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로메시 라트니사르, 이 장벽을 허무시오 (2009년)
2014-05-04 15:09 3,254 이상돈


로메시 라트니사르, 이 장벽을 허무시오 (2009년, 사이먼 앤드 슈스터, 229쪽, 27달러)

Romesh Ratnesar, Tear Down This Wall (2009, Simon & Schuster, 229 pages, $27.00)

1987년 6월 12일, 서 베를린을 방문 중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동서 베를린의 경계선에 서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고르바쵸프 소련 서기장을 향해서 “이 문을 여시오, 이 장벽을 허무시오”(“Open this Gate. Tear down this Wall”)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허물어 졌다. 독일은 통일됐으며 소련은 해체되었다. 영구히 지속될 것으로 보이던 냉전이 끝난 것이다. 타임지(誌) 기자인 저자는 레이건 대통령의 베를린 방문과 유명한 연설,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1987년 6월, 백악관은 레이건 대통령의 유럽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인해 지지도가 하락하는 등 심적으로 무거운 상태였다. 1986년 10월에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 있었던 레이건과 고르바쵸프의 핵무기 감축 회담은 레이건이 미사일 우주방어 체제를 고집해서 결렬되고 말았다. 고르바쵸프는 집권 후 개방정책을 들고 나왔지만, 당시만 해도 그로 인해 냉전이 종식될 것으로 믿었던 서방의 정치인이나 전문가는 없었다.

레이건은 연설이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레이건은 연설을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레이건은 대통령으로 재직 중 유명한 연설을 많이 남겼다. 베를린 방문 중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앞에서 행할 연설문은 백악관 비서실 연설문 담당관실에서 일하던 피터 로빈슨이 준비하게 됐다.  임무를 부여 받은 그는 베를린 현지를 방문해서 분위기를 익혔다.

베를린

1948년 6월, 미국과 영국은 서부 독일에 단독국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소련은 서부 베를린을 봉쇄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서 베를린에 대해 생필품을 공수하도록 명령했다. 1953년 6월, 동독에선 공산정권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소련군과 동독군은 시위대에 발포해서 267명을 살해하고서 사태를 장악했다. 동독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행렬이 이어져서 1960년까지 동독 전체 인구의 20%가 서독으로 탈출했다. 1961년 8월 12일, 동독 당국은 군과 노무자를 동원해서 서부 베를린과 동부 베를린 경계에 철조망을 설치했다. 얼마 후 동독 당국은 철조망을 철거하고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했다. 베를린 장벽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동서로 갈라진 베를린은 냉전을 상징했디.

1963년 6월 26일, 케네디 대통령은 서 베를린을 방문해서 체크 포인트 챨리와 브란덴부르크 문을 승용차 속에서 돌아 본 후 루돌프 빌데 광장에서 연설했는데, 50만 인파가 그를 환영했다. 1969년 초, 닉슨 대통령은 서 베를린을 방문해서 미국이 자유 베를린을 방어하겠다고 약속했다. 닉슨은 소련과 데땅트 정책을 추진했지만 공산권 내의 사정은 변한 것이 없었다. 1978년 7월 15일, 카터 대통령은 서 베를린을 방문해서 베를린 시민들과 타운 홀 미팅을 가졌다. 한 주민이 “베를린 장벽이 얼마나 더 서있을 것인가?” 하고 묻자, 카터는 “장벽이 미래에 제거되기를 바라지만 그 시기가 언제일지는 나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1979년 12월, 소련군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카터 행정부는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비준을 철회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던 중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이 이란인 시위대에 점거되어 미국 외교관들이 포로가 되는 일이 발생했다. 대통령 출마를 준비 중인 레이건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카터의 실패로 비난했다. 1980년 11월 선거에서 레이건은 카터를 일반유권자 득표에서 10% 차이로, 그리고 선거인단 득표에서는 489 대 89로 압승했다.

