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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벌린스키, “대안은 없다” (2008년)
작성일 : 2013-05-28 00:53조회 : 4,378


클레어 벌린스키, “대안은 없다” (2008년, 베이직 북스, 386쪽, 27.95 달러)

Claire Berlinski, “There Is No Alternative” (2008, Basic Books, 386 pages, $27.95)

미국인으로 영국에서 공부를 한 저자는 이 책에서 대처가 곤경에 처한 영국을 구해냈으며, 대처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따옴표로 처리한 책 제목 자체도 대처가 남인 유명한 구절이다. 하지만 책 내용이 대처에 대해 완전히 우호적이지는 않다. 여러 곳에서 저자는 대처의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을 하고 있다.

저자는 대처가 세가지 측면에서 대처가 남긴 유산(legacy)이 오늘날에서 영국과 세계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째, 대처는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를 철저하게 배척한 정치인이었다. 대처는 사회주의가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강한 나라를 약한 나라로 변모시킨다고 믿었다. 대처가 집권하기 전 영국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회주의 국가였다. 둘째, 대처는 쇠락하는 길에 접어 든 영국을 다시 일으켰다. 2차 대전 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노동당에 패배했고, 그 이후 영국은 계속 쇠락의 길을 갔다. OECD 회원국 중에 처음으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쌓였고 시체가 버려져서 치워지지 않기도 했다. 그런 영국이 이제 다시 부강한 나라로 일어 섰다. 셋째, 대처는 이런 위업을 해낸 여성이기에 한층 더 의미가 있다.

1925년 그랜섬이란 작은 도시에서 식품상의 딸로 태어난 대처의 결혼 전 이름은 마가렛 힐다 로버츠였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직장에서 화학기사로 일하면서 법률을 공부해서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보수당 정치에 관심을 갖고 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두 번 낙선한 후 1959년 34세 때 당선되어서 최연소 여성의원이 됐다. 1970년 보수당 정권이 들어서자 히스 총리는 대처를 교육장관에 임명했는데, 대처는 우유 무상급식을 중단해서 ‘아이들로부터 우유를 빼앗아 간 대처’(‘Thatcher the Milk-Snatcher’)란 명칭을 얻었다. 실업 문제가 심각해지자 히스 총리는 노조와 타협해서 쇠퇴해가는 기간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을 늘렸다. 기고만장해 진 노조는 1973년 오일쇼크가 일어난 상황에도 탄광 노동자와 전력 노동자들로 하여금 초과근무를 거부토록 해서 영국을 추위와 어둠으로 몰아 넣었다. 존재이유를 상실한 보수당은 선거에서 패배해서 노동당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1979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해서 대처가 총리가 됐을 때도 대처가 영국의 비관적인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영국은 패전국인 독일, 그리고 나치에 점령되어 전쟁피해를 당한 프랑스 보다 훨씬 낙후된 상태였다. 전후에 영국 정부가 취한 경제정책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대처가 취임하고 난 후 한두 해 동안 영국 경제는 더 나빠졌고, 대처는 인기도 없었다. 1982년에 실업자가 온건하게  계산해도 360만 명이나 됐다. 대처 취임 첫 2년 동안 영국에선 제조업의 1/4이 문을 닫았다. 실업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상점을 약탈했다. 1980년에 인플레이션은 20%에 달했다. 영국은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 있었다.

인플레이션을 악(惡)으로 본 대처는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을 주된 정책 목표로 삼았다. 대처가 취한 경제정책은 화폐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대처는 외환 규제를 철폐하고 은행에 대한 규제도 철폐했다. 대처는 화폐의 흐름을 바로 잡아서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했다. 인플레이션은 1983년 들어서 4%로 안정됐다. 하지만 1985년 들어서 인플레이션은 다시 상승했고 대처의 마지막 해였던 1991년에는 10.9%에 달했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한 대처의 정책은 당시엔 성공하지 못했는데, 화폐 공급목표를 혼돈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그 때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대처의 정책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1997년 이후 영국은 OECD 회원국들 중에서 인플레이션이 가장 낮은 국가가 되었고 영국 경제는 다시 번영하게 됐다. 대처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나이젤 로슨은 “화폐주의 정책이 유효함이 입증됐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대처는 이전 정부가 국유화한 기간산업에 대해 보조하기를 거부했다. 영국의 산업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 중심으로 급속하게 변화해 갔다. 제조업 분야에서 실직을 한 노동자는 서비스 분야에서 저임금 근로자가 되었다. 대처는 소득세 최고구간의 세율을 83%에서 40%로 인하했고, 반면 부가가치세 세율을 7%에서 17.5%로 대폭 증가시켰다. 대처는 사회적 불평등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1979년에 비해 1992년의 영국의 가계소득은 37% 상승했는데, 상위 10%의 소득은 61% 오른 데 비해 하위 10%의 소득은 18% 내려갔고, 정부 복지에 의존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어느 경제정책도 전체적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처가 강력하고 인기 있는 지도자로 태어난 계기는 포클랜드 전쟁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갈티에리는 그들이 포클랜드를 장악하면 영국은 다시는 이를 탈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 국방부도 포클랜드가 아르헨티나에 점령되면 탈환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나 영국 해군참모총장 헨리 리치 경(卿)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대처에게 “명령만 내리면 48시간 내에 기동함대를 출발시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대잠수함 작전을 주로 수행하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수상 전투와 상륙전에 취약했다. 더구나 영국군은 수천 마일을 항해해야만 했으며 군수 지원도 취약했다. 반면 아르헨티나 공군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 군대는 포클랜드를 점령했고, 며칠 후 항모 헤르메스와 인빈시블을 주축으로 한 함대가 남대서양을 향해 출발했다. 엘리자베스 2세 등 대형 여객선 2척은 병력운반선과 병원선으로 개장(改裝)되어 총 110척으로 구성된 전단(戰團)에 가담했다.

