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리 에드워즈, 윌리엄 버클리 2세 (2010)
2013-01-27 17:34 5,228 이상돈


리 에드워즈, 윌리엄 F. 버클리 2세 (ISI 북스, 2010, 223 쪽)

Lee Edwards, William F. Buckley Jr. (ISI Books, 2010, 223 pages, $24.95)

지난 2008년 2월 27일에 82세로 타계한 윌리엄 버클리 2세는 보수 평론가이자 저술가이다. 그는 단순한 문필가가 아니라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지를 창간해서 보수주의를 일으킨 운동가이기도 하다. 버클리와 그의 가족과 친지를 가까이 지켜 본  리 에드워즈가 펴낸 이 책은 윌리엄 버클리의 인간과 생각, 그리고 그가 미국 정치에 미친 심대한 영향을 알게 해 준다.

윌리엄 버클리 2세는 1925년 11월 24일 뉴욕 시에서 윌리엄 버클리 1세와 알로이지 여사 사이의 10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텍사스 출신으로 아일랜드계(系)이고, 모친은 뉴올린스의 부유한 기업가의 딸이었다. 부친과 모친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부친은 멕시코와 베네주엘라에서 석유 사업을 벌였고, 사업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가족과 함께 파리와 런던에서 몇 년간 머물렀다. 어린 시절을 프랑스와 영국에서 보낸 버클리는 독특한 액센트를 갖게 되었다. 어릴 때 남미와 프랑스에서 자란 버클리는 스페인어를 처음 배웠고, 학교에 들어가선 프랑스어로 공부했다. 그가 일곱 살이 되던 1933년에 버클리 가족은 코네티컷 주 샤론에 자리잡았다. 버클리에게 부친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싫어한 시장자유주의자인 부친은 급진적 자유주의자인 앨버트 제이 녹(Albert Jay Nock)을 자신의 저택인 그레이트 엘름(Great Elm)에 자주 초대했고, 버클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영향을 받았다.

예일대학에 입학한 버클리는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학내에서 가장 토론을 잘하는 학생으로 뽑혔고 비밀서클 해골단(Skull and Bones) 회원이 됐다. 학내 신문인 예일 데일리 뉴스의 편집장이 된 버클리는 기자들은 뉴욕과 워싱턴에 파견해서 기사를 쓰도록 하고 학내 문제와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사설을 실었다. 버클리는 나치에 협력한 사람은 비난하면서도 소비에트 공산체제에 찬동하는 사람에 대해선 침묵하는 지식인들의 위선을 비판했는데, 그런 생각은 그의 첫 책 ‘예일에서의 신(神)과 인간’(God and Man at Yale)에 정리되어 있다. 버클리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사람은 윌무어 켄달(Willmoore Kendall)이다.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다가 스페인 내란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학살을 목격한 후에 반공주의자가 된 켄달은 버클리 가족과 가깝게 지냈다.

버클리는 누이동생을 통해 알게 된 패트리셔 테일러와 1950년에 캐나다 뱅쿠버에서 결혼했고, 예일대 부근 작은 도시 햄든에 정착했다. 1951년에 펴낸 ‘예일에서의 신과 인간’은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부친이 책 광고비용을 부담했다. 그 해에 버클리는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의 소개로 중앙정보국(CIA)에 채용되어 훈련을 받은 후 멕시코 시티로 파견되었다. 첩보원 생활이 의외로 단조로운데다가 자식이 태어나서 버클리는 중앙정보국을 사임하고 코네티컷으로 돌아왔다. 잠시 <머큐리>(Mercury)지에서 일했지만 자신의 글이 편집장에 의해 거절되자 사임하고 다시 코네티컷으로 돌아왔다. 1954년에 매부(妹夫)인 브렌트 보젤(Brent Bozell)과 함께 ‘매카시와 그 적들’(McCarthy and His Enemies)을 펴냈는데, 매카시 상원의원이 제기한 미국 내 공산주의 문제가 사실이지만 그가 제기한 방식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1954년은 미국의 우파에게 큰 위기였다. 공화당 우파를 대변하던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은 암으로 죽었고 매카시는 상원에서 견책을 받았으며, 민주당은 다시 의회를 장악했다. 버클리는 자신이 보수 평론지를 창간해서 진보적 시대정신에 도전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버클리는 55만 달러를 모금하고자 했으나 29만 달러를 모금하는데 그쳤지만 부친이 10만 달러를 주어서 잡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버클리는 미시건 주 메코스타 농장에 은거하면서 전통주의 보수철학을 전파하고 있던 러셀 커크(Russell Kirk)를 만나서 새로 나올 평론지에 기고를 해주기를 부탁했다. ‘보수적 마인드’(The Conservative Mind)란 무게 있는 저서를 펴낸 커크는 그 후 버클리와 깊은 친분을 유지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1955년 11월 19일에 <내셔널 리뷰> 창간호가 햇빛을 보았다. 편집장 버클리는 새 평론지가 공산주의와 싸울 것이며 비대해가는 정부를 자유주의적(libertarian) 입장에서 견제할 것임을 천명했다.

