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도어 골드, 핵 국가 이란의 등장 (2009년)
2011-02-24 10:37 2,276 이상돈


도어 골드, 핵(核) 국가 이란의 등장 (2009년, 레그너리 출판사, 390쪽, 27.95달러)

Dore Gold, The Rise of Nuclear Iran – How Tehran Defies the West
(2009, Regnery Publishing, 390 pages, $27.95)

미국인으로서 이스라엘에 귀화해서 이스라엘 외무장관을 지낸 도어 골드는 이 책에서 이란의 핵 무장이 임박했음에도 그 위험을 바라 보고만 있는 서방을 비판하고 있다. 골드는 2009년에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 도전한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서유럽 지도자들은 시위대를 옹호했지만 1979년에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했을 당시 미국 외교관을 심문했던 무사비도 이란의 핵무장을 지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골드는 이란의 2005년 대선과 2009년 대선이 모두 이슬람 혁명수비대가 간여한 것이라서 선거는 결국 이슬람 최고지도자들의 결정에 의해 조종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이슬람 정권과 협상을 원하고 있지만 공화당은 물론이고 바이든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같은 민주당 정치인도 이란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정책 자체가 불분명하며, 미국이 확고한 정책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이란은 핵무기를 개발해서 ‘제국’이 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2003년-2005년간 유럽연합은 이란과 핵 프로그램 해체를 위한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바로 이 기간 중 이란은 이스파한 핵 시설에서 옐로 케이크 37톤을 UF6으로 변환시켰다. 이란은 당시 핵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 164개를 갖고 있었는데, 엘로 케이크 37톤은 농축을 하면 최소한 핵 폭탄 5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서방이 비교적 실용주의적이라고 평가했던 모하마드  카타미가 실각하고 그 대신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이 된 것도 핵 무기 개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란에 대한 군사적 대응은 대안이 아니라고 보고 협상을 추진해 왔지만 정작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를 속여가며 핵무기 개발을 해왔다.

이란은 인구가 7,000만 명에 이르고 영토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을 합친 것보다 더 넓다. 이란은 사파비드 제국(1501-1722) 시절에 지금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 파키스탄의 서부 지역, 그리고 바레인 등 걸프 연안을 장악했었다. 이슬람 시아파(派) 왕국이던 사파비드의 영향은 지금도 건재하다. 순니파(派)를 신봉하는 아랍 국가들에 시아파(派) 신자들이 많이 있고 그것이 아랍 국가들에게 골칫거리인 것도 이런 역사와 관련이 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자 사우디 국왕이 미국 고위관리에게 “당신들은 사파비드 페르시안으로 하여금 이라크를 장악하게 했다”고 말한 것도 아랍권의 그러한 인식을 잘 보여 준다. 

1983년 10월 23일 베이루트의 미 해병대 숙소가 폭파되어 장병 241명이 사망한 사건은 이란이 사주(使嗾)해서 헤즈볼라가 저지른 테러였다. 1996년 6월 25일 사우디의 코바 타워를 폭파해서 미 공군 장병 19명을 죽게 하고 수백 명을 다치게 한 테러도 이란이 사주해서 헤즈볼라가 저지른 것이었다. 2003년 5월 12일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의 외국인 숙소건물에 가해진 테러 공격으로 많은 외국인이 죽었는데 이도 이란에 근거를 둔 알케이다 조직이 저지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등 연합군을 많이 죽게 한 은익폭탄(IED)도 대부분 이란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

오늘날 이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알아야 한다. 1902년에 시아파 종교적 가문에서 태어난 호메이니의 선조는 인도의 캐슈미르 지방에서 살았는데, 그의 증조부는 그곳에서 이슬람 학교를 세웠고, 그의 조부가 나자프에서 공부한 후 이란에 정착해서 그 후손들은 이란에 살게 됐다. 호메이니가 알려진 계기는 1964년에 이란의 샤 정부가 미국과 미군 주둔군 협정을 체결할 때 그것을 격렬하게 비난한 사건이었다. 그 해 말 호메이니는 해외로 추방되어 터키에 잠시 체류한 후에 이라크에 정착했다. 이라크 나자프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호메이니는 설교를 통해 이란의 샤 정권을 비난했다. 호메이니의 설교를 듣기 위해 나자프를 찾는 이란인들이 줄을 잇자 사담 후세인도 이를 불편하게 느끼게 됐다.

