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훔베르토 폰타바, 체 게바라의 진실을 폭로한다 (2007)
2008-06-23 02:11 12,663 관리자


훔베르토 폰타바, 체 게바라의 진실을 폭로한다
(2007년, 센티널, 23.95 달러, 224쪽)

Humberto Fontava, Exposing the Real Che Guevara
(2007. Sentinel, $23.95, 224 pages)

1928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중남미 여행 도중 망명 중이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서 쿠바 공산혁명에 참여했고, 혁명 후에는 쿠바의 산업장관을 지냈다. 유엔 총회 참석 후 여러 나라를 순방하고 돌아 온 게바라는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콩고에 가서 내전에 참가했고, 볼리비아에서 잠입해서 활동하던 중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생포되어 1967년 10월 9일 처형됐다.

‘20세기의 예수’ ?

그 후 게바라는 전세계 좌파의 아이콘이 되었다. 당시 유럽과 미국을 풍미한 新좌파 운동에 힘입어 게바라는 聖人(성인)으로 추앙됐다. 장 폴 샤르트르는 게바라가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처형 후에 공개된 그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 놓은 예수를 닮았다면서, 그를 ‘20세기의 예수’로 부르기도 했다. 反美(반미)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게바라의 초상이 등장했다. 

카스트로의 전속 사진사가 찍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게바라의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인물 사진의 하나로 자리잡았고, 이 사진을 프린트한 티셔츠는  전세계에서 인기상품이 됐다. 그가 썼다는 ‘모토사이클 일기’는 그의 사망 30주기를 맞아 영어로 번역됐고, 게바라 傳記(전기)도 여럿이 출간되었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모토사이클 일기’를 토대로 같은 이름의 영화를 제작했고, 락 그룹 산타나의 리더인 칼로스 산타나 등 많은 연예인들이 게바라 티셔츠를 걸치고 다니는 등 게바라는 대중 문화의 영웅이 돼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게바라를 미화한 책이 여러 권 출간되었고, 어느 철없는 가수는 게바라를 추앙하는 음반을 냈다.

체 게바라의 생애

그렇다면 도대체 체 게바라는 어떤 인물인가 ? 그에 관한 이야기는 좌파 진영에 의해 과장되거나 미화된 부분이 많아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가 의심스럽지만, 대체로 알려진 바는 다음과 같다.
             
                아르헨티나의 중상층 백인 가정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의대를 다니던 중 모토사이클을 타고 중남미를 無錢(무전)여행하면서 빈곤과 압제에 시름하는 민중의 삶을 목격했다. 학업을 마쳤지만 인턴을 하지 못해 정식 의사가 되지 못한 게바라는 과테말라에 머물렀는데, 그 때 쿠데타가 일어나서 과테말라의 합법 정부가 전복됐다.

                    과테말라를 떠난 게바라는 멕시코 시티에 잠시 머물렀는데, 거기서 망명 중인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났다. 1956년 11월, 게바라는 카스트로 형제와 다른 쿠바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쿠바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간 지역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게바라는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의 지대장으로 활약했는데, 산타 클라라에서 쿠바 정부군의 무장 열차를 탈취함으로써 이름을 날렸다. 1959년 1월, 쿠바의 바티스타 대통령은 도미니카로 망명했고, 카스트로는 쿠바 전역을 장악했다.

                      쿠바 국립은행장, 산업장관 역임

              게바라는 라 카바나 수용소장으로 舊(구) 정권 인사들을 심문하고 처형하는 일을 맡았다. 게바라는 쿠바 국립은행장이 되었고, 이어서 산업장관이 됐다. 1964년 12월 게바라는 쿠바 정부 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해서 주목을 샀고, 중국, 이집트, 북한, 알제리 등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평양에서 게바라는 쿠바가 북한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1965년 3월에 아바나에 돌아온 그는 공항에서 카스트로의 환영을 받았으나 곧 뉴스에서 사라져 버렸다.

                1965년 4월에 게바라는 십 여명의 쿠바 군사요원을 이끌고 내전 중인 콩고에 잠입해서 현지 공산세력에 합류했다. 콩고에서 게바라의 부대는 쿠바 출신의 反共(반공) 용병과 남아공화국의 용병의 지원을 받는 콩고군의 추격을 받다가 철수했다.
1966년 말 게바라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볼리비아에 잠입해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몇 번의 전투를 벌였다. 게바라가 볼리비아에 잠입했음을 파악한 미국의 중앙정보국은 쿠바 출신 요원을 파견해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함께 게바라 소탕 작전에 나섰다.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 동부의 작은 마을 라이구에라에서 포위된 게바라와 그의 동료는 항복했다. 다음날 볼리비아 정부군은 게바라를 총살했다. 사망을 확인하기 위해 군의관은 게바라의 두 손을 절단해서 별도로 보관했고, 사체를 비밀 장소에 매장했다. 1997년 볼리비아의 발레그란드 비행장 활주로 아래에서 두 손이 없는 게바라의 유골이 발견됐고, 쿠바 정부는 게바라와 그의 동료 6명의 유골을 반환 받아서 산타 클라라에 게바라 기념관과 靈墓(영묘)를 건립했다.

