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데이비드 호로위츠, 교수들 (2006)
2008-02-27 00:13 1,852 관리자




미국을 저주하는 엉터리 좌파 교수 101명

데이비드 호로위츠, 교수들 (2006, 레그너리 출판사, 448쪽)
David Horowitz, The Professors – The 101 Most Dangerous  Academics in America
                                              (2006, Regnery Publishing, $27.95)

6 25를 ‘실패한 통일전쟁’으로 규정한 강정구 같은 황당한 교수가 미국에도 적잖게 있는데, 9 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작은 아이히만(little Eichmans)’으로 부른 워드 처칠이 대표적이다.

‘처칠 妄言 사건’을 계기로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학자 101명’이란 부제를 붙인 이 책을 펴냈는데, 좌파 이념에 병든 미국 대학의 참 모습을 잘 보여준다. 호로위츠는 1960년대에 좌파 운동에 몸담았다가 보수로 전향한 후 진보세력의 위선을 폭로하는데 앞장서 오고 있다.

뉴욕州 북부에 자리 잡은 해밀튼 대학은 학부 중심의 사립대학(‘liberal arts college’라고 부름)으로, 동북부 대학이 그러하듯이 진보 성향이 강하다. 이 대학의 ‘性, 사회 및 문화에 관한 커클랜드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낸시 라비노위츠 교수는 2004년 가을학기에 수전 로젠버그를 방문교수로 초청했다.

문제는 로젠버그가 좌파 지하조직 「웨더 언더그라운드」의 멤버로 1981년 10월에 뉴욕州 나누엣市에서 발생한 현금 수송차량 강도사건에 가담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1984년 11월 뉴저지 州 체리 힐에서 폭발물과 무기를 비밀창고에 옮기던 중 체포되어 58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클린턴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1981년 강도사건에선 호송원 1명과 경찰관 2명이 사망했다.

로젠버그를 초청한 라비노위츠 교수는 공산주의자 변호사로 주로 좌익 폭력세력을 변호했던 빅터 라비노위츠의 딸이다. 빅터 라비노위츠의 파트너였던 레오나르드 보우딘 변호사의 딸인 캐시 보우딘도 「웨더 언더그라운드」의 멤버로 1981년 현금 호송차량 강도사건에 가담했었으니, 좌익이 대물림함을 잘 보여주었다.

수전 로젠버그를 방문교수로 초청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1981년 현금차량 강도사건이 일어난 마을 출신인 한 학생이 문제를 제기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뉴욕주의 경찰관 단체가 항의를 했고, 해밀튼 대학의 동문회도 경찰관 살해범이 교수가 될 수는 없다고 나서자 대학 당국은 로젠버그 초청계획을 취소했다. 그러자 라비노위츠 교수는 콜로라도 대학의 과격한 좌파 교수인 워드 처칠을 공개강연 연사로 초빙했다.

워드 처칠의 경우

처칠은 9 11 테러가 일어나자 세계무역센터에서 죽은 사람들은 “트윈 타워의 성역에 숨어 있던 작은 아이히만들로서, 이들에게는 이 보다 더 효과적인 징벌이 없다”고 썼다.

처칠은 미국이 나치 독일 같은 존재이고 세계무역센터에서 일하는 민간인들은 미국 시스템의 기술관료이기에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해밀튼 대학의 몇몇 교수들이 처칠 초청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라비노위츠는 표현의 자유라면서 초청을 강행했다.

그러나 당시 그 대학 2학년 학생이던 매튜 코포는 처칠의 강연 초청에 반대할 개인적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세계무역센터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코포는 처칠 초청계획을 폭스 뉴스에 제보했고, 그러자 영향력이 큰 폭스 뉴스의 빌 오라일리는 처칠과 해밀튼 대학을 정면으로 규탄했다. 해밀튼 대학에는 엄청난 항의가 몰려 왔고 결국 대학은 처칠의 강연을 취소했다.

폭스 뉴스의 보도로 이제는 콜로라도 대학이 주목을 받게 됐다. 처칠은 이 대학의 소수인종학(Ethnic Studies)이란 이상한 학과의 정교수로 연봉 12만 달러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박사학위도 없고 학술논문도 발표한 적이 없었으며, 그가 받았다는 석사학위도 1970년대에 생긴 한 실험대학에서 받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체로키 인디언이라는 이유로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의해 교수가 됐다. 처칠은 미국이 인디언 부족과 지하 좌익단체를 박해하고 전복하려 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엮은 책을 여러 권 썼다.

