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피터 콜리어, 정치적 여인 (2012년)
2013-02-13 21:55 1,784 이상돈


Peter Collier, Political Woman – The Big Little Life of Jeane Kirkpatrick
                (Encounter Books, 2012, $25.99, 241 pages)

피터 콜리어, 정치적 여인 – 진 커크패트릭의 큰 작은 생애
(엔카운터 북스, 2012년, 25.99 달러, 241쪽)

이 책은 레이건 1기 행정부에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진 커크패트릭(1926-2006)의 전기이다. 진 커크패트릭은 “공산독재와 달리 자유진영 독재국가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민주국가로 발전해 갈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자유진영 독재국가를 공산독재국가와 동등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커크패트릭 독트린’(The Kirkpatrick Doctrine)으로 유명하다. 또한 진 커크패트릭은 유엔 주재 미국 대사라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한 최초의 여성이었을 뿐 더러 레이건 1기 행정부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많은 영향을 준 외교 이론가였다.

진 커크패트릭의 결혼 전 성(姓)은 조던이었는데, 부친 가계는 오클라호마에 오랫동안 살았고, 모친 집안은 텍사스에 살았다. 부친은 석유 노동자였는데, 결혼 후 오클라호머 시티 부근에 위치한 던컨이란 마을에서 자리잡아 살았다. 부친과 모친의 집안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민주당원이었다. 대공황은 오클라호마를 강타했고 진의 집안은 1938년에 던컨을 떠나서 일리노이 주 마운트 버논으로 이사를 갔다. 진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졸업반 때 2차 대전이 발발했다. 진은 시카고 대학을 가고 싶었으나 부친의 뜻에 따라 미주리 주 콜럼비아에 있는 2년제 여자대학인 스티픈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여기서 진은 평생 친구인 마가릿을 만났다.

스티픈스 대학을 졸업한 진은 콜럼비아 대학 바너드 칼리지에 3학년으로 진학해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 때 앨저 히스 재판이 열려서 온 미국인의 주목을 샀는데, 대부분 학생들과 달리 관련 자료를 주의 깊게 읽은 진은 히스가 유죄라고 생각했다. 1948년 선거에서 진은 공산주의에 확고한 자세를 갖고 있는 해리 트루먼에 투표했다. 콜럼비아 대학원 정치학과에 진학한 진은 프란츠 노이만 교수가 가르치는 독일 정치를 공부했고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으로부터 깊은 교훈을 얻었다. 1951년에 석사학위를 딴 진은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부친은 더 이상 학비를 지원할 수 없다고 해서 워싱턴으로 직장을 구하러 갔다. 워싱턴에서 진은 국무부 정보연구실에서 일하던 에브론 커크패트릭을 만나서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됐다.

1912년에 태어난 에브론 커크패트릭은 일리노이 대학을 나오고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미네소타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늦은 나이로 복학을 한 휴버트 험프리를 가르쳤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커크패트릭은 전략국(OSS)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는 전략국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음을 알고 그 사실을 빌 도노반(Bill Donovan) 국장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1947년에 커크패트릭은 국무부 정보연구실 부실장이 되었고 나중에는 실장이 됐다. 1949년에 그는 부인과 이혼을 하고 1951년에 재혼을 했으나 얼마 후 두 번 째 부인과도 이혼을 했다. 이런 상태에서 커크패트릭은 진을 만났는데, 진은 자기의 상사이며 지적으로 탁월한 15세 연상인 커크패트릭을 좋아하게 됐고, 1952년 들어서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1952년 여름, 진은 프랑스 정부 장학금으로 파리 대학 정치학부로 유학을 가게 됐다.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진은 전쟁 전에 프랑스 중산층이 공산주의를 탐익하게 된 이유를 연구했고, 당시 프랑스 지성계를 뒤흔든 사르뜨르와 까뮤 간의 논쟁에선 대부분의 학생들과는 달리 까뮤 편을 들었다. 커크패트릭은 파리에서 공부하던 진에게 자주 편지를 했고, 진이 돌아 올 즈음에 파리에 나타나서 두 사람은 여객선을 같이 타고 미국에 돌아왔다. 

