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제임스 베이커 3세,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정
2008-05-30 01:37 2,643 관리자


          前 美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의 공화당 집권 12年史

                    제임스 베이커 3세,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 - - 정치하지 말라
                                    (퍼트남, 2006년, 460쪽, 28.95달러)

                  James A. Baker, III, Work Hard, Study - - - and Keep Out of Politics,
(Putnam, 2006, 460 pages, $ 28.95)

제임스 베이커 3세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과 재무장관을 지내고 부시 행정부(41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작년(2006년)에 나온 베이커의 자서전은 그의 인간적 면모 뿐 아니라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으로 이어진 공화당 집권 12년간의 裏面史(이면사)을 알게 해 준다.

  텍사스의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제임스 베이커

베이커는 텍사스 주 휴스턴 출신으로 그의 조부와 부친은 저명한 변호사였다. 베이커는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후 해병대에 입대해서 장교로 임관됐다. 베이커는 대서양 함대에 귀속되었지만 그의 많은 동료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했다. 베이커는 한국에서 전사한 동료를 생각하면 지금도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軍 복무가 거의 끝날 무렵 베이커는 오하이오 출신의 매리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제대 후에 텍사스 주립대학 로스쿨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돼서 기업관련 법률 업무를 담당했다. 아들 4명이 태어나는 등 베이커 부부는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베이커 집안은 당시 남부의 많은 가정이 대개 그러하듯이 민주당원이었다.

                아내와 死別 후 부시의 권유로 정계 입문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베이커에 큰 시련이 닥쳐 왔다. 그의 아내가 유방암에 걸린 끝에 1970년 2월에 사망한 것이다. 좌절에 빠진 베이커에게 그의 테니스 친구이던 조지 H. W. 부시 당시 하원의원이 정치를 해 보라고 권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 버린 슬픔을 잊기 위해 베이커는 공화당원으로 당적을 바꾸고 부시의 상원의원 선거를 도왔다.

              1970년 선거에서 부시는 민주당의 로이드 벤슨에서 패배했지만 베이커는 이를 계기로 선거를 배우고 정치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이렇게 해서 베이커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 - - 정치하지 말라”는 家訓(가훈)을 깨고 말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베이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조지 부시는 유엔 주재 대사가 됐고, 베이커는 사망한 아내의 친구 수전과 재혼했다. 베이커 집안은 베이커의 아이 4명에 수전의 아이 3명이 가담해서 대식구가 됐고, 베이커는 갑자기 커진 가족을 이끌어 가야만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닉슨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됐다. 부시가 부통령으로 지명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포드는 공화당내 진보파인 넬슨 록펠러를 부통령에 지명했고, 부시를 중국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1975년 여름에 베이커는 상무차관으로 임명되어 워싱턴 政街(정가)에 진입했으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1976년 대선을 앞두고 로널드 레이건을 상대로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힘든 경쟁을 하던 포드 대통령은 베이커에게 자기의 선거운동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베이커의 활약으로 포드는 레이건을 물리치고 공화당 후보가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본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패배했다.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자 부시와 베이커는 휴스턴으로 돌아왔다.

                하원의원, 駐(주)유엔 대사, 駐中(주중) 대사 및 CIA 국장을 거친 부시는 대통령 출마를 결심했고, 베이커에게 선거운동을 부탁했다. 1980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에서는 레이건 외에도 하워드 베이커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밥 돌 상원의원, 존 코널리 前 텍사스 주지사 등 거물들이 출마를 선언했다.

                  베이커는 1976년 선거을 치룬 경험을 바탕으로 부시를 대통령감으로 인식시키는데 성공했고, 1980년 초에 열린 아이오아 코커스에선 부시가 레이건을 젖히고 1등을 하는 異變(이변)이 생겼다. 하지만 뒤이은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레이건은 여유 있게 1등을 차지했고, 여세를 모아 계속 승리를 이어갔다. 하워드 베이커, 존 코넬리 등은 일찌감치 기권했다. 5월 말에 부시는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레이건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많은 후보 중 오직 부시 만 레이건을 상대로 善戰(선전)했던 것이다.