로널드 레이건

레이건은 자신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그치고 세부 사항은 참모와 장관에게 위임했다. 레이건의 철학은 좋은 사람을 주위에 두고 권한을 위임해서 정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결코 서두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는 부인 낸시 여사만 진정으로 신뢰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낼 때도 레이건은 세부사항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그것은 아마도 주지사가 되기 전에 레이건은 사무실에서 일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6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 나설 때 레이건은 포드 대통령의 데땅트 정책을 비난했다. 포드 대통령에 1976년 선거에서 카터에게 패배하자 레이건은 차기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등장했고, 1980년 선거에서 카터를 상대로 크게 승리했다. 레이건은 냉전을 종식시키고자 했는데, 이런 생각은 레이건을 지지하던 보수파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 레이건을 지지했던 미국 보수파들은 소련을 항구적인 적(敵)으로 생각했다.

레이건은 임기 초부터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두 나라가 세계를 핵 무기의 위협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크렘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레이건의 백악관은 비서실 3인방(트로이카)이라는 제임스 베이커, 에드윈 미즈, 마이클 디버가 이끌어갔는데 이들은 실용주의자들이었다. 캘리포니아 시절부터 레이건을 보좌해 온 마이클 디버는 레이건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었다. 반면에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는 리차드 알렌, 윌리엄 클라크 같은 원리주의자들이 이끌어 갔다.

스피치라이터

레이건의 백악관에서 연설문 담당관실(speechwriting office)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 스피치라이터들은 보수주의자들이었고 레이건을 거의 신화적 존재로 인식했다. 레이건은 자기에 주어진 연설문을 보고 자기가 직접 가필 수정해서 연설을 했고, 스피치라이터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레이건을 배웠다. 이들은 다(多)음절 단어를 피하고 번역하기 쉬운 단어를 선택하며, 30분을 절대로 넘지 않고, 처음은 약간 우스운 이야기로 시작하고 끝은 항상 영감(靈感)을 주는 이야기로 마치고, 가급적이면 중간에도 약간 우스운 이야기를 추가하는 것이 레이건의 스타일임을 알았다.

레이건의 취임 연설을 기초한 스피치라이터는 켄 캐치건이었는데, 그는 레이건에게 자신은 6개월 이상 백악관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가 이직하자 31살 나이의 젊은 앤소니 돌란이 연설문담당관이 되었다. 예일 대학 출신으로 기자를 지내면서 이미 퓰리처 상을 탄 돌란은 레이건이 했던 과거의 모든 연설문을 해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영국의회 연설

1982년 들어서 레이건은 프랑스, 바티칸, 영국, 그리고 서독을 순방하게 되었다.마이클 디버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최고로 높일 수 있는 이 기회를 1년 동안 준비했다. 레이건은 6월 8일 영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하게 되어 있었다. 앤소니 돌란은 23쪽에 달하는 연설문 초안을 준비해서 레이건에게 전달했는데, 여기에는 “소비에트 체제가 악(惡 : evil)이며, 기능하지 않고 있으며(dysfunctional), 결국에는 역사의 잿더미(the ash heap of history)가 되고 말 것”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다. 국가안보회의가 만들어 준 연설문 초안을 이미 거부한 레이건은 윌리엄 클라크가 전해 준 돌란의 초안을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레이건은 돌란의 초안에 스스로 수정을 해서 최종 연설문을 만들었다. 레이건은 ‘악’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대신에 폴란드 사태를 언급하고 소비에트 체제 자체 내에서도 자유를 위한 투쟁이 일어날 것이며, 서방 민주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이런 추세가 지속될 지가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 당시 영국 하원의원 중 노동당 의원들 다수가 레이건의 연설을 거부했지만 앞 좌석에 앉아 있던 마가릿 대처 총리는 열렬한 박수로서 이 연설에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크렘린은 레이건의 연설이 지구적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런던 연설을 계기로 앤소니 돌란은 레이건의 스피치라이터로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됐다. 런던 방문을 마친 레이건은 서독 본에 들러서 연방하원에서 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소련이 유럽에 배치한 SS-20 미사일에 미국이 대처할 것이며, 그럼에도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는 여론을 이해한다고 했다. 서 베를린에선 샬롯덴부르크 광장에 모인 2만 군중을 상대로 레이건은 “우리는 장벽 너머 있는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소련은 유럽을 분열하고 있는 베를린 장벽 같은 인간이 만든 장벽을 감축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연설을 마치고 레이건은 체크 포인트 챨리를 방문했다.