후세인은 샤의 권고에 따라 호메이니를 이라크에서 내 보내고자 했는데, 이 때 프랑스 정부가 호메이니에게 망명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호메이니는 1978년 10월에 파리 근교에 자리를 잡게 됐다. 서방 지도자들은 호메이니가 프랑스로 망명하면 추종세력과의 접촉이 줄어들어 그의 영향력이 줄어 들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를 취재하고 인터뷰하려는 서방 언론이 줄을 이어서 호메이니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1977년 테헤란을 방문한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이 샤 정권의 우방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1978년부터 이란에서는 샤에 반대하는 시위가 잦아지는 등 정정(政情)이 불안하게 돌아갔다. 테헤란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본국 정부에 대해 샤 정권이 붕괴단계에 들어갔다고 경고했지만, 미국 중앙정부국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1979년 1월, 샤는 신병치료를 이유로 망명 길에 올랐고, 2월 1일에 호메이니는 에어 프랑스 특별기 편으로 테헤란에 도착했으며 수백만 군중이 그를 환영했다.

카터 행정부는 호메이니를 잘 알지 못했다. 당시 유엔 주재 미국대사이던  앤드류 영은 호메이니를 ‘성자(聖者)’라고 불렀다. 심지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이던 윌리엄 설리번도 미국 정부가 호메이니와 정상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본국에 보고했다. 샤 정권이 무너진 후 세워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실상은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혁명위원회가 모든 것을 주도했다. 호메이니의 가까운 보좌관이던 세이크 칼칼리가 특별판사로 임명됐는데, 그는 샤 정권의 각료와 고위장교, 국립은행 총재 등을 체포해서 처형했다. 이란 전역에 혁명재판소가 세워졌고 대학은 폐쇄되었으며, 이슬람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체포돼서 처형됐다. 

그럼에도 카터 행정부의 밴스 국무장관과 브레진스키 안보특보는 이란의 새 정부와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 해 10월, 암 치료를 위해 샤가 미국에 입국했고, 11월 5일 이란 민병대는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 사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카터 행정부는 이란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카터 행정부가 취한 조치는 이란이 미국에 대해 석유수출을 금지하려고 하자 이란산(産) 석유 수입을 금지시키고 미국내 이란 자산을 동결한 것 뿐이었다. 카터 행정부는 호메이니와 근본주의 이슬람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이란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에 비로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석방했다. 

레바논과 헤즈볼라

1982년 이스라엘은 레바논으로 진입해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기지를 공격했다. 유엔 결의에 따라 이스라엘 군이 철수하자 그 공백을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군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이 메웠다. 1983년 10월 23일 새벽 6시 22분, 레바논 시아파 민병대가 사전에 탈취한 급수트럭이 폭탄을 가득 채우고 미 해병대 기지로 돌진해서 폭발했다. 이 자폭테러로 미 해병대원 241명이 사망했다. 몇 분 후 프랑스 군 기지에도 자폭테러가 발생해서 프랑스 군 58명이 죽었다. 11월 4일에는 남부 레바논 티레의 이스라엘 기지에 트럭 자폭테러가 발생해서 이스라엘 군 등 60명이 죽었다. 이 테러는 그 해 4월에 레바논의 미국 대사관에 대한 자폭테러로 미 대사관 직원 등 60명 이상이 죽은 사건과 흡사했다. 일련의 테러는 이란이 사주한 것으로 여겨졌고, 레이건 대통령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서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에 반대했고, 장관의 의사를 존중했던 레이건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공군기를 동원해서 바카 계곡에 위치한 이란 공화국 수비대 기지를 폭격했다.

