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진 힐리, 대통령이란 컬트 (2009년)
2013-06-30 20:23 3,329 이상돈


진 힐리, 대통령이란 컬트 (2009, 케이토 연구소, 383쪽, 12.95 달러)

Gene Healy, The Cult of the Presidency
(2009, paperback, Cato Institute, 387 pages $12.95)

미국 워싱턴에 자리잡고 있는 케이토 연구소는 보수성향의 싱크 탱크이지만 헤리티지 재단이나 미국기업연구소와는 성격이 다르다. 케이토 연구소는 하이에크 - 프리드먼의 자유주의 경제철학과, 제한된 정부와 시민적 자유의 보장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케이토 연구소는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법과 제도에 반대하고, 또 연방정부가 과다한 권한을 갖는 데 반대한다. 케이토 연구소는 이런 입장에서 조지 W.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시카고 대학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이며 케이토 연구소 부소장인 진 힐리가 펴낸 이 책은 데 미국에서 대통령 권한의 비대화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분석해서 좋은 평가를 얻었다. 책 제목에서 ‘컬트’(cult)란 ‘우상’(偶像) 또는 ‘사교’(邪敎)를 뜻하는데, 대통령에 대한 기대, 그리고 대통령이 갖고 있는 권한이 사교의 그것과 닮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국민대표형 대통령’
 
근래에 들어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이 미국을 대표하는 행정부의 수장(首長)을 넘어서 미국인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강력해 지는 것을 불신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늘었고 대통령직 자체에 대한 존경도 낮아졌지만 대통령에 대한 기대치는 매우 높다.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대표이기 때문에 무제한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식의 ‘국민대표형 대통령’(plebiscitary presidency)이 되어 미국 헌법 제정자들이 구상했던 원칙에서 벗어나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은 제한되어 있으며 특히 대외관계 설정과 전쟁에 관해서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헌법 해석이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버클리) 로스쿨 교수이던 젊은 한국계 학자 존 유(John Yoo)는 이와 정반대 이론을 제기해서 주목을 샀다. 1993년에 젊은 나이로 버클리의 헌법교수가 되어 주목을 산 유 교수는 “미국 헌법 제정자들은 대통령의 집행권(the executive power)를 전통적인 영국 헌법의 연장으로 이해했다”면서, “대통령은 자신의 독자적 판단으로 어느 때이든 어떠한 이유로든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자 유 교수는 법무부 부차관보가 됐고, 9-11 테러가 일어나자 그는 부시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법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유 교수의 주장은 헌법 제정자와 그 후의 헌법 관행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보편적 시각이다. 남북 전쟁 후의 대통령은 전쟁은커녕 주된 입법자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했다. 당시엔 대통령이 의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의원들이 대통령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20세기 들어서 대통령의 역할을 보다 확장적으로 생각하는 대통령이 등장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그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그러한데, 이들은 대통령직의 활력을 위해선 전쟁마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로버트 태프트, 워렌 하딩, 그리고 캘빈 쿨리지는 평화와 번영을 지키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 권한의 확장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있었던 탄광파업에 군대를 투입할 태세를 취했고,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 군함을 보내 파나마 독립군을 지원하라고 하는 등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학자 출신인 우드로 윌슨은 1차 대전 참전을 위해 비판자들을 탄압하고 언론을 제약했다. 그리고 워렌 하딩과 캘빈 쿨리지로 이어지는 정상화 시대가 열렸다 하딩은 윌슨이 벌려 놓은 일을 되돌려 놓았고, 1924년이 되자 정부 지출이 윌슨 시절에 비해 반으로 줄어서 재정이 흑자로 돌아섰다. 쿨리지는 ‘대통령이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반대했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DR)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이 보여준 대통령 위상을 극대화했다. FDR은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를 직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성향을 2차 대전 후에도 계속됐다. 딘 애치슨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가 없이 미군을 세계 어디에든 보낼 수 있다고 확신시켜 주었다. 미군 장병 33,000 명이 의회의 동의가 없는 대통령의 일방적 군사행동으로 한국에서 사망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 피그스 만(灣) 침공작전 실패로 큰 시련을 맛보았으나, 군부의 압력을 물리치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복한 일은 그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존슨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베트남 전쟁 동안 대통령 권한은 최고조에 달했다. 존슨은 또한 ‘위대한 사회’라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시작해서 연방정부의 역할을 대폭 확대시켰다. 베트남 전쟁과 ‘위대한 사회’는 정부의 역할을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데, 의회는 ‘통킨 만 결의’와 사회보장 입법으로 이 같은 존슨의 정책을 지지했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를 거치는 과정에서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사실상 입법을 하는 경우가 증가했고 의회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 시절에 이 같은 추세는 반전(反轉)을 맞았다.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 시절에도 FBI는 비판언론을 도청했지만 닉슨 대통령은 정적(政敵)을 도청하고 FBI와 CIA로 하여금 이로 인한 문제를 은폐하도록 지시했다. FBI는 또한 ‘반정부 행위’를 광의로 해석해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집단을 반국가 단체인양 감시했다. 민주당 선대본부에 대한 불법침입 사건이 불거지자 닉슨은 CIA로 하여금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했으나 CIA는 이에 불응했고, 그런 사실이 언론에 알려져서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란 큰 사건으로 확대됐으며 닉슨은 결국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의회로 하여금 그들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권한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워터게이트 이후에 이루어진 많은 개혁은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많은 제약을 가했다. 정치학자 클린턴 로시터가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t)이라고 불렀던 시대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로널드 레이건은 1964년 대선에서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면서 “대통령은 우리의 선생님이며 지도자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데 시대착오적인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공화당 우파가 행정부를 전과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음이 표현된 것이다. 레이건은 국민적 지지를 얻어서 1980년에 당선됐으나 의회의 다수당은 민주당이었다. 그러자 공화당에선 ‘제왕적 의회’라는 말이 나왔다. 공화당 대통령들도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전쟁권한을 행사했다. 레이건 정권에서의 그레나다 침공, 그리고 부시 정권에서의 파나마 침공이 그러했다. 1991년 걸프 전쟁 때 부시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를 얻었지만 이미 취해진 조치에 대해 추인을 요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병역을 회피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도 재임 중 몇 차례에 걸쳐 군사적 행동을 취했다. 그는 아이티와 소말리아에 대한 지상군 개입을 명령했고, 보스니아에 대한 공습을 지시했다. 클린턴은 영화 ‘왝 더 독’(Wag the Dog) 같은 군사작전을 지시한 대통령으로 기록된다. 자신의 섹스 스캔들에 대한 특별검사의 조사가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명령했는데, 이 공격은 완전한 실패였다. 클린턴은 하원이 자신에 대한 탄핵소추를 시작하자 이라크에 대한 ‘사막의 여우’ 작전을 명령했다.

