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로렌스 라이트, 타워가 다가온다 (2006년)
2013-07-11 19:04 3,324 이상돈


로렌스 라이트, 타워가 다가온다 (알프레드 노프, 2006년, 470쪽, 27.95달러)

Lawrence Wright, The Looming Tower (Alfred A. Knopf, 2006, 470 pages, $27.95)

9-11 테러는 21세기를 한 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논픽션 저술가인 로렌스 라이트가 낸 이 책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생성에서 9-11에 이르는 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 어떻게 해서 오사마 빈 라덴과 아이만 알 자와히리가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되어서 알 카에다를 만들었고, 어떻게 9-11 테러를 기획하고 실천에 옮겼나를 다루고 있다. 책은 미국 정부기관들이 협력하지 못해서 막을 수 있었던 대재앙을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빈 라덴의 눈에는 그의 타깃이었던 세계무역센터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을 것이다.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인들은 세상에 미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CIA와 FBI는 미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1996년 11월, FBI 요원 대니엘 콜맨은 수단에 있던 빈 라덴 아래에서 일하다가 미국에 협력할 의사를 밝힌 자말 알 파들을 독일에서 취조하던 중에 ‘알 카에다’라는 조직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파들은 알 카에다가 1992년 예멘 폭탄 테러와 소말리아에서 미군 헬기를 격추한 반군(叛軍)의 배후라고 밝혀서 미국 요원들을 놀라게 했다. 콜맨과 그의 동료들은 알 카에다 조직의 방대함과 미국내의 연계 활동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사이드 큐트브

알 카에다의 정신적 배경은 한창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이집트 교육부의 공무원이었던 40대 초의 사이드 큐트브는 정부 장학금을 받아서 1948년 선박 편으로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워싱턴에서 영어를 배운 그는 1949년 여름에 콜로라도 주 그릴리에 있는 주립대학에 도착해서 영어 강의를 들었다. 독실한 무슬림이며 독신은 그는 미국의 물질적 풍요와 여성의 자유분방함에 저항감을 느꼈다. 그는 “미국 사회는 영혼이 없다”고 썼다. 1950년 8월에 카이로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전보다 서양 문명에 대해 훨씬 더 적대적으로 되어 있었다.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통치를 벗어났지만 절대다수 국민은 빈곤했다. 이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하난 알 바나가 세운 무슬림 형제단은 자체적으로 학교와 병원을 건립하고, 공장을 운영하면서 세력을 넓혀갔다. 바나는 세속적인 민주주의를 배척하고 이슬람 법이 모든 국가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런 믿음을 전파했다. 형제단은 악명 높은 경찰국장을 암살하는 등 폭력적 수단을 동원했고, 이집트 정부는 군을 동원해서 형제단을 탄압했다. 1952년 7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2년 후에 나세르가 실권을 장악했다. 나세르는 큐트브에게 교육장관직을 제의했으나 큐트브는 거절했고, 큐트브는 무슬림 형제단 기관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1954년 10월, 형제단 회원이 나세르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한 일이 발생하자 나세르는 가담자들을 체포해서 처형하고 큐트브도 검거했다. 큐트브는 20년 형을 선고 받고 1964년까지 복역했다. 감옥을 나온 후 6개월 만에 다시 정부 전복음모 혐의로 구속된 큐트브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나세르는 큐트브에게 항소하면 사면해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큐트브는 순교의 길을 택해서 1966년 8월 29일 교수형을 당했다.