콜로라도의 신문은 “처칠의 책과 논문에는 표절한 부분이 많다”고 폭로했다. 처칠은 인디언 단체의 명예회원일 뿐이고 인디언 혈통이 아님으로 교수 임용이 부정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빌 오라일리는 처칠이 파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콜로라도 주지사도 대학이 처칠을 파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진보 교수들은 이런 여론의 압력은 대학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면서 연판장을 돌렸다. 콜로라도 대학은 교수의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하지만 처칠 교수의 학문적 정직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조사에 들어갔다. 2006년 5월 대학의 조사위원회는 전원일치로 “처칠의 저술이 사실왜곡과 표절 등으로 인해 학문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판정했다.

베트남 전쟁 反戰 운동가들이 대거 대학으로 진출
 
문제는 처칠 같은 교수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호로위츠는 현재 미국 대학교수 중 진보성향 교수는 보수성향 교수에 비해 5배나 많다면서, 미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는데 비해 교수 집단이 좌경화 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다고 했다.

베트남 전쟁 시절에 反戰운동을 했던 급진파들은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1970년대에 대학생 인구가 늘자 이들이 대학교수로 대거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대학을 학문과 진리의 전당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정치적 아젠다를 전파하는 장소로 생각했다.

이들은 흑인학, 여성학, 평화학, 세계정세연구 같은 괴이한 學際(학제) 연구과목을 많이 개설했다. 정해진 틀이 없는 이런 과목을 통해 좌파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이념을 주입한 것이다. 이런 교수들이 인사권을 장악해서 오늘날 인문사회 계열은 진보좌파 일색이 되고 말았고, 보수 성향을 띤 학자는 교수로 임용되기 어렵게 됐다.

호로위츠는 미국에 교수가 617,000명이 있는데, 그 중 25,000‐30,000명이 좌파라고 평가했다. 그는 개인을 총체적으로 판단하는 기법을 이용해서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101명의 좌파 교수를 선정해서 이 책에 담았다. 전공과 무관하게 과격한 정치적 선전을 하는 교수, 교실에서 정치적 토의를 하는 교수, 유대인 기독교인 및 백인에 대해 공공연하게 차별적 언동을 하는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호로위츠가 선정한 좌파 교수들의 면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콜럼비아 대학의 노골적인 공산주의자 에릭 포너, MIT의 反美 反유대주의자 노엄 촘스키, ‘민중의 미국사’란 수정주의 역사책을 쓴 보스턴 대학의 하워드 진, 9 11과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건물 폭파를 미화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마이클 다이슨, 마오쩌둥 찬양자인 듀크 대학의 프리데릭 재미슨, 9 11 테러는 미국의 壓制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고 한 조지타운 대학의 존 에스피스토와 이본느 하다드, 페미니즘과 비판인종이론을 법학에 도입한 조지타운 로스쿨의 마리 마쓰다 등 유명한 좌파 교수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자기가 공산주의자이며 레스비안 행동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캘리포니아 주립대(산타 쿠르즈)의 베티나 애프테커, 과격한 페미니스트인 뉴욕 시립대학의 벨 후크, 좌파 저널 ‘네이션’의 편집자인 콜럼비아 대학의 빅터 네이버스키, 平和學을 연구한다는 퍼듀 대학의 해리 타그, 평화학을 가르치면서 반정부 시위를 조직해 온 코넬 대학의 매튜 에반겔리스타 등도 명단에 포함돼 있다.

테러리스트에서 교수가 된 안젤라 데이비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산타 크루즈)의 앤젤라 데이비스 교수이다. 1960년대에 허버트 마르쿠제의 좌파 이론에 깊이 빠진 앤젤라 데이비스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UCLA에 교수로 채용되었으나 공산당 가입사실이 알려져서 해고됐다가 소송 끝에 복직했다.

1970년에 그녀는 감옥에 갇힌 블랙팬더 동료를 구하기 위한 법원을 습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판을 받았으니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데이비스는 그 후에도 쿠바가 가장 이상적 국가라는 등 사회주의 혁명을 주창했는데, 지금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교수로 ‘良心史(양심사)’라는 괴상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월간조선 200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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