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토니 블레어, 여정 (A Journey) (2010년)
2011-09-30 21:02 2,908 이상돈


토니 블레어, 여정(旅程) (2010년, 알프레드 노프, 702쪽, 35달러)

Tony Blair, A Journey (2010, Alfred A. Knopf, 702 pages, $35.00)

1997년 5월부터 2007년 6월까지 영국 총리와 노동당 대표를 지낸 토니 블레어(1953년생)가 펴낸 이 책은 그가 정계 입문에서 총리가 된 후의 정치 역정(歷程)을 담고 있다. 1953년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태어난 블레어는 어릴 때 부친을 따라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살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더햄에서 성장했다. 에딘버러에서 명문 사립고등학교를 나온 후 옥스포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블레어는 록 음악을 좋아해서 직접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옥스포드에서 블레어는 호주 출신의 성공회 신부 피터 톰슨을 만나서 큰 영향을 받고 사회주의와 신앙에 탐익하게 됐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자신의 출신 계층과는 거리가 먼 노동당에 입당했다. 블레어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피터 톰슨이라고 했다. 링컨 법조학원에서 진학해서 배리스터(법정 변호사)가 된 블레어는 1980년에 세리와 결혼했다.

정치에 뜻을 둔 블레어는 첫 번 째 선거에선 패배했지만 1983년에 새로 생긴 세지필드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1983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 크게 패배했기 때문에 그의 당선은 돋보였다. 세지필드 지역구는 그 후 블레어를 계속 당선시켜서 총리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하원의원으로 두각을 나타낸 블레어는 1994년 5월에 존 스미스 노동당 대표가 갑자기 사망하자 노동당 대표로 선출됐다.  1997년 총선을 승리로 이끈 그는 44세 나이로 총리가 되어 2007년 6월까지 10년 동안  재직하면서 영국과 세계를 이끌었다. 

이 책에서 블레어는 총리로서 자신이 결정했던 많은 정책에 대해 쓰고 있는데,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게 된 데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 블레어는 자기가 미국을 좋아하게 된 경위와 클린턴 대통령 및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쓰고 있다. 블레어는 1985년에 야당 의원으로 미국과 2중 과세 문제를 협의하러 보수당 의원들과 함께 워싱턴에 가서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을 만난 것이 자신의 첫째 미국 방문이었고, 1986년에 미국 정부 초청으로 한 달간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을 보다 잘 알게 됐다고 한다. 블레어는 클린턴이 쉽게 친해지는 스타일이지만 대단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조지 W. 부시는 직설적으로 솔직하며 뛰어난 직관을 갖고 있지만 그의 직관은 정치적인 데 보다는 선과 악에 관한 생각을 할 때 더욱 탁월하다고 지적한다. 

1997년 5월 1일 총선에서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은 보수당을 크게 눌러서 18년 만에 다시 집권당이 됐다. 블레어는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노동당을 다시 일으켜서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블레어는 노동당이 노조와 지나치게 유착되어 왔는데, 거대 노조는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현대세계와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노동당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노동당이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 패배한 원인이 그들이 지나치게 왼쪽으로 갔기 때문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노동당의 좌경화가 심화되자 1981년엔 온건파들이 공개선언을 하고 탈당해서 사회민주당을 만들어서 노동당의 기반을 더욱더 잠식했다. 블레어는 노동당의 문제가 대중과 문화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3년 2월, 결손 가정 출신인 두 명의 열 살 난 아이들이 두 살 난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서 영국에 충격을 주었다. 이 때 블레어는 유명한 연설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블레어는 “전통적인 사회주의는 개인과 권리 의무를 ‘공공선’이라는 이상 속에 담으려 하지만 정부를 ‘공공선’으로 보아서 실패했고, 작금의 우파는 공동체가 없어야 자유가 생기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지적해서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새 노동당’

노동당 대표가 되었을 때 블레어는 당시 노동당은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부 잉글랜드, 그리고 대도시 도심 빈민가에서만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보수당의 오랜 집권에 염증이 난 중산층은 노동당을 지지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레어는 노동당원이 아니면서도 보수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노동당은 빈곤자와 노조를 위한 정당이고 법 집행에 대해선 진보적이며 국방 문제에선 평화주의적이라고 생각해서 지지를 보류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1995-96년 사이에 노동당은 세금과 일자리 창출을 두고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고든 브라운은 증세를 주장했지만 블레어는 증세에 반대했다.

