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제임스 그린, 헤이마켓에서의 죽음 (2006)
2008-04-27 00:27 3,023 관리자


노동절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사건’의 진실

제임스 그린, 헤이마켓에서의 죽음 (판테온 북스, 2006, 383쪽, 26.95달러)
James Green, Death in the Haymarket (Pantheon Books, 2006)

5월1일은 ‘근로자의 날’인데, 이 날을 흔히 ‘메이데이’라고 부른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우리나라 신문에는 ‘메이데이’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기사가 등장한다.
                [1886년 5월1일 시카고에서 당시 하루에 16시간 노동을 하던 근로자들이 8시간 노동을 주장하면서 파업을 일으키자 경찰이 발포해서 소녀 1명을 포함한 근로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 30만 명이 시카고 시내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누군가 폭탄을 투척해서 아수라장이 됐다. 법원은 그 책임을 물어 파업지도자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나중에는 이 사건의 기획자가 자본가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5월1일을 메이데이로 정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소설에 가깝다. 이 사건은 자본가에 의해 기획된 노조 탄압이 아니었다. 당시 시카고 인구가 80-90만 명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3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최근 매사추세츠 대학의 제임스 그린 교수가 펴낸 이 책 ‘헤이마켓에서의 죽음’은 120년 전에 있었던 헤이마켓 사건을 생생하게 그려내서, 사건의 진실과 사건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알게 해 준다.

산업의 중심지 시카고는 ‘혁명 전야’ 분위기 

남북전쟁이 끝난 후 시카고는 급성장했다. 많은 공장이 세워져서 동부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건너온 노동자들로 북적거렸다. 철도 교통의 중심지인 시카고는 처리하는 물동량도 대단했다. 시카고의 기업가들은 대단한 富(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긴 노동시간에 시달렸다. 독일 등 유럽에서 온 노동자들은 시카고 북쪽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는데, 그곳의 생활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당시 유럽에선 마르크스가 이끄는 공산주의 운동과 바쿠닌이 이끄는 아나키즘이 사회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었다.

              산업화로 인한 계층간 갈등이 위험수위에 달한 시카고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성숙한 것처럼 보였다. 시카고의 기업가들과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화당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시카고 트리뷴紙(지)는 위기를 느꼈다.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해서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감축을 내걸고 파업을 했다.
1867년 일리노이 주는 미국 최초로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는 주법을 제정했다. 사업주들은 8시간 노동제에 저항했다. 노동자들은 당시 관행이던 10시간 노동에 따른 총액 임금을 줄이지 않고 근로시간만 8시간으로 단축할 것을 요구하면서 파업과 시위를 빈번히 벌였다.

              1886년 5월 4일 밤, 헤이마켓

              1877년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자 경찰이 강경하게 진압해서 100여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 후 노동자와 경찰이 거리에서 충돌하는 일은 일상사가 돼버렸고, 경찰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사업주들은 무장 경호원들을 고용했다.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은 테러를 공공연하게 주장했고, 일부는 실제로 총기와 폭발물을 소지했다.
              1886년 5월1일을 기해 시카고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내걸고 市(시) 전역에서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맥코믹 농기구 제작소는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조업을 하고 있었다. 5월3일 맥코믹 제작소에서 파업 노동자들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생겼고,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5월4일 저녁 7시30분, 약 1500명의 군중이 시카고 다운타운의 헤이마켓이라고 부르는 농산물 장터에 모여 전날 있었던 발포 사건에 항의하기 위한 집회를 열었다. 집회를 주도한 독일 태생의 사회주의자 오거스트 스파이스는 대중연설가로 잘 알려진 앨버트 파슨스를 소개했다. 파슨스는 한시간 정도 연설을 했다. 마지막으로 새무엘 필던이 연단에 올라왔을 때에는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필던이 경찰의 폭력을 비난하는 연설을 마칠 밤 10시20분 경에 청중은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 때 176명으로 구성된 시카고 경찰 支隊(지대)가 헤이마켓으로 다가 왔다. 경찰 책임자는 집회 군중에게 해산을 명했다. 그 순간 어디로부터 폭탄이 날라와서 폭발했고, 놀란 경찰관들은 어둠 속에서 총을 발사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폭탄이 터지자 아나키스트들이 경찰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경찰이 응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은 군중과 경찰이 뒤엉켜 있어서 경찰이 쏜 총탄에 경찰관과 민간인이 맞았던 것이다. 한시간 후 경찰 지원병력이 도착해서 상황을 수습했다. 경찰관 1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6명이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으며,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민간인 몇 명도 총상으로 사망했다.