                게바라의 진실

게바라가 대중적 우상으로 떠 올랐지만 게바라의 진실을 파헤친 책은 찾아 보기 어려웠는데, 그런 점에서 쿠바 출신의 훔베르토 폰타바가 금년 봄에 펴낸 책 ‘체 게바라의 진실을 폭로한다’는 의미가 깊다. 저자 폰타바는 어릴 때인 1961년에 그의 가족과 함께 쿠바를 떠나서 미국에 정착했다. 중남미 정치를 전공한 그는 쿠바를 유토피아로 생각하는 미국의 ‘쓸모있는 바보들’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발표했다. 저자는 게바라와 관련이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과 쿠바 정부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기록에 근거해서 이 책을 썼다. 

              ‘모터 사이클 일기’는 쿠바 정치선전부가 출간

저자는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일기’는 쿠바의 정치선전부가 출간한 것이며, 카스트로가 책의 서문을 썼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믿는 진보진영과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어리석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저자는 게바라가 최소한 1만 4천명을 처형한 대량학살범이며, 미국 본토에서 건물 폭파를 시도한 테러범이라고 단언한다. 흑인해방군이란 지하단체를 이끌던 로버트 콜리어는 1964년 8월에 쿠바로 가서 게바라를 만났으며, 그 해 말 게바라가 뉴욕을 방문하던 중 게바라를 다시 만나 ‘자유의 여신상’ 등을 폭파하는 계획을 의논했는데, 콜리어의 그룹에 경찰관이 잠입해 있어서 이들은 폭발을 일으키기 전에 검거됐다. 

많은 사람들은 “게바라가 아르헨티나에서 의사로 편안한 삶을 즐길 수 있었는데 혁명을 위해 몸을 던졌고, 쿠바 혁명 후에도 아바나에서 권력자로서 행세할 수 있었지만 콩고와 볼리비아에 혁명을 수출하기 위해 갔다가 순교했다”고 말한다.

                  게바라는 의대를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도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게바라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학위를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게바라가 의학학위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전기 작가들은 그의 학위가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게바라가 의대를 다녔다는 증거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농민의 편으로 알려졌지만 게바라는 매우 부유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와 함께 아바나에 입성한 후 바닷가에 위치한 당시 쿠바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저택을 차지해서 새로 결혼한 백인 아내와 함께 귀족적 삶을 즐겼다. 저자는 게바라의 이런 이중적 성향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라고 본다.

카스트로가 게바라를 만나서 함께 쿠바로 배를 타고 향했을 때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의사로 알았다. 게바라가 배에서 멀미를 하고 천식 발작을 하면서 의사를 불러 달라고 신음할 정도가 되자, 카스트로는 게바라가 죽으면 바다에 처넣으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다. 게바라가 국제적으로 떠 오른 계기는 1958년 12월에 있었던 산타 클라라 전투인데, 저자는 이 전투 이야기가 완전한 조작이라고 말한다.1959년 1월 4일자 뉴욕타임스는 산타 클라라에서 게바라가 지휘하는 혁명군이 바티스타 정부군 3000명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물리쳤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정작 이 전투에 목격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발견된 게바라의 일기는 이 날 전투로 자기 부대원 중 1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당시 주민들은 총소리가 나서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을 나갔다. 바티스타 정부는 정부군 373명과 탄약을 가득 실은 열차를 혁명군이 진입해 있는 산타 클라라로 보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게바라는 철도 레일을 뜯어 내고 열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열차가 나타나서 혁명군이 총을 몇 방 쏘자 열차에서 정부군이 응사했다. 혁명군 몇 명이 백기를 들고 열차에 다가섰고, 게바라가 정부군 지휘관에게 “이게 무슨 짓이야. 약속한 것과 다르단 말이야”라고 외쳤다.

열차를 보낸 정부군 대령은 게바라로부터 수십만 달러를 받고 열차와 탄약을 팔아 넘긴 후 마이애미로 도망갔는데, 정작 열차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몰랐던 것이다. 사기가 꺾인 정부군은 항복했고, 게바라는 카메라 기자를 불러서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연출해서 외신에 뿌렸다. 그러면서도 게바라는 포로로 잡힌 정부군 중 27명을 戰犯(전범)으로 처형했다.

                  소녀, 임신부 직접 총살

              게바라 전기를 쓴 좌파 학자들은 게바라가 피그스 灣(만) 침공사건 때 쿠바군을 지휘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썼다.
1961년 4월 쿠바 출신으로 구성된 자유전사군은 군대가 미군 지원 하에 쿠바 남쪽 해안을 침공해서 수비 중이던 쿠바 정부군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2차 공습과 군수 지원을 거부함에 따라 침공군은 탄약이 떨어져서 항복하고 말았다.