<내셔널 리뷰> 창간

<내셔널 리뷰> 창간호는 7,500권을 냈으나 첫 3년 동안에는 매호 20,000권, 그리고 1960년에는 매호 30,000권을 찍었다. <내셔널 리뷰>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내셔널 리뷰>에 대한 최대의 후원자는 다름아닌 버클리였다. 버클리는 자신이 신문 기고, TV 프로 <사선(射線)>(Firing Line) 출연, 강연 등으로 벌어들인 돈을 기부했다. 대신에 <내셔널 리뷰>는 버클리에게 약간의 봉급과 비서 그리고 연구보조인을 제공했다.

명성을 얻은 버클리는 많은 대학에서 강연초청을 받았는데, 유모 넘치는 강연으로 인기를 얻었다. 1960년 9월, 코네티컷 샤론에 위치한 그레이트 엘름 저택에 버클리를 추종하는 보수 대학생 대표 100여명이 모여서 ‘샤론 강령’을 채택했으며, 이를 계기로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Young Americans for Freedom)이 결성되었다.

1961년에는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 ‘보수주의자의 신념’(The Conscience of a Conservative)을 출간했다. 버클리의 매부인 브렌트 보젤(Brent Bozell)이 사실상 대필한 이 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64년에 골드워터가 공화당 후보가 되는데 기여했다. 보수주의를 주창했던 버클리였지만 남부에서 인종차별을 주창하는 존 버치 협회(John Birch Society) 같은 단체가 보수를 표방하는 현상을 묵과할 수 없었다. 버클리는 이 협회를 움직이는 부유한 기업가 잭 웰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등 이단적이라고 생각했다. 버클리는 잭 웰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망치고 있다면서 신랄할 비판을 가했다. 버클리는 러셀 커크와 같은 전통주의자, 그리고 하이에크와 같은 자유주의자를 엮는 것이 진정한 보수운동이며, 인종주의와 무리한 반공주의는 오히려 보수주의를 저해한다고 보았다.

1964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버클리와 <내셔널 리뷰>는 골드워터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고 또 본선에서 승리하도록 공개적으로 운동을 했다. 러셀 커크는 골드워터의 연설문을 기초했고, 밀튼 프리드먼 교수도 경제정책 공약을 입안했다. 골드워터는 공화당 후보 지명전에선 승리했지만 본선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참패했다. 1964년 선거를 계기로 로널드 레이건이 부상하게 됐고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했다. 한편 버클리는 공화당 진보파의 유망주인 존 린지 하원의원이 뉴욕시장에 출마하려는 움직임을 보고 이를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공화당 진보파들은 린지를 뉴욕시장에 당선시키고 그 다음에 뉴욕 주지사를 만들고, 종국적으로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했다.

1965년 뉴욕시장 선거에 버클리는 뉴욕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물론 당선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공화당이 존 린지에 의해 끌려가는 사태를 막아보고자 했다. 버클리는 유효투표의 13.4%를 얻는데 그쳤고 린지는 민주당 후보를 근소하게 누르고 당선됐다. 비록 버클리는 패배했지만 이 영향으로 1970년 선거에서 버클리의 형 제임스 버클리가 보수당 후보로 뉴욕 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뉴욕 주 유권자들이 보수성향으로 기움에 따라서 로널드 레이건은 1980년 선거와 1984년 선거에서 뉴욕 주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73년에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버클리는 레이건에게 닉슨을 더 이상 지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레이건은 마지막 순간에 닉슨에게 사임을 촉구했다. 닉슨이 사임한 후에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취임했는데, 포드는 진보파 공화당원인 넬슨 록펠러 뉴욕지사를 부통령에 지명했다. 공화당 보수파들은 포드가 골드워터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기를 기대했으나 1964년 선거에서 골드워터를 지지하지 않는 록펠러를 부통령에 지명하자 분개했다.