이처럼 대통령의 권한을 갈수록 확대되어 왔다. 반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갈수록 하락해 왔다. 2001년에 취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첫 9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강력한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시 대통령은 TV 심야 코미디 쇼에 소재로 빈번히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모든 것은 바뀌고 말았다. 미증유의 대참사를 맞아 미국민은 그들의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합했다. 9-11 테러 후 부시에 대한 높은 지지도는 진주만 공격 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누렸던 지지도 보다 더 견고했다. 부시는 “미국이 전쟁 중’(We are at war)이라고 선언했고,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惡)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몰아 붙였다.

‘전쟁 대통령’

부시 행정부는 또한 ‘애국법’(The Patriotic Act)를 비롯한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입법조치를 마련해서 몰아 붙였고, 의회는 행정부가 하는 대로 따라갔다. 전쟁에 관한 논의 자체를 회피한 의회는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할 가능성을 견제해야 하는 기능을 포기한 것이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던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의원이 이라크 전쟁은 “그(부시)의 전쟁”(it’s his war)라고 한 데서 당시 의회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이라크 문제는 잘되든 안되든 부시가 알아서 하고 의회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부시 자신도 “나는 전쟁 대통령”(I am a war president)라고 말했다. 전시 대통령으로서 부시는 테러 의심자에 대한 구금, 감시 체제 강화, 국내 테러 발생시 군대 투입 등 실정법에 근거가 없는 조치를 취했다. 대통령의 고유한 전쟁권한을 강조했던 존 유 교수의 이론은 이 같은 조치를 취하는 데 근거가 됐다. 

