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루 캐논 – 칼 캐논, 레이건의 제자 (2008년)
2013-08-25 22:33 2,001 이상돈


루 캐논 – 칼 캐논, 레이건의 제자 (2008년, 퍼블릭 어페어스, 380쪽, 27.95 달러)

Lou Cannon and Carl M. Cannon, Reagan’s Disciple (2008, Public Affairs, 380 pages, $ 27.95)

루 캐논은 캘리포니아 지방신문과 워싱턴 포스트 기자로 로널드 레이건을 36년 동안 취재했고, 레이건의 공식 전기를 집필했다. 그의 아들 칼 캐논은 내셔널 저널 기자로 조지 W. 부시를 오랫동안 취재했다. 레이건과 부시를 각각 잘 안다고 생각하는 캐논 부자는 이 책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왜 성공했고, 레이건을 롤 모델로 생각한 부시가 왜 실패했나를 다루고 있다.

조지 W. 부시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경제 정책과 세금 문제에 있어서 부친 조지 H. W. 부시 보다 로널드 레이건을 따랐다. 그는 세금을 절대로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임기 중 증세를 해서 재선에 실패한 아버지의 교훈을 기억한 것이다. 레이건의 보좌관을 오래 지낸 마이클 디버는 조지 W. 부시는 레이건의 3번째 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임기가 중간을 넘기면서 공화당원들과 보수파들은 조지 W. 부시에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보수 논평가들은 부시가 ‘우익 이념주의자’라고 폄하하기 시작했다. 보수층이 부시에 대해 돌아서게 된 원인은 전쟁과 재정적자 때문이었다. 부시 정부에서의 재정적자는 주로 전쟁비용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서 결국 부시가 시작한 이라크 전쟁을 두고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공화당원들은 “그런 상황에서 레이건이라면 이라크를 침공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학계와 언론계 보다는 국민 대중에게 더 친숙한 정치인이었다. 레이건 자신도 자기는 미국민과 분리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믿음이 정치적 자신이었다. 레이건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그 점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유사했다. 정치학자 더글러스 브링클리는 20세기 대통령 중 레이건 보다 앞선 대통령은 루스벨트의 그림자에 가려있고, 레이건 이후 대통령은 레이건의 그림자에 가려있다고 지적했다. 루스벨트와 레이건은 절망적인 시절에 미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카터 행정부 시절이던 1979~80년 동안 미국은 실업률은 10%에 근접했고 인플레이션은 평균 12.5%였고, 프라임 이자율도 두 자리 숫자였다. 당시 소련은 미국보다 국방비를 거의 두 배를 쓰면서 핵 무기를 늘리고 있었고, 테헤란에선 과격 이슬람 정부가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아 두고 있었다. 1980년 선거에서 레이건은 현직 대통령 카터를 상대로 압승했고 공화당은 상원에서 다수석을 차지했고 하원에서도 의석을 늘렸다.

레이건은 세금을 낮추고 예산을 감축하는 정책을 밀고 나갔으나 국방비를 오히려 증액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레이건은 고(高)이자율 정책을 주장하는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위원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임기 첫 해에 레이건은 소득세 감축을 제안했고 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경게침체와 감세로 세수가 줄자 1982년에는 감축했던 소득세의 1/3을 부활시켰다. 1986년에는 소득세 공제제도를 감축해서 이를 많이 이용하던 부유층의 세금 부담을 늘렸다. 이로서 낮은 세금과 낮은 인플레이션이 레이건 경제정책의 상징이 됐다.

1983년 3월 레이건은 소련을 ‘악(惡)의 제국’으로 부르는 등 소련과 대립했지만 1985년 11월에 제네바에서 고르바쵸프를 만나서 핵 무기 감축협상을 시작했다. 레이건은  고르바쵸프를 모스코바와 레이캬비크에서 만났으며, 결국에는 1987년에 워싱턴에서 중거리 핵무기 협상이 타결됐다. 냉전이 안전하게 종식된 것은 레이건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인류가 아마겟돈을 겪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레이건이 핵 전쟁 악몽을 종식시킨 것이다.

조지 H. W. 부시가 1992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사람들은 그가 3선에 나올 수 없었던 레이건을 대신했다고 생각했다. 레이건의 성공은 민주당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클린턴은 중도적 입장으로 당선됐고, 그가 지나쳤다고 생각한 유권자들은 1994년 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 지배하에 두도록 했다. 2006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하자 부시가 레이건에서 이탈해서 패배했다는 말이 나왔다.