       
로널드 레이건과의 우정

레이건과 버클리는 출신은 달랐지만 키가 크고 잘 생긴데다 연설을 잘 하고 유머가 풍부한 점에서 많이 닮았다. 1966년에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자 <내셔널 리뷰>는 레이건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1970년 대 초에 버클리는 이미 레이건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75년 레이건은 보수정치행동회의(The 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에서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는 모든 이슈에 대해 분명한 색깔을 내는 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버클리는 레이건에게 197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도록 촉구했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만나기를 거절해서 파문이 일자 레이건은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치열한 경선 끝에 레이건은 포드에게 근소한 차이로 경선에서 패배했다. 대통령 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포드는 “폴란드 국민들은 자신들이 소련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본다”고 말했다. 버클리는 이를 두고 “폴란드 조크의 종결판”이라고 말했다. 결국 포드는 민주당의 카터에게 패배했다. 버클리는 “대부분 미국인들은 포드의 조크를 믿지 않고 카터를 당선시켰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당선된 카터 대통령은 무능했다. 1979년 들어서 인플레이션이 13%를 넘었고, 실업률은 8%나 되었다. 카터 행정부는 미국을 스태그플레이션에 빠뜨린 것이다. 

1978년 초, 버클리는 로널드 레이건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1979년 5월, 영국 유권자들은 보수당을 지지했고 마가렛 대처가 총리가 됐다. 보수가 승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9년 11월, 레이건은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공화당 후보 지명전에서 쉽게 승리한 레이건은 본선에서 카터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1984년 선거에서 레이건은 다시 한번 압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 보수 시대가 열렸으니, 버클리는 보수 시대를 연 운동가였다.

은퇴를 준비하다

1990년 11월, 버클리는 자신의 65세 생일을 맞아 <내셔널 리뷰> 편집장에서 물러날 것으로 발표하고 후임으로 존 오설리번(John O’Sullivan)을 지명했다. 자신이 해 오던 TV 프로 <사선> 출연과 신디케이트 칼럼 기고도 회수를 줄였다. 독일이 통일된 데 이어 1991년에 소련이 붕괴했다. 버클리에게는 꿈이 이루어 진 순간이었다. 같은 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자유훈장을 버클리에게 수여했다.

1994년 4월 러셀 커크가 사망했고, 버클리는 그를 추모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 에 버클리는 프랑스 루드의 가톨릭 성지를 방문했다. 버클리는 자신이 특별한 기적을 찾아 갔던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1998년 존 오설리번이 편집장에서 물러나고 젊은 정치담당 기자 리치 로우리(Rich Rowry)가 편집장이 되었다. 1998년 6월 배리 골드워터가 87세로 사망했다. 1999년 12월, 버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맡아 해 온 <사선> 프로를 종료시켰고, 더 이상 강연을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2004년 6월, 버클리는 자신이 갖고 있던 <내셔널 리뷰>의 지분을 아들 크리스토퍼 등 지인에게 넘겼다. 같은 달 알즈하이머로 투병해 온 로널드 레이건이 사망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버클리와 ‘내셔널 리뷰’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했다. 하지만 버클리는 리치 로리 등 편집진과는 달리 이라크에 대한 국가 재건(nation-building)을 추구하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버클리는 국가 재건이란 개념이 윌슨주의(Wilsonian)라고 생각했다. 이라크 전쟁이 지연되고 미군 사상자가 늘어나자 미국의 보수는 분열을 했다. 고전적 보수주의자(paleoconservatives)들은 이라크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고 본데 비해, 네오콘(neocon)들은 이들을 ‘비애국적’이라고 비난했다. 버클리는 미국 보수의 분열에 실망을 표시했다. 그는 공산체제가 몰락함에 따라 구심점을 잃어 버린 미국 보수주의의 앞날을 우려했다. 버클리는 부시 정권이 추구했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국가 재건 정책이 ‘유토피아’적이라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2007년 여름, 버클리의 아내 패트리셔가 사망했다. 그 해 12월, 버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담배를 많이 펴서 폐 기종을 앓고 있다고 썼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아는 버클리는 마지막 칼럼에서 골드워터와 레이건에 관한 회고록을 펴낼 것임을 밝혔다. 2007년 8월까지 버클리는 골드워터와 1960년대 보수운동을 돌아보는 ‘높이 날다’(Flying High) 원고를 끝마쳤다. 2007년 말부터 2008년 1월 동안에는 레이건에 대한 회고록인 ‘내가 알았던 레이건’(The Reagan I Knew) 원고를 끝냈다. ‘높이 날다’는 솔직하고 용기가 있었던 원칙론자인 한 정치인에 대해 보내는 마지막 찬사였다. ‘내가 알았던  레이건’은 레이건과 그의 가족과 자신에 얽힌 인연과 추억을 담고 있다. 2008년 2월 27일, 버클리는 자신이 평생 글을 썼던 서재의 책상 위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피터 콜리어, 정치적 여인 (2012년) 
패트릭 뷰캐넌, 초강대국의 자살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