블레어는 노동당의 모든 정책은 세금과 기업, 그리고 복지에 관한 포괄적 계획에 의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블레어는 새로운 노동당 정부는 과거와는 달라야 하며, 보수당 정권처럼 장기간 집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블레어는 노동당이 집권하기 위해선 사기업을 국유화하고 세금을 중과하는 종전과 같은 노동당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블레어는 노동당 정부도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 엄격하고, 공공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늘리며, 복지에 있어 기회와 책임을 강조하고, 기업과 노조에 대해 동등하게 대하고, 유럽과 미국에 대해 친화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블레어는 기회만 있으면 이런 점을 강조해서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1995년에는 노동당이 국내 사회질서와 안보, 국제주의와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더타임스에 기고했다. 이런 변화가 노동당을 집권으로 이끌었다고 블레어는 말한다.

총선이 다가오자 블레어는 보수당이 새로운 젊은 지도자를 내세워서 도전해 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보수당은 당내 화합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존 레드우드를 차기 당대표로 선출했다. 블레어는 본능적으로 보수당이 잘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1996년이 되자 블레어는 노동당은 교육을 강조하는 정당임을 강조하고 ‘새 노동당, 새 영국’이란 정책 가이드를 내놓았다. 노동당을 이렇게 변화시키자 블레어를 찾는 언론이 급증해서 블레어는 자기가 별안간 영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됐다고 회고했다.

북아일랜드 문제

1997년 총선을 앞두고 블레어는 북아일랜드에 평화를 가져오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조지 미첼 미 상원의원이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을 중재하고 있었는데, 총리에 취임한 첫해 가을에 블레어는 북아일랜드 신파인(Sinn Fein)당의 게리 애담스와 마틴 맥귀네스를 만나서 악수를 했다. 총리가 북아일랜드 정파 대표와 공개적으로 악수를 한 것은 자체가 파격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아일랜드 공화군(IRA)은 벨파스트에서 공격을 가해서 두 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평화협상에 반대하는 강경파는 폭탄 테러를 계속했다. 블레어는 북아일랜드의 강경파를 달래기 위해 1972년에 영국군이 항의시위를 하던 군중을 향해 발포해서 사망자를 낸 ‘피의 일요일’ 사건의 진상을 재조사하도록 했다. 평화협상에 반대하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이어졌지만 ‘벨파스트 협정’이라고 불리는 평화안은 1998년에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그 후에도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아일랜드 공화군의 테러는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는데, 2005년 1월에 일어난 로버트 매카트리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론은 강경파에 불리하게 돌아가게 됐다. 블레어는 이런 과정에서 협상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코소보 사태

블레어는 코소보 사태가 대외정책을 대하는 자신의 자세를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코소보 사태를 보고서 블레어는 국제사회가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으며, 그래서 군사적 해결을 지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코소보 사태에 대해 블레어는 한편으로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쉬레더 독일 총리 등 유럽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또 한편으론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의논했지만 미국 없이는 아무런 군사적 조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럽은 무력했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블레어는 클린턴이 분명한 정치철학과 계획을 갖고 있는 머리가 좋은 정치가라고 높이 평가한다. 블레어는 자신과 클린턴이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제3의 길’ 철학을 갖고 있어서 통하는 데가 많았다고 말한다. 블레어는 자신과 클린턴이 나토를 통한 공습작전을 밀고 나갔고, 그 작전이 주효해서 결국 세르비아 군대는 코소보에서 철수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2001년 총선