아이만 알 자와히리

나중에 빈 라덴과 함께 알 카에다를 이끌게 되는 아이만 알 자와히리는 이집트 카이로 근교의 계획도시 마아디에서 성장했다. 저명한 의사였던 그의 부친은 유럽인들과 이집트 지식인들이 모여 살던 마아디로 이사 와서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냈다. 그의 모친은 부유하고 정치적인 가문 출신이었는데, 그녀의 부친은 카이로 대학 총장을 지냈다. 자와히리는 부친 가문의 전통대로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지만 모친 가계의 영향으로 정치사회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큐트브가 처형되자 15세이던 자와히리는 이집트에서 새로운 이슬람 운동을 위한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1967년 ‘6일 전쟁’은 이집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집트가 이런 꼴이 된 것은 나세르의 세속적 통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 나세르는 갑자기 사망했고 후계자 안와르 사다트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 화해를 제의하면서 수감 중이던 무슬림 형제단 멤버들을 석방했다. 카이로 대학 의대에 진학한 자와히리는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이슬람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카이로 대학에는 수염을 기른 남학생과 베일을 쓴 여학생이 늘어났다. 이슬람 운동이 대학가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 복무를 마친 자와히리는 자신의 과업을 같이 할 여성과 결혼을 했고, 1980년에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역에 가서 아프간 난민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했다. 아프간 접경지역에 머물던 자와히리는 소련군에 대항해 싸우는 무자헤딘의 용기에 감명을 받고 고향 마아디로 돌아왔다.

자와히리 등 근본주의자들은 이란에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선 데 감명을 받았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사다트를 저주했다. 자와히리는 단순히 지도자를 교체하는 게 아니라 기존 질서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퇴역 군인들을 지지세력으로 끌어 드렸고 무기를 자기 병원에 은익했다. 이렇게 해서 ‘알 지하드’라는 지하단체가 세력을 확장하게 됐다. 1981년 9월, 사다트는 반정부 인사 1,500명 검거를 명했는데, 자와히리는 여기서는 벗어났다. 사다트의 조치에 분개한 젊은 장교들이 사다트 암살을 모의했고, 그 해 10월 6일 사다트는 암살됐다. 가담자들은 체포됐고 자와히리도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서 자와히리는 이집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슬람주의자인 세이크 오마 압둘라 라만을 만났다. 암살 주모자 4명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고, 라만은 6개월 후에 석방됐다. 1984년에 석방된 자와히리는 수염을 깎고, 아마도 위조여권을 이용해서 튜니지아로 출국했다.

자와히리는 1985년에 사우디 아라비아에 순례자 비자를 갖고 입국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취업비자로 바꾼 그는 제다에 있는 병원에서 의사로 일을 하면서 외과 전문의 시험을 통과했다. 사우디에서 그를 만난 친지는 자와히리가 자신이 이집트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동료들에 대해 진술한 데 대해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자와히리는 제다에서 빈 라덴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제다에서 성장했고, 1967년에 59세 나이로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그의 부친도 제다에 묻혀 있다.

오사마 빈 라덴

오사마 빈 라덴의 부친 모하메드 빈 라덴은 제다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석유 사업을 시작한 아람코에서 건축 일자리를 얻어 일하던 중 현지민에게 일감을 위탁하던 회사 방침에 따라 용역회사를 세워서 돈을 벌었다. 모하마드 빈 라덴이 만든 회사는 제다에서 주택개량 사업을 했는데, 그것이 사우디 왕가의 눈에 띠어서 크게 성장했다. 사우디가 도로 등 사회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건설하게 되자 빈 라덴이 세운 회사는 급성장했다. 메디나에 있는 모스크 성지를 확장하는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의 명성은 특히 높아 졌다. 사우디가 수도를 제다에서 리야드로 옮김에 따라 건설 붐이 불었고, 빈 라덴은 다른 분야 사업으로 다각화해서 기업군을 이루었다.

모하메드 빈 라덴은 22명의 부인으로부터 54명의 자녀를 두었다. 1956년에 사업차 시리아에 갔을 때 14살 난 알리아를 데리고 와서 넷째 부인으로 삼았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1958년 1월에 태어난 아이가 오사마이다. 오사마는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사우디 왕가가 세운 엘리트 학교를 다녔다. 14세가 되던 해에 오사마는 갑자기 종교적 및 정치적 자각을 하게 되어 서방 음악과 복식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동조하게 되는데, 그것은 무슬림 형제단 소속이었던 시리아 출신 체육선생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사마는 또한 승마와 자동차를 좋아했다.

1976년에 왕립 압둘 아지스 대학에 들어간 오사마는 전공인 경제학 보다는 종교활동에 더 관심이 많았고, 학생들과 어울려서 사이드 큐트브의 책을 읽었다. 오사마는 이점에서 외국 대학에서 다니면서 서방문명에 탐익했던 다른 형제들과 달랐다.

