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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클라인, 아마추어 (2012년)
작성일 : 2013-03-10 15:38조회 : 2,110


에드워드 클라인, 아마추어 (레그너리 출판사, 2012년, 277쪽, 27.95 달러)

Edward Klein, The Amateur : Barack Obama in the White House
(Regnery Publishing, 2012, 277 pages, $27.95)

케네디가(家)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쓴 에드워드 클라인이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펴낸 이 책을 오바마의 재선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인들은 오바마를 또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저자는 오바마는 전에 보지 못한 아마추어 대통령이며, 그로 인해 미국 경제는 침체할 것이며 미국 안보는 취약해 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오바마는 현재 미국이 당면해 있는 문제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며, 대통령직(職)에 대한 자기도취에 빠져있다고 본다. 저자는 오바마가 대통령으로서 이끌어야 할 미국 사회의 가치에 대해 반란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저자는 빌 클린턴이 힐러리에게 2008년 대선에 출마하라고 권하면서, “오바마는 대통령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마추어’”라고 했다고 전한다.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 학생들이 발행하는 하버드 로 리뷰의 발행인이 되어서 유명해 졌다. 그가 흑인 학생으로선 처음으로 그런 명예로운 직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시카고 대학 로스쿨 학장이 오바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시카고 로스쿨에서 강의를 하겠냐고 물었고, 오바마는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바마는 12년 동안 시카고 로스쿨에서 강사, 그리고 나중에는 시니어 강사로 강의를 했다. 학교는 사무실과 건강보험을 제공했고 연봉 6만 달러를 주었다. 오바마의 강의는 인기가 있었지만 그는 다른 교수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도무지 대학에 그가 존재하는지도 의문일 정도였다.

2000년에 오바마는 시카고의 흑인 지역 사우스 사이드의 4선 하원의원 보비 러시에 도전했으나 예비선거에서 참패했다. 오바마는 재정적으로 곤란해졌고 부인 미셀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그러던 중 시카고의 부유한 흑인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짐 레이놀드가 오바마를 찾아 왔다. 이렇게 해서 시카고의 영향력 있는 흑인들이 오바마를 유망주로 키우게 됐다.

오바마가 30세 되던 해에 미셀과 결혼하기 전까지 가장 깊은 인간관계를 가졌던 사람은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다. 라이트는 트리니티 교회를 이끌면서 흑인 해방신학(Black Liberation Theology)을 전파해 온 급진적 성향의 목사다. 라이트는 오바마에게 정치를 하도록 권했고, 자신의 교회에 나오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흑인 신도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부친을 모르고 자란 오바마가 라이트 목사를 통해 부서진 자아(自我)를 재건했을 것이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찬조연설자로 나선 오바마는 순식간에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알려 지지 않았던 오바마의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됐고, 오바마는 백만장자가 됐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오바마가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하고, 이란과 북한과도 대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모든 이슈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2008년 미국민들은 경제위기와 이라크 전쟁에 지쳐서 오바마를 선택했는데, 정작 오바마는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는 패거리, 뇌물, 부패로 얼룩진 ‘시카고 스타일 정치’(Chicago-style politics)의 산물이다. 1972년 이후 일리노이 주지사를 지낸 7명 중 4명이 부패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오바마의 부인 미셀은 데일리 시카고 시장을 위해 일했고, 오바마의 보좌관이 발레리 자렛도 그러했다. 오바마는 선거에 강한 정치적 감각을 갖고 있지만 정작 정부를 운영하는 데는 서툰 스타일이다. 오바마는 취임 초기부터 램 이마뉴엘 비서실장의 권고를 무시하고 관타나모 기지를 폐쇄하고 9-11 테러 주모자에 대한 재판을 뉴욕시에서 열리도록 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오바마 백악관은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스케줄을 모르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조직과 운영이 난맥상이다.

오바마 백악관에서 실세는 발레리 자넷이다. 자넷은 백악관 웨스트 윙에서 가장 좋은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으며, 백악관에서 열리는 모든 회의에 마음대로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고 있다. 자넷은 오바마 부부와 함께 휴가를 갈 정도로 대통령과 가깝다. 자넷은 성공한 흑인 혼혈 가문 출신으로 스탠포드 대학과 미시건 로스쿨을 나왔다. 오바마와 미셀은 시카고 정치에서 아웃사이더였는데, 미셀이 자넷을 만나서 자넷이 미셀을 리차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에 연결시켜 준 후에 오바마 부부는 시카고 정치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넷의 경력을 초라하다. 자넷은 시카고 공공주택 단지 재건사업을 다루다가 실패해서 해임되었다. 공적 경력이 초라한 자넷은 그럼에도 백안관 비서실 차장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실용적이고 정치적 센스가 있던 램 이마누엘 비서실장은 자넷과 빈번하게 충돌했다. 이마누엘은 오바마에게 코펜하겐에서 열릴 국제올림픽 위원회 총회에 가지 말도록 권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올림픽을 시카고에 유치하겠다고 코펜하겐에 갔지만 올림픽은 리우데자네이루로 결정됐고 시카고는 4위를 하는데 그쳤다. 오바마를 움직이는 사람은 이마누엘 등 공식 채널이 아니라 미셀과 자넷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2000년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오바마는 처음에 힐러리를 러닝 메이트로 정하려고 했는데, 미셀이 반대해서 조 바이든이 부통령 후보가 됐다. 미셀은 이마누엘 비서실장을 불신했고, 자넷을 통해서 백악관의 의사결정에 개입했다. 2010년 에드워드 케네디의 사망에 따른 보궐선거에서 오바마는 직접 민주당 후보를 위해 유세를 했지만 티파티의 지지를 받은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미셀은 선거 패배를 이마누엘의 책임으로 돌렸다.