                앨버트 파슨스와 오거스트 스파이스

              5월 5일자 시카고 트리뷴이 전한 헤이마켓 사건의 전모는 모순된 면이 많았다. 하지만 사실이 어떠하든 간에, 아나키스트들이 주최한 집회에서 폭탄이 터져 경찰관이 죽고 다쳤다는 사실에 여론은 경악했다. 미국 전역의 신문은 “가해자들을 처형하라”는 사설을 연일 실었다. 
              앨라바머에서 태어난 앨버트 파슨스는 소년 시절에 텍사스로 이사한 후 인쇄기술을 익혔다. 남북전쟁 중에 南軍(남군)으로 참전했으나, 전쟁 후에는 대학을 다닌 후 해방된 흑인을 돕는 일을 했다. 파슨스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멕시코계 혼혈 흑인 여성 루시를 만나 1872년에 결혼했다. 남부에선 흑백인 부부가 살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2년 후 시카고로 이주했는데, 그 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시카고의 신문사에 인쇄기술자로 취직한 그는 노조활동에 열성적이었다.

              1870년대 시카고는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들로 붐볐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가 20만 명이 넘어서 전체 시카고 인구의 40%, 전체 노동자의 56%를 차지했다. 독일계 이주자가 특히 많았는데, 17세에 시카고에 도착한 오거스트 스파이스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스파이스는 역사책을 많이 읽은, 지적 호기심이 많은 젊은이였지만 가구 공장에서 일했다. 
            시카고 북부 외곽에는 모여 살던 유럽 출신 노동자들 사이엔 사회주의가 만연했다. 시카고의 기업가와 정치인들은 경찰력을 강화해서 노동자의 소요에 대처했다. 1877년 여름, 경기침체로 인해 임금을 삭감당한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파슨스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파슨스는 해고됐고, 경찰로부터 도시를 떠나라는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파슨스는 노동자 정당 운동에 나서게 됐다.

            스파이스는 독일어로 발행하는 ‘아르바이터 짜이퉁’(노동자 신문)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다. 그는 신문의 독자층을 넓혀서 사회주의 혁명 이념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시켰다. 경찰과 기업의 경호대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본 스파이스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단체가 무장을 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
            1884년에 스파이스는 ‘아르바이터 자이퉁’의 편집자가 되었고, 파슨스는 이 신문의 영어판을 책임지게 됐다. 이즈음부터 이들은 마르크스의 계급혁명 뿐 아니라 아나키즘에도 빠져들었다. 시카고의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 이들은 서로간에 우정을 다졌다. 

            운명의 5월 4일

            1886년 5월 3일 스파이스는 맥코믹 농기구 제작소 파업 시위에서 경찰이 노동자 6명을 죽였다는 과장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복수하라 ! 노동자들이여, 무기를 들라 ! 당신들의 고용주들이 피에 굶주린 경찰을 동원해서 오늘 오후 맥코믹에서 여섯 명을 죽였다.”고 쓴 전단을 수백 장 인쇄해서 돌렸다.
            한편 조지 엔젤, 아돌프 피셔 등 보다 과격한 아나키스트들은 다음 날 저녁에 헤이마켓에서 군중집회를 열기로 하고 전단을 인쇄해서 뿌렸다. 집회의 사회를 보기로 한 스파이스는 파슨스에게 연설을 부탁했다. 그러나 스파이스는 루이 링그와 윌리엄 셀리거라는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그날 셀리그의 집에서 사제 폭탄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5월 4일 밤에 헤이마켓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셀리그의 집을 수색해서 폭탄을 압수했다.

