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앤서니 드팔마, 피델을 만들어 낸 사람 (2006년)
2008-07-07 11:41 2,036 관리자



앤서니 드팔마, 피델을 만들어 낸 사람 (2006, 퍼블릭 어페어스, 308쪽, 26.95달러)
Anthony DePalma, The Man Who Invented Fidel
(2006, Public Affairs, 308 pages, $ 26.95 )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가 重病을 앓고 있어서 그의 死後에 쿠바가 어떤 길을 갈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몰리고 있다. 좌파 미디어는 카스트로를 낭만적 혁명가로 그리고 있지만, 그가 일으킨 혁명은 피비린내 나는 대량학살을 초래했고 한 나라를 철저하게 망가뜨렸다. 카스트로가 쿠바를 장악하는 데는 뉴욕타임스의 국제담당 대기자 허버트 매튜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의 앤서니 드팔마 기자가 쓴 ‘피델을 만들어 낸 사람’은 반세기 전에 일어난 서반구 최초의 공산혁명에 공명심과 편견에 사로잡힌 뉴욕타임스 기자가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책은 혁명 당시의 쿠바의 사정도 상세히 다루고 있어 한 사회가 공산화되는 것이 순식간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

1956년 12월 쿠바 

1958년 12월 2일 일요일 새벽 카스트로가 이끄는 ‘7월 26일 운동’(1953년 7월 26일에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 일단이 쿠바 남부의 산티아고의 부대 막사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사건을 기념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카스트로는 생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당시의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 대통령은 처형 직전에 카스트로를 15년 징역형으로 감형했으며, 1955년에 정치적 소요가 계속되자 바티스타는 반대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카스트로 등 정치범을 석방했다.) 대원들을 태운 길이 18미터의 요트 그랜마 號(호)가 쿠바 남부 해안에 도착했다. 바티스타 정권에 의해 석방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가서 혁명 동지들을 규합했고, 이들은 ‘그랜마’라는 중고 선박을 구해서 쿠바 남동 해안으로 향했던 것이다. 

정원이 불과 18명인 이 배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 등 82명이 타고 있었다. 1주일간의 항해 끝에 해안에 도착한 이들은 쿠바 정부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다수가 사망했고, 단지 18명만이 시에라 마에스트라  山地(산지)에 잠입할 수 있었다.

같은 날 오후 아바나에 상주하던 뉴욕타임스 주재원 루비 필립스는 본사로부터 카스트로와 그 일당이 쿠바에 침입하려다가 실패했다는 UP 통신의 기사를 확인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쿠바에 오랫동안 살아온 루비는 웬만한 일은 미리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번만은 그렇지 못했다. 쿠바의 정부 소식통은 침입자들은 정부군에 의해 소탕되었다고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루비는 그대로 뉴욕의 본사에 송고했으나 본사는 半信半疑(반신반의)하였다.

루비는 자기가 올린 기사가 본사에서 불신 당하고 있는데 대해 종종 좌절했다. 루비는 원래 미국 오클라호마 출신으로, 쿠바에서 뉴욕타임스 주재원으로 하던 남편이 사망하자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중서부의 광활한 환경에서 자란 루비의 눈에 바티스타는 흔히 있는 후진국 독재자로 비쳤다. 하지만 본사에 자리잡은 동부 출신 기자들은 쿠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의 기운(機運)을 흥미롭게 지켜 보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허버트 매튜스 

뉴욕타임스의 허버트 매튜스 논설위원은 카스트로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지만 불안한 쿠바의 政情(정정)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맨해튼에서 성장한 매튜스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콜럼비아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고, 이탈리아에 유학했다.
외국어에 능하고 유럽 문제에 능통한 그는 뉴욕타임스 파리 지국에서 일하게 됐다. 무솔리니가 에디오피아를 침공하자 매튜스는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취재했고, 스페인에서 공화파와 프랑코派 사이에 내란이 벌어지자 스페인에 건너가서 취재했다. 공화파에 동정적이던 매튜스는 당시 공화파에 가담했던 헤밍웨이를 처음 만났다.

이탈리아에 머물던 매튜스는 무솔리니에 의해 체포되어 추방됐고,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을 취재했다. 전쟁 후에는 런던 지국장을 지냈고, 1949년부터는 뉴욕타임스의 사장이 된 아서 셜츠버거의 배려로 논설위원이면서도 기명 기사를 쓸 수 있는 독특한 지위를 확보했다. 매튜스는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에 대해 비판적 기사와 논설을 써서 페론의 실각(失脚)을 가져오는데 기여했다.

매튜스와 카스트로의 만남

매튜스는 쿠바에서 루비가 보내오는 기사는 바티스타에 편향됐다고 생각했다. 57세가 됐지만 아직은 자신이 현장을 취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매튜스는 쿠바를 방문하기를 희망했다.
아바나에서는 카스트로가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정부군은 시에라 산간지대를 계속 수색하고 있었다. 루비는 카스트로가 500-1000명의 叛軍(반군)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는 과장일 것이라고 본사에 보고했다. 카스트로의 한계를 알고 있는 루비는 정부군이 반군을 곧 진압할 것이라고 믿었다.