2000년에 블레어 정부는 여우 사냥(fox hunting) 문제에 봉착했다. 블레어가 여우 사냥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자 이에 대한 심각한 반대가 일었다. 블레어는 여우 사냥이 영국의 전원지역 문화에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잘 모르고 단지 동물보호차원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 거센 비판에 봉착한 것이다. 여우 사냥 문제로 홍역을 치른 블레어 정부는 구제역 사태를 맞게 됐다. 백신을 투여한 동물도 결국에는 살처분해야 하는 것이 유럽연합의 지침이었기 때문에 블레어 정부는 동물을 살처분해서 소각하기로 했다. 구제역에 걸린 돼지와 소를 태우는 모습은 뉴스를 타고 세계로 전파되었고 영국의 농촌 지역은 의기가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은 2001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노동당은 연단에서 연설하기 보다는 학교 등을 찾아 가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블레어는 천편일률적인 교육 시스템은 실패하게 되어 있으며, 당시 미국에서도 차터 스쿨이 시작되었다면서 교육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보수당 정부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투자가 인색해서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보았다. 노동당은 정책 메니페스토를 내 걸고 2001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9-11 테러

9-11 테러는 조지 W. 부시 뿐 아니라 토니 블레어의 운명도 바꾸어 놓았다. 블레어는 부시를 임기 초인 2001년 2월에 캠프 데이비드에서 처음 만났는데, 당시 부시의 관심사는 교육과 복지, 그리고 방만한 정부기구 축소였다고 회고한다. 9-11 테러 소식을 듣고 블레어는 로커비 항공기 테러와 미 구축함 콜호(號) 폭발테러를 연관해서 생각했다. 블레어는 이 같은 테러가 미국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기에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과격 이슬람의 위험성을 그때까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테러 직후 블레어는 푸틴, 쉬레더, 시라크, 베를루스코니와 전화를 했고, 다음 날에 부시와도 통화를 했는데, 그러면서 부시와 확고한 동맹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9월 20일에 뉴욕을 방문한 그는 영국인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루디 줄리아니 뉴욕시장을 만났다. 블레어는 모스코바를 방문해서 푸틴을 만나 미국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을 요청했고, 10월 5일에는 영국군 군용기 편으로 파키스탄을 방문해서 무사라프 대통령을 만났다. 2001년 10월 7일, 미국, 영국 등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영국 해군 함정과 공군기는 미사일 공격과 공습에 참가했고, 영국 해병대 특공대는 바그람 공항을 장악하는 등 영국군은 미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블레어는 이러한 군사적 조치 덕분에 또 다른 9-11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라크 전쟁

부시 대통령을 도와서 영국군을 이라크 전쟁에 대거 파병한 블레어는 총리를 그만 둔 후에도 “후회가 없는냐?”는 질문에 시달렸다. 블레어는 자신이 한 결정에 책임을 지지만, 이런 태도는 답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블레어는 당시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발견하지 못했고, 2003년 5월에 전쟁을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지도 못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 블레어는 사담 후세인이 유엔의 무기사찰을 집유하게 방해했고, 석유를 판 돈으로 식량과 의약품을 수입하는 대신 무기를 구매하는 등 서방의 제재를 무력화시켰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동지역은 전체가 연계되어 있으며 이라크 상황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은 없다면서 후세인을 제거한 전쟁은 정당했다고 강변한다.

블레어는 의회를 설득해서 이라크 참전에 동의하도록 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의회에서 히틀러의 위협에 굴복해서 평화를 구걸했다가 2차 대전을 초래한 역사를 거론한 것은 지나친 비유였다고 후회했다. 블레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서방이 상대하고 있는 적들은 서방이 감당할 수 있는 전쟁은 짧고 성공적인 전쟁 뿐이라는 약점을 알아차렸다고 우려한다. 영국이 미국과 보조를 같이 함으로써 세계에서의 영국의 지위가 떨어졌다는 주장에 대해 블레어는 이 보다 더한 넌센스가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도 블레어는 이라크에서의 유혈사태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은 알지 못했고, 이 때문에 도무지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더 나와야 하는가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좌절했다고 고백한다.