미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협상을 위해 대처와 접촉했으나 대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타협은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5월 2일, 영국 잠수함은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나로를 격침해서 아르헨티나 수병 323명이 사망했다. 5월 4일, 아르헨티나 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영국 구축함 세필드 호가 폭발해서 침몰했고, 사흘 후에는 영국 구축함 두 척이 또 침몰했다. 5월 21일, 영국군 공정부대가 포클랜드에 상륙했고, 6월 14일 영국군은 섬 전체를 장악했다. 영국군은 함정 6척과 항공기 34대를 상실했고 255명이 전사했다. 아르헨티나는 649명이 전사했다. 영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섬을 둘러싼 이 전쟁은 영국의 영예와 신뢰성을 제고시켰다. 대처의 위상이 국내외에서 높아졌으며, 1983년 총선에서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 포클랜드 전쟁 당시 전쟁 수역 밖에 있었던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를 격침하라고 명령한 데 대해 비난이 일자 대처는 나중에 “(영국 항모) 헤르메스나 인빈시블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난을 받기 보다는 벨그라노를 공격한 데 대해 비난을 받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1984년 봄, 또다시 영국의 탄광 노조가 파업을 할 징후가 보였다. 대처는 에너지 장관으로 하여금 탄광 노조 대표 아서 스카길와 대화를 하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스카길은 타협을 할 의사가 없었다. 대처 또한 이번 파업에 대해선 대비를 해 놓고 있었다. 1981년 파업에서 고통을 겪은 대처는 다음 파업에서 노조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한 대비책을 세워놓았다. 1982년까지 대처는 석탄을 전국에 비축해 놓도록 했다. 1982년에 개정된 고용법은 클로스드 숍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또한 동정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노조가 민사책임을 지도록 했다.

1984년 3월 12일, 드디어 탄광 노조가 전국적 파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의 발전소는 이미 석탄을 산처럼 쌓아 놓아서 파업의 영향은 미미했다. 작업을 하는 광부 숫자가 늘어나자 파업 지도부는 이런 광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스카길이 리비아 정부의 돈을 받았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스카길은 리비아 노조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다고 궁색하게 답변했다. 바로 얼마 전에 런던 소재 리비아 대사관에서 대사관원들이 가다피에 반대하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서 대사관을 경비하던 젊은 영국 여성 경관이 사망한 사건을 기억하는 영국민은 경악했다. 파업이 한창이던 1984년 10월 12일, 대처를 노린 폭탄 테러가 일어나서 대처의 측근 다섯 명이 사망했다. 대처는 “폭탄 테러범과 스카길이 도덕적으로 구분될 점이 없다”고 했다. 파업이 국민의 동정을 얻지 못하고 장기화함에 따라 이탈해서 복귀하는 광부들이 늘어났다. 1985년 3월 3일, 탄광 노조 대의원들은 스카길을 버리고 파업을 철회하기로 발표했다. 파업이 정부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탄광 파업의 종료는 다른 노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파업은 더 이상 유효한 도구가 아님이 분명해 진 것이다. 영국에서 파업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오늘날 영국의 노동시장은 유럽에서 가장 유연하다. 1994년에 영국의 탄광은 민영화되었고, 석탄산업은 구조조정의 길을 갔다. 석탄에 이어 철도 등 국영기업이 민영화되었다. 대처는 정부가 가격과 임금을 정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대처는 자력(自力)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처는 담대한 여성이었다. 1984년 10월 12일 밤 2시 54분, 대처가 묵고 있었던 호텔에서 아일랜드 공화군이 설치해 놓은 폭탄이 터져 대처의 측근 5명이 사망하고 대처와 남편 데니스 경은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럼에도 대처는 그 날 오전에 계획된 대로 행사를 진행했다. 1988년에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대처는 자루젤스키 총리에게 자유노조 대표 바웬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해서 관철시켰다. 대처는 자유노조 운동이 탄생한 그단스크 조선소를 방문하고 1970년에 보안경찰에 피살된 노동자들의 묘지에 헌화했다. 폴란드 노동자들은 환호했고, 영국의 강성 노조를 분쇄한 대처를 초청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고양시키려 했던 자루젤스키는 낭패감을 맛보았다.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들은 이념적인 동지였으며, 진정으로 서로를 존경했다. 레이건이 소련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쏟아 낼 때 유럽에선 오직 대처만 레이건을 지지했다. 1987년 12월 8일, 레이캬비크에서 고르바쵸브와 레이건은 중거리 핵 미사일 협정에 서명했다. 미국은 미사일 방어체제(SDI)를 지킬 수 있도록  한 이 협정은 나토에게 유리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어서 동유럽 공산정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대처는 유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대처는 특히 독일에 대해 동정적이지 않았다. 대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로타리 클럽 친구들을 설득해서 나치 치하의 오스트리아에 있던 동생의 유태인 펜팔 친구를 구출해서 그랜섬으로 데려 온 일을 생애에 있어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고 주변에 말했다. 2차 대전 중 독일 공군은 그랜섬을 공습해서 주민 78명이 죽었는데, 이 사건도 대처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젊은 대처에게 독일은 살인자이고 프랑스와 화란은 그 협력자였고, 미국은 해방군이었다.

