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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허만, 조지프 매카시 (2000)(100권의 책에서)
작성일 : 2008-08-23 13:19조회 : 2,277


(* '세계의 트렌드를 읽는 100권의 책'에 수록된 글을, 아직 읽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편의상 수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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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허만, 조지프 매카시, 2000년 프리 프레스, 26달러 404쪽

Arthur Herman, Joseph McCarthy : Reexamining the Life and Legacy of America's Most Hated Senator, 2000, Free Press, New York


최근 우리 사회는 심각한 이념 대립과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런 논쟁 중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용어가 ‘매카시즘’(McCarthism)이다. 2003년 독일에서 귀국한 송두율 씨를 검찰이 기소하자 열린우리당의 전신인 통합신당은 “매카시즘을 중단하라”고 했고, 한 좌파 교수는 “매카시 광풍(狂風)이 불어 닥친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최병렬 의원은 “지금 매카시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몇 년 전 고려대 최장집 교수와 한국외국어대학 이장희 교수의 저술을 조선일보가 문제를 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진보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를 ‘매카시즘’이라고 몰아 붙였다. ‘매카시즘’은 멀쩡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부치는 선정적이고 음모적인 수법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매카시즘’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1999년 4월25일자 동아일보 칼럼에서 정치학자인 김학준 씨(당시 인천대총장)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40년대 말과 50년대 초 사이의 서너 해 동안 미국은 국회의 극우적 의원들에 의해 뒤흔들렸다. 상원의 매카시 의원 같은 반공 구세군들이 국제공산주의에 매수된 미국 안의 공직자들이 중국대륙을 중국공산당에 팔아 넘겼고 한반도에 공산세력의 남침을 유도했다고 공격하면서 수십 명의 이름을 대자 온 나라가 의혹과 격노에 빠졌던 것이다.  - - - 뒷날 매카시 등의 폭로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나서야 미국 사회는 비로소 냉정을 되찾아 자신들이 왜 ‘광란의 빨갱이 사냥’에 동조했던가를 반성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때 미국 사회가 깊이 병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김학준 씨 같은 저명한 학자가 ‘매카시즘’을 이렇게 정의했으니 우리 사회의 보수진영이 좌파를 비판하기만 하면 좌파에선 대뜸 ‘매카시즘’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송두율 씨 사건 때 최병렬 씨가 말한 것을 보더라도 ‘매카시즘’이란 것 때문에 보수진영은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매카시즘’의 장본인인 매카시 의원이 어떤 사람인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매카시즘’을 들먹이는 사람들에게 매카시가 누구냐고 물어 보면 제대로 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재평가되는 조지프 매카시

미국에선 매카시 의원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 정부 내의 공산주의자가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중 많은 숫자가 소련의 간첩이라는 매카시의 주장이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1991년에 소련이 망한 후에 냉전시대의 미소 양국의 기밀문서 일부가 공개된 데 힘입은 것이다. 특히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소련의 암호교신을 도청해서 해독했던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 문서는 앨저 히스, 해리 홉킨스, 해리 덱스터 화이트 등 당시 간첩 혐의를 받고 있었던 고위관리들이 정말로 간첩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대소(對蘇) 강경책으로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자 로날드 레이건 - 배리 골드워터 - 로버트 태프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공화당 보수파가 새로이 평가받게 된 것도 중요한 변화이다. 

2000년에 나온 이 책은 매카시의 생애와 그 역할을 재평가한 것이다. 저자 아서 허만은 조지 메이슨 대학의 역사학자이다. 저자는 매카시가 남긴 정치적 유산(遺産)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매카시는 결점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그는 미국의 보통사람들을 공화당과 접합시키는 역할을 했고, 그것이 레이건 대통령의 등장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매카시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책은 앤 코울터(Ann Coulter)가 2003년에 펴낸 ‘반역’(Treason)이다. 코울터는 매카시가 옳았으며 매카시를 몰아냈던 진보세력들은 사실상 반역자들이며 이들은 지금도 테러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등 미국을 헐뜯는데 혈안 돼 있다고 주장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인간 매카시

