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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드류 바세비치, 미국의 신(新)군사주의 (2005)
2013-11-02 18:05 2,586 이상돈


앤드류 바세비치, 미국의 신(新)군사주의
(2005년, 2012년 페이퍼 백,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 284쪽, 15.95 달러)

Andrew J. Bacevich, The New American Militarism
(2005, 2012 paper edition, Oxford Univ. Press, 284 pages, $15.95)

보스턴 대학 정치학 교수인 안드류 바세비치는 2005년에 나온 이 책에서 미국이 대외정책에 있어 군사력에 의존하는 경향은 잘못이라면서 이라크 전쟁을 비판해서 주목을 받았다.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면서, 클린턴 행정부의 바보짓과 위선을 비판했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도 재정적으로 무책임하고 해적과 같은 대외정책을 취해서 보수 정권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세계 평화를 위해 모든 전쟁을 끝내겠다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야망(‘윌슨주의’ : Wilsonian ambition)이 냉전 종식 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화두를 연다.

‘사막의 폭풍 작전’

미국은 오늘날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미군의 임무는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냉전이 종식되고 나서 미국은 빈번하게 군사력을 해외에 투입했는데, 이제 미국인들은 이런 현상에 익숙해져 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군을 지지하는 것을 도덕적 의무로 생각하고 있다. 1960-70년대에 베트남 전쟁으로 반전(反戰) 정서가 팽배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현상은 큰 변화이다. 1991년 초,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은 미군이 국민적 신뢰를 회복한 정점(頂点)이었다.

미군이 이런 성과를 올리는데 기초를 놓은 사람은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장군이다. 에이브람스는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2차 대전 중 유럽에서 조지 패튼 장군의 휘하에서 싸웠다. 1968년에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후임으로 베트남 주재 미군 사령관이 되어 전쟁의 후반부를 지휘한 그는 1972년에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참모총장으로서 에이브럼스은 민간 정책결정자들이 전쟁을 선택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참모총장이 되고 2년 만에 폐암으로 사망해서 이 같은 개혁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미군 장교단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 장교들은 존슨 대통령과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북부 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제한하고 점진적 확산(escalation)이라는 바보 같은 정책을 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미국의 중요한 국익이 걸려 있고,정치적 및 군사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있으며, 국민과 의회의 지지를 얻고 있으며, 승리할 수 있는 경우에 최후 수단으로 군사력을 사용한다”는 ‘와인버거 독트린’을 발표했는데, 이는 미군 장교단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와인버거 독트린’은 에이브럼스 장군이 남겨 놓은 유산인데, 이 원칙을 충실하게 신봉한 사람이 콜린 파월이다.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합참의장이던 콜린 파월은 ‘와인버거 독트린’을 충실하게 따랐다. 합참의장이 작전에 대한 정치적 간여를 최대한 억제했기 때문에, 작전 사령관 노먼 스워츠코프는 지휘관으로서 최대한 재량을 누렸다. 하지만 파월과 스워츠코프는 후세인의 정예부대인 공화국 수비대가 온전하게 철수하는 것을 허용해서 후세인이 재기할 수 있게 하는 실책을 범했다. 여하튼 파월은 걸프 전쟁이 향후 미군의 대외 군사개입에 있어 기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파월은 “미군이 개입할 때는 출구가 있어야 하며, 압도적 군사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를 ‘파월 독트린’이라고 불렀다. ‘파월 독트린’은 ‘와인버거 독트린’이 발전한 것인데, 미국의 대외 군사개입을 촉진하기 보다는 억제하려는 의도였다.

걸프 전쟁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군사적 행동을 정치로부터 격리시켜 큰 성공을 거둔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은 미국 군부가 염원했던 바가 이루어진 성공적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 후 미군은 인종 청소, 제노사이드, 실패한 국가, 내란 등 여러 상황에 개입하게 되었다. 미군은 세르비아를 상대로 공습을 해야 했고, 코소보 내란에도 개입했다. 그리고 9-11이란 최악의 악몽이 발생했다. 국방장관은 군 총사령관인 대통령을 위해서 국방부에 대한 민간통제를 하는 자리인데,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처음부터 전쟁을 할 의도를 갖고 장관직에 취임했다. 2003년에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합참의장 마이어스 대장은 “이라크에서 미군이 군사적으로 패배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2004년에 되자 “미군이 이라크에서 승리할 수 없음”은 너무나 분명해 졌다.