‘악(惡)의 제국’ 연설

그 해 11월 10일, 브레즈네프가 사망했고 KGB 국장이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했다. 알렉산더 헤이그의 후임으로 국무장관이 된 조지 슐츠는 레이건에게 소련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는 1983년 2월 15일에 주미 소련대사 도브리닌을 백악관으로 몰래 불러서 레이건과 2시간 동안 대화를 하도록 했다. 슐츠 국무장관이 소련의 새 지도부와 대화를 모색하는 동안에도 앤소니 돌란은 플로리다에서 열릴 복음주의자 대회에서 레이건이 행할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돌란은 학교에서의 기도문 독송과 낙태 같은 국내문제 뿐 만 아니라 소련 체제에 대한 비난을 연설문에 추가했다. 그는 런던 연설문에서 빠진 ‘악’이란 단어를 초안에 추가했다.

레이건은 “냉전의 양쪽을 함께 비난하는 사람들은 `악의 제국’(evil empire)의 공격적 충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 초안에 대해 백악관 안보보좌관 로버트 맥팔렌은 ‘악의 제국’이란 표현을 삭제한 초안을 대통령에게 보냈다. 하지만 돌란은 원래의 초안을 대통령에게 보내서 본인이 판단하도록 했다. 레이건은 국내문제에 대해 약간의 수정을 했지만 소련에 대한 언급은 돌란의 초안을 따랐다. 레이건의 이 연설은 폭탄선언과 같았다. 뉴욕타임스는 “레이건, 소비에트 이념을 ‘악(惡)의 핵심’이라고 부르다”고 1면에 대서특필했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자신이 알지 못한 채로 이런 연설이 이루어진 데 대해 크게 화를 냈다. 2주일 후에 레이건은 집무실에서 행한 연설에서 “전략 핵 미사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한 연구와 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전략적 방어 체제(Strategic Defense Initiative : SDI)가 탄생했다, 슐츠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은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1984년 6월 6일, 레이건은 노르망디 쁘엔 디 옥(Pointe du Hoc)과 오마하 비치에서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40주년 기념식에서 참석해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마이클 디버는 사전에 노르망디 해안 9 마일을 걸어가면서 레이건의 연설을 구상했다. 새로 백악관 연설문담당과장이 된 벤 엘리옷은 앤소니 돌란에게 오마하 비치에서 할 연설을, 그리고 새로 들어 온 페기 누넌에게 쁘엔 디 옥에서 할 연설문을 기초하도록 했다. 쁘엔 디 옥에는 40년 전에 제2 레인저 대대의 일원으로 이 곳을 공격했던 예비역들이 참석했다. 레이건은 단지 8분간 연설했는데 예비역 장병들과 참석자 대부분은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오마하 비치에서 열린 두 번째 기념식에서는 청중은 물론이고 연설을 하던 레이건 대통령도 울었다.

미하엘 고르바쵸프 

레이건은 취임 후에 군비를 확장했지만 그러면서 핵 무기를 언젠가는 없애야 한다고 믿었다. 1984년 11월 선거에서 월터 몬데일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레이건은 두 번째 임기 취임사에서 “핵 무기 증강에 한계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핵 무기를 감축할 것이며, 종국에는 지구상에서 핵 무기를 없앨 것”이라고 언급했다.

레이건은 안드로포브가 사망한 후 공산당 서기장이 된 체르넹코에게 서신을 보내서 직접 만나 회담을 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체르넹코는 1985년 3월에 사망했다. 소련 정치국은 그 후임으로 미하엘 고르바쵸프를 선출했다. 체르넹코 장례식에 참석한 조지 H. W. 부시 부통령과 조지 슐츠 국무장관에게 고르바쵸프는 “소련은 미국과 전쟁을 할 의도가 없었고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슐츠는 부시에게 “우리는 전에 없었던 소련 지도자를 보았다”고 속삭였다.