미 해병대 건물을 폭파한 테러의 배후는 당시 시리아 주재 이란 대사였던 알리 악바르 모타세미로 나중에 밝혀졌다. 모타세미는 1982년에 헤즈볼라를 비밀리에 설립했는데, 헤즈볼라가 레바논의 미국 대사관을 폭파하고 중동 지역의 CIA 책임자이던 윌리엄 버클리를 납치한 것이다. 헤즈볼라 대원들은 이란의 자금을 받아 움직이고 이란에서 공화국 수비대와 함께 훈련을 받았다. 1983년 12월 12일, 쿠웨이트에서 미국 대사관과 프랑스 대사관 등 6곳에서 동시에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쿠웨이트 보안경찰은 레바논 내의 시아파 테러 조직인 다와 대원 17명을 체포했다. 1984년과 1985년에 쿠웨이트 항공과 미국 TWA 항공의 민간항공기가 납치됐는데, 납치범들은 다와 대원 17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납치범들은 항공기에 타고 있던 미국 해외개발처 공무원과 미 해군 장병을 살해했다.

1985년 말까지 헤즈볼라는 미국인 6명을 인질로 잡아 놓고 각종 요구조건을 내 걸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윌리엄 버클리를 석방시키기 위해 이들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버클리는 고문 끝에 이미 살해됐음이 밝혀졌고, 인질로 잡혀 있던 목사만 석방됐다. 하지만 이 협상을 이루기 위해 백악관은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팔았음이 나중에 밝혀져서 레이건 대통령은 곤혹을 치렀다. 이란과 이라크 간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인 1987년 미국이 쿠웨이트 선박을 보호하기로 하자 미국과 이란 간에 긴장이 걸프 전역에 높아졌다. 미국기를 단 유조선이 이란이 부설한 기뢰를 접촉하고 1988년 4월엔 미 해군 프리게이트 함이 기뢰를 접촉해서 파손되는 일이 일어났다. 미국은 해군력을 동원해서 인근의 이란 해군 기지를 즉각 파괴해 버렸다. 1988년 7월엔 미 해군 순양함이 빈센스호(號)가 이란 항공 소속 여객기를 이란 공군기로 오인하고 미사일을 발사해서 격추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군사력이 소모된 이란은 미국에 보복하기 보다는 이라크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했다.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종식시킨 호메이니는 이슬람을 모욕한 살만 루시디를 살해하라는 교시를 내리고 1989년 6월에 사망했다. 루시디는 숨어서 무사했지만 루시디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한 일본인은 피살됐다. 

호메이니가 사망한 후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이 되자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이란의 지도자가 보다 실용적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라프산자니는 호메이니의 강경노선을 그대로 추종했다. 헤즈볼라는 그들이 레바논에서 납치한 미 해병 히긴스 중령을 처형하는 비디어를 공개해서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란과 의 영토분쟁을 해결한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이 과정에서 쿠웨이트 감옥에 있던 다와 대원 17명은 탈출해서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복귀했다.

