긴 군사개입의 수렁에 빠져 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케네디는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마이크 맨스필드 의원을 만나서 “내가 재선에 성공하면 베트남에서 철군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케네디는 “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겠지만,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니엘 엘즈버그는 1967년에 로버트 케네디가 자신에게 “형과 나는 1951년에 베트남을 가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혐오감을 느꼈다”고 말했다고 했다.

케네디의 그런 생각은 피그스 만(灣) 침공사건에서의 그의 자세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해가 된다. 처음에 케네디는 CIA와 합참, 그리고 번디의 권고를 받아 들여서 침공계획을 승인했다. 하지만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위기를 확대시키기 보다는 패배를 인정했다. 그런 케네디가 단지 미국의 위신을 위해서 베트남 전쟁을 확대시켰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도 워싱턴의 안보 관료의 막강한 영향력에 굴하지 않았다. 맥나마라도 1995년에 펴낸 회고록에서 “케네디가 살아 있었더라면 남베트남과 더 나아가서 종국적으로 동남아 전체가 공산주의 수중에 떨어지더라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특보를 지낸 역사학자 아서 슐레징거도 “케네디는 남베트남을 구하러 미 지상군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술회했다.

말년에 번디는 베트남에 대한 케네디와 존슨의 시각이 차이가 난 것은 대통령 자체의 리더십의 차이라고 보았다. 베를린 위기와 쿠바 위기를 극복한 케네디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존슨과 달리 케네디는 선거를 생각하는 의회의 기회주의적 요구를 따르지 않았고, 의회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입법 아젠다를 갖고 있지 않았다. 번디는 “케네디는 전쟁권한을 승인하는 의회의 결의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며, “케네디는 협상을 통해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망하기 5주 전에 번디는 “케네디가 죽지 않고 1964년에 재선되었더라면 1968년 선거를 의식해야 했고 또 진보적인 국내 아젠다에 매달려 있었던 존슨과 달리 매우 성공적인 안보 지도자로서 1965년에 베트남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을 되돌아 본 번디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군사개입은 대통령의 선택이지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는 점이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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