마가릿 대처는 고르바쵸프를 1984년 12월에 만났다. 대처는 레이건에게 “고르바쵸프와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알려 줬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고르바쵸프도 여느 소련 지도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 레이건은 소련과 오랫동안 석유 사업을 해 온 아먼드 해머로부터 고르바쵸프가 지금까지 보아 온 소련 지도자와 다르다는 보고를 받았다.

실제로 고르바쵸프는 달랐다. 그는 유럽에 배치한 소련 미사일 숫자를 줄이도록 했고, 핵 실험을 중단시켰다. 그는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할 뜻을 비쳤고, 오랜 친구 에두아르드 세바르나제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레이건과 고르바쵸프는 1985년 11월 19일,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예정 시간을 넘겨서 한 시간 동안 회담을 했고 이어서 양쪽 참모들이 참가한 회의가 열렸다. 레이건은 전략적 방어체계(SDI)가 소련을 위협하지 않는 순전한 방어체계라고 주장했다. 양측은 다시 교차 방문을 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레이건이 워싱턴에 돌아 오자 보수 칼럼니스트들은 레이건이 양보했다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이런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1986년 1월 28일, 스페이스 셔틀 챌린저가 공중폭발해서 우주비행사 6명과 고교 여교사가 사망했다. 챌린저 승무원들을 애도하는 연설문은 페기 누넌이 썼다. 레이건의 애도 연설이 있은 후 백악관에는 감사 전화와 전보가 쇄도했다. 4월 26일에는 소련 체르노블 원전에서 화재가 나서 방사능이 서유럽까지 날라가는 큰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인해 고르바쵸프는 핵 전쟁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고르바쵸프는 2000년까지 모두 핵 무기를 폐기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레이건의 참모들은 고르바쵸프가 미국이 전략 방어체제(SDI)를 포기하도록 술수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하튼 레이건과 고르바쵸프는 서로 워싱턴과 모스코바를 방문하기로 했으며, 이에 앞서 1986년 10월 12일, 고르바쵸프와 레이건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됐다.

레이캬비크에 왔을 때 고르바쵸프는 군축을 하기로 작정했었다. 고르바쵸프는 양국이 모든 전략 무기를 50% 감축하고 유럽에 배치된 양국의 미사일을 함께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레이건은 자신도 그 제안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면서도 군축에 대해서 검증이 필요하며 미국은 스타워스(Star Wars : SDI) 방어체계를 실험할 것이며, 그 기술을 소련에게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고르바쵸프는 그런 기술 개발은 실험실에서만 행하여야 한다고 응수했다. 레이건은 군축이 탄도 미사일에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했던 종전 입장을 버리고 고르바쵸프의 주장대로 모든 핵 무기를 감축하는 방안을 받아 드렸다. 이 같은 입장 변화를 보고 슐츠 국무장관은 반색을 했다.

고르바쵸프는 레이건이 SDI 개발을 실험실에서만 한다고 약속하면 당장이라고 군축 협정에 서명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이를 거절했다. 레이건은 자기가 SDI를 포기하면 국내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의견차이를 극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오후 6시 30분이 되자 레이건은 슐츠 장관에게 “이제 가자”고 말했다.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슐츠는 기자들에게 설명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고르바쵸프는 “레이캬비크는 실패가 아니다. 이것은 현상을 타파한 것이다”고 말했다. 옆에서 보던 고르바쵸프의 부인 라이사 여사는 눈물을 보였다.

워싱턴에 돌아온 레이건은 “우리는 전보다 핵 무기 없는 안전한 세상에 근접해 있다”고 집무실에서 언론을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모스크바로 돌아 온 고르바쵸프는 “미국 대통령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치국원들에게 설명했다.