핵 무장을 향한 발걸음

샤 정부 시절 이란은 독일 시멘스사(社)에 계약을 주어 1,200 메가와트 급 원자력 발전소 2기를 부세흐르에 건설하고 있었다. 호메이니는 샤 정권이 추진해온 이 사업을 중단시켰다. 호메이니는 원자력 프로젝트가 터무니 없이 비싼 사치라고 생각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라크 공군기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건설 중인 이란의 원자력 발전소를 파괴했다. 한편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룬 호메이니는 원자력을 다시 보게 됐다. 이란 대통령이던 알리 카메이니는 이란이 원자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공언했다. 핵 무장을 향한 이란의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1991년 초 걸프 전쟁이 일어나자 이란은 미국의 군사작전을 방해하지 않았고, 자국 공항으로 피난해 온 이라크 공군기의 출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란은 또한 사우디 아라비아 및 이집트와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걸프 전쟁 당시 이집트와 사우디는 미국의 동맹이었기에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이란과 대화를 트려고 했다. 그러나 이란은 걸프 전쟁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고 있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만일에 사담 후세인이 핵 무기를 갖고 있었더라면 미국이 쿠웨이트를 해방하러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이란은 중수로를 도입하려고 했고, 또 카자크스탄의 구 소련 핵시설에 있던 핵물질을 구입하려고 시도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런 시도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란의 핵 야망은 결코 식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고 워렌 크리스토퍼가 국무장관이 됐다.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차관으로 인질석방 협상을 했던 크리스토퍼는 이란에 대해 매우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고, 클린턴 행정부는 이란에 대한 봉쇄정책을 지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석유회사들은 이란 원유를 구입해서 다시 제3국에 파는 방식으로 이란과 거래를 했다. 유럽 국가들과 일본도 이란과의 교역과 투자를 늘렸다.

이란은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하는 인물을 가차없이 암살했다. 1989년에는 이란 출신 쿠르드 지도자가 이란 정부의 대표와의 만남을 위해 비엔나에 왔다가 피살됐다. 1991년 8월에는 샤 정권의 마지막 총리였던 샤푸르 바크티아르가 파리 자택에서 피살체로 발견됐다. 1992년 9월에는 베를린의 그리스 음식점에서 이란 쿠르드 민주당 사무총장과 간부 3명이 이란이 보낸 암살단에 의해 피살됐다. 이들 외에도 이란 체제에 반대하거나 저항했던 인사들이 이란 정권이 보낸 암살단에 의해 유럽 각지에서 살해됐다. 이란은 또한 알제리아와 이집트의 이슬람 과격세력을 지원했다. 

1994년 7월 18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유태인 센터빌딩에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해서 85명이 죽었는데, 이란의 사주를 받은 헤즈볼라가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테러는 아르헨티나가 이란에 대한 핵 장비 판매를 취소한 데 대한 보복인 것으로 추측됐다. 1996년 6월 21일, 사우디의 다란에 있는 미 공군기지 막사인 코바 타워에 강력한 자폭 테러가 발생해서 미 공군 장병 19명이 죽고 3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자폭 테러범은 사우디 경찰의 추적을 받던 사우디 헤즈볼라 대원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보복 공격을 검토했지만 시간을 끌다가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사우디 정부는 미국이 보복을 하면 사우디가 보다 큰 테러에 시달릴 것으로 알고 미국 정부의 조사에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1997년에 라프산자니의 뒤를 이어 모하마드 카타미가 대통령이 되자 새 정부는 보다 실용적일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미국에 돌았다. 그러나 이란에서는 혁명수비대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서 대통령의 역할이 전과 같지 않았다. 이란은 미사일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서 1998년 7월에는 사정거리가 1,300 킬로미터 되는 샤합 3호를 실험 발사했다. 이란은 러시아가 제공한 장비와 기술을 사용해서 미사일을 개발한 것이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테헤란 거리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등 미국을 동정하는 분위기가 잠시 일었다. 또한 당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심각한 대립을 겪고 있었다. 1998년 탈레반은 서부 아프가니스탄의 시아파 주민을 제거하려고 했다. 마자르 이샤리프를 장악한 탈레반은 이란의 외교관과 기자들이 이란 영사관 건물 지하실에 몰아넣고 학살했다. 이란은 시아파 주민 5,000-6,000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내의 시아파 군벌에 무기를 공급해서 시아파 이란과 순니 탈레반 사이에는 내란의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9-11 테러 후 미국은 순니파인 탈레반이 옹호하는 알케이다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미국이 탈레반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이란의 국익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합참과 중앙정보국은 이란 혁명수비대가 탈레반을 지원하고 있다는 정보를 취득했다.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을 우려한 이란이 아프가니스탄과 연합하기로 한 것이다. 2001년 12월, 라프산자니는 “이슬람 세계가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무기를 가져야만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오만의 수단인 이스라엘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천명했다. 2002년 1월 초에 이스라엘 해군은 홍해 연안에서 카렌-A호를 나포했는데 선박에는 가자 지구로 향하는 이란제 무기와 폭발물이 가득 차 있었다. 2002년 1월 29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더불어 ‘악(惡)의 축”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자 서부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란은 국경을 개방해서 탈레반과 알케이다의 지휘부와 무장세력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요르단 출신 알 자르키위도 이 때 이란으로 피신했는데, 그는 무장세력을 재정비한 후 이라크로 들어가서 미군을 공격하고 테러를 자행했다.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고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이란은 혁명수비대 정예병력 2,000명을 직접 이라크에 침투시켜서 반군(叛軍)을 지원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나중에 바드르 군단이라고 불린 이라크 내의 반군(叛軍) 정예부대를 창설하고 또 지원했다. 현재 이라크 총리인 무리 알마키가 이끄는 다와당(黨), 그리고 다와당과 대립하는 시아파 지도자인 목타다 알사드르도 이란의 지원을 받았다. 이란은 재정적 지원 외에도 반군에게 각종 무기를 제공했는데, 미영 연합군을 많이 살상한 은익폭발물(IED)도 대부분 이란에서 제조된 것이다. 미군과 영국군이 이라크에서 보다 많이 피를 흘릴수록 자신들의 안보가 더욱 튼튼해 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란은 이라크 반군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조종해 오고 있다.

