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월리드 파레스, 시민혁명이 닥쳐온다(2010년)
2011-06-05 00:02 1,850 이상돈


월리드 파레스, 시민혁명이 닥쳐온다 (2010년, 사이먼 앤드 슈스터, 383쪽, 26달러)

Walid Phares, The Coming Revolution
(2010, Simon & Schuster, 383 pages, $26.00)

월리드 파레스는 레바논에서 태어나서 레바논 대학에서 공부해서 변호사로 잠시 활동한 후 프랑스 리옹 대학에 국제정치를 공부했고, 미국 마이애미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귀화했다. 지금은 국방대학에서 중동학과 테러리즘을 가르치고 있는 파레스는 중동 지역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이슬람 지하드를 경고하는 글을 많이 썼다. 2010년 12월에 이 책이 나온 후에 튜니지아와 이집트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리비아와 예멘 등지에서도 권력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저자는 중동 아랍국가에서도 종국적으로 민주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레바논, 이집트 등 여러 중동국가 내부의 복잡한 문제와 미국과 유럽이 석유 의 포로가 되어 이 지역의 민권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책은 중동 아랍국가에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시민혁명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중동권(大中東圈)과 이슬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토만 제국이 해체되자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대중동권(The Greater Middle East)에선 이슬람 신정(神政)을 세우려는 세력과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하는 현대화를 추구하는 세력 사이에 큰 대립이 생겼다. 자유를 열망했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 지역에선 쿠데타가 발생했고 냉전 체제 속에서 자유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염원은 잊혀져 갔다.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고 남아공화국의 백인우월체제가 무너지는 변화가 있었음에도 중동 지역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9-11 테러와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이 지역에 또 한번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집트,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알제리 등 곳곳에서 구(舊)질서를 타파하려는 운동이 인권운동가, 언론인, 블로거 등을 중심으로 활발해 지고 있다. 저자는 혁명의 기운이 아래에서 끓어 오르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의 주장은 책이 나온 후에 입증됐다.

대중동권은 이집트, 페르시아 등 고대 문명의 요람이다. 서기 632년 예언자 모하마드가 사망하자 그의 추종자들은 모하마드가 세운 종교와 국가를 이끌어갈 후계체제를 모색해야만 했는데, 이런 후계자를 칼리프(Caliph)라고 부른다. 칼리프들은 전쟁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으로 개종시켰고, 불과 100년 만에 방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네번째 계승자 알리에 대한 도전이 생겨서 알리의 추종자들은 시아파가 되었고, 반대파는 순니파가 되었다. 칼리프 왕조는 16세기 초까지 아랍 세계를 지배했다. 1517년 인종적으로 아랍이 아닌 터키가 아랍 지역을 점령하고 이슬람의 지도자 역할을 장악했다. 이렇게 해서 오토만 칼리프-술탄 제국은 대중동권을 장악했고, 그 지배권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계속됐다. 오토만 제국에선 오토만 인종이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아랍, 발칸, 베르버 종족 중 무슬림 으로 개종한 엘리트가 있었으며, 기독교인과 유태인 같은 비(非)이슬람 인종은 하층 지위에 머물렀다.

1919년 오토만 제국은 제1차 대전에 패배했고, 1924년에 터키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케말은 칼리파-술탄 제국을 폐지했다. 그러나 오토만 제국이 사라진 공백에서 생겨난 아라비아 등 여러 곳에서는 칼리프가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서방의 신탁통치가 이루어 졌지만 사우디에는 와하비가, 이집트에선 무슬림 형제단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사실상 칼리프 체제가 부활했다. 권력을 장악한 집단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결합하게 된 것이다. 서방 식민체제가 종말을 고하자 중동권 여러 나라에는 권위주의적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사우디에선 1920년대 초에 와하비가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이슬람 외의 다른 종교를 금지했으며, 시아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떠난 이집트에선 입헌군주제가 들어섰으나 1954년에 가말 나세르가 이끈 쿠데타가 일어나서 군부 독재체제가 시작됐다. 이탈리아와 영국은 리비아에 입헌 군주국을 세우고 철수했으나 1970년에 무아마르 가다피가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시리아에선 1945년에 프랑스가 철수하자 역시 쿠데타가 연거푸 일어났고, 1970년에 강경파인 하페즈 아사드가 정권을 장악했다.

영국이 철수한 이라크에도 1958년 쿠데타가 일어나서 바스당(黨) 일당독재가 들어섰으며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집권을 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철수한 이란에선 왕정이 들어섰고, 1953년에 모사데그 수상의 개혁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전제적 왕정이 계속되다가 1979년 호메이니 혁명으로 근본주의 이슬람 정부가 수립됐다. 1958년에 프랑스 식민통치를 벗어나 독립한 알제리는 국민해방전선이 일당독재를 해 오고 있다. 모로코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다른 아랍권 국가도 대개가 비슷한 형편이었다. 중동권에선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어 본 적이 없고, 압제와 또 다른 압제가 계속되는 악순환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1990년대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어서 동유럽 공산체제가 무너지는 등 동유럽과 구(舊) 소련에도 자유가 찾아왔지만 중동에는 자유와 민주의 봄이 오지 못했다. 중동의 집권자들이 그러한 조짐이 자신들의 체제 내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가혹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서방은 동유럽의 자유와 인권에 관심을 가졌지만 중동에 대해선 관심이 거의 주지 않았다. 