이란-콘트라 사건

레이캬비크 회담이 있은 후 레이건은 이란-콘트라 사건이라는 재임 중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레바논에 납치되어 있는 미국인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해 이란에 무기를 비밀리에 팔고, 무기 수출에서 생긴 이윤으로 나카라과에서 활동하는 반공(反共) 반군(叛軍 : 콘트라)을 지원하는 거래를 백악관이 승인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레이건은 이러한 보도를 확인해 주는 수 밖에 없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포인덱스터 제독과 올리버 노스 중령이 직접적으로 이 사건을 지휘했지만 레이건이 인질 석방에 대해 동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건은 포인덱스터와 노스의 사임을 발표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레이건의 지지도는 20%나 떨어졌다. 의회에서는 탄핵 이야기마저 나왔다. 낸시 여사는 레이건에게 리건 비서실장을 해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레이건은 듣지 않았다. 상심한 레이건은 브리핑 페이퍼를 보는 대신 옛 영화를 다시 보는 등 일에서 손을 놓았다. 당시 백악관을 떠나려고 했던 페기 누넌은 대통령에게 사임인사를 했는데 당시 레이건이 “매우 늙어 보였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그 해 12월, 백악관은 레이건이 전립선 암 수술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분명히 레이건의 전성기는 지나간 것으로 보였다. 그 즈음 독일 주재 미국 대사는 레이건 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할 것을 국무부에 제안했다. 그는 헬무트 콜 총리가 레이건에게 독일을 방문해 줄 것으로 요청했으며, 베를린을 방문한다면 가장 좋은 시기는 1987년 6월에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G-7 회의에 참석한 직후라고 보고했다.
 
1987년은 베를린 시 750주년이기도 했다. 당시 서독에서는 퍼싱 미사일의 서유럽 배치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이 한창이었는데, 동독이 이런 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었다. 반면 서독 정부는 동독과 관계 정상화를 위한 접촉을 늘리고 있었다. 1987년 2월, 안개가 자욱한 밤에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젊은이를 동독 경비병이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동독에선 동독 체제의 실패를 서방에 알리고자 하는 시민들의 모임이 결성됐는데, 게르트 포프가 이끄는 ‘평화와 인권을 위한 이니시어티브’ 같은 단체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서방의 평화운동가들은 레이건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다. 한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일하던 스티픈 세스타노비치는 레이건이 고르바쵸프에 압력을 넣어서 동독에서의 인권 상황을 개선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벽이 없는 베를린’이란 문서를 작성했는데, 양독 간에 보다 많은 왕래가 있어야 동독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87년 초, 세스타노비치는 백악관을 떴는데, 그러면서 후임자에게 레이건 대통령이 베를린 장벽을 주목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만든 문건을 인계했다.
 
1987년 2월 4일, 레이건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서 베를린 시장이던 에브하르트 디프겐을 만났다. 그 즈음 레이건은 자신이 베를린을 방문할 것임을 알게 됐다. 언론은 레이건이 6월 12일에 베를린을 방문한다고 보도했다. 이제 백악관은 레이건이 베를린의 어디를 방문하고 어떤 연설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마이클 디버가 백악관을 뜬 후에 그가 하던 일을 인수한 빌 헹켈은 레이건의 베를린 방문이 어떤 테마를 가져야 할 지를 고민하게 됐다. 헹켈은 레이건이 독일 연방하원을 방문한 후에 브란덴브르크 문을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무부 동유럽 담당관이던 존 콘블럼은 독일 정부에게 레이건이 브란덴브르크 문 앞에서 연설을 하고자 한다고 알려 주었는데, 독일 정부는 동독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콘블럼은 레이건이 베를린에서 연설하는 경우에 포함해야 할 문언을 정리한 문건을 만들어서 국무부에 전달했다.

레이건 2기 행정부에서 도널드 리건이 비서실장을 맡은 후 연설문담당과의 영향력은 약해졌다. 돌란은 연설문담당과를 이끌고 있었는데, 페기 누넌이 이미 백악관을 떴기 때문에 베를린에서의 연설문 초안은 새로 들어 온 피터 로빈슨이 작성하게 됐다. 다트머스를 졸업한 로빈슨은 윌리엄 버클리의 소개로 백악관 연설문과에 취직했다. 돌란은 로빈슨에게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의 초안이 반영해야 할 점을 알려 주었다. 로빈슨과 연설문을 준비하는 팀은 레이건이 방문하게 될 베네치아와 베를린을 사전에 답사하면서 레이건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를 미리 느껴보았다. 특히 로빈슨은 미 공군 헬리콥터를 타고 상공에서 베를린 장벽을 내려다 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로빈슨은 레이건의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을 준비하게 됐다. 한편 존 콘블럼이 작성한 문건은 나중에 백악관 연설문과에 참고용으로 전달되었는데, 로빈슨은 그런 문건의 존재는 알았지만 사전에 참조하지는 않았다.