대처는 유럽공동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럽공동체 예산의 70%는 농업보조금인데, 영국의 농업은 규모가 적지만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영국민을 상대로 예산삭감을 설득하던 대처는 유럽공동체의 방만한 농업보조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처는 또한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내는 1.5 파운드에 대해 단지 1 파운드만 되돌려 받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차액을 리베이트로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1984년에 유럽공동체는 그런 대처의 주장을 용인했다.

1989년 들어 인플레이션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대처에 대한 지지도는 하락했다. 당시 논의 중이던 유럽환율체제를 두고 나이젤 로슨 재무장관과 제프리 하우 외무장관이 대처와 대립했다. 대처는 유럽환율체제가 화폐연합의 전단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반대했으나 로슨과 하우는 이에 참여해야 한다고 대처에 반기(叛旗)를 들었다. 대처는 할 수 없이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하우를 의례적 자리인 하원 대표로 임명하고 경제보좌관이던 앨런 월터스로 하여금 로슨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도록 했다. 얼마 후 로슨은 각료직을 사퇴했다.

1990년 가을이 되자 보수당은 대처를 부담으로 생각하게 됐다. 경기는 다시 침체 국면에 접어 들었고,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대해 열세를 보였다. 1990년 10월, 유럽이사회를 다녀 온 대처는 유럽 단일화폐에 대한 반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11월 13일, 제프리 하우는 각료직에서 사임했다. 사임 연설에서 하우는 “영국이 유럽 단일통화 체제에 가입하지 않으면 고립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1월 20일,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대처에 반기를 든 마이클 헤슬타인은 152 표를 얻어 204표를 얻은 대처를 압박했다. 압승을 예상한 대처는 회의 참석차 파리에 있었고, 득표 활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당헌에 의해 요구되는 표를 얻지 못해서 2차 투표를 해야 만 했다. 11월 21일, 대처를 방문한 각료들은 대처가 2차 투표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통보를 했다. 11월 22일 대처는 사임을 발표하고, 마지막으로 하원에서 연설했다. 대처가 후계자로 지명한 존 메이저는 보수당 대표로 무난하게 선출됐다.

대처의 몰락은 대처 자신이 초래한 측면도 있다. 영국 정치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장소인 클럽에서 이루어 져 왔다. 특히 각료들은 클럽에서 자주 모였다. 대처에게는 그런 클럽 문화가 없었는데, 그 점은 장점이기도 했지만 한계로 작용했다. 점차 대처는 자신을 지지하는 각료와도 소통을 하지 않았다. 대처는 자신이 완전하다고 믿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처는 마르크스의 영향 때문에 영국이 쇠락하고 있다고 믿었다. 대처는 영국의 쇠락이 필연적이지 않다고 확신했다. 대처는 또한 사회주의가 결코 돌아 올 수 없는 길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리고 대처는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고 있던 추세를 번복시켰다. 역사가 종착역에 도착했다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예측은 잘못으로 들어났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장례식도 너무 성급했음이 이제 분명해 졌다. 이슬람 극단주의의 급속한 대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동안에 사회주의는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다시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마가렛 대처의 생각과 그가 이루어 놓은 변화는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 c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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