실제로 이라크, 수단 등의 압제적 집권자들은 동유럽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차우세스크 등 구 공산체제 지도자들이 처형되는 모습에 경악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도전을 사전적으로 예방하려고 했다,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의 군대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하페즈 아사드의 군대가 동부 베이루트를 점령한 것도 자유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아랍의 독재자들은 자국내 소수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동유럽의 자유화 물결에 잠시 고무되었던 이라크의 쿠르드족, 수단의 남부 흑인 부족, 알제리의 베르버족이 희생을 당했다. 이집트의 콥틱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탄압을 당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서방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동유럽, 중남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권탄압을 크게 보도했던 가디언 등 서방의 진보 언론은 중동의 지유화 운동에는 침묵했다. CNN의 중동문제 특파원 크리스티안 아만푸르는 쿠르드 같은 중동 국가의 소수인종을 거의 인터뷰하지 않았다. 중동 국가에서의 인권침해에 침묵하기는 학계도 마찬가지다. 중동의 소수인종의 인권을 다룬 논문은 학술지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고, 학술대회도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중동관련 학계는 중동의 산유국가들이 제공하는 돈에 의해 좌우되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중동 문제를 다루는 학계가 돈을 받고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는 셈이다.

서방 정치지도자들도 중동의 인권 문제에 침묵했다. 이들은 중동 국가들의 인권 문제는 해당국가의 국내문제로 보았는데, 특히 이들은 자신들이 섣불리 이런 문제를 거론하면 새로운 식민주의라는 비난을 들을 것을 우려했다. 서방국가들의 이런 태도의 배후에 석유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서 전쟁을 불사했던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시리아의 레바논 침공에 대해선 침묵했는데, 쿠웨이트와 달리 레바논은 석유가 나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개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우디에서의 여성 인권 탄압 등에 대해 서방이 침묵하는 것도 석유가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중동에선 자유주의자들이 설 땅이 없는 것이다.

9-11 사태와 새로운 도전

9-11 테러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중동의 자유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합의가 어렵게 이루어 진 것이다. 사우디의 와하비 세력과 파키스탄의 근본주의자들은 탈레반과 알케이다를 향한 미국의 전쟁을 고통스럽게 받아드리는 수 밖에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이 초기에 순조롭게 진행되자 조지 W. 부시는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및 헤즈볼라가 테러집단임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이라크, 이란 및 북한을 ‘악(惡)의 축’으로 지목했다.

이라크를 침공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중동의 ‘민주화’를 외교정책으로 천명했다. 중동에서 ‘민주화’란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중동의 압제자들은 미국의 새로운 정책을 숨죽이고 지켜 보았다. 미국 내에선 윌리엄 크리스톨, 존 볼튼 같은 네오콘 이론가들과 뉴트 킹리치 같은 공화당 정치인이 부시의 이 같은 정책을 지지했다.

이라크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미국의 진보세력은 부시의 고상한 이상을 무시해 버렸고, 중동의 석유 로비는 진보세력을 두둔했다. 중동 산유국의 연구비에 길들여진 미국의 중동 학계도 부시의 이런 정책을 비현실적이라고 보았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의회의 지배를 상실했고, 중동의 자유화를 주장했던 존 볼튼 유엔 주재 대사는 사임했다. 중동의 압제자들은 이런 변화에 안도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1999년, 플로리다의 한 주립대학을 강연차 방문한 하버드의 저명한 여교수는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보다 행복하다”고 말해서 학생들의 빈축을 샀다. 미국 등 서방의 엘리트들은 중동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에 이처럼 무관심하다. 2001년 3월, 탈레반이 바미안의 거대한 불상을 파괴하자 비로서 국제사회는 탈레반에 관심을 갖게 됐다. 9-11 테러가 발생하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지만 토라 보라에서 알케이다와 탈레반의 지도부는 파키스탄 서북부로 피난하는데 성공했다.

탈레반이 민주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탄압하는 체제임은 분명하다. 미국은 군사력으로 탈레반 체제를 무너트렸지만 탈레반의 영향력은 아프가니스탄 전역과 파키스탄 국경지역에서 아직도 건재하다. 2009년 12월,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은 알케이다와는 싸우지만 탈레반과는 대화를 하겠다”고 밝혔다. 자유를 향한 미국의 노력이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라크

1982년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라크에 이슬람 혁명을 비밀정당의 결성을 지시했는데, 그 정당의 군사 조직이 바드르 여단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망명객 찰라비의 정보를 믿고 이라크에 침공해서 후세인 정부를 붕괴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찰라비는 이란과 관련이 깊은 인물임이 밝혀졌고, 미군은 순니파 반군 뿐 아니라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민병대와 끝없는 전투를 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민주주의 운동이 싹을 피웠지만 그 앞날은 불분명하다.