격동하는 사우디 아라비아

1964년에 국왕이 된 파이잘은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왕자로 있을 때 여성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TV 방송을 시작하는 등 개혁적 조치를 취했다. 그의 아들 중 사우드 왕자는 외무장관이 됐고 미국에서 공부한 투르키 왕자는 정보기관장이 됐다. 1975년, 파이잘 국왕은 근본주의 와하비즘을 주창하는 조카에 의해 암살됐다. 1979년 11월에는 ‘마하드’(구세주)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이 메디나의 그랜드 모스크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사우디 정부는 난동자들을 진압하고 63명을 공개 처형했다. 1979년 말,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오사마 빈 라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제다에 머물고 있던 요르단 출신의 이슬람 성직자 세이크 압둘라 아짬은 아프가니스탄 지하드를 주창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알제리아, 이집트 등지로부터 온 도피자들이 제다에 모여들었고 사우디 정보기관은 이들에게 가짜 여행증명서를 제공했다. 카이로에 건설인력 사무소를 두고 있던 빈 라덴 그룹은 사우디를 거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려는 젊은 무슬림들의 통로가 됐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들을 만나서 격려하고 제다에 머무는 동안 편의를 제공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후 한 달이 지나서 사우디 정보국장 투르키 왕자는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투르키는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경악했고 파키스탄도 위태롭게 될 것을 우려했다. 투르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에 대해 싸우는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투르키는 자연스럽게 미국 정부와 파키스탄 정보국(ISI) 사이의 연결고리가 됐다. 오사마 빈 라덴은 파키스탄을 방문해서 아프간 국경지역을 살펴 보았고, 국경을 넘어 아프간에 들어가서 소련군과 무자헤딘 간의 전투 모습을 보게 됐다. 빈 라덴은 자기 돈을 들여서 아프간 접경 지역인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 모병소를 차렸다. 1986년 들어서 빈 라덴은 자신의 부인들과 자식들을 페샤와르로 데리고 왔고, 직접 부대를 이끌고 아프간에서 소련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소련군은 빈 라덴이 이끄는 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혔다. 빈 라덴이 이끄는 부대의 용맹성이 널리 알려졌고, 빈 라덴은 전투 중 획득한 AK-74 소총을 그 후 늘 지니고 다녔다.   

제다에서 의사로 일하던 자와히리는 1986년에 계약기간이 끝나자 페샤와르로 왔다. 페샤와르의 적십자 병원에서 일하면서 자와히리는 과격한 근본주의들과 어울렸다. 페샤와르에 머물면서 ‘아프간 지하드’를 전파하던 빈 라덴은 자연히 자와히리를 만났고, 이들의 모임이 ‘알 카에다’로 발전했다.

1988년 5월에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아프간으로 돌아간 무자헤딘 군벌들은 주도권을 두고 서로 적대행위를 시작했다. 그 해 8월, 세이크 압둘라 아짬은 빈 라덴 등과 함께 페샤와르에서 향후 방향을 논의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 때에 ‘알 카에다’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됐다. 빈 라덴이 부대를 이끌고 아프간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그런 과정에서 동굴에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쇠약해 졌으며, 의사인 자와히리가 그를 치료했다. 아프간 무자헤딘은 남부 퍄수툰 출신과 북부 부족간에 갈렸는데, 아짬은 북부 출신인 마수드를 좋아했다. 아프간 내란에 간여한 아짬에게는 많은 적이 생겼고, 결국 1989년 11월 24일에 폭발물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암살되었다.

사우디로 돌아 온 빈 라덴

1989년 가을에 빈 라덴은 사우디로 돌아왔다. 아프간에서의 투쟁이 알려져서 빈 라덴은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빈 라덴은 사우디 빈 라덴 그룹의 지분을 갖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풍요했다. 해외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던 파드 국왕에게 이런 빈 라덴은 부담스런 존재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석유가격이 폭락해서 사우디의 재정은 상황이 나빴다. 1979년 메카에서 있었던 공격 후 사우디에서 음악을 금지하는 등 통제가 강화되어서 젊은 세대는 할 일이 없었다.

