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브리지트 가브리엘, 그들이 저주하기 때문에 (2006)
2008-07-26 10:47 2,432 관리자


이스라엘을 조국(祖國)으로 택한 레바논 여인의 이야기

Brigitte Gabriel, Because They Hate
(St. Martin’s Press, 2006, 258pages, $23.95)

브리지트 가브리엘, 그들이 저주하기 때문에 (세인트 마틴, 2006, 258쪽, $23.95)

책의 저자 브리지트 가브리엘은 레바논 남부의 기독교 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하지만 1975년에 무슬림 무장세력이 기독교도들을 상대로 지하드를 선포하자 그녀의 세상은 바뀌고 말았다.

그녀는 열 살일 때 자기 집이 무슬림 무장세력의 포격으로 파괴된 후 지하 방공호에서 7년 동안 살다가 이스라엘로 탈출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이슬람의 위협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젊은 나이에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겪은  한 아랍 여성의 처절한 자전적 手記(수기)이다.

레바논은 오랫동안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균형을 이루면서 교역과 관광으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970년에 요르단에서 추방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레바논으로 들어 오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1975년 무장 무슬림이 기독교도에 총격을 가해서 내란이 일어났고, 시리아 등 아랍국가의 지원을 받는 무슬림 세력은 기독교도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브리지트와 그녀의 나이 많은 부모는 좁은 방공호에서 3년 동안 살면서 무슬림의 포격을 견디어 냈다. 기독교도가 살던 마을은 완전히 파괴됐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 와중에도 총명한 브리지트는 방송을 들어가면서 영어를 익혔다.

PLO가 남부 레바논을 基地(기지)로 삼아 테러 공격을 하는데 참다 못한 이스라엘은 1978년 3월 군대를 보내 레바논 남부 국경지역을 장악했다. 이 때 브리지트와 그녀의 부모는 비로소 방공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스라엘 군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민병대가 마을을 지켜 주어서 기독교인들은 다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세월이 몇 년간 흘렀다. 1982년엔 브리지트 가족을 챙겨주던 젊은 기독교 민병대원 척이 지뢰 폭발로 사망했다. 척은 브리지트의 첫 사랑이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 군은 PLO를 보다 북쪽으로 몰아 내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PLO는 남부 레바논 민간지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브리지트의 어머니가 큰 부상을 입었다. 브리지트는 차를 얻어 타고 어머니를 이스라엘 군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 곳에서 브리지트는 인생의 대전환을 맞게 된다. 이스라엘 의사들은 부상당한 이스라엘 병사와 레바논 기독교도 뿐 아니라 부상당한 무슬림 병사들마저 친절하게 치료해 주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선 여성과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은 저속하기만 한 아랍인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모든 일이 브리지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스라엘 의료진의 헌신적 노력 끝에 어니가 회복하자 브리지트는 집으로 돌아 왔지만, 그녀는 이스라엘로 가겠다고 다짐했다.

브리지트는 이스라엘 군 병원에 찾아가서 한 將星(장성)을 만나 취직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 장성은 브리지트에게 비서 자리를 구해 주었다. 병원에는 이스라엘 의사 뿐 아니라 레바논 의사도 있었는데, 브리지트는 두 그룹의 차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의사들은 간호사 등 여직원들을 친절하게 대했고, 모이면 자기들이 최근에 읽은 책을 대화에 올렸다. 반면 레바논 의사들은 항상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렸고, 여직원들의 옷과 외모를 대화에 올렸다.

병원에서 브리지트는 이스라엘에서 일하던 ‘미들 이스트 TV’의 미국인 기술자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예루살렘에서 방송 뉴스를 아랍어로 편집하는 일자리를 얻게 됐다.

브리지트는 1984년 12월에 예루살렘으로 왔고, 다음해 5월에 아랍어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가 사직하자 브리지트는 앵커 일을 보게 되었다. 뉴스를 진행하면서 브리지트는 무슬림은 항상 테러를 하고 미국인과 이스라엘인은 항상 피해를 입지만, 그런 사실을 용기 있게 전하는 언론인이 많지 않음을 느꼈다. 진실을 전달해서 이슬람을 비판하는 언론인들은 생명을 위협 받았기 때문이다. 브리지트 자신도 암살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브리지트는 같은 방송국의 미국인 기자를 만나 사랑하게 됐다. 이슬람 세력의 암살표적이 되어 있던 이들은 1987년에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 후 얼마 지나서 남편은 미국으로 발령이 났고, 브리지트도 미국으로 향하게 됐다. 이스라엘을 떠나기 전에 브리지트는 고향으로 가서 그곳에 묻혀 있던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해서 예루살렘의 시온 마운트 묘지에 잠든 아버지 곁에 묻었다. 브리지트는 레바논의 방공호 속에서 7년 동안이나 어린 자기를 지켜준 부모를 자신의 정신적 조국(祖國)인 이스라엘에 묻은 것이다.

브리지트의 자전적(自傳的) 스토리는 여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녀는 “이슬람 테러의 실체와 그것이 야기하는 엄청난 위협을 직시하자”고 호소한다. 그녀는 근본주의 과격 이슬람 세력은 이슬람의 本流(본류)가 되었고, 이들이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을 ‘작은 악마’ 미국을 ‘큰 악마’로 부르는 것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슬람 세력과 대화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다고 말한다. 브리지트는 “미국이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으면 미국은 레바논 꼴이 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록 中東(중동) 태생이지만 브리지트는 아랍과 무슬림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오늘날 “아랍 남성의 절반과 아랍 여성의 2/3는 文盲(문맹)이지만 이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기 때문에 인구 증가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브리지트는 자기가 이스라엘 병원에서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것을 처음 보았다면서, 책과 담을 쌓은 아랍인들의 無知(무지)를 지적한다.

그녀는 무슬림 가족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명예살인’을 소개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생지옥”이라고 말한다. 9×11 후 그녀는 ‘진실을 위한 미국인의 모임(American Congress for Truth)’라는 민간단체를 만들어서 이슬람 문제를 왜곡하는 미디어를 비판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