책은 매카시가 정치인으로 등장해서 반공활동으로 성가(聲價)를 올리다가 그것이 지나쳐서 지지를 상실하고 상원에서 견책을 받고 사라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조지프 매카시는 1908년 11월14일, 위스콘신 주(州)의 그랜드 슈트(Grand Chute)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계의 가난한 농부였다. 당시 위스콘신 주에는 아일랜드와 동유럽 이민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다. 매카시의 부모는 너무 가난해서 조지프도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만 나오고 농사일을 했다. 매카시는 21세 되던 해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학교를 다녔다. 총명하고 매사에 열심인 매카시는 4년 과정을 9개월 만에 끝냈다. 그의 근면에 감동한 교장의 추천을 받아 매카시는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열의 가톨릭 학교인 마케트 대학(Marquette University)에 입학했다. 매카시는 돈을 버는 데는 기술자가 최고라고 생각해서 전기공학을 택했으나 수학을 따라 갈 수가 없었고, 결국 3학년 때 전공을 바꾸어 로스쿨에 입학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공부한 끝에 1935년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정치인 매카시

변호사 일를 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매카시는 지방검사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됐고, 1939년에는 지방순회판사에 출마해서 역시 쉽게 당선됐다. 31세에 판사가 된 매카시는 초범에 관용을 베풀고 사건을 빨리 처리해서 주민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당시에는 뉴딜 관련법 때문에 농산물을 정부지정 가격 보다 싸게 파는 것이 불법이었는데, 매카시는 우유회사가 우유를 싸게 팔았다는 이유로 연방정부가 제소하자 우유를 싸게 팔면 소비자에게 좋은데 이런 재판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판결문에 썼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동네에서 일약 영웅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매카시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판사는 입대할 의무가 없었으나 그는 훈련이 가장 힘든 해병대에 입대한 것이다. 정보장교 훈련을 받고 임관된 그는 17개월 동안 솔로몬 군도에 파견됐다. 그는 자기가 폭격기를 타야한다고 우겨서 10여 회에 걸쳐 조종사 뒷좌석에 타고 출격을 했다. 그는 군함 위에서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전쟁이 끝난 후 매카시는 자기가 공습에 참여했고 부상당했다고 과장을 했지만 기본적인 사실은 틀리지 않았다. 

매카시는 1944년 말에 전역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인기 있던 판사가 해병대 장교로 전장에 나갔다가 돌아 왔으니 대단한 영웅인 된 것이다. 일약 명사가 된 그는 1945년에 선거에서 판사로 다시 당선됐다. 다음 해 매카시는 공화당 후보로 상원의원 선거에 나섰는데,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그의 지역구에는 동유럽 이민들이 많았고, 그들은 대개 가톨릭이었다. 가톨릭인 매카시는 자기가 당선되면 공산주의 팽창을 막겠다고 약속해서 이들의 표심(票心)을 잡았다. 

매카시의 당선은 위스콘신 정치에 있어 새로운 장(章)을 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공부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가 38세로 최연소 상원의원이 됐으니 일대사건이었다. 상원의원으로서 매카시는 비대해 지는 연방정부 및 노조와 싸웠다.

간첩과 공산주의자

트루만 행정부에서는 루스벨트가 기용한 동부 출신의 관료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엘리자베스 벤틀리(Elisabeth Bentley)와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가 연방정부 고위직에 소련간첩이 침투해 있다고 비밀리에 제보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Dean Acheson)과 차관보이던 아돌프 벌(Adolph Berle)은 이런 제보를 믿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유럽이 공산화되고 소련이 유엔안보이사국으로 거부권을 갖게 되는 등 미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축소되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얄타 회담 당시 루스벨트는 건강이 나빠서 분별력이 없었다. 얄타 회담을 준비한 사람은 국무부 차관보였던 앨저 히스(Alger Hiss)였는데, 그는 소련의 간첩이었다. 국제통화기금 창설을 준비한 재무부 차관보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도 소련의 간첩이었다. 1941년에서 1944년까지 부통령을 지낸 헨리 월러스(Henry Wallace)는 소련의 간첩은 아니었지만 자타가 인정하는 공산주의자였다. 1944년 대선 때 루스벨트가 부통령 후보를 트루만으로 교체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월러스가 대통령이 될 뻔했다. 그러면 히스가 국무장관이 되고 화이트가 재무장관이 되었을 것이니, 이들이 6․25 남침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뉴딜의 공공사업을 관장하다가 루스벨트의 보좌역으로 전쟁정책에 간여했던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도 소련의 간첩이었고, CIA의 전신이던 OSS의 참모장이던 던컨 리(Duncan Lee)도 그러했다..