빈 라덴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우디 정부는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90년 8월, 후세인의 군대는 쿠웨이트를 점령했고, 이라크 군대를 국경에서 마주치게 된 사우디 정부는 경악했다. 팔레스타인, 알제리아, 리비아, 튜니지아,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은 사우디 보다 이라크를 지지했다. 사우디는 고립감과 위기를 느꼈다. 미국이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을 준비하자 사우디는 미군의 주둔을 허용했다. 미군 중에는 여군도 많았고, 1,500명이나 되는 많은 기자들이 사우디에 취재차 입국했다. 빈 라덴은 이교도가 사우디에 들어설 수는 없다는 코란을 들어서 미군의 사우디 주둔을 비난했다. 1991년 1월 16일, 미군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쿠웨이트를 탈환하고 이라크 본토를 공격했다. 빈 라덴은 전쟁이 끝나고도 철수하지 않는 미국을 비난했고, 이를 용인하는 사우디 정부도 비난했다. 사우디 정보부를 이끌고 있는 투르키 왕자와 빈 라덴은 이제 적대적인 관계가 됐다. 1992년 3월, 빈 라덴은 다시 페샤와르로 돌아왔다.

빈 라덴, 수단으로 향하다

카불이 무자헤딘 반군에게 함락되자 아프간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전투원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이들이 떠나온 사우디 등 본국 정부는 이들을 위험인물로 간주해서 이들의 귀국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국적 없는 종교적 용병이 되어서 캐슈미르, 코소보, 보스니아, 체체냐 등 분쟁지역에 떠돌았다. 일부는 파키스탄에 남아서 현지 여성과 결혼해서 정착하기도 했다. 1989년 6월, 수단에서 극단적 이슬람주의자 하산 알 투라비가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새로 들어선 수단 정부는 수단이 국제 무슬림 공동체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고, 빈 라덴을 수단으로 초청했다.

빈 라덴은 측근을 수단으로 보내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수단 정부는 사우디 빈 라덴 그룹과 공항 건설계약을 체결하는 등 빈 라덴을 수단으로 오도록 유인했다. 1992년 빈 라덴은 아내 4명과 자녀 17명을 대동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출발해서 수단에 도착했다. 빈 라덴은 불도자 등 건설장비도 수단으로 보냈다. 수단 정부는 빈 라덴을 귀빈으로 영접했다. 이슬람 철학자이기도 한 투라비와 빈 라덴은 수단에서 잘 어울렸다. 빈 라덴은 카르툼 도심에 사무실을 열고 가져온 돈으로 토지를 사서 농사를 하고 피혁공장을 인수해서 경영했다. 빈 라덴을 따라 온 알 카에다 조직원 100명도 농사와 공장 일을 했다.

카르툼에서 10 km 떨어진 빈 라덴의 농장에는 그를 찾아 오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본국으로 돌아 갈 수 없거나 막연하게 이슬람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빈 라덴 주변으로 모여 든 것이다. 1993년 10월, 소말리아 모가디시에서 미군 헬기 두 대가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소말리아에 파견된 미군을 철수시켰다. 빈 라덴은 자신이 소말리아에 알 카에다 대원을 보냈다고 홍보했으나 그것은 과장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알 카에다 대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주었다. 빈 라덴은 갖고 간 돈으로 도로를 건설해서 수단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수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집트는 빈 라덴이 그들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항의를 받아들여서 사우디는 빈 라덴의 여권을 취소했다. 1994년 2월, 빈 라덴은 암살을 모면했는데, 그 배후는 사우디로 알려졌다. 1995년 11월 13일,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의 미군 시설 앞에서 차량이 폭발해서 미국인 5명 등 7명이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사우디 당국은 현장에서 검거된 범인들은 신속하게 처형했는데, 사우디 당국은 테러의 배후가 빈 라덴일 것으로 생각했다.

1995년 6월 26일, 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는 아프리카 통합 기구(OAU) 회의 참석차 이디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던 중 무장괴한의 공격을 받은 무바라크는 이를 간신히 피해서 다시 공항으로 돌아갔다. 이집트 당국은 암살 시도가 수단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카이로부터 국경지대에 이르는 곳곳을 뒤져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을 색출했다. 이집트 정보당국은 자와히리가 수단에 들어 와 있는 것을 알고 어린 소년을 시켜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 해 11월 19일, 자와히리의 지시에 따라 파키스탄 주재 이집트 대사관이 폭발물 테러를 당했다. 자폭 테러리스트 2명이 폭발물 250 파운드를 실은 트럭을 몰고 대사관을 돌진해서 많은 사상자를 내서 세계를 경악시켰다.