1953년 여름에 진과 커크패트릭은 워싱턴에 자리잡았다. 국무부 경제협력국에 직장을 잡은 진은 박사학위를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도교수였던 노이만 교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콜럼비아 대학에는 프랑스 정치를 전공한 교수가 없어서 박사과정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1955년 2월, 진은 부모의 승락을 얻어 커크패트릭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1956년 7월에 두 사람 사이에서 첫 아들 토머스가 태어났고, 이어서 존과 스튜어트가 태어났다. 1963년에 진은 콜럼비아 대학원 박사과정에 다시 입학했다. 커크패트릭 부부는 1960년대를 풍미한 과격한 신좌파(New Left) 운동을 경계했다. 미국정치학회(APSA) 사무국장 일을 보던 커크패트릭은 미국정치학회가 과격한 풍조에 물 들지 않도록 했다. 진은 세 아이를 키우면서 박사논문을 준비했고 트리니티 대학에서 가르쳤다. 박사학위 논문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인 1967년에 진은 조지타운 대학 정치학과에 교수 자리를 얻었다. 1968년 대선 때 커크패트릭은 미네소타 시절부터 잘 알던 휴버트 험프리를 도왔고 진도 그러했다.

1972년 선거에서도 진은 험프리를 지지했으나 전당대회 규칙이 변경됨에 따라 조지 맥거번이 후보로 지명되자 본선에서 공화당 후보 닉슨에 투표했다. 진이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긴 그 때가 처음이었는데, 민주당 후보 맥거번이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다.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참패했고, 이를 계기로 민주당 전통파를 결집시키기 위한 ‘민주당 다수파 연합’(Coalition for a Democratic Majority : CDM)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헨리 잭슨 상원의원의 보좌관이던 벤 워텐버그(Ben Wattenberg)와 노먼 포도레츠(Norman Podhoretz)가 준비했는데, 나중에는 헨리 잭슨,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 조지 볼 등 쟁쟁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독재와 이중기준’

1976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진과 커크는 헨리 잭슨 상원의원을 민주당 후보로 지지했다. 진은 소련에 대해 반체제 인사의 해외망명 허용을 촉구하기 위해 무역제재를 가하도록 하는 잭슨 수정법안 등을 제안한 헨리 잭슨 상원의원이 냉전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워싱턴 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은 조지아 주지사 지미 카터를 민주당 후보로 지지했다. 잭슨을 지지했던 진은 카터 행정부의 난맥상을 곧 보게 되었다. 1979년 들어서 이란에는 호메이니 정권이, 그리고 니카라과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 카터 행정부를 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카터 행정부가 소모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산디니스트 공산정권을 인정한 데 대해 특히 그러했다.

진은 ‘독재와 이중기준’(Dictatorship and Double Standards)이라는 긴 논문을 그 해 여름에 작성했다. 이 논문에서 진은 “민주주의는 최소한 수십 년에 걸쳐서 이를 지탱할 만한 규율과 관행이 확립된 후에야 달성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러면서, “우익 독재는 시간이 경과하면 민주주의로 진화할 수 있다. - - 전통적인 압제는 국민의 일상생활과 가족과 대인관계를 파괴하지 않지만 공산혁명체제는 이와 정반대다”고 지적했다. 진은 인권을 가장 심각하게 유린하고 있는 소련은 비판하지 않으면서 친미(親美) 독재정권을 비난하는 카터 정부의 이중성을 비난했다. 이 논문은 코멘터리(Commentary)지(誌) 1979년 11월 호에 실렸다.

커멘터리 11월호가 뉴스 스탠드에 꽂혀 있을 때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카터 정부의 외교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나온 진의 이 논문은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헤리티지 재단과 미국기업연구소(AEI)는 이 논문을 곳곳에 산포했다. 1980년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로널드 레이건도 이 논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레이건은 “이 논문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감사 편지를 진에게 보냈다. 1980년 4월 6일,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레이건은 진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은 윌리엄 케이시, 에드윈 미즈, 리차드 알렌 등 레이건의 참모도 만났다. 레이건을 두번째 만나고 난 진은 레이건을 지지하기로 결심을 했다. 레이건은 진에게 “자신도 한 때 뉴딜을 지지했던 민주당원이었다”고 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레이건이 후보로 지명된 후 진은 ‘레이건을 지지하는 민주당원’(Democrats for Reagan)을 이끄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진에게 유엔 주재 대사직을 제안했고, 진은 기꺼이 수락했다. 

유엔 주재 미국 대사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 이전 3주 동안 진과 다른 각료 지명자들은 인수팀과 레이건 이너 서클로부터 많은 브리핑을 받았다. 레이건 대통령 외에는 새 정권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진은 자신이 취약함을 알았다. 진은 유엔 주재 대사가 각료급이 되어야 하고 또 국가안보보장회의(NSC)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관철시켰다. 진은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중앙정보국장이 된 빌 케이시, 백악관 보좌관인 에드윈 미즈 및 윌리엄 클라크와는 정서적으로 가까웠다. 하지만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과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헤이그는 진이 레이건 대통령과 직접 통화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불만을 가졌다. 진에 대한 인사청문은 민주당 의원 몇 명이 진의 논문에 대해 질문한 것으로 끝났고, 상원 외교위원회와 상원 전체에서 전원일치로 통과되어 2월 4일에 취임선서를 했다.

