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앤드류 바세비치, 아메리카 제국 (2002년)
2013-03-15 22:19 2,088 이상돈


앤드류 바세비치, 아메리카 제국 (2002년, 하버드 대학 출판부, 302쪽, 29.95 달러)

  Andrew Becavich, American Empire (2002, Harvard University Press, 302 pages, $29.95)

앤드류 바세비치는 웨스트포인트를 나와서 1990년대 초에 대령으로 예편했다. 1970-71년 간에는 베트남에 참전한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웨스트포인트와 존스 홉킨스에서 가르쳤으며, 1998년에 보스턴 대학 교수로 부임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는 바세비치는 조지 H. W. 부시와 클린턴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예리하게 비판해서 주목을 샀다. 2002년에 나온 이 책을 바세비치의 첫 책이다.

바세비치 교수는 이라크 전쟁이 또 다른 베트남 전쟁이 될 가능성이 많으며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두 번 째 책(The New American Militarism)을 2005년에 냈다. 바세비치 교수의 아들도 웨스트포인트를 나왔는데, 아들 존 바세비치 중위는 2007년 5월에 이라크에서 반군(叛軍)의 폭발물(IED)로 전사했다. 공화당원임에도 바세비치는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콜린 파월 등과 보조를 함께 했다. 이 책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관한 바세비치 교수의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는 당시 발생한 9-11 테러에 대한 대응방향에 관해 의미 있는 언급을 하고 있다. 2002년에 나온 책이지만 1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보며 저자의 경고가 대체로 정확했음을 알게 된다. 

1990년대에 미국은 목표와 의지를 갖고 대외관계를 이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는데, 그만 낭비하고 말았다. 냉전시대의 봉쇄(containment) 정책의 틀에 갇혀서 위기를 관리해 오는 데 그쳤고 ‘큰 생각’(Big Idea)은 없었다. 미국의 팽창적인 대외정책은 “미국은 외국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정이 불가피해서 개입했다”는 신화(‘the reluctant superpower’)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신화는 미국이 현재 의문의 여지가 없는 글로벌 강대국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마들레인 올브라이트는 “미국이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했고, 1999년에 콘돌리사 라이스는 “소련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승리로 인해 미국은 역사의 올바른 쪽에 서있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실패는 미국의 대외정책 전문가들로 하여금 보다 신중한 자세를 갖도록 하였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캐스퍼 와인버거는 “미국의 매우 중요한 국익이 걸린 경우에만 군사적으로 개입한다”는 ‘와인버거 독트린’을 천명했다. 1990-91년에 있었던 쿠웨이트 위기는 ‘와인버거 독트린’의 시금석(試金石)이었다. ‘와인버거 독트린’의 신봉자이기도 한 콜린 파월 합참의장은 걸프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데, 나중에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파월 독트린’은 ‘와인버거 독트린’과 유사한 것이었지만, 보스니아에서 미국이 개입을 주저함으로써 파월 독트린은 시련을 겪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 팀은 검증된 인물들이었지만, 냉전 시대의 틀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걸프 전쟁이 성공이라고 하지만 그 성과는 매우 과장된 것이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승전을 선언했지만 사담 후세인은 건재했기 때문에 승리가 갖는 의미는 퇴색하고 말았다. 부시 행정부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대사건에 대해서도 역사적 상상력과 도덕적 감각을 갖고 있지 못했다. 전후(戰後) 세대인 클린턴 대통령은 전임 부시가 갖고 있지 못한 장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 사회와 세계를 바꾸고 있는 힘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점이다. 클린턴은 또한 외교가 국내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잘 알았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클린턴과 그의 외교 팀은 소말리아에 섣부르게 개입했다가 큰 대가를 치렀다.

클린턴 시대에 밀어 붙인 자유무역정책은 미국 경제에 좋은 영향을 준 성공작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자랑하는 개방성(openness)는 1990년대에 미국이 테러의 대상이 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세계무역센터(1993년), 오클라호마 시티 연방청사(1995년), 사우디 코바르 타워(1996년), 케냐 및 탄자니아 주재 미 대사관(1998년), 그리고 미 해군함정 콜호(號)(2000년) 등 테러가 연이었다. 미국이 자랑하는 개방성은 테러와 같은 위험을 야기하고 있지만 개방성을 제약하려는 시도는 결코 지지를 받지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과거에 군함을 앞세웠던 외교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는 크루즈 미사일과 항공전력을 십분 활용했는데, 몇몇 경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민은 미국이 글로벌 리더이기를 원하지만 이런 목적을 피와 땀과 눈물이 없이 또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달성하기를 원하고 있다.