          “누가 폭탄을 투척했고 누가 총을 먼저 발사했나” 하는 문제가 쟁점이 됐다. 경찰관들은 “폭탄이 터지자 총탄이 그들을 향해 날라왔다”고 증언했다. 반면 노동자들은 그들의 집회가 평화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현장을 목격한 사업가 3명은 “노동자들의 집회가 평화적이었고, 경찰이 폭발 소리를 듣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총상으로 사망한 경찰관들은 동료들이 쏜 총에 맞은 것으로 밝혀 졌다.
            파슨스의 아내와 친구들은 파슨스에게 시카고를 떠나라고 했다. 파슨스는 기차 편으로 일리노이의 친구 집을 거쳐 위스콘신의 사회주의 동료의 집에 숨었다. 5월 6일 경찰은 영장도 없이 ‘아르바이터 짜이퉁’의 사무실을 수색했고, 스파이스, 펠던, 스와브 및 링그를 연행했다. 스파이스는 폭탄 투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5월7일에 체포했다가 실수로 풀어 준 루돌프 슈나우벨트라는  아나키스트를 폭탄 투척혐의자로 수배했다. 슈나우벨트는 경찰에서 풀려 난 후 사라져 버렸다. 경찰은 파슨스도 수배했다.

            세기의 재판

          시카고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스파이스 등을 변호할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벌였다. 두 명의 젊은 변호사 외에 북군 대령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윌리엄 블랙이란 유명한 변호사가 사건을 맡기로 했다.
          6월 5일에 대배심은 사건을 법원에 이송했다. 뉴욕 출신의 조지프 개리 판사가 사건을 담당하게 됐다. 블랙 변호사는 재판 연기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블랙은 파슨스의 부인 루시를 만나 남편의 소재에 대해 물었다. 블랙은 파슨스가 폭판 투척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는데도 그가 도피하고 있으면 죄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법정에 출두해서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6월 21일 재판이 시작되자 법정은 방청객과 기자들이 가득 찼다. 오후에 파슨스가 법정에 들어와서 판사에 대해 자기가 무고함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겠다고 요청했다. 판사는 이를 거부했고, 파슨스가 다른 피고인들 옆에 앉도록 했다. 배심원 선정 절차에서 블랙 변호사는 “배심원 후보자들이 사건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검찰은 “스파이스가 폭탄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았다”는 두 명의 증인을 내세웠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들의 증언은 어설펐다. 그리넬 검사는 “피고인들이 폭탄을 제조한 집단이며, 경찰과 사유재산을 파괴하려고 모의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검사는 “피고인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블랙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살인죄로 기소되었기에, 이들이 폭탄을 투척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무죄”라고 주장했다. 시카고 시장 카터 해리슨은 “사건 당일에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평화로워 보였고, 그래서 자기는 경찰서장에게 경찰관들을 돌려 보내라고 말하고 귀가했다”고 증언했다. 재판은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들을 처형해서 노동운동을 잠재울 수 있다면 우리들을 처형하라”

            개리 판사는 “폭탄이 피고인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투척됐다 하더라도 피고인들을 유죄로 판정할 수 있다”고 배심원들에게 지시했다. 8월 19일, 배심은 합의에 도달했고 배심원 대표가 판결을 읽었다. 스파이스 등 7명은 살인죄로 사형에 처하고 오스카 니베는 살인죄로 15년 징역형에 처하기로 한 것이다.
            판결은 미국 전역의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시카고 트리뷴은 판결이 법을 정당하게 구현했다고 평했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최종 진술을 했는데, 스파이스는 “우리들을 처형해서 노동운동을 잠재울 수 있다면 우리들을 처형하라”고 소리쳤다. 개리 판사는 사형집행일을 12월 3일 전으로 정했다. 
         
            11월23일 블랙 변호사는 일리노이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은 상고를 접수하고 형 집행을 중지시켰다. 대법원의 심리를 기다리는 동안 피고인들은 유명인사가 됐다.
            독일의 사회당 당수, 칼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어 등 유럽의 저명인사들이 시카고의 교도소로 이들을 만나러 왔다. 조지프 퓰리처가 운영하는 뉴욕 월드紙의 찰스 러셀 기자는 파슨스를 면회한 후 그에 매료되어 피고인들을 옹호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파슨스를 자주 면회한 아나키스트 동지로는 다이어 럼이 있는데, 그는 나중에 자살해서 많은 의혹을 남겼다.