                    대통령 당선된 레이건의 놀라운 제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레이건은 러닝 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처음에는 제럴드 포드 前 대통령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포드가 대통령 권한의 일정부분을 공동으로 행사하자는 조건을 걸어 옴에 따라 이 구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레이건은 부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부통령 후보를 수락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레이건은 부시에게 “자기의 정책에 동의하느냐”고 물었고, 부시는 “동의한다”고 답해서 부통령 후보가 됐다. 레이건의 선거 캠프는 베이커에게 선거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80년 11월 선거에서 레이건은 카터를 일반투표 50.5% 대 41%, 그리고 선거인단표 489표 대 44로 승리했다.

                레이건과 부시가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었지만 베이커의 앞날은 불확실했다. 베이커는 1976년에는 포드 대통령 선거참모로, 1980년에는 부시의 선거참모로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번이나 싸웠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다음날 레이건은 베이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레이건은 놀랍게도 베이커에게 백악관 비서실장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베이커는 순간적으로 전신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레이건이 자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베이커에게 자기의 비서실장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부터 자기를 보좌해 온 에드윈 미즈와 마이클 디버는 다른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베이커 비서실장, 미즈 보좌역, 디버 부실장이라는 레이건 1기 백악관의 ‘환상의 트로이카’가 탄생한 것이다.

책에서 베이커는 자신이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지내면서 겪었던 많은 일에 대해 솔직한 평가를 하고 있다. 레이건 행정부가 맞은 첫번 째 위기는 레이건 대통령의 피격이었다. 베이커는 레이건이 살아난 것은 신(神)의 뜻이었다고 말한다. 베이커는 대통령에 有故(유고)가 생긴 상황에서 당시 국무장관이던 알렉산더 헤이그의 경솔한 발언과 행동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이 헤이그의 한계였다고 지적한다.

레이건의 減稅 정책에 확신을 갖지 못해

              減稅(감세)와 정부지출 절감을 위해 앞장 섰던 예산관리국장 데이비드 스토크맨에 대해서도 베이커는 경험이 부족한 그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평가한다. 베이커는 “레이건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말한다.

              베이커는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의 존 오닐 하원의장과 돈독하게 지내는 등 대단한 포용력을 갖춘 지도자였기 때문에 민주당의 지배하에 있던 의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리거노믹스(Reaganomics)의 핵심이 감세 정책에 대해 베이커는 자기도 확신을 못하고 불안했었다고 고백한다.
   
              베이커는 減稅가 재정적자를 초래하고 그로 인해 인플레가 심해지고 이자율이 높아져서 경제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스토크맨의 주장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했었다고 솔직히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레이건의 소신이 들어 맞아서 성장과 고용이 늘어 나는 등 경제가 좋아졌다.
             
            영원한 낙관론자인 레이건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베이커는 백악관이 수립한 정책이 관련 부처를 거쳐 조정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믿었고, 그의 이 같은 철학은 훌륭하게 작동했다.

            再選(재선)에 성공한 레이건은 베이커를 재무장관에 임명하고, 재무장관이던 도널드 리건을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란-콘트라 사건이 발생했다. 베이커는 이 사건이 백악관이 직접 작전을 꾸미면 어떻게 되는가를 잘 보여 주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자기가 비서실장으로 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이란-콘트라 사건이 2기 레이건 행정부를 마비시킨 데 대해 아쉬워 하고 있다. 베이커는 “오만한 리건은 비서실장으로 적절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1988년 대선을 앞두고 조지 부시, 밥 돌, 하워드 베이커 등이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고자 예비선거에 나섰다. 현직 부통령인 조지 부시가 가장 유망했지만 1980년 초 아이오와 코커스에선 밥 돌이 1등을 했다. 하지만 뉴햄프셔 예비선거부터 부시는 1등을 휩쓸어서 후보로 지명됐다.