진의 남편 커크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미국정치학회 일을 그만 두고 진을 따라서 뉴욕에 자리잡았다. 진은 유엔 대사 직무가 순탄하지 않음을 잘았다. 무엇보다 국무부가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 유엔은 제3세계 국가들이 수적(數的) 다수를 점하고 있는 기능하지 않는 기구였다. 공산권 국가와 제3세계 국가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고, 유럽 국가들도 이들 블록에 대해 동조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진은 유엔에 팽배해 있는 반미주의와 반(反)이스라엘 정서와 상대하고자 했다. 진은 모든 유엔 회원국들이 유엔에서의 표결 기록을 분석해서 미국 상 하원 의원들에게 보냈다. 유엔 회원국이 유엔에서 반미(反美) 투표를 계속한다면 미국 의회는 그런 나라에 대해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 전폭기들이 이라크의 오시락 핵 시설을 폭격하자 미국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진은 레이건과 만나서 미국이 이 문제에 대해 유엔에서 기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이스라엘에 대한 견책 결의 문안을 완화시켜 줄 것으로 부탁했고, 진은 집요한 협상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규탄결의 문언을 최대한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에 대해서 진은 동정적이었지만 헤이그 국무장관은 소련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시 중앙정보국장과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폴란드 문제에는 도덕적 정치적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즈음 레이건은 일기장에 헤이그와 진 사이의 갈등에 대해 우려하는 글을 남겼다.

아르헨티나 군이 포클랜드에 침공하고 영국이 이에 대대적으로 반격하자 미국은 또 한차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진이 자신들을 지지해 줄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었다. 헤이그 국무장관은 나중에 진이 아르헨티나의 침공계획을 미리 알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은 이에 대하여 사전에 아는 바가 없었다. 1982년 5월 2일, 영국 잠수함이 아르헨티나 경순양함 벨그라노 호를 격침해서 323명이 사망했다. 진은 휴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철수를 거부하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무감각으로 인해 진전을 보지 못했다. 스페인과 파나마 정부가 유엔에 즉시 철군안을 제출하자 진은  미국은 기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이그 국무장관은 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지시했다. 진은 영국이 이미 미국과 관련이 없이 독자적인 외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미국이 영국의 입장을 무조건 지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종국적으로 기권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진은 많은 비난을 받았다. 헤이그 국무장관은 진을 몰아 내기 위해 언론을 움직여서 진을 비난했다.

1982년 6월 25일, 헤이그는 사표를 제출했는데, 그는 사표가 반려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헤이그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조지 슐츠를 임명했다. 진이 승리한 것이다. 진은 이제 강한 미국을 상징하는 외교관으로 부상했고, 언론은 다투어서 그를 초청했다. 1983년 9월 1일, 소련이 대한항공 007편 항공기를 격추해서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 헨리 잭슨 의원이 사망해서 진은 심적으로 우울했었다. 진은 유엔 총회장에서 소련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진은 “폭력과 거짓말은 소련 정책의 통상적 수단’이라고 비난했다. 소련에 대한 서방의 도덕적 우위를 천명한 이 연설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 소련을 비난한 애들라이 스티븐슨 대사의 연설에 비견된다.

진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해서 무자헤딘 지도자들은 만나는 등 아프간에서 소련군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소련은 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도의 심리전을 펴기도 했다. 리비아의 독재자 가다피가 진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파견했다는 정보가 돌아서 경호실은 진에게 방탄 리무진과 무장 경호원을 보내 보호했다. 진은 니카라과를 직접 방문해서 반공 반군(叛軍) 콘트라의 엔리케 버뮤데즈와 만나서 격려했다. 진은 이들을 쿠바와 소련이 후원하는 공산세력에 대항해서 싸우는 민주세력으로 간주했다. 버뮤데즈는 반군의 정계 부대를 ‘진 커크패트릭 여단’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990년 자유선거에서 산디니스트 정권이 패배한 후에 버뮤데즈는 공산세력에 의해 암살됐는데, 진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애도했다.

진은 이스라엘 문제를 두고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충돌했다. 슐츠 장관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양민들을 살해한다고 생각한 데 비해, 진은 항상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백악관 내에서는 진을 둘러싼 이상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진은 케이시 중앙정보국장, 윌리엄 클라크 안보보좌관,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과 가까웠다. 반면 슐츠 국무장관은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 마이클 디버 비서실 차장, 그리고 조지 부시 부통령과 가까웠다.  1983년 10월, 윌리엄 클라크는 안보보좌관직을 물러나고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후임 안보보좌관으로는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과 버드 백팔렌 안보 부(副)보좌관이 거론됐다. 베이커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는 듯 했으나 케이시와 와인버거가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레이건은 진을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하고자 했는데, 제임스 베이커와 조지 슐츠가 반대해고 나서서 결국 맥팔렌이 임명되었다.