간첩은 아니더라도 당시 고위관리 중에는 공산주의로 기운 사람이 많았다. 내무장관을 지낸 해롤드 이키즈(Harold Ickes)는 공산주의가 미국 사회를 개조하는데 있어 중요한 도구가 될 것으로 믿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중국 전문가로 루스벨트 행정부와 트루만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오웬 래티모어(Owen Lattimore)는 모택동을 공공연히 찬양했던 공산주의자였다. 래티모어는 1944년에 월러스와 함께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다녀왔는데 그런 참혹한 곳을 미국의 테네시 계곡 공사장으로 비유했다. 래티모어는 중국과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무장관인 애치슨은 히스와 래티모어를 깊이 신임했다. 제2차 대전 때 합참의장을 지내고 트루만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조지 마셜(George Marshall)도 중국 공산당에게 우호적이었다. 1946년 국공(國共) 내전 때 국민당 정부에 대한 군사원조를 단절해서 공산당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바로 마셜이었다.

동유럽에 이어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인들은 비로서 공산주의 팽창에 경악했다. 그리고는 무엇이 잘못됐나 하고 묻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 정부는 원자탄 비밀을 소련에 넘겨 준 혐의로 로젠버그(Rosenburg) 부부를 기소했다. 1951년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이들은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전성기

매카시는 1950년 2월 웨스트 버지니아의 휠링(Wheeling)에서 열린 공화당 모임에서 자신은 미국 국무부에서 일하는 공산당원과 간첩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곧 205명이 아니고 57명이라고 숫자를 정정했다. 이렇게 해서 ‘매카시 선풍(旋風)’이 시작된 것이다.

어떤 계기로 이런 주장을 했는지에 대해선 많은 논쟁이 있다. 해군장관이던 제임스 포레스탈(James Forestal)이 정부 내의 공산 간첩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이를 쟁점화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전직 육군 정보장교가 미국 정부 내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FBI의 보고서를 전달해 주었다는 설도 있다. 조지타운 대학의 외교대학원장이던 에드먼드 월시(Edmund Walsh) 신부가 매카시에게 1952년 선거에 대비해서 공산주의 문제를 제기할 것을 권고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월시 신부는 볼세비키 혁명 후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산주의 위협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당대의 반공주의자였다. 조지타운 대학도 예수회 소속의 가톨릭 대학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이면서 예수회 소속의 마케트 대학을 나온 매카시가 가톨릭 보수교단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

1950년 2월20일 매카시는 상원에서 국무부의 보안조치가 허술하며 자기는  81명의 공산주의자 및 위험인물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 연설은 무려 6시간이나 걸렸는데 다분히 선동적이었다. 이런 논란을 확인하기 위해 상원은 민주당의 타이딩스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위원회가 조사하도록 했다. 당시 의회에선 민주당이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원회의 진짜 목적은 매카시의 거짓말을 밝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위원회가 열리자마자 매카시는 래티모어가 소련의 스파이망(網)의 대장이라고 폭로하는 등 공세를 취했다. 래티모어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증언했지만 그이 증언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1944년과 1949년 두 차례에 걸쳐 그는 동료들에게 한국은 소련의 통치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당시 래티모어의 주변에는 소련의 간첩이 우굴거렸음이 드러났다.

매카시는 히스가 오랫동안 간첩이었음에도 국무부가 그를 비호했다고 비난했다. 애치슨은 히스를 두둔했지만, 히스는 위증죄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1990년대 들어 공개된 베노나 문서는 그가 간첩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그러면 매카시는 어떻게 이런 정보를 갖고 있었나 ? 훗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런 정보의 상당 부분은 FBI의 에드가 후버(Edgar Hoover) 국장이 공급했다는 것이다. 후버는 매카시가 문제를 좀 더 냉철하게 다루지 못하고 선정적으로 취급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매카시는 저명한 국제법학자인 콜럼비아 대학의 필립 제섭(Phillip Jessup) 교수도 공산주의자라고 몰아 세웠다. 제섭은 래티모아가 운영하던 태평양 연구소(Institute of Pacific Research)에 간여했으며, 히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고, 트루만은 미군을 급히 파견했다. 매카시는 국무부내의 공산주의자 때문에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몰아 붙였다. 그럼에도 타이딩스 위원회는 민주당이 주동이 되어 매카시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채택했다. 바로 그 날 FBI는 원자탄 비밀을 소련에 넘긴 혐의로 로젠버그 부부를 체포했다고 발표해서 타이딩스 보고서는 묻혀 버렸다.