9-11 직후 부시에 대한 지지도는 90%에 달했다. 그러나 2004년 초에는 50% 이하로 떨어졌고, 2005년 봄부터는 50%를 회복하지 못했다. 2005년 8월 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루이지애나를 휩쓸었을 때 부시는 전용기에서 수해지역을 가까이 내려다 보았다. 그 사진이 공개되자 언론은 지상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자신의 비행기에서 구경이나 했다고 비판했다. 강력한 전쟁 대통령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언론은 부시를 매사 비판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하원에서 30석, 상원에서 6석을 추가했고, 언론은 부시를 ‘믿기 어렵게 작아지는 대통령’(incredible shrinking president)라고 불렀다.

대통령의 자격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국가에선 “가장 나쁜 자가 가장 강력해져서 그 사회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 말은 민주국가에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일찌감치 대통령 선거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 이 시대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텔레마케팅에 능통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막대한 선거자금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많은 약속을 해야 하는데, 그런 약속이란 것은 대개 불가능한 것들이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스태미나가 넘치고 많은 미국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나면 그를 선출해 준 국민과는 멀어지기 마련이다.

1970년에 정치학자 조지 리디는 과거와 달리 요즘의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중과 격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제공되는 환경 속에서 보통사람들과는 완전히 두절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일찍이 캘빈 쿨리지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최면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아들은 항상 자신들을 숭앙하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기 마련이다”고 했다. 쿨리지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백악관에는 단지 38명의 직원만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하위직 공무원들이었다. 19세기 초에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은 오직 한 명의 비서와 전령을 두고 대통령 직무를 했다. 1차 대전을 치른 우드로 윌슨은 단지 7명의 보좌진을 두었고, 이따금 스스로 타이핑을 했다. 맥킨리 대통령이 암살된 후 5년이 지나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한 전담조직이 생겼다. 대통령 경호는 갈수록 강화되어서 이제 대통령은 일반인을 아예 접할 수 없게 됐다.   

집단적 사고의 함정

피그스 만 침공이 실패하자 케네디는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나?”하고 반문했다. 피그스 만 침공을 결정하는 백악관 회의에 참석했던 아서 슐레징거는 훗날 “자신은 이에 반대하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제출했지만, 정작 회의석상에서는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일 대학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집단적 사고의 희생자>(Victims of Groupthink)라는 책을 펴냈다. 재니스 교수는 “합의를 구하고자 하는 대외정책 결정과정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자신 주변의 참모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은 자신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그가 그것을 반드시 안다는 보장은 없다. 조지 W. 부시는 그런 점에서 문제가 심했다. 그의 보좌관을 지낸 데이비드 프럼은 “부시는 때때로 탐구심이 없었고, 그런 결과로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부시 자신도 언론 인터뷰에서 자기가 “앤드류 카드 비서실장과 콘돌리사 라이사 안보보좌관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으며 신문 헤드라인을 훑어 본다”고 말했다. 부시 백악관에서 회의론은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이런 결과로 밖에선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관론이 우세했지만 백악관은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

대통령직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

조지 W. 부시는 지나친 경우라고 하더라도 모든 대통령이 겪는 이런 현상을 겪는다. 따라서 이제는 대통령직을 정상화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란 컬트를 개혁하기는 쉽지 않다. 1950~60년대에 비해 오늘날 미국인들은 대통령의 권한을 매우 의심스러운 눈으로 본다. 그럼에도 대통령을 구원자로 보는 팬타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런 모순적 현상은 대중문화에도 나타나고 있다. <절대권력>(1997년), <왝 더 독>(1997년)이 전자라면, <인디펜덴스 데이>(1996년), <에어포스 원>(1997년)은 후자이다.

1921년에 취임해서 재직 중 병사(病死)한 워렌 하딩 대통령은 “미국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적인 것이 아니고 치유이며, 특효약이 아닌 정상화이며, 혁명이 아닌 재건”이라고 말했다. 미국인들은 대통령에게 영웅적인 리더십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권력에 대한 회의적 태도는 미국 헌법의 토대이다. 우리가 대통령으로부터 영웅적 리더십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다른 형태의 영웅이어야 한다. 진정한 영웅은 연단에서 가슴을 치고 두드리면서 자신이 무엇을 구원하겠다고 외치지 않는다. 자제의 덕목(the virtue of restraint)을 존중하는 대통령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어떤 조치가 필요할 때에는 대담하게 행동하더라도 권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할 때는 겸손할 줄 아는 그런 대통령을 오늘날 미국은 가장 필요로 하고 있다.

( c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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