1957년 2월 9일 매튜스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바나에 도착했다. 그는 반정부 운동가들을 몰래 만나서 카스트로에 면담을 신청했다. 2월 15일 아바나에 잠복해 있던 반군 요원이 자동차를 갖고 와서 매튜스와 그의 부인을 태우고 500 마일을 달려 카스트로가 기다리고 있는 산간지역에 도착했다.

미디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카스트로는 매튜스를 이용해서 자기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달하려 했다. 매튜스는 산속에서 叛軍을 지휘하는 카스트로를 만나는 특종을 터뜨릴 수 있게 됐다. 매튜스는 인터뷰하는 도중 40여명의 반군을 목격했는데, 이들이 카스트로가 거느리고 있는 부대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카스트로는 자기는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 내는 것이 목표이며 결코 반미(反美)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매튜스는 카스트로가 구상하는 새로운 쿠바는 급진적이지만 민주적인 반공국가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카스트로를 만났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매튜스는 카스트로와 사진을 찍었고, 인터뷰 노트에 카스트로의 서명을 받아 놓았다. 아바나로 돌아 온 매튜스는 아바나 교외에 살고 있던 헤밍웨이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2월 19일 아침 비행기로 매튜스 부부는 뉴욕으로 돌아 왔다.

1957년 2월 24일자 뉴욕타임스

1957년 2월 24일 뉴욕타임스는 ‘쿠바 반군을 은신처에서 만나다’라는 제목을 단 매튜스의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렸다. ‘카스트로는 살아 있으며, 산간지역에서 싸우고 있다”는 부제를 단 이 기사에는 소총을 들고 있는 카스트로의 사진과 카스트로의 서명이 함께 실렸다. 후속기사가 25일과 27일에 나왔다. 매튜스는 카스트로가 진지한 인물이며, 많은 세력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 매튜스는 또한 바티스타 정부군이 반군을 맞아 苦戰(고전)하고 있다고 썼다.

매튜스의 기사는 대특종이었다. 모든 언론이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전재했다. 뉴욕의 카스트로 동조세력은 매튜스의 기사를 오려서 팜프렛으로 인쇄해서 쿠바로 보내서 시민들에게 뿌렸다. 부패한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던 쿠바 사람들 사이에서 매튜스는 영웅으로 등장했다. 뉴욕과 워싱턴에선 카스트로를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957년 6월에 매튜스는 다시 아바나를 방문했다. 매튜스는 자신이 단순히 기자가 아니라 사실상 쿠바의 운명을 좌우하는 인물이 되어 있음을 깨닫고 스릴감을 느꼈다. 그 해 말 매튜스는 마티스타 정권의 언론 검열을 비난하고, 카스트로는 단지 민주주의를 회복하려고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설을 썼다.

뉴욕타임스의 우려

뉴욕타임스의 발행인과 편집인은 매튜스가 카스트로와 밀착되어 있는 사실을 점차 우려의 눈초리로 보았다. 자연히 매튜스가 쓴 기사가 보류되는 경우가 늘었다. 1958년 들어서 편집국장은 제2차 대전 중 종군기자로 날렸던 호머 바이코트는 쿠바에 파견했다. 바이고트와 루비 필립스는 매튜스와 다른 견해를 뉴욕에 전달했다. 바이고트는 카스트로가 반란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았다.

루비가 예상한 대로 반정부 세력이 주도했던 일제 파업은 실패로 돌아가자,이에 고무된 바티스타는 10,000명의 군대를 시에라 산간지대로 보내서 카스트로 세력을 소탕하도록 했다. 하지만 산간지형에 익숙해진 카스트로의 반군의 기습 공격에 정부군은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 정부는 바티스타 정부에 지원하기로 했던 소총 1950정의 引渡(인도)를 보류시켰다. 바티스타 정부는 궁지에 빠졌다.

1959년 1월 1일

1958년 12월 31일, 매튜스와 그의 아내는 연말 휴일을 보내기 위해 다시 아바나에 왔다. 매튜스 부부 등과 식사를 마친 루비가 콜롬비아 정부군 기지 부근의 집에 도착한 시각은 1959년 1월 1일 오전 2시경이었다. 그 때 DC-4기가 기지의 활주로를 이륙했고, 연이어 두 대가 또 이륙했다. 3대의 항공기에는 바티스타와 그의 최측근, 그들의 가족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태운 항공기는 도미니카에 착륙했다. 미국이 더 이상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바티스타는 망명한 것이다.

1959년 1월 1일 워싱턴 관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은 카스트로 세력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다고 보았고, 국방부도 그런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카스트로의 집권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반면 미국의 언론계는 33살도 안된 젊은 혁명가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미국 신문편집인 협회는 카스트로를 미국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2주일이 지나서 아바나에서 머물고 있던 루비는 혁명정권의 총살대가 피의 숙청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올려 보냈다. 그러자 매튜스는 쿠바의 숙청이 정당하다는 사설을 썼다. 하지만 뉴욕타임스의 논설주간은 매튜스가 쓴 사설을 죽여 버렸다.