내정 개혁

블레어는 자신의 총리 재직 중 국가보건서비스, 대학 등록금 등 몇 가지 내정을 개혁하고자 했는데, 그 중 대학 등록금 문제가 정치적으로 가장 힘들었다고 되돌아 본다.  블레어는 세계 50개 명문 대학 중 유럽대륙의 대학은 거의 없고 영국 대학도 불과 몇 개 밖에 안 되는 상황을 보면서 영국 대학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계 50개 명문 대학의 특징은 한결같이 재정규모가 크며 비싼 등록금을 받고 기부금을 유치하는 것이 공통적이라면서, 영국의 상위 20개 대학도 그런 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상위권 20개 대학총장들은 블레어를 찾아 와서 정부가 대학에 대한 지원을 늘여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블레어 정부는 매년 1,150 파운드를 등록금으로 내는 기존 시스템을 폐기하고 대학 재량으로 매년 3,000 파운드까지 등록금을 부과하되 졸업 후에 졸업생의 수입에 따라 내도록 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재무부는 이런 제안이 문제가 많다면서 대학 졸업생에게 수입에 따라 졸업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내어 놓았다. 하지만 블레어는 재무부의 대안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학생에게 주는 것과 학생이 대학에 내는 것 사이의 연계가 단절될 뿐 만 아니라 세금체제를 크게 흔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노동당 내에서도 이를 두고 많은 이견이 나왔고, 보수당과의 의견조율도 불가능하더니 등록금 개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2005년 총선

2005년 총선을 앞두고 블레어는 이번이 총리로서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고든 브라운과도 자기 이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블레어는 2004년 미국 선거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블레어는 민주당 후보 존 케리를 좋아했지만 조지 W. 부시의 낙선은 곧 자기에 대한 심판을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고, 2005년 5월 총선에서 블레어는 승리해서 3선 총리가 되었다. 선거 도중 보수당은 이민 문제를 부각시켰고, 언론은 이라크 전쟁 개입을 문제 삼았다.

2005년 총선 결과 노동당은 355석을 얻어서 1당을 유지했지만 전체 득표율은 35.2%로 전보다 5.5%가 줄었고 의석은 47석이 줄었다. 보수당은 전체 득표율 32.4%로 198석을 얻어서 33석을 추가하는데 성공했다. 자유민주당은 득표율에서 3.7%가 증가했고 11석을 추가해서 62석을 차지했다. 블레어는 노동당이 잃어버린 표의 대부분이 자유민주당으로 간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블레어는 많은 영국인들은 이라크 전쟁에 불만을 갖고 있지만 당시 영국군은 바스라에서 힘든 전투를 하고 있어서 선거에서 전쟁에 대한 반대를 표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퇴

2005년 총선에서 승리해서 3선 총리가 된 블레어는 그 해 7월에 싱가포르에 가서 2012년 올림픽 게임을 런던으로 유치하는 데 성공하고, 글라스고우에서 열린 G8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상황은 블레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영국내 언론은 블레어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머도크가 소유한 보수 언론과 가디언 같은 진보언론이 모두 블레어에게 적대적이었다. 2005년에 동성혼인법(The Civil Partnership Act of 2004)이 효력을 발휘했는데, 보수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이 법에 대해 블레어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증진시킨 자랑스러운 업적이라고 했다. 2006년에는 개각을 했는데 외무장관에서 경질된 잭 스트로우가 불만을 피력했다. 노동당 대표의 후임은 이미 고든 브라운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블레어는 브라운이 ‘새 노동당’이란 가치에 충실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보수당에 패배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블레어는 브라운이 유능하고 정력적이지만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총리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블레어는 자신의 임기 중에 상원을 개혁하고, 법관을 독립적인 인사위원회가 지명하도록 했으며, 스코틀란드 의회를 새로 만들어서 노동당이 다수당을 차지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고 되돌아 보았다. 그러면서 블레어는 영국의 노조가 아직도 교조적인 투쟁노선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블레어는 자기가 총리로 있었던 10년 동안 영국은 계속 성장했다면서, 2007년에 그만 둘 당시의 자기가 1997년에 총리가 되었을 당시의 자기 보다 총리를 더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끝으로 블레어는 유럽연합이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재정적자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가 무거운 짐을 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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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헤지스, 진보계층은 죽었다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