조지 W. 부시

조지 W. 부시는 2004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2004년 대선의 투표율은 61%로 전보다 높았다. 민주당 후보 존 케리는 4년 전에 앨 고어가 얻는 표보다 800만 표를 더 얻었지만 패배했다. 부시는 2000년 보다 1160만 표를 더 얻었다. 2004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상원에서 4석을 추가해서 상원의석은 55대 45가 됐다. 공화당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부시의 성공신화는 곧 무너지지 시작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정치 브로커의 부패가 부시와 공화당에 악재로 작용했고, 유권자들은 공화당의 과잉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그 결과는 2006년 선거에서 공화당 패배로 나타났다.

2001년에 취임한 후 부시는 민주당과 협의해서 자신의 공약이었던 교육개혁입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세법 개정을 통해 소득계층을 더울 세분화하고 세율을 내렸다. 그리고 9-11이 발생했다. 9-11은 부시를 단숨에 ‘전쟁 대통령’(‘war president’)로 바꾸어 놓았다. 부시는 “우리는 지치지 않을 것이며,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군은 그 해 겨울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고, 2003년 봄에는 이라크를 점령했다. 부시의 지지도는 70%를 웃돌았다.

부시의 백악관은 능률적으로 돌아갔다. 부시의 백악관은 클린턴 시절과 달랐고,또 레이건 시절과도 달랐다. 레이건 백악관에선 제임스 베이커와 에드윈 미즈 사이에  파벌 대립이 있었던 반면에 부시의 비서실장 앤드루 카드는 백악관 참모들에게 오직 부시 만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2004년 재선 운동을 주도한 칼 로브는 부시에게 걸림돌이 되는 톰 대슐 등 민주당 의원들을 선거에서 저격해서 낙선시켰다. 레이건은 민주당 지도자이던 팁 오닐 하원의장과 대화를 자주했던 것에 비한다면 부시는 민주당을 상대하지 않았다.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준비할 때도 부시는 민주당 지도자들에 대해 양자 택일 하도록 강요했을 뿐이었다. 그런 부시는 2004년 재선 후에 자신을 너무 믿었다. 하지만 부시는 정치적 자산을 그다지 갖고 있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을 찬성했지만 나중에 부시 정권에 반대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부시의 정책을 ‘신(新)윌슨주의’(neo-Wilsonian)라고 불렀다. 부시 정권에서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사 라이스는 윌슨 대통령과 1차 대전 후에 잃어 버린 평화의 기회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 출신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윌슨주의’란 ‘실패한 이상주의’(failed idealism)를 의미하는데, 부시의 이라크 정책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 그리고  부시 대통령은 살아 온 과정에서 군대 배경이 없었고, 그런 탓인지 극소수의 참모에 의존해서 전쟁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미군은 전쟁터에서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이루어 진 것은 없었다.

레이건의 짧은 전쟁

1970년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긴 후 레바논은 내란에 시달렸다. 1982년 6월,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가 파타 소속 테러리스트에 의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에 있던 PLO 무기저장소를 폭격했다. PLO가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역을 포격하자 이스라엘 군은 레바논을 침공하고 시리아 바카 밸리에 있던 시리아 방공 미사일 기지를 포격했다. 레바논 전 지역에 전투에 휩싸이자 미국도 방관할 수 없게 됐다.

그 시점에 레이건은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으로 조지 슐츠를 임명했다. 레이건은 백악관 참모들과 충돌을 빚어 온 독단적 성격의 헤이그를 교체함으로써 대외정책에 조율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조지 슐츠가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알지 못했다. 레이건은 메나쳄 베긴 이스라엘 총리에 전화를 걸어서 베이루트에 대한 이스라엘 군의 공습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시리아 군도 레바논에서 철수했다. 필립 하비브 중동특사의 권고에 따라 프랑스 공정대와 이탈리아 군이 레바논에 평화유지군으로 진주했고, 이 해병대 800명도 레바논에 도착했다. PLO 전투부대와 시리아 군대가 웨스트 베이루트를 떠나자 레바논을 평화를 되찾는 듯이 보였다. 레이건은 미 해병대 병력을 해군 함정으로 철수시켰고, 프랑스 군대와 이탈리아 군대도 철수했다.