              저자는 당시 포로로 잡혔다고 2년 후에 6200만 달러 몸값을 주고 송환된 쿠바 反共전사들의 말을 인용해서, 정작 게바라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전투에 무능한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발탁된 이유는 따로 있다고 본다. 1957년 1월, 카스트로는 정부군 첩자 노릇을 한 농민 게릴라 한명을 처형하도록 자신의 경호원에게 지시했다. 경호원이 머뭇거리자 그 옆에 있던 게바라가 권총을 빼어 들어 표정도 변하지 않고 관자놀이를 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카스트로는 집권 후 소련에서와 같은 숙정을 할 때 게바라가 유용할 것임을 알아 차렸다. 카스트로는 라 카바나에 정치수용소를 만들고 게바라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라 카바나에선 게바라의 총살대가 바티스타 정부의 장교와 하사관은 물론이고 가톨릭 司祭(사제), 지식인, 공무원, 선량한 양민을 쉬지 않고 사살했다. 게바라는 저항할 힘도 없는 사람들을 권총으로 직접 사살하기를 즐겼다. 게바라는 어린 소녀와 임신한 여성도 직접 사살했다. 저자는 “게바라는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화국 백인 정권의 감옥이 아닌 게바라의 감옥에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카스트로 정부의 산업장관이 된 게바라는 소련식 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쿠바에는 공업을 일으킬 만한 자원이 없었다. 그러면서 게바라는 소련을 비난하고 중국을 칭찬해서 카스트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볼리비아에서 체포되자 목숨 구걸

              저자는 게바라가 콩고에서 전투를 했다는 이야기도 거짓말이라고 본다.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본 경험이 없는 게바라는 콩고의 정글 속을 헤매다가 아바나로 귀환했다.

            게바라는 콩고에서 못 이룬 꿈을 볼리비아에서 이루려고 했다. 게바라가 쿠바에 남아 있으면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 카스트로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 가서 죽으면 소련과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의 지시를 받은 볼리비아의 공산 叛軍(반군)은 정부군에게 게바라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쿠바 출신인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 펠릭스 로드리게스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합류해서 45명으로 구성된 게바라의 부대를 추적했다.

            1967년 9월 27일 정부군은 게바라 군의 진지를 기습해서 다수를 사살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게바라는 권총을 버리고 항복했다. 그러면서 게바라는 “쏘지 말라. 나는 체다. 내가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당신들한테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게바라는 자기가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게바라를 죽이기로 이미 결정한 볼리비아 군은 다음날 게바라의 다리와 몸통에 총을 쏘아 죽이고 그가 전투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게바라의 시체가 공개되자 세계가 떠들썩해졌다. 미국과 유럽의 신문들은 천식과 열대기후로 몸이 약해진 게바라가 최후까지 싸우다가 실탄이 떨어져서 항복했는데, 볼리비아 군부가 그를 처형했다고 써댔다. 하지만 볼리비아 군부의 기록과 로드리게스의 진술은 전혀 달랐다. 게바라가 항복할 때 그가 내려 놓은 권총에는 실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처형 직후 시체 사진이 보여 주듯이 그는 삐쩍 마르지도 않았다. 게바라는 형편없는 비겁자였을 뿐이다. 

                게바라 부대의 일원으로 콩고와 볼리비아의 정글을 누빈 다니엘 알라콘은 게바라가 죽은 후 칠레를 거쳐 쿠바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카스트로가 기적적으로 돌아 온 자기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쿠바를 탈출해서 오늘날까지 파리에서 살고 있다. “카스트로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죽어서 소련과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했다”고 알라콘은 회고했다.

                  ‘매춘국가 쿠바’를 찬양하는 할리우드 배우들

                저자는 진보 언론과 할리우드 배우들이 게바라를 우상화하는 것은 한심하다고 말한다. 할리우드의 배우들이 쿠바를 방문하면 카스트로 정부는 철저하게 보호하고 환대한다. 그래서 이 멍청한 배우들은 카스트로가 훌륭한 지도자라고 치켜 세우는 것이다.

              오늘날 쿠바의 중요한 수입원은 외국인 관광객이 뿌리는 달러이다. 정작 게바라를 동경해서 쿠바를 찾은 젊은이들은 쿠바 사람들의 삶을 보고 환상에서 깨어난다. 오늘날 쿠바를 찾는 외국인들은 대개 섹스 관광객이다. 젊은 여자 값이 워낙 싸기 때문에 쿠바는 필리핀과 태국을 젖히고 굴지의 매춘국가가 됐다. 저자는 자기 부모의 나라가 공산체제 40년 만에 가난한 매춘국가가 됐다고 한탄한다.
                                                          (월간조선 2007년 9월호)

* 표지는 아래 클릭. 자료 사진은 '자료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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