세 베를린에서 로빈슨은 워싱턴에서부터 알았던 독일인 친구 디히터 엘즈 부부가 주선한 모임에 참석했는데, 잉글보르크 엘즈가 “고르바쵸브가 진심으로 개방을 원한다면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말한 데서 큰 영감을 얻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로빈슨은 돌란을 만나서 레이건이 베를린에서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돌란은 “그것이야말로 대단한 발상이야”라면서 동조했다.

연설문 초안 완성

1987년 초, 레이건은 아직도 이란-콘트라 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낸시 여사의 조언에 따라서 레이건은 “자신이 인질을 구하기 위해서 무기를 이란에 팔았다”고 시인하는 연설을 했다. 레이건은 안보보좌관에 프랭크 칼루치를 임명한 데 이어서 2월 말에는 하워드 베이커 상원의원을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레이캬비크 회담은 실패했지만 고르바쵸프는 중거리 핵 미사일을 폐기하는 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고르바쵸브는 레이캬비크 회담을 좌초시킨 미사일 방어체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레이건은 슐츠 장관을 급히 모스크바로 보냈고, 고르바쵸프를 만나고 온 슐츠는 크렘린이 중거리 핵 미사일을 철폐하는 데 진지하다고 레이건에게 보고했다. 레이건은 슐츠에게 “자신이 미국과 소련이 이런 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윌리엄 버클리가 발행하는 내셔널 리뷰지(誌)에 레이건이 원칙을 팔았다고 비난하는 닉슨과 키신저의 논평이 실리는 등 보수파들이 반발을 했다. 레이건은 자신이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고 버클리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로빈슨은 연설문 초안을 만들어서 돌란과 의논을 하고 수정을 거듭했고 이를 백악관 다른 부서에 의견수렴차 전달했다. 1987년 초, 당시 비서실장 도널드 리건은 이례적으로 돌란과 로빈슨을 불러서 연설문 초안이 지나치게 대립적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국가안보회의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국무부는 “독일 주재 대사관이 연설문 초안이 지나치게 대립적이라고 생각한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5월까지 지속된 이러한 과정에 로빈슨은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문장을 용케도 살아남았다. 6월 1일, 돌란은 대통령에게 최종 연설문안을 전달했다. 돌란이 전달한 연설문에는 “이 문을 여시오”라는 부분이 독일어로 되어 있었고, 독일어 발음이 표기되어 있었다. 유럽으로 출발하기 5일 전에 레이건은 외국 TV 기자 6명과 인터뷰를 가졌다. 한 기자가 “당신이 베를린에 가면 고르바쵸브에게 무슨 말을 할 예정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레이건은 “우리가 모두 믿고 있는 바를 말할 겁니다. 독일은 통일되어야 하고, 장벽은 허물어 져야 한다고 말입니다”고 답했다.
 
유럽 방문

70이 넘은 레이건에게 해외 방문은 육체적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레이건은 임기 초에 브라질에 방문하던 중 “볼리비아에 오게 되어 매우 즐겁습니다”라고 건배사를 해서 고십에 오른 적이 있다. 레이건은 외국에서 회담을 하던 중 간간히 졸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백악관 참모들은 유럽 방문 일정을 여유롭게 짰다.
 
6월 3일 워싱턴을 출발한 레이건 부부와 칼루치 안보보좌관 등 일행은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레이건은 오래 된 빌라에 이틀 간 묵으면서 보고서를 읽었다. 6월 5일, 백악관 비서실 부실장 켄 두버스타인이 베를린에서 행할 연설문을 레이건에게 가져왔다. 그러면서 두버스타인은 슐츠 국무장관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표현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한다고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연설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연설문을 읽어 본 레이건은 “매우 잘 됐다”고 하면서, 장벽에 관한 표현은 “그대로 두겠다”고 말했다.