레바논

2005년 2월, 레바논의 전 총리 하리리가 암살되자 수천 명 군중이 레바논을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거리로 나왔다, 얼마 후 군중은 수만 명을 넘더니 수십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것이 ‘삼나무 혁명’(The Cedar Revolution : 옆으로 자라는 삼나무는 레바논의 상징이다.)이다.

오토만 제국이 패망한 후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에 진주한 프랑스 덕분에 레바논은 다원적이고 자유적인 사회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에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을 침공한 후 압제가 시작됐다. 2005년 혁명은 30년 만에 자유를 도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나 시리아와 이란이 조종하는 세력은 민주화 지도자들을 암살했고, 2008년에는 이란과 시리아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헤즈볼라가 레바논을 장악했다. 레바논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실패한 것이다.

시리아

시리아는 원래 기독교가 번창했으나 서기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무력으로 장악한 후 이슬람권에 속하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는 레바논과 함께 프랑스의 통치를 받게 됐는데, 프랑스가 떠난 후에는 순니파 범(汎)아랍주의자들이 정부를 장악했다. 1970년, 하페즈 아사드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해서 20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지배했고, 그 후로는 아들이 통치하고 있다.

시리아에는 기독교인, 쿠르드족, 그리고 자유를 원하는 소수 순니파가 아사드의 압제에 반대했다. 하페즈 아사드의 죽음은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페즈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을 이끌었던 아마르 압델하미드는 망명했고, 또 다른 반정부 지도자 마이클 킬로는 투옥됐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사드 2세 정권과 대화를 갖기로 했는데, 이는 시리아 내의 민주주의 운동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이란

2005년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란 대학생들은 투표거부 운동을 전개했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아마디네자드는 대학생 단체를 탄압했다. 2009년 6월에는 테헤란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나 또 다시 진압되고 말았는데, 이 시위를 ‘녹색 혁명’이라고 부른다. 2009년에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한 오바마는 “미국이 아랍권과 이슬람 세계를 존경할 것”이라고 천명한 것도 이란의 반정부 세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이집트에서 가장 박해 받는 집단은 콥틱 기독교도 1,400만 명이다. 원래 ‘이집트’는 ‘콥틱의 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집트 알렉잔드리아에 자리잡고 살던 이들은 마르코 사도에 의해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기독교 문명을 이루고 살았으나 7세기에 이슬람 군대에 의해 정복되어 탄압을 받고 살게 됐다. 콥틱 기독교도는 이집트가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를 받았을 시절에만 자유를 허용 받았다.

1954년에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콥틱 정당은 해산되었고, 콥틱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숨어야만 했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을 거쳐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어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됐는데, 콥틱 기독교들은 평화협정을 지지했다. 반면, 무슬림 형제단 등 극단적 이슬람 세력은 평화조약을 체결한 사다트 대통령에 반대했다. 1981년 6월, 카이로의 콥틱 교도 집단거주지가 무슬림의 공격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사다트는 공격을 한 무슬림 형제단 뿐 아니라 콥틱 기독교인들도 비난을 했다. 1981년 10월, 사다트는 근본주의 무슬림 집단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1990년대 들어서 콥틱 교회 사제와 그 신도와 주민들이 공격을 받고 사망하고, 또한 콥틱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집트 당국은 가해자를 처벌하기 보다는 오히려 콥틱 주민들을 격리하고 콥틱 교회를 철거하는 등 오히려 콥틱 교회를 박해했다.

사우디 아라비아

사우디 아라비아는 왕가 일족과 와하비 근본주의 세력과의 결탁과 세력균형으로 유지되고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 사우디 동부 지역에 자리잡은 시아파 주민들과 강경파 와하비 지도자들과 대립이 심각해 지고 있다. 사우디 지배층은 시아파 주민들의 배후에 이란이 있다고 보고 있다. 사우디에서도 여성 인권과 시민적 자유를 주장하는 진보운동이 일고 있지만 미국내의 막강한 와하비 로비세력 때문에 사우디의 민주주의 문제는 미국 의회와 여론의 주목을 사지 못하고 있다. 

예멘

1994년에 통일되지 전에 남예멘은 공산정권이, 그리고 북예멘은 부족 엘리트가 지배해 왔다. 통일 후에 예멘은 알리 압달라 살레 대통령이 계속 집권해 오고 있다. 2008년에는 남부 예멘에서 지방자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오늘날 예멘에는 보다 많은 자유를 원하는 근로자, 지식인, 그리고 세속적인 민주주의 신봉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c) 이상돈


토머스 소웰, 지식인과 사회 (2009년) 
도어 골드, 핵 국가 이란의 등장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