콜린 파월은 미국에서 새로운 부류의 총독들의 전성시기를 열였다. 걸프 전쟁에서의 성공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입은 정신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걸프 전쟁을 지휘한 콜린 파월은 은퇴하자마자 워싱턴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합참의장을 지낸 두 명의 4성 장군은 파월과는 달리 직무에만 전념한 군인이었으나, 중부군 사령관이던 안소니 지지 장군은 잦은 언론 인터뷰로 백악관과 충돌을 빚었다. 세르비아를 상대로 한 공습작전을 지휘한 웨스트 클라크 대장도 언론에 많이 노출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인들은 자신의 군사력과 지휘관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외교정책은 선거 이슈가 되지도 않았다. 조지 부시는 클린턴의 외교정책 기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는 콜린 파월을 국무장관에, 도널드 럼스펠드를 국방장관에 임명했고, 리차드 아미티지를 국무차관에, 폴 울포비치를 국방차관에 임명했다. 럼스펠드는 포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이미 지냈고, 울포비치와 아미티지는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부시는 역시 아버지의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에서 일했던 콘돌리사 라이스를 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파월이 국무장관이 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중요한 국익이 위협받는 경우에만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외적으로 개입할 것이란 ‘파월 독트린’은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인 것으로 이해됐다.

부시 대통령은 임기 초에 교토 의정서를 거부해서 일방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교토 의정서는 자체가 비현실적이어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일방주의라는 비난은 온당치 않다. 부시 행정부 외교 팀의 정책은 클린턴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부시 행정부는 초기에 다음의 네 개의 원칙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받아드렸다. 첫째는 글로벌 질서에서 우세를 유지해서 역사의 수호자가 되려는 미국의 사명이고, 둘째는 개방성과 일관성의 유지이고, 셋째는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 지역에서 미국의 우위를 유지해서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이며, 넷째는 군사적 우위를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항구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2001년 5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낙관주의를 피하기가 어렵다”면서, 냉전 시대처럼 “진영으로 분열된 세상을 걱정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해 9월 11일, 모든 것은 바뀌고 말았다. 9월 11일에 시작된 전쟁은 개방성을 지키고 증진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9월 14일, 의회는 9-11 공격에 가담한 자들에 대하여 필요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포괄적 권한을 대통령에게 위임했다. 9월 20일, 부시 대통령은 이른바 ‘부시 독트린’을 발표했다. 부시는 세계를 자유 진영과 압제 진영으로 구분하고, “자유 그 자체가 공격을 받았다”고 단언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악’(evil)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게 됐다.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를 상대로 한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이 시작됐다. 군사전략가들은 미사일과 공군력을 최대한 이용하고 최소한의 지상군을 사용했다. 지상전은 북부 연방의 군벌 병력이 주로 담당했다. 9-11은 또한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1990년대를 통해 입증된 미국의 우세한 군사력에 애국심이 가해져서 미국인들은 전에 없이 군사력에 의존하려는 성향을 갖게 됐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방어선이 지구 전체를 포함한다고 천명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사실상 ‘제국’(Empire)가 되었다.

20세기 초에 찰스 베어드는 유럽에서의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는 데 반대하면서, “미국은 로마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 이제 미국은 로마가 되고 말았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제국이 된 것이 결코 축하할 일만은 아니다. 제국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만 유지할 수는 없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선 도덕적 기반이 있어야 하고 혜안과 일관성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 제국은 사소한 불편과 중대한 위협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꼭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과 있으면 좋은 편리한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포스트 모던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국으로 구실을 하기는 무척 어렵다. 미국이 제국이 되어야 하는가 또는 아닌가 하는 문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제국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여기서 판단을 그르치면 제국으로서 미국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공화국으로서 미국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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