네오콘과 로널드 레이건

미군이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이라크에 개입하게 된 데는 네오콘의 영향이 컸다. 어빙 크리스톨, 노먼 포도레츠 등 소수의 논객들이 시작한 이 지적(知的)운동은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들은 1930년대에 나치의 성장을 방관해서 2차 대전이란 비극을 초래했다면서 선제적 전쟁(preemptive war)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적 가치가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등 윌슨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이 당선되자 이들은 레이건이 그들의 철학을 실천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 실천에 옮기지 않은 레이건에 실망했다. 1995년에 윌리엄 크리스톨은 ‘위클리 스탠다즈’를 창간했고, 로버트 케이건 등 새로운 이론가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케이건은 “실용주의자들은 항상 비관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라크에 대해 제한적 공습을 하는데 그친 클린턴 행정부를 비판했다. 이들의 주장은 워싱턴 포스트와 월 스트리트 저널 같은 주류(主流) 언론에 등장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이들은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에 주어진 소명(召命)”이라고 주장하는 등 제국주의적 비전을 전파했다.

네오콘 이론가들은 군사력 사용에 미온적이던 레이건 대통령에 비판적이었지만 네오콘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은 레이건 시대에 조성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과거 어느 대통령 보다 연설에서 군에 대해 언급을 많이 했고, 취임 초부터 대대적으로 군비를 확장했다. 레이건은 2차 대전 후에 퇴역했던 전함을 재무장해서 취역시켰는데, 이를 본 미국인들은 선대(先代)가 치른 전쟁을 상기하면서 애국심을 갖게 됐다. 1980년대 들어 헐리우드는 ‘사관과 신사’ ‘람보’ ‘톱 건’ 등 군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10월을 찾아라’ ‘패트리어트 게임’ 등은 베스트 셀러가 됐고 영화화되어서 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10년 전 만에도 전쟁과 군대를 비판하던 영화를 만들던 할리우드가 대변신을 한 것이다. 

‘부시 독트린’

부시 대통령은 “억제력(deterrence)이 무의미하고 봉쇄(containment)도 불가능하다면 미국은 선제공격의 특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예방적 전쟁’(preventive war)이란 ‘부시 독트린’을 선언한 것이다. 선제적 전쟁은 압도적 힘을 가해서 결정적 효과를 가져와야 하는데, 역사는 전쟁이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음을 잘 보여준다. 여하튼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부시는 그 방아쇠를 당겼다.

‘부시 독트린’의 뿌리를 찾다 보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에 군사력을 결부시킨 레이건을 보게 된다. 미국이 더 이상 경제적 번영을 구가할 수 없다고 말했던 카터를 누르고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미국인은 번영을 누려야 한다”고 설파했고,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지원해서 소련군에 맞서 싸우도록 했다. 소련군이 물러난 아프가니스탄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그 공백을 과격 이슬람 세력이 차지 했다. 조지 H. W. 부시는 걸프 전쟁이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뒤를 이은 클린턴 정부는 임기 내내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봉쇄정책을 수행해야만 했는데, 봉쇄정책은 사실상 끝없는 준(準)전쟁이었다.

9-11 테러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이라크 전쟁은 의미가 없었고 역(逆)생산적(counter-productive)이었다. 부시와 그의 측근들은 거대한 십자군 전쟁을 생각했다. 9-11 테러라는 전에 없던 비극으로 인해 이들은 잠시 역사적 기억상실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이들은 미군의 능력과 미군의 무기에 무한한 신뢰를 가졌다. 이들은 신(新)군사주의에 너무 심취했고, 미국은 끝이 안 보이는 무한 전쟁에 빠져 버렸다.

신(新)군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이 같은 신군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회와 행정부가 서로 견제하는 권력분립 원칙을 재건하고, ‘부시 독트린’을 폐기하고 군사력은 최후의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군은 국가방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유럽, 일본, 한국 등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 해외에 미군 기지를 두게 되면 미군이 해외 분쟁에 휩쓸려 갈 가능성이 많다. 또한 미국은 국민개병(皆兵)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지원자로 구성된 오늘날 미군은 마치 프랑스 외인부대와 같다. 99% 국민은 전쟁과 관계없는 생활을 하고 있고, 1% 직업군인들만이 전쟁을 하는 제도가 있는 한 신군사주의의 유혹은 커 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은 이제 항구적 전쟁(permanent war)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신군사주의를 초래한 여건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 c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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