수단 정부는 빈 라덴이 수단에 머물고 있는 데 대해 부담감을 느끼게 됐다. 투라비는 빈 라덴에게 수단을 떠나 줄 것을 요구했고, 빈 라덴은 그가 많은 돈을 투자한 수단을 떠날 수 없다고 버텼지만 결국에는 수단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빈 라덴은 수단에 머물면서 1억 6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되돌려 받지 못했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2천만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빈 라덴이 갈 수 있는 곳은 아프가니스탄 밖에 없었다. 빈 라덴을 따르던 알 카에다 대원 중 일부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따라 가기로 했고 나머지는 2,400 달러와 고국행 항공기 표를 받고 각각 제 갈 길을 갔다. 수단 정부는 낡은 구 소련제 비행기를 내어 주었고 빈 라덴은 자녀 두 명과 경호원 몇 명을 대동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빈 라덴, 아프가니스탄에 돌아오다

빈 라덴을 태운 낡은 비행기는 아프가니스탄의 잘라라바드에 착륙했다.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 지역은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었다. 탈레반은 무자헤딘으로 소련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오른 쪽 눈을 잃어 버린 물라 오마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제 빈 라덴은 오마르의 통제하에 있게 됐다. 탈레반은 마드라스라는 이슬람 종교학교로부터 인적 자원을 공급받았고, 재정적으로는 파키스탄과 사우디의 원조와 헬만드 지역에서 기르는 아편 판매에 의존했다. 아프간에서의 생활을 열악했지만 빈 라덴과 그의 세 명의 부인과 측근들은 힘든 생활을 감내했다.

빈 라덴이 잘랄라바드에 도착하고 얼마 후에 탈레반은 카불을 점령했다. 소련 치하에서 아프간 대통령을 지낸 나지불라는 카불의 유엔 건물에 숨어 있었는데, 탈레반은 나지불라와 그의 형제들을 체포해서 고문하고 처형한 후 시신을 차에 끌고 다녔다. 탈레반을 후원했던 사우디와 파키스탄은 이 모습을 보고 아프간의 새 집권자들이 대단히 잔인한 집단임을 비로서 깨달았다. 탈레반은 특히 여성에 대해 공격적이었다. 탈레반은 여성의 사회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공무원의 50%, 교사의 70%, 그리고 의사의 40%가 여성일 정도로 여성의 사회참여가 높았던 아프간의 사회 인프라는 하루 아침에 마비되어 버렸다.

빈 라덴은 잘랄라바드에서 조금 떨어진 토라 보라의 동굴지대로 본거지를 옮겼다. 예언자 마호메드가 가브리엘 천사를 동굴에서 만난 것처럼, 빈 라덴은 그런 이미지로 이용해서 자신이 예언자인 것처럼 행세했다. 1996년 8월 23일에 빈 라덴이 미국에서 대한 성전을 선포한 곳도 토라 보라였다. 동굴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이용해서 미국에 대한 성전이 마치 마호메드의 뜻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토라 보라에서 빈 라덴은 그를 찾아 온 칼레드 세이크 모하메드를 만났다. 1993년에 세계무역센터에 폭발물 테러를 감행한 람지 유세프의 삼촌이기도 한 칼레드 모하메드는 빈 라덴을 만나서 미국 항공기 12대를 태평양 상공에서 폭파시키는 계획을 유세프와 같이 계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빈 라덴은 유세프에 사람을 보내서 필리핀을 방문하게 될 빌 클린턴을 암살해 주도록 부탁했다. 보안 때문에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유세프는 필리핀을 방문할 예정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암살하고자 했다. 하지만 마닐라 아파트에서 폭발물 실험을 하던 유세프는 화재가 발생하자 그대로 도망갔고 그가 남긴 컴퓨터에 있던 테러 계획이 미국 정보당국에 알려지게 됐다.

