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에릭 에반스, 대처와 대처리즘 (2004년)
2013-05-06 00:08 4,567 이상돈


에릭 에반스, 대처와 대처리즘 (2004년, 러틀리지, 176쪽, 29.95달러)

Eric Evans, Thatcher and Thatcherism (2nd ed., 2004, Routledge, 176 pages, $29.95)

얼마 전에 타계한 마가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20세기 후반기 영국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총리였다. 랭캐스터 대학 역사학 교수인 에릭 에반스가 펴낸 이 책은 1997년에 초판이 나왔고, 토니 블레어 총리 집권 6년 차 되는 2004년에 2판이 나왔다. 에반스 교수는 대처가 영국에 남긴 유산(legacy)은 보수당 정권이 끝나던 1997년에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심대해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에도 그대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대처가 ‘대단한 현상’이었다고 지적한다. 대처는 1979년 5월부터 1990년 11월까지 11년 반 동안 총리직에 있었다. 최초의 그리고 아직까지 유일한 영국의 여성 총리였고 세 차례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나중 두 번 선거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대처는 ‘변화’를 도덕적 소명으로 생각했고, 이를 시행에 옮겨서 어느 총리보다 영국을 크게 변화시켰다.

1925년에 태어난 대처는 1959년에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되었고, 1970년에 보수당이 집권하자 에드워드 히스 총리 아래에서 교육장관을 지냈다. 19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자 당내 급진 우파는 대처를 당 대표로 지지했고, 2차 투표 끝에 대처는 보수당 대표로 선출됐다. 보수당내 우파의 지적(知的) 리더는 케이스 조셉이었고, 이들은 대처주의자가 되어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서 대처를 당 대표로 밀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영국 정부가 화폐를 공급해서 복지를 충당했으며, 이로 인해 악성 인플레이션이 생겼고 이로 인해 개인들의 저축과 자산의 가치가 저하되어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이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튼 프리드먼의 학설을 따라서 화폐공급을 통제할 것을 주장했다. 실제로 1974년 영국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24%였다. 1970년대 초까지 영국의 성장률은 프랑스 등 다른 유럽국가 보다 낮은 2% 대에 불과했고, 영국의 1인당 소득은 다른 선진국에 갈수록 뒤떨어지고 있었다. 영국 파운드의 가치도 갈수록 하락했다. 영국의 자존심이던 롤스 로이스가 1971년에 파산했는데, 영국 정부는 국영기업을 만들어서 경영을 맡도록 해서 국민세금만 낭비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대처리즘(Thatcherism)이 탄생하는데, 사실 대처리즘은 고유한 이념이라기 보다는 정치사회에 관한 여러 생각을 모은 것이었다. 대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개입, 의존성을 야기하는 국가의 이니시어티브, 높은 세금, 그리고 시장을 왜곡하는 노조와 직역 단체에 확실하게 반대했다. 대처는 이런 생각을 신념화했고, 이것을 정부정책으로 밀어나갔다.

1979년 총선에서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339석을 획득해서 269석을 얻은 노동당을 확실하게 눌렀다. 대처는 취임하자 마자 경찰관과 군인의 봉급을 크게 올렸다. 1980년에 인플레이션은 22%에 달하는 등 경제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제 개혁을 시행에 옮겼다. 소득세 최고구간을 83%에서 60%로 인하하고 표준 소득세율을 33%에서 30%로 인하했다. 동시에 8%이던 부가가치세를 15%로 인상했다. 부가세는 식품과 몇 가지 생필품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서민층은 고통을 받았다. 대처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경기침체를 감당할 각오였다. 1979년에서 81년 사이에 영국 제조업의 25%가 문을 닫아서 일자리와 세수(稅收)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만일 당시 북해서 원유 생산이 대폭 증가하지 않았더라면 영국은 파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1983년 총선에서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397석을 차지해서 209석을 차지한 노동당을 압도했다. 이러한 승리로 대처는 전에 없는 권한을 갖게 됐다. 1983년 총선에서의 압승은 포클랜드 전쟁 덕분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많은 유권자들은 대처를 강력한 지도자로 인식하게 됐다. 대처 정부의 세제(稅制) 개혁은 1988년에 완성되었는데, 소득세 표준과세율은 25%, 그리고 최고 구간 과세율은 40%로 이원화되었다. 대처 정부는 세금을 줄이지는 못했다. 1979년에 세금은 전체 GDP의 38.5%를 차지했는데, 1990년에는 40.75%가 되었다. 소득세는 줄었지만 그 자리를 부가세와 지역부과금이 채웠는데, 이들은 모두 역진세(逆進稅)여서 빈곤층의 부담이 더 컸다. 이 결과로 부유한 계층과 빈곤한 계층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대처가 집권했던 시기에 제조업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서 1990년에는 제조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로 줄어 들었다. 대신에 호텔과 관광 서비스 같은 저임금 일자리와 금융 서비스 같은 고임금 일자리가 늘었다.