레이건 “자넨 우리의 성공의 비밀이었네”

                베이커는 친구인 조지 부시의 선거를 돕기 위해 재무장관직을 사임했다. 사직서를 수리하면서 레이건은 “자네는 우리의 성공의 비밀이었네. 짐, 이제 조지를 위해 일 하게나.”고 말했다.

                1988년 대선 운동이 시작됐을 때 조지 부시는 민주당의 두카키스에게 뒤지고 있었다. 민주당은 공화당이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정당이라고 몰아 붙였다. 중반이 넘어서 부시 측은 공격적인 TV 광고를 통해 두카키스가 국방과 치안에 무관심하다고 반박했다. 조지 부시는 두카키스를 여유있게 누르고 당선됐다. 부시는 1836년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부통령이 됐다.
베이커는 그가 충성을 다해 봉직한 레이건 대통령이 8년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고, 다음날엔 그의 오랜 친구인 부시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부시는 베이커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베이커는 국무장관이 되어 친구인 부시 대통령과 같이 일했던 기간이 자기 인생의 최고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을 뒷마무리

                  베이커는 냉전의 마지막 순간의 미국 외교를 이끌었다. 민주화 조치를 취하는 폴란드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함으로써 정치적 개혁을 하는 공산권 국가를 미국이 도울 것임을 분명히 했다. 베이커는 동독의 붕괴가 서방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당시 부시 행정부가 동유럽의 붕괴에 대해 환호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것은 혹시 고르바쵸프가 모험을 저지르지 않을까 우려해서 였다고 한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부시 행정부에 있어 큰 도전이었다. 국무장관으로서 베이커는 이라크 문제에 대해 유엔 안보이사회의 결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왜 미군이 쿠웨이트를 해방하고 이라크를 침공하면서도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해, 베이커는 “후세인을 제거하면 미군은 이라크에 점령군으로 주둔해서 모든 것을 책임질 상황이 발생하며, 그러면 미군은 도시 게릴라에 시달리게 될 것을 우려해서 였다”고 말한다.
             
              현재의 이라크 사태에 대해서 베이커는 자신이 이미 “이라크 문제는 정권을 교체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으며, 이를 위해 치를 대가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말한다.

              1992년 8월 베이커는 부시의 再選(재선)운동을 지휘하기 위해 국무장관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1990-91년에 있었던 경기침체, 그리고 부시의 예산국장이 세금을 인상한 조치 등으로 인해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말았다. 베이커는 부시가 재선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공화당 행정부가 이미 12년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화를 원했다고 회고한다.

              12년의 워싱턴 생활을 정리한 베이커는 휴스턴으로 돌아와 선친이 창업한 로펌을 운영하고, 라이스 대학에 베이커 연구소를 설립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 때 플로리다 투표로 분쟁이 생겼을 때 공화당을 대리해서 소송을 담당했고,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베이커는 대통령을 지낸 친구의 아들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식장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위대한 인간, 레이건

                2004년 6월 5일 레이건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이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베이커는 이렇게 회고했다.
“도대체 레이건이 아닌 어느 누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의 선거참모를 두 차례나 지낸 사람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대단한 사람을 위해 8년간 봉사했던 나는 얼마나 운이 좋았던가. 레이건의 너그러운 결정으로 인해 나의 인생이 바뀌었고, 그래서 그러한 영예를 안겨준 레이건을 위해 나는 매일매일 노력했다.”  레이건의 장례식에서 낸시 여사를 만난 베이커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로펌에서도 은퇴한 베이커는 라이스 대학의 베이커 연구소에 나가고, 또한 오랜 친구 부시와 사냥과 낚시를 하면 소일하고 있다. 베이커는 자신이 백악관 비서실장, 재무장관, 국무장관을 지낼 때 자신을 도와준 그의 측근인 마거릿 터트와일러, 딕 다만, 그리고 존 로저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을 성공적으로 보좌했던 베이커의 주변에는 그를 보좌한 유능하고 헌신적인 보좌관들이 있었던 것이다.
(월간조선 2007년 7월호)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