레이건에게 전달된 연설문은 최종안이 아니었다. 백악관에선 연설문에 포함된 사실 체크와 표현을 계속 검토하고 있었다. “이 문을 여시오”라는 문장은 아직도 독일어로 되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레이건을 수행하던 칼루치 안보보좌관에게 최종 연설문안이 팩스로 전달되었다.

베네치아에서 열린 G-7 경제정상회담에서 참석한 레이건은 구체적 안건에 대해선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고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 같은 의제가 나오면 레이건은 슐츠 국무장관과 베이커 재무장관으로 하여금 답하도록 했다. 동행 취재한 NBC 방송의 안드레아 미첼 기자가 “왜 서유럽 사람들이 대통령 보다 고르바쵸프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질문하자, 레이건은 웃으면서 “그가 군비축소를 제안한 최초의 소련 지도자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답했다. 레이건이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고 온 후에 로마에선 폭발물이 투척되고 차량이 폭발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레이건은 다음 행선지인 베를린으로 향했다. 서 베를린은 도시 창립 7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 페스티벌을 사흘 동안 열었다. 6월 6일 밤, 젊은 동독인 수백 명이 이 음악 페스티발 음악을 듣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문 동쪽에 모여들었다. 동독 당국은 경찰을 동원해서 군중을 해산시켰다. 그 다음 날 1만 명에 달하는 젊은 군중이 모여서 “장벽을 사라져야 한다”고 외쳤다. 더 많은 동독 경찰이 동원돼서 군중을 해산시켰다. 6월 8일에도 2천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서 “장벽을 허물라”는 등 구호를 외쳤다. 일부 군중은 러시아 대사관 앞에 가서 “고르비, 고르비”하고 외쳤다. 그 날 밤 최소한 120명이 체포됐다. 비록 동독 경찰에 의해 시위는 곧 진압됐지만 동독에서 1953년 이후 처음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스타시의 비밀서류는 당시 동독 정부가 레이건의 베를린 방문이 동독에서 소요를 야기할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하고 동 베를린, 특히 브란덴부르크 문 부근에서의 집회에 대해 경계령을 내렸음을 보여주었다.
 
레이건의 베를린 방문은 서 베를린 당국에도 우려를 야기했다. 서 베를린 시당국은 레이건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연설하는 경우에 서 베를린에서 시위를 야기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연설을 반대했다. 하지만 서 베를린 시에서 안보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행정권한은 미국 정부가 갖고 있었다. 서 베를린 시 당국은 브란덴브르크 문 연설에 참관할 수 있는 청중의 수를 15,000명으로 제한하고자 했다. 반면 미국 대사관은 40,000명이 참관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미국 대사관은 서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 외교관과 군인의 가족만해도 10,000명이 되고 서 베를린에 위치한 다국적 기업 직원과 가족이 참석하려면 그 정도 인원이 돼야 한다고 계산했다. 서 베를린 주재하고 있는 고위 미국 외교관인 존 콘블럼과 그의 스태프는 4일 동안 작업해서 40,000명 초청자 리스트를 작성했다.

백악관 경호실은 레이건이 연설 중에서 동 베를린에서 날라오는 총탄에 피격될 가능성에 대해 걱정했다. 그래서 이들은 레이건의 뒤쪽에 방탄 유리 방어막을 치기로 했다. 한편 독일 정부는 서유럽 내의 좌파 세력이 레이건의 베를린 방문을 계기로 대대적인 시위를 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실제로 6월 11일, 서 베를린 중심지 상업지구에선 3만 명이 참석한 레이건 반대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는 평화로웠지만 2,000명에 달하는 과격파들이 검은 마스크를 쓰고 화염병을 던지는 사태로 번지자 서독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해서 진압했다. 서 베를린 경찰은 이들이 레이건이 연설을 하게 되어 있는 그 다음날에도 더 큰 폭력시위를 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사전에 파악했다.

(계속)


존 디긴스, 로널드 레이건 (2007년)(계속) 
로메시 라트니사르, 이 장벽을 허무시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