대처 정부는 공공재산의 비(非)국유화(denationalization)를 정책으로 밀고 나갔다. 쓰레기 수거에서 대중교통과 통신에 이르는 정부가 제공하거나 규제해온 많은 분야가 민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대처 정부는 지방정부가 임대해 주고 있는 공공주택을 거주자에게 매각하도록 했다. 이 조치는 매우 인기가 좋았는데, 1982-83년 기간 동안에만 공공주택 204,000 채가 민간에 불하되었다. 1981년까지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 브리티시 항공(BA), 그리고 브리티시 슈가가 민영화되었다. 브리티시 텔리컴(BT)은 민간회사 머큐리와 경쟁을 하다가 1984년에 민영화되었다. 하지만 공기업이 독점적으로 공급하던 서비스는 결국 거대 민간기업이 제공하게 되었을 뿐이며, 이들의 서비스는 공공기업이 제공하던 서비스 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보수당이 지배하는 의회는 1982년에 고용법(The Employment Act of 1982)을 제정해서 합법적인 파업을 근로자와 사용자 간의 관계로 국한시켰다. 이에 따라 다른 사업장의 근로자에 동조하는 파업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이 법은 노조에 가입하지 않아서 해고되는 근로자는 보다 많은 보상을 받도록 해서 모든 근로자가 노조에 가입하도록 하는 클로즈드 숍(closed shop) 운영을 어렵게 했다. 1984년 노조법은 노조원들이 매 5년 마다 노조간부를 우편 투표로 선출하도록 했고, 1988년 개정법은 파업 중 근로를 하는 근로자를 더 이상 제제할 수 없도록 했다. 정치권에서 성역으로 있다시피 한 노조를 정면으로 제어한 이런 조치를 영국민들은 대체로 지지했다. 1984년에서 85년에 이르는 동안에 탄광 파업이 일어나자 대처 정부는 석탄을 비축하고 해외에서 석탄을 수입해 올 것이라면서 탄광노조를 압박했다. 노조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영국의 탄광지역이 아예 문을 닫게 될 것임을 알게 된 노동당도 탄광노조와 거리를 두었고, 결과는 대처의 승리였다.

공공분야 고용을 ‘필요악’으로 생각한 대처는 이를 감축하기로 결심했다. 관료들이 대처의 주요한 타깃이 되었다. 관료들은 단지 몇 년 동안 장관으로 머무는 정치인들을 설득시켜서 자신들의 조직을 지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대처는 마크 앤 스펜서 경영진 출신인 데릭 라이너를 기용해서 관료제를 개혁했다. 첫 조치로 공무원부(Civil Service Department)를 아예 없애 버렸는데, 1968년에 생긴 이 부서는 직원 5,000명을 두고 있었다. 대처는 이 조직이 전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폐지해 버렸고, 그 후 대처는 공무원 임명권을 보다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대처는 시장의 경쟁과 격리되어 있는 공무원 집단을 아주 싫어해서, 대처의 정책 보좌관들도 관료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로빈 이브스가 주도한 행정개혁의 결과로 정부를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인원만 공무원으로 남고, 특정한 서비스를 제공하던 공무원들은 별개의 서비스 조직으로 이관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체 공무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300,000명이 새로 탄생한 서비스 조직으로 이관되었다.