서방은 왜 실패했나 ?

1979년 이후 미국과 서유럽은 이란에 대해 계속 실패해 왔는데, 이란은 협상을 할 의향이 없음을 서방이 몰랐기 때문이다. 이란은 외교 자체를 상대방을 기만하는 수단으로 보고 있는데, 상대방을 기만하는 술책은 이슬람 내 소수파인 시아파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코바 타워 테러 등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대가를 치러 본 적이 없는 이란은 서방을 우습게 보고 있다. 미국계 석유회사들은 이란과 석유거래를 해서 미국의 경제제재를 우습게 만들었다. 2009년에도 뉴스위크 편집장 파리드 자카리아는 “호메이니와 그의 후계자들은 핵무기를 부도덕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란이 핵 무기를 개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영향력 있는 언론인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이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혁명수비대와 각별한 관계가 있으며, 혁명수비대의 지지를 받고 있다. 혁명수비대 사령관은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고 공언했고,  아미디네자드는 “12번째 이만인 마흐디의 재림이 이루어 진다”고 자주 언급했다. 이런 발언은 이란이 서방을 정복시킬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위협적인 증거인데도 서방 정치인들은 이를 애써 못 본체 하고 있다. 미군 지휘부는 목타바 알사드르가 지휘하는 이라크 순니파 민병대에 이란의 비밀군사조직이 들어와 있으며 이란의 정예 쿠드즈 부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보고 있지만 정책 결정자들은 이런 결론을 받아드리기를 주저하고 있는 형편이다. 

중동 전체를 위협하는 이란

바레인을 통치하고 있는 왕가와 지배계층은 순니파이지만 바레인 국민의 70%는 시아파다. 이란은 제국 시절의 영토를 거론하면서 최근에 다시 바레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이란은 바레인의 반정부 세력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다. 이란의 영향은 이집트와 수단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예멘과 요르단은 이란의 영향력에 직접 노출되어 있다. 2009년 3월, 모로코는 이란이 모로코에 시아파 이념을 전파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란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란은 레바논을 장악한 헤즈볼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직접 공격해서 결국 2006년 7월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을 공격하게 됐다. 헤즈볼라는 민간인 지역에 로켓을 배치해서 이스라엘 공군기가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법을 썼다. 가자 지구에서도 이란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가고 있다. 이스라엘이 철군한 후에 가자 지구에서 선거가 있었는데 이란의 지지를 받는 하마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2008년 12월, 헤즈볼라 사무총장인 하산 나스랄라는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다면서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집트의 가장 큰 야당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은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순니 무슬림으로 전에는 시아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런 태도는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이란은 친(親)서방 아랍국가를 무너트리면 이스라엘도 자연히 무너질 것이라고 보고 헤즈볼라, 하마스,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 등을 지원하고 있다.