            사형수와 결혼한 니나

          시카고의 부유한 기업가의 외동딸로 명문 여자대학을 졸업한 니나 반 잔트라는 미모의 젊은 여인은 재판을 방청하면서 피고인들의 무죄를 확신하게 됐다. 니나는 교도소로 스파이스를 면회하러 오다가 그를 사랑하게 됐다. 그녀에 관한 기사가 신문을 장식하자 교도소 측은 면회를 제한했다.
            그러자 니나는 수감자의 가족은  면회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이용하기 위해 스파이스와 결혼을 할 계획을 세웠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이 떠들썩해 졌다. 부모와 상류사회의 반대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법적으로 스파이스와 결혼했다.
         
          1887년에 들어서 급진적 노동운동은 세력이 약해졌다. 노동자 정당은 와해됐고 한때 막강하던 노동기사단도 회원을 많이 상실했다. 일리노이 주의회는 혁명을 敎唆(교사)하거나 치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 해 9월13일 일리노이 주 대법원은 이들의 上告(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우리들은 정의를 요구한다”

          사형 집행일이 11월11일로 잡히자 노동단체들은 판결을 강력히 비난했다. 온건한 노동운동을 이끌던 새무엘 곰퍼스는 피고인들은 계층적 편견에 의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블랙 변호사 등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이 미국 헌법에 보장된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면서 변호인단은 주지사에서 사면 청원을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스파이스와 파슨스는 “우리들이 죄가 없기 때문에 감형을 구걸할 생각이 없으며, 자신들은 정의를 요구한다”고 버텼다.
         
          10월 20일, 임박한 처형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뉴욕시에서 열렸다. 이 집회에서 새로 탄생한 全美노동연합(AFL) 대표가 된 곰퍼스는 “이들을 처형하는 것은 미국의 수치”라고 연설했다. 11월 2일 연방대법원은 헌법의 적법절차 조항은 주법원 절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고를 기각했다.
            이제 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지사의 赦免(사면)이었다. 사면을 청하기 위해선 피고인들의 참회문이 필요했는데, 파슨스와 스파이스는  자신들은 참회할 것이 없다고 했다. 오직 필덴과 슈와브 만이 참회문을 제출했다. 변호사들과 가족은 스파이스 등 5명에게 참회문을 쓰라고 애원했지만 이들은 차라리 명예롭게 죽겠다고 버텼다.
         
            시카고 변호사 협회 회장, 전직 상원의원 등 저명인사들이 주지사에게 감형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11월 7일에는 10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가 일리노이 주지사에게 제출됐다. 리차드 오글스비 주지사는 노예 해방에 앞장섰던 존경받는 정치인이어서 감형할 것으로 예측됐다.

            私製爆彈(사제폭탄) 

            그러나 바로 11월 7일 큰 사건이 발생했다. 루이 링그의 감방에서 네 개의 작은 폭탄이 발견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의 감형을 요청하는 탄원서와 연판장이 주지사 집무실에 몰려 들었다. 주지사는 이제 며칠 안에 결심을 해야 만 했다.
            11월 10일 루이 링그가 감방에서 작은 폭약을 입 속에서 터뜨려서 자살했다. 링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자기가 증오하는 정부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 전에 자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자신의 감방 속에 폭탄을 4개나 숨겼다가 발각됐고, 또 어떻게 작은 폭약을 반입해서 자살했는지는 당시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피고인들을 자주 면회했던 다이어 럼이 죽은 후에 그가 링그에게 폭약을 전해 주었다는 편지가 발견되어 수수께끼가 풀렸다.
         
            링그가 폭발물을 터뜨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주지사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참회문을 제출한 필덴과 슈와브는 종신징역으로 감형하고, 파슨스, 스파이스, 피셔, 그리고 엔젤은 교수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주지사의 결정이 알려졌음에도 파슨스 등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엔젤의 딸, 피셔의 아내, 그리고 이제는 스파이스의 아내가 된 니나가 마지막으로 이들을 면회했다. 루시 파슨스는 失性(실성)을 해서 남편을 면회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마지막에 볼 수 없게 된 파슨스는 어린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썼다. 死後(사후) 1년이 지나 공개된 편지에서 파슨스는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여인인 너희 엄마를 사랑하고 존중하라”고 했고, “너희들 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죽은 아빠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

            사형 집행

            11월 11일 시카고 교도소에서 이들 4명에 대한 교수형이 공개적으로 집행됐다. 250명의 기자와 관계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서 스파이스는 “우리의 침묵이 우리를 교살하는 당신들의 목소리보다 강력해질 때가 올 것이다”고 외쳤다. 이들의 시체는 가족에게 인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빈소를 찾았다. 그들의 시신은 시카고 북부에서 시내를 거쳐 기차 편으로 월드하임 묘지로 향했는데, 2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장례 행렬을 지켜 보았다.
          파슨스 등이 처형된 후 시카고는 표면적으로는 평온해 졌다. 우려했던 폭동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시카고 트리뷴은 헤이마켓 사건으로 사망한 경찰관들을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는 모금을 시작했고, 1889년에 경찰관 추모 기념물이 헤이마켓에 세워졌다.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파슨스 등을 순교자로 추모했고, 1890년부터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했다.