대처는 높은 세금과 엘리트 관료에 의해 움직이는 강력한 중앙정부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방만한 지방정부에 대해선 그 존재 자체에 비판적이었다. 대처가 집권했을 당시에 영국의 지방정부는 전체 공공재정의 28%를 지출하고 있었으나 그 60%를  중앙정부 보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1985년에 제정된 지방정부법은 런던 광역시 위원회(The Greater London Council)를 없애고 원래 대로 기초단체가 행정을 관장하도록 했다. 대처는 또한 재정적자를 기록하는 지방정부에는 벌금을 과하도록 했고, 나아가서 지방정부를 경쟁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직으로 변모시켰다. 이런 결과로 지방정부는 약 20% 경비를 절감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지방정부에 관한 대처의 정책 중 가장 논란이 많았고 또한 결국에는 정치적 실책으로 귀결된 사안은 지역 부과금(community charge)이었다. 종전에는 지방정부의 중요한 세원(稅源)이 재산세였다. 대처는 이 제도에 의하면 “지방 유권자 3,500만 명 중 1,700만 명은 과세 대상이 아니고, 나머지 1,800만 명 중 300만 명은 기준 이하로 내고 또 다른 300만 명은 전혀 내지 않는다”면서, “지방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사람들이 지방정부의 방만한 운영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를 투표세(poll tax)라는 일종의 인두세(人頭稅)라고 비난했지만 대처는 이를 밀어 붙였다. 그러나 지역 부과금 제도는 정치적 참사였다. 실제로 이를 시행해 보니 1인당 350 파운드가 되어 4인 가족의 경우는 무려 1,500 파운드를 내야만 해서, 부자들한테만 즐거운 제도가 되고 말았다. 보수당내에서도 “대처가 정치적 판단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결국 이 제도는 대처가 퇴임한 후에 폐지되었다.

대처는 의사, 교수와 교사 같은 집단이 전문성을 핑계로 국민 세금을 마셔가면서 자신들의 복지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8년에 도입된 국가건강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는 방만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전국민을 포괄하는 정부 의료 서비스 덕분에 수명이 길어지고 노령자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대처는 대형 병원을 운영하는 300개의 병원신탁회사를 만들어서 이들이 서로 경쟁을 하도록 하고 당국이 이들 중에서 구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의사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상당수 병원신탁회사들은 극심한 적자에 시달렸으며, 건강 서비스 예산을 절약하지도 못했다.

학교와 대학도 대처의 개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1979년에서 1986년 사이에 교육예산은 10%가 감축되었고 학교에도 경영기법이 적용되었으며, 교과과정이 교육부의 통제를 받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교직의 자존심을 손상되었고 많은 교원들이 조기에 퇴직하였다. 대처 정부 초기에 예산이 증가한 분야는 경찰과 교정시설이었다. 첫 3년 동안 대처 정부는 경찰관 10,000명을 신규 채용했고, 교도소 시설을 확충하였다.

보수당 전임 당 대표였던 에드워드 히스와 달리 대처는 영국의 미래가 유럽에 달려 있다고 보지 않았다. 대처는 미국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처가 총리로 있던 시절은 유럽이 급속하게 통합되던 시기였지만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대처 때문에 유럽 문제에서 영국은 소외되었다. 대처에게는 대서양이 유럽 대륙 보다 더 중요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은 같은 성향의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었다. 대처는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이 영국에 배치되도록 했고, 1986년 4월에는 미 공군기들이 영국 기지에서 발진해서 리비아를 폭격하도록 허용했다.

1983년 10월, 미군이 카리브 해의 작은 나라 그레나다를 침공하자 영국과 미국 간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그레나다는 영연방 국가였는데도 미국은 영국과 사전협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처는 “작은 독립국가에 개입하는 데 반대한다”는 서신을 레이건에게 보냈다. 그러나 1년 반 전에 포클랜드에 군대를 보낸 대처의 이 같은 반응은 모순된 것이었다.