1982년 9월 14일,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 본부에 폭탄테러가 발생해서 레바논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마일이 죽었다. 그러자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난입해서 700명 이상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레바논 사태가 다시 악화되자 레이건은 해병대를 다시 레바논에 상륙시키기로 결심했다. 당시 국방부와 합참은 미군을 레바논에 파병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레바논에 상륙한 미 해병대 병력은 1,200명이었는데 무장도 빈약한 상태였다. 1983년 4월 18일, 베이루트 주재 미 대사관에 폭탄테러가 발생해서 CIA 중동지부장 등 미국인 17명이 죽었다. 미 해병대는 베이루트 공항 부근의 낮은 지대에 주둔하고 있었고 주변의 고지는 PLO가 차지하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백악관 참모 사이에서, 그리고 국방부와 국무부 사이에서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고 레이건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1983년 10월 23일, 강력한 폭발물을 탑재한 트럭이 미군 바라크로 돌진해서 미군 241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잠시 후엔 프랑스 군 막사에서 폭발물 테러가 발생해서 프랑스 군 8명이 죽었다. 분노한 레이건은 테러의 배후가 시리아라면서 시리아에 대한 공습을 명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이러한 조치는 의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합참도 레바논에 미군이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1984년 2월 말, 레이건의 명령에 따라 미군은 베이루트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레바논 사건은 레이건에게 닥쳤던 가장 큰 시련이었다.

레이건은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참모진들이 의견 대립을 보이는 가운데 중심을 잡지 못했다. 레이건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후에는 미군 병력을 해외에 파견하는 데 매우 신중했다. 베이루트 폭발사건과 비슷한 시점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은 국무부, 국방부, 그리고 백악관 참모진이 의견 일치로 대통령에게 긴급하게 군사개입을 요청해서 이루어 졌다. 하지만 그레나다 침공도 사전 준비 부족으로 미군들은 불필요한 피해를 입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부시의 긴 전쟁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됐을 때 그는 레이건이 중동지역에 벌였던 작은 전쟁, 자신의 부친이 미완으로 남겨 놓은 이라크 정권,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 덕분에 기세가 등등해진 알 카에다의 테러활동을 인수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부시는 “그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나는 우리가 전쟁을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부시는 전쟁에 이끌려 간 것이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알 카에다에 대한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때부터 국방부의 민간 수뇌부는 아프가니스탄 외에 다른 목표물을 향한 전쟁을 공공연하게 말했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폴 울포비츠 국방차관, 그리고 더글라스 페이스 국방차관보는 처음부터 아프가니스탄 외에 이라크를 침공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딕 체니 부통령도 이에 가담했다. 반면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리차드 아미티지 국방차관은 이라크 침공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해 경악했다. 부시는 당분간 아프가니스탄과 알 카에다를 상대해야 한다고 정리했다.

더글라스 페이스 등 네오콘 그룹은 1998년에 이미 이라크에선 레짐 교체(regime change)가 필요하다면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공개서신을 보낸 바 있었다. 부시도 이 그룹에 보조를 맞추었다. 부시는 이라크에 민주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월 국무장관은 이라크를 통치하기 어려우며, 이라크 국민은 민주주의 경험이 없다면서 부시에 신중론을 피력했다. 2002년 12월,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부시에게 보고했다. 2003년 3월 19일, 부시는 전세계에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로 평화를 위협하는 무법자 이라크를 좌시할 수 없다”면서 이라크 침공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침공 3주 만에 14만 명으로 구성된 미 원정군은 바그다드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상황은 예상과 빗나가기 시작했다. 이라크는 무법천지가 됐고, 군정장관으로 파견된 제임스 가너 중장이 이유 없이 경질되고 후임으로 부임한 폴 브레머는 이라크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브레머는 이라크 군대를 해산하는 실책을 범해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전직 군인들이 반군이 되어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라크 전역을 장악하고 국경을 통제하는데 미군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그가 임명한 현지 지휘관들은 미군이 이라크에서 쉽게 철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으며, 콘돌리사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대통령에게 정보를 현실감 있게 제공하지 못했다. 2004년 선거 후 앤드루 카드 비서실장은 럼스펠드를 교체해야 한다고 부시에게 조언했으나 체니 부통령과 칼 로브 백악관 보좌역이 반대해서 이루지 못했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한 후에 부시는 럼스펠드와 이라크 고위 지휘관들을 경질했다.
 
이라크 전쟁이 이처럼 잘못되어 나가자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이 늘어났다. 이런 중 레이건이라면 이라크에 침공했겠는가 하는 논의가 생겼다. 레이건의 백악관 참모와 법무장관을 지낸 에드윈 미즈는 레이건은 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해서 침공했으며 보다 충분한 준비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책의 저자들은 레이건이 아예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저자들은 레이건은 역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그래서 군을 보내서 다른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MBA 대통령

부시는 MBA 학위를 가진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뒤늦게 들어간 부시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하버드에서의 생활을 나중에 자랑하지도 않았다. 사업 경영자로서도 부시는 텍사스 레인저 구단을 사기 전까지는 별로 였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부시는 결정적이고 대담하며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해서, 그 점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같은 톱다운 방식 의사결정은 GE의 잭 웰치와 닮았다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부시는 과도한 자기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결점이었다.