1984년 들어서 진은 이제 유엔 대사 이후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해 여름 댈러스에서 열린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에서 진은 “샌프란시스코 민주당원들”(San Francisco Democrats)과 “미국을 먼저 비난하는 집단”(blame America first crowd)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진은 “평화를 지키러 레바논에 간 해병대원들이 잠자다가 살해되었는데도 미국을 먼저 비난하는 집단은 해병대원들을 살해한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하지 않고 미국을 비난한다. - - 그들은 항상 미국을 먼저 비난한다.”고 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 직전에 진은 레이건을 단독으로 만났다. 레이건은 대사직을 그만 둘 예정인 진에게 새로운 정부 자리를 마련해 주고자 했으나 백악관의 참모들은 진이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데 반대했다. 1985년 4월 1일은 유엔 대사로서 마지막 날이었다. 4월 3일, 진은 민주당적을 버리고 공화당에 입당했다. 진은 애들라이 스티븐슨과 헨리 캐봇 롯지를 제외하면 유엔 주제 대사를 가장 오래 지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 만큼 유엔에 큰 영향을 미친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 여정 

대사직을 물러난 진은 조지타운 대학에 복직해서 학부와 대학원 강의를 했고, 미국기업연구소 연구위원을 겸했다. 진은 이미 슈퍼스타가 되어서 여기저기서 강연 초청을 받았고 강연으로 많은 수입을 올렸다. 진은 또한 많은 신문 잡지에 신디케이트 칼럼을 기고했다. 198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예비선거 운동이 시작되자 진에게 대통령 출마를 권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실제로 진이 출마선언을 하면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지지자도 있었지만 진은 얼마 후 그 생각을 접었다. 진은 잭 캠프 상원의원을 지지했으나 캠프의 선거운동은 동력을 얻지 못했다. 조지 H. W. 부시가 후보가 됐지만 진은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진은 레이건과 고르바체프 간의 정상회담이 일종의 데땅뜨가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진은 고르바체프의 베스트셀러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읽고 고르바체프는 레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이어서 소련이 붕괴하자 진의 지적(知的) 생활에도 단락이 지어졌다.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이에 대한 대응을 두고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진은 공군력을 사용하면 충분하며 지상군 투입을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이 후세인의 운명을 유엔 안보이사회에 맡겨두려고 하자 진은 냉소를 보냈다. 진은 당시 유엔 사무총장 부르투스 부르투스 갈리는 미국의 영향력을 저해하려는 음모세력으로 보았다. 진은 미군을 소말리아에 파병하면서 유엔의 지휘 아래에 두도록 한 클린턴 행정부의 결정에 경악했다. 그 만큼 진은 유엔을 불신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진의 남편 커크는 건강이 부쩍 나빠졌다. 큰 아들 토머스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진과 커크에게 큰 부담이 됐다, 둘째 아들 존은 변호사가 되어 가장 믿음직한 자식으로 성장했다. 1995년, 커크가 85세로 사망했다. 2002년에 진은 조지타운에서 은퇴했고, 신문 기고를 중단하고 자신의 책에 집중했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진은 알카에다와 탈레반에 대한 공격에 찬성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한 이라크에 대한 지상전에 대해선 회의적인 생각을 했다. 조지타운에서 은퇴한 후에도 진은 미국기업연구소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지만 비워두는 경우가 많았다. 건강이 나빠진 상태에서 집필을 끝낸 진은 원고를 미국기업연구소 출판부에 넘겨주었으나 출판부는 출판을 거부했다. 2006년 3월, 자신이 더 이상 미국기업연구소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진은 조용히 자신의 물건들을 챙겨서 나왔다.

진의 조수였던 케이트 캠패인은 원고를 다른 출판사에 돌렸는데, 하퍼콜린스가 수정없이 출판하고 1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7월 14일, 알코올 중독으로 평생을 보낸 큰 아들 토머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후에 진은 둘째 아들 존과 셋째 아들 스튜어트에게 자신은 11월 19일에 80회 생일을 갖고 그 해가 가지 전에 죽기를 원하며, 죽기 전에 자신의 책이 출판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80회 생일에는 마가릿 르피버 부부 등 가까운 친지가 진의 집에 모였다. 12월 7일, 바하를 들으면서 진은 눈을 감았고, 그 때까지 그녀의 책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Making War to Keep Peace)은 출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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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클라인, 아마추어 (2012년) 
리 에드워즈, 윌리엄 버클리 2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