1982년 5월, 대처는 포클랜드에 군대를 보내서 아르헨티나로부터 섬을 도로 찾았다. 아르헨티나의 동정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캐링턴 외교장관은 사임을 했다. 영국 외교관들은 포클랜드가 구 식민시대의 유물로 생각했었다. 포클랜드 전쟁은 대처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 주었지만 전쟁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많다. 국방부 고위관리였던 클라이브 폰팅은 영국 잠수함이 격침시킨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는 전쟁 수역을 향해 온 것도 아닌데 전시 각료회의에서 격침을 명령했다고 언론에 밝혀서 기밀누설죄로 기소됐다. 당시에 페루 정부는 아르헨티나 정부를 상대로 중재를 하고 있었는데, 벨그라노가 격침됨에 따라 협상은 여지를 잃어 버렸다. 대처는 “벨그라노 격침이 군사적 결정이었지 결코 정치적 결정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대처는 영국령이었다가 무단으로 독립을 선언한 남아프리카의 불법 백인국가 로디지아에 선거를 통해서 흑인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지지했다. 대처는 공산주의자인 무가베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무가베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그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4년 12월 영국은 홍콩을 1997년에 넘겨 주기로 중국과 합의를 보았다. 영국 여권을 갖고 있던 홍콩 주민 300만 명이 영국으로 이주하기를 원했지만 대처 정부는 전문직과 사업가 5만 명 만 영국으로의 이주를 허용했다. 대처는 1984년에 헝가리를 방문해서 부다페스트 거리를 거닐면서 자유를 열망하는 헝가리 국민들을 격려했다. 1988년에는 폴란드를 방문해서 자유노조 관계자들을 만났고 자루젤스키 공산당 서기장에게 개혁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대처는 독일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많았다. 대처는 독일 통일이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데 반대했으나 이로 인해 유럽에서 영국이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대처는 관계 장관과 의논하기 보다는 전문 분야 보좌관들과 협의해서 결정하는 스타일이었다. 자연히 장관들은 선출되지 않은 보좌관들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처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장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웨스트랜드라는 헬리콥터 제조회사에 대해 구제금융을 주는 방안을 두고 1986년에 마이클 헤슬타인 국방장관이 사임을 했고, 1989년에는 나이젤 로슨 재무장관이 유럽통화체제에 대한 정책을 둘러싼 이견 때문에 사임했다. 1990년이 되자 다음 총선에서 대처를 앞세우고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보수당 내부에서 공공연하게 나왔다. 
1990년은 영국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이자율은 15%에 달했고 인플레이션은 10%를 기록했다. 케인즈 경제이론을 배척했던 대처 정부의 결과물로선 너무나 초라했다. 3월에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선 반정부 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해서 경찰관 400명이 부상을 당했다. 각료 두 명이 연이어 사임했고, 11월 1일엔 제프리 하우 외무장관이 사임했다. 대처 정부는 붕괴하고 있었다. 앞서 장관직을 사임한 헤슬타인과 로슨도 공개적으로 대처의 국정운영 방식을 비판했다. 헤슬타인은 당 대표에 도전하겠다고 밝혔고, 11월 20일에 열린 1차 투표에서 대처는 과반수 득표에 실패했고, 2차 투표에서도 승리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대처는 총리직에서 사임할 것을 밝혔다. 그러자 대처가 지지하는 존 메이저가 2차 투표에서 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처의 시대가 끝났다.

대처는 떠났지만 대처가 남긴 유산을 건재하다. 세금 인하와 민영화가 대처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일 것이다. 메이저 정부에서도 민영화 정책은 계속되어서 1995년에는 브리티시 레일(BR)이 민영화되었다. 그러나 철도회사 간의 경쟁을 통해 서비스를 향상시킨 것이 아니라 1개의 민간기업이 철도를 운영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철도 민영화는 가장 실패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메이저 정부에선 부정 부패 사건이 잦아서 보수당 정부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이 가중되었다. 1997년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는 ‘제3의 길’(The Third Way)과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을 내걸고 승리해서 노동당 정권이 들어섰다. 블레어는 대처 보다는 유럽을 존중했지만 대처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대처가 남긴 유산은 블레어 정부에 인계되었지만 블레어는 부(富)의 재분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점에서 대처와는 차이가 있었다.

대처는 영국의 정치적 기후를 크게 변화시켰다. 대처의 세금 인하 정책은 심대한 영향을 주었지만 실제로 세금부담이 크게 줄지는 않았다. 대처 정책으로 인해 영국은 빈부 차이가 커져서 양극화 사회가 되고 말았다. 민영화로 인한 투자기회를 포착한 소수의 승자가 있는 반면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늘었다. 대처가 집권했던 1980년대의 최고의 아이러니는 중앙정부를 약화시키겠다고 집권하고서 실제로는 중앙정부의 권한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대처리즘은 영국 사회를 도덕적으로 빈곤하게 만들어서 21세기 영국은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 계량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 c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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