대통령으로서 부시는 자신이 믿는 사람을 철저하게 신뢰했고, 다른 소리를 듣지 않았다. 아버지 부시의 백악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카우크라프트는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오피니언을 월 스트리트 저널에 실었는데, 그것은 부시가 도무지 부친의 오랜 친구인 안보전문가에게도 의견을 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시 정부에서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지위는 너무나 확고했다. 조지프 나이 교수는 “부시가 하버드에서 MBA를 했지만 그는 좋은 관리자가 아니었다”고 혹평했다. 콜린 파월이나 콘디 라이스는 이 두 사람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렵고 중요한 문제를 주변 누구에게도 심각하게 물어 보지 않았다. 리더십에 필수적인 소통이 부재했던 것이다.

반면 레이건은 국민의 반응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레이건의 두 번째 임기 첫 2년은 실패였다. 그러나 레이건을 실패를 이해하고 회복했다, 레이건의 옆에는 하워드 베이커 등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 부시는 자신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아예 회피했고, 민주당을 설특하기는커녕 심지어 적대적으로 몰아 세웠다. 이 점에서 부시는 레이건과 전혀 달랐다.

부시의 국내정책

부시는 선거 때 자신은 “진보적인 법관을 신뢰하지 않으며, 엄격해석론자를 연방법관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시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가 임명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 샘 얼리토 대법관 그리고 연방고등법원과 연방지방법원 판사들의 성향은 레이건이 임명한 법관들 보다 더 보수주의적이다. 부시는 또한 세금 문제에 있어서 레이건을 따랐다. 취임 첫 해에 부시는 향후 10년간에 걸쳐 세금을 1조 3000억 ~ 1조 5000억 달러 감축하는 괄목할 만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부시는 2005년 9월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피해지역을 곧 방문하지 않는 등 실책을 저질러서 지지도 하락을 초래했다. 2007년 4월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나서 많은 학생이 죽자 부시는 로라 여사와 함께 방문해서 희생자와 학생들을 위로했다. 카트리나 사태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데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부시가 남긴 유산

이라크 전쟁은 부시에게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라크 상황이 악화되자 국민들은 부시로부터 더 이상 듣기를 거부했다. 부시는 국방장관, 합참의장, 이라크 주둔군 사령관을 교체했지만 국민들은 관심을 보이기를 거부했다. 베트남 전쟁의 실패는 3명의 대통령에게 책임이 돌아갔지만 이라크 전쟁은 오직 부시의 책임이었다. 부시의 지지도는 레이건 보다 후버의 그것을 따라갔다. 부시는 재임시에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나중에 평가 받은 해리 트루먼을 생각하면 마음의 위안을 삼고자 하는 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이 오래 끌자 트루먼의 지지도는 바닥을 헤맸지만, 트루먼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성공적으로 막은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레이건은 트루먼이 자기가 찍은 마지막 민주당 대통령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쓴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이라크 전쟁을 한국전쟁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부시는 트루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레이건은 자신의 생각이나 정책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서 수정하는 사람이었다. 임기 첫해에 단행한 감세가 경제를 바로 잡는 효과를 보이지 않자 카터에 의해 임명된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위원회 의장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고이자 정책을 썼다. 공화당내에서도 볼커의 정책을 두고 논란이 많았지만 레이건은 볼커를 지지했고, 이렇게 해서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었다. 레이건은 민주당 소속 팁 오닐 하원의장과 부단하게 대화를 해서 타협을 이루어내곤 했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문제가 있는 각료는 신속하게 교체했다.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그러했고, 환경보호처장, 노동장관, 내무장관 등이 교체되었다,

반면 부시는 지적 흥미는 높지만 제대로 결정을 하는데 필요한 좋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뒤늦게 기독교에 몰입한 탓인지 확신이 너무 강했고, 참모들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을 강조해서 이너 서클 내부에서도 토론이 적었다. 콜린 파월은 부시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라크 사태가 악화되고 있음에도 부시는 낙관적 생각을 했는데, 이는 마치 스테로이드를 맞고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콜린 파월이 이라크 침공을 늦추어야 한다고 부시에게 말했을 때 파월은 단순히 국무부를 대표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파월은 축적된 미군의 경험과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얻은 경험으로 하는 말이기도 했는데, 부시는 이런 경험을 무시했다. 부시는 레이건의 제자이지만, 부시는 이라크 전쟁 등 자신의 행정부가 당면했던 위기를 레이건이 소련을 상대했을 때 동원했던 원칙과 실용주의를 혼용하는 지혜를 따르지 않았다. 부시의 의도는 숭고했지만 의도가 숭고했다고 이라크 전쟁과 국내정책에서의 실패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부시는 자신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기를 거부했다.
(c)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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