오바마는 매우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럼에도 미셀은 호화판 여행을 자주했다. 2010년 여름에 초호화판 스페인 여행으로 구설수에 오른 미셀은 잦은 휴가여행을 국민세금으로 즐겼다. 오바마 못지 않게 비싼 취향을 갖고 있는 미셀도 병적(病的)인 나르시시즘 증상을 갖고 있다. 2011년 1월, 이마누엘은 사임하고 빌 데일리가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자넷은 새 비서실장 데일리에 대해서도 나쁜 소문을 냈고, 오바마는 중요한 결정을 비서실장을 거치지 않도록 했다. 데일리 비서실장은 자넷과 자주 충돌했고, 좌절을 느낀 데일리는 2012년 1월 사표를 제출했다. 오바마는 백악관 예산실장인 제이콥 류를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존 뵈너 하원의장이 오바마에게 “세금, 온실가스 규제, 의료 서비스에서의 불확실성 때문에 경제가 문제다”고 했더니, 오바마는 정색을 하고 “당신이 틀렸다”고 대어 들었다. 뵈너 의장은 나중에 “누가 오바마에 그와 다른 의견을 내면 그는 화를 내고 죽일 듯이 쏘아 본다”고 말했다. 뵈너는 “오바마 백악관에서 누가 결정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오바마가 힐러리를 꺾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어 결국 대통령이 된 데는 오프라 윈프리의 도움이 컸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쇼가 시청률이 감소할 위험성을 감수하고 오바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백악관 주인이 된 후에 오프라와 오바마 사이는 멀어졌다. 자넷은 오프라는 자신의 권한에 대한 위험 요소로 파악했고, 미셀은 오프라를 질시했다. 오프라는 백악관 방문시 홀대 당했고, 미셀은 불성실한 인터뷰를 해서 오프라를 실망시켰다.

2008년 대선에서 케네디가(家)는 오바마를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존 F. 케네디의 딸 캐롤라인은 오바마를 지지한 대가로 무엇인가를 기대했지만 백악관은 응답도 하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미망인 에셀은 오바마 부부를 히아니스 포트에 있는 케네디 본가로 초청했으나 백악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화가 치민 에셀은 오바마를 저주하면서 가구를 부셨다고 전해 진다.

국내 정치에서 아마추어 짓을 하는 오바마는 자신의 수준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을 자주 방문했다. 외교 정책에서도 오바마는 아마추어였다. 오바마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 전 국경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백악관에 입성했다. 오바마는 이스라엘 총리 벤자민 네타냐후를 공공연하게 모욕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오바마를 만난 후의 오바마의 반(反)유태 편견과 국제관계에 대한 무지(無知)에 대해 놀랐다. 한 언론인은 오바마가 자신이 모든 국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백악관에서 가장 탁월한 경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초기에 안보보좌관을 지낸 제임스 존스 예비역 해병대장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존스는 오바마 백악관에서 첫 안보보좌관을 지냈다. 그는 이미 65세로 대부분의 백악관 참모 보다 스무 살이 많았지만 취임하자 마자 다른 참모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하고 소외되었다. 군대에서 익힌 대로 업무를 하급자에게 위임하고 또 조직적으로 일을 할 줄 알았던 전문가였던 존스는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7시에 퇴근했는데, 시카고에서 오바마를 따라 워싱턴에 입성한 참모들은 존스가 퇴근이 너무 빠르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

존스는 조지 마셜과 맥스웰 테일러의 전통을 이은 군 출신 전략가이었지만 오바마가 시카고에서 데려온 참모들은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믿었던 군 출신을 믿지 못했다. 존스에게 가장 모욕적이었던 점은 존스는 자신의 보좌관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바마는 카터의 보좌관과 워싱턴에서 로비스트를 지내고 파산한 주택 모기지 공기업인 패니 매의 임원이었던 톰 도닐론을 안보부보좌관에 임명했다. 오바마는 존스를 젖히고 도닐론을 통해서 일을 처리하거나 지시하곤 했다. 좌절한 존스는 취임 19개월 만에 사표를 냈고, 오바마는 외교 문제에 대한 비전문가인 도닐론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을 작성해서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흔히 ‘오바마 독트린’이라고 불렸다. 오바마 독트린은 미국의 군사력은 좋은 일을 하기 보다는 나쁜 일을 더 많이 했으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비판하고 미국은 미국의 우방국에 보다 많이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오바마 독트린은 기껏해야 웃음거리이고 완전히 바보 같은 대외정책일 따름이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사맨타 파워스가 쓴 ‘자옥으로부터의 문제’(A Problem from Hell)은 오바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파워스는 아프리카에서의 대량학살을 미국과 유럽국가들이 방치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급진 좌파인 파워스는 힐러리를 ‘괴물’이라고 불러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바마가 유엔 주재 대사로 임명한 수전 라이스는 사만타 파워스와 이념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인권을 위해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저자는 오바마가 닉슨과 닮은 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오바마는 닉슨처럼 다른 사람 보다는 자신의 패거리 만을 신뢰하고, 언론과 차가운 관계이고, 국민을 분열시키며,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2012년 선거에서 오바마를 낙선시켜서 그를 단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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