칼레드 세이크 모하메드는 민간 비행기를 빌딩에 부딪쳐서 폭파하는 등 미국을 상대로 한 여러 가지 테러 방법을 빈 라덴에 설명했다. 빈 라덴은 모하메드에게 아프간으로 와서 알 카에다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모하메드는 이를 사양했지만 9-11 테러에 대한 구상이 빈 라덴의 머리 속에 심어진 것이다.

1997년 3월, 빈 라덴은 CNN 취재 팀과 인터뷰를 했다. 빈 라덴은 이미 영국의 인디펜덴트지(紙) 등과 인터뷰를 했지만 TV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피터 버겐이 이끄는 취재 팀은 잘라라바드의 추운 산 속 진흙 동굴 속에서 빈 라덴과 인터뷰를 했는데, 걸프 전쟁 취재로 유명해 진 피터 아넷이 마이크를 잡았다. 빈 라덴은 사우디를 비난했다. 그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미국에 대해 성전을 선포했다고 말했다.

탈레반 수장 오마르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잘라라바드에 빈 라덴이머물고 있는 데 불편해 했다. 오마르는 헬리콥터를 보내서 빈 라덴을 자신이 머물고 있는 탈레반의 본거지 칸다하르로 초청했다. 빈 라덴은 칸다하르로 옮기기로 했고, 세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측근들도 칸다하르로 이사해 왔다. 빈 라덴과 그의 일행은 칸다하르 외곽의 황폐한 농장에서 텐트를 치고 살게 됐다. 이들은 먹을 것도 별로 없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

자와히리,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다

1996년에 수단을 떠난 자와히리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는 여러 개의 위조여권을 이용해서 말레이지아, 타이완,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을 여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와히리는 체체냐도 여행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조직 ‘알 지하드’를 재건할 생각을 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체체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체체냐를 이슬람화하면 코카시안 세계에 최초로 이슬람 국가가 탄생하게 되며, 그러면 거기서 중앙아시아를 상대로 지하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 자와히리는 다른 두 명과 함께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가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국경침입죄로 6개월간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러시아 당국은 그들이 국경에서 체포한 인물이 자와히리임을 몰랐지만, 이러는 동안에 알 지하드 조직은 와해됐다. 활동자금도 떨어져 버린 자와히리는 빈 라덴과 합치는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서 칸다하르로 향했다. 칸다하르에서 자와히리는 빈 라덴과 합류했고, 두 집안의 아이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나름대로 평화로운 생활을 했다. 1997년 7월, 자와히리는 이집트 정부와 이슬람주의자들이 평화협정을 맺었음을 알고 분개했다.  자와히리는 이집트 내에서 대형 테러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그 해 9월에 나일 강변 룩소 부근에서 뮤지컬 아이다가 공연될 때 폭발물을 터뜨리고자 했으나 경비가 삼엄해서 포기했다. 그 해 11월 17일, 괴한 6명이 피라미드 관광지인 룩소의 한 신전에  잠입해서 관광 중이던 외국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인 관광객 등 외국인 48명과 이집트인 4명이 사망했다. 괴한들은 일본인 관광객의 몸을 칼로 가르고 ‘외국인 관광은 안 된다’라는 쪽지를 시신 몸 속에 집어 넣는 등 잔학한 행동을 해서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서 도주하다가 전원이 자살을 했다. 이 사건은 이집트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어서 이슬람주의자들을 경계하는 효과를 초래했다. 

칸다하르에서 이집트인 들 사이에 노선을 두고 분쟁이 생겼다. 자와히리를 따르던 이집트 출신들이 칸다하르를 떠나서 자와히리는 더욱더 빈 라덴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됐다. 빈 라덴은 이집트를 상대로 한 성전이 효과가 없다면서, 앞으로의 지하드는 미국을 향해 할 것임을 다짐했다. 1998년 들어 빈 라덴은 파키스탄 언론과 인터뷰를 자주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고, 미국의 ABC 방송과도 TV 대담을 했다. 빈 라덴은 인터뷰를 끝내고 자신과 함께 찍힌 녹화 테이프에서 사우디 출신 조직원 두 명의 얼굴을 삭제한 후 방송 팀에게 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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