미(美)신문편집인 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카스트로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뉴욕타임스 사옥을 방문해서 매튜스를 만났다. 카스트로는 매튜스에게 “당신이 없었더라면 혁명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세라톤 호텔에서 열린 오찬에서 카스트로는 매튜스에게 감사의 메달을 달아 주었다. 연설 도중 카스트로는 “매튜스가 자기를 만나러 시에라 산간으로 왔을 때 자신의 그룹은 18명 뿐이었지만 이들이 번갈아 행진해서 매튜스를 속였다”고 자랑했다.

곤란에 빠진 매튜스

카스트로가 공산주의자임이 드러나자 매튜스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뉴욕타임스의 동료들은 그를 멀리 하기 시작했다. 타임지와 뉴스위크지는 그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1960년 초, 뉴욕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은 쿠바가 결국 소련과 동맹을 맺을 것이며, 미국은 쿠바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써서 매튜스와 충돌했다.

1960년 8월 카스트로는 미국 기업 등 쿠바내의 모든 기업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라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미국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은 매튜스를 공산주의 동조자로 보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1961년 초 미국은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새로 들어선 케네디 행정부는 아이젠하워 정부가 세워 놓은 쿠바 침공계획을 인계 받았다.

피그스 灣(만) 침공

1961년 4월 15일, 쿠바의 反共(반공)망명군이 조종하는 두 대의 B-26 폭격기가 아바나 인근의 비행장을 폭격해서 쿠바의 공군기들을 대부분 파괴했다. 같은 날 반공군을 태운 선단이 아바나로부터 동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피그스 만의 늪지대에 도착했다. 카스트로는 직접 탱크와 보병을 이끌고 피그스 만으로 내려와서 반공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약속했던 공중지원을 하지 않아서 탄약이 떨어진 반공군은 대부분 포로로 잡혔다.

같은 날 카스트로 정부는 아바나에 주재 중이던 서방의 기자들의 기사 송고(送稿)를 금지시켰다. 카스트로 정부는 그들에게 적대적인 기사를 써온 루비 필립스의 사무실을 급습해서 서류를 압수하고 쿠바인 직원을 체포했다. 5월 19일, 루비는 옷 가방 한 개만 들고 황급하게 마이애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0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 온 루비는 “카스트로의 쿠바는 공포와 저주로 뒤덮여 있는 아름다운 파라다이스”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사직

내셔널 리뷰의 편집인인 보수 논객 윌리엄 버클리는 “매튜스가 공산주의 동조자이며, 그가 글로써 미국의 안보를 위협했다”고 비난했다. 뉴욕타임스 사옥 밖에는 매튜스을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회사 안팎에서 비난을 받은 매튜스는 다시 쿠바를 방문했다. 그는 쿠바가 정말 공산체제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 쿠바에서 매튜스는 마치 國父(국부) 같은 대접을 받았다.
미국에 돌아 와서 매튜스는 쿠바의 혁명을 긍정적이라는 글을 썼으나 뉴욕타임스는 더 이상 그의 글을 싣지 않았다.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이 반입된 사실이 밝혀지자 군사적 긴장이 감돌았고, 자연히 매튜스는 공산주의 옹호자로 몰렸다.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 버린 매튜스는 1967년 1월 뉴욕타임스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해 9월 30일, 그는 혼자서 자기 물건을 챙겨 뉴욕타임스 사옥을 나왔다. 에디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란, 제2차 대전을 취재한 대기자가 쓸쓸하게 뉴욕타임스를 떠난 것이다. 이임식은커녕 떠나는 그에게 의례적 인사말을 건넨 기자도 없었다.

비극적 末路(말로)

소득에 비해 지출이 많았던 매튜스는 퇴직 후 돈이 궁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프렌치 리베라에서 허름한 집을 얻어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저술 작업을 시작했다. 매튜스는 그 작업의 일환으로 1969년에 ‘피델 카스트로’라는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뉴스위크는 물론이고 뉴욕타임스 마저 그의 책을 혹평했다.
   
1972년에 매튜스는 쿠바를 다시 방문해서 카스트로와 긴 인터뷰를 가졌다. 매튜스는 쿠바의 혁명이 의료와 교육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1975년에 ‘쿠바의 혁명’이란 책을 냈지만, 이 책은 완전히 외면당했다. 매튜스는 이 때 비로서 카스트로가 자신을 능숙하게 변화시키는 교묘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 진 매튜스는 아들이 살고 있는 호주의 애들라이드로 이사해서 얼마간 지내다가 1977년 7월 30일에 77세로 사망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사망을 전하는 기사에서도 그가 “이 시대에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기자 중 한명”이라고 폄하했다.
매튜스가 카스트로를 처음 만나서 찍은 사진이 아바나의 혁명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등, 오늘날 매튜스는 쿠바에서만 기억되고 있다. 저자는 매튜스가 편견을 갖고 카스트로를 취재해서 이 같은 비극을 초래했다고 말하면서, 그의 실패가 他山之石(타산지석)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월간조선 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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