이란 핵 무장을 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이란의 이 같은 완고하고 위험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대화를 재개하는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 서방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2004년에 츠비그뉴 브르제진스키와 로버트 게이츠가 낸 보고서, 그리고 2006년에 제임스 베이커와 리 해밀턴이 낸 보고서도 미국이 이란과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란과의 대화에 대한 기대는 갈수록 무의미해지고 있다. 심지어 오바마도 대화 전망에 대해 회의적임을 피력했다. 이란은 서방과의 협상을 항상 그들에 대한 압력을 피하는 방편으로 사용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핵 개발을 추진해 왔다.

2009년 3월, 미 합참의장 마이크 멀린 대장은 이란은 저농축 우라늄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고농축을 해서 핵 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증언했다. 이란이 핵 무장을 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인 것이다.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책임지고 있는 헨리 오벌링 중장은 2015년이면 이란의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란이 제공한 핵 물질을 포함한 폭발물을 제조해서 테러를 하는 최악의 상황도 현실적 위협이 되고 있다. 이란이 핵 무기를 갖게 되면 이란은 오만해 질 것이며, 결국은 중동을 넘어서 세계 질서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최근에 이란은 중남미의 반미(反美) 정권과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2005년 이후 이란은 베네주엘라, 니카라과, 볼리비아, 그리고 에콰도르와 유대관계를 공고히 해 오고 있다. 이란은 또한 페르시아 만(灣)에서 미국을 몰아내기 위해 바레인에서 시아파 반란을 획책하고 다른 순니 국가에서도 반정부 선동을 지원하고 있다. 1941년에 일본 제국은 미국의 전진(前進)기지인 펄 하버를 공습했지만, 공군력이 열악한 이란은 테러와 반군 활동을 통해 미 5함대에 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순니 정부를 전복해서 미국을 몰아 내려고 하고 있다.

핵 무장을 한 이란은 2001년에 미국을 공격한 탈레반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위력으로 미국과 서유럽을 위협할 것이다. 시리아에 핵 물질과 기술을 제공한 북한은 이란에게도 산화 플루토늄을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플루토늄 생산시설을 폐쇄하기로 했지만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집중하고 있을 때인 2003년 초부터 다시 플루토늄 생산을 재개했다. 이처럼 이란은 교묘한 외교를 통해 서방을 기만했지만, 이란도 취약한 곳이 많다. 이란은 원유를 수출하지만 자체 정유시설이 부족해서 휘발유 등 정제된 유류를 수입해야 한다. 따라서 서방이 합심해서 이란에 대해 정제된 유류 수출을 금지한다면 이란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란은 북한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고 있음이 분명하다. 북한은 미국에 이라크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을 무렵인 2002년 12월에 국제원자력기구 요원을 추방하고 사용된 핵연료를 재처리하기 시작했다. 2006년 10월에 북한은 핵실험을 했고, 그러자 북한의 핵 보유는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fait accompli’)로 여기는 분위기가 돌았다. 자연히 이란도 자신들도 핵을 보유하면 ‘기정사실’로 인정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란은 북한처럼 공개적으로 핵 실험을 할 필요는 느끼지 않고 다만 충분한 핵 물질을 비축해서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란의 핵 보유는 막을 수 없는 것인가 ? 최근 이란 곳곳에서 이슬람 공화국 자체에 반대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반대운동이 이란 정권을 쉽게 무너트릴 수는 없겠지만 서방은 그러한 반대시위를 폭압적으로 탄압하는 정권을 인정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서방이 지금까지 그들이 취해온 정책이 왜 실패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란의 핵 무장은 또 다른 ‘기정사실’이 되고 말 것이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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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브래들리, 이집트를 파헤친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