            진실

            루시 파슨스는 월드하임 묘지에 4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을 했고, 1893년 6월에 기념물 준공식을 갖았다. 바로 그날 존 앨트겔드 주지사는 복역 중이던 펠던 등 3명을 특사로 석방했다. 앨트겔드는 “헤이마켓에서 있었던 폭탄 투척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고 범인이 경찰관에 대한 적개심으로 단독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폭탄을 투척한 범인은 사건 발생 후 사라져 버린 슈나우벨트일 것이라고 믿었다. 슈나우벨트는 사건 후 캐나다로 도망갔고, 영국을 거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해서 살았다.
           
            노동자들은 기업가들이 고용한 비밀공작원이 경찰관을 공격해서 8시간 근로법에 대한 반대여론이 조성하려 했다고 믿었다. 몇 년이 지난 후 한 학자가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한 후 폭탄 투척범은 다이어 럼이 알고 있는 시카고의 아나키스트이거나 뉴욕에서 온 독일계 아나키스트일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럼은 1893년에 자살했는데, 폭탄 투척에 대해서 아무런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루시 파슨스

            앨트겔드 지사의 사면으로 풀려난 이들은 정상적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슈와브와 니베는 죽은 후에 월드하임 묘지의 동료 옆에 묻혔다. 루시 파슨스는 계속해서 아나키 운동을 이끌었다.
            1901년 맥킨리 대통령이 시카고 출신의 아나키스트에 의해 암살되자,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아나키즘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1903년 의회는 아나키스트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루시 파슨스는 아나키즘을 포기하고 유진 뎁스가 이끄는 사회당에 가담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유진 뎁스와 루시 파슨스는 이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동했다. 미국 정부는 뎁스 등 사회당 간부들을 치안법 위반으로 체포해서 기소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법무부는 공산주의 혐의자 1만 명을 구금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1930년대 들어서 새무엘 곰퍼스는 과격한 노동운동이 오히려 기업주들의 입장을 도와주었다고 주장했다. 1938년에 비로서 미국 의회는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공정노동법을 통과시켰다.
            미국 노동계의 살아 있는 신화가 된 루시 파슨스는 1941년 5월1일 시카고 북부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진에 마지막으로 참가했다. 1942년 3월7일 루시는 그녀가 혼자 살고 있던 작은 집에 스토브 과열로 불이 나서 사망했다. 그녀는 89세였다.

            갈등과 화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1886년 헤이마켓의 비극을 초래한 시카고의 갈등은 치유되지 못했다. 1968년 4월 마틴 투터 킹 목사가 피살되자 시카고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고,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해서 4명이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1969년 가을에 헤이마켓에 서 있는 경찰관 동상이 폭파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 해 12월에는 블랙 팬더의 지도자 2명이 경찰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1970년 4월 시카고 市는 경찰관 동상을 복원해서 헤이마켓에 다시 세워 놓았다. 그러나 그 해 10월 좌파 폭력단체인 웨더맨이 헤이마켓의 경찰관 동상을 또다시 파괴했다. 시 정부는 동상을 보수해서 시카고 경찰학교의 교정 구석으로 옮겼다.
         
            2004년 10월 헤이마켓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 제막식이 헤이마켓에서 열렸다. 이 조형물은 상처의 치유와 화합을 상징했다. 시카고 사람들이 대립을 잊고 헤이마켓 사건 자체를 기리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헤이마켓에서의 죽음’의 저자인 제임스 그린 교수는 이 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다”면서, “1886년 5월 1일의 노동자 집회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미국 역사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고 아쉬워 한다. 그린 교수는 오늘날 모든 미국인들이 헤이마켓의 遺産(유산)을 안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
(월간조선 2007년 5월호)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