한편 1950년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은 승리했다. 닉슨이 상원의원에 당선된 것도 이 때였다. 매카시는 임기 중이었지만 지원유세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운 래티모어, 애치슨, 제섭 등은 동부 명문대 출신의 이른바 WASP(백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트)였다. 이에 비해 매카시는 아일랜드계 가톨릭으로 블루 칼라 출신이었다. 대중이 그를 영웅으로 본 데는 그런 정서가 도사리고 있었다. 1950년 11월 중공군이 한반도에 진입하자 매카시는 이를 사전에 알지 못한 트루만 정부의 무능을 질타했다. 1951년 3월 로젠버그 부부는 간첩죄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 해 4월 트루만이 맥아더를 해임하자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해 버렸다. 인기 절정에 있던 매카시는 조지 마셜이 중국을 공산당에게 넘겨줬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트루만이 필립 제섭을 유엔 대사로 임명하자 매카시는 이를 막기 위해 공격을 퍼부었고 그것이 주효해서 제섭의 인준안은 소위원회에서 부결됐다.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매카시는 맥아더와 더불어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연설을 했다. 그 해 11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원는 민주당 후보 스티븐슨을 가볍게 누르고 당선됐다. 중산층이 민주당을 이탈해서 공화당을 찍은 것이다. 이 선거에 매카시와 동갑인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가 상원에 진출했다. 다음 해 공화당의 보수진영을 이끌던 로버트 태프트(Robert Taft) 의원이 암으로 사망했다. 매카시는 든든한 후원자를 상실한 것이다.

퇴장

아이러니칼하게도 아이젠하원 행정부의 등장은 매카시의 퇴장을 촉진했다. 아이젠하워는 기본적으로 실용주의자였다. 아이젠하원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된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애치슨 인맥을 제거하고 새로운 보안조치를 통해 직원을 재심사했다. 자연히 매카시가 지목했던 사람들은 국무부를 떠났다. 에드가 후버는 이런 변화에 만족하고 더 이상 매카시에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젠하워는 매카시가 차기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매카시가 이런 변화를 알아 차렸다면 그의 최후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종의 자기도취에 빠진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1953년 9월 매카시는 비서이자 반려자였던 20년 연하의 진 커(Jean Kerr)와 결혼했다. 워싱턴의 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은 대성황이었다. 그때가 매카시의 전성기였다. 그 후 모든 일은 매카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문제는 매카시에게 있었다. 대중은 그의 주장에 식상해 있었다. 그의 보좌관이던 로이 콘(Roy Cohn)이 무리수를 많이 두었다. 드루 피어슨(Drew Pearson) 같은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이 매카시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매카시가 육군 내의 공산주의자 문제를 계속 거론하자 드디어 아이젠하워는 매카시를 문제로 보게 됐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은 매카시를 징계할 계획을 세웠다. 존슨은 그렇게 함으로써 공화당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풀브라이트, 휴버트 험프리 등 민주당의 진보파가 앞장섰다. 그들은 매카시 때문에 진보정치인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남부 출신 민주당 의원들이었는데, 존슨은 특유의 교섭력을 동원해서 이들을 설득해 나갔다. 매카시는 이런 움직임에 거칠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이 패배한다면 누군가는 승리할 것인데 그 결과는 뻔하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견책 사유였다. 공식적 견책 사유는 매카시의 활동이 무분별하고 무책임하다는 것이었다.

민주당의 이런 움직임에 공화당의 실용주의자들이 동조함에 따라 견책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많아 졌다. 그러자 의회에는 매카시를 지지하는 편지가 쇄도했고 지지자들이 의회 앞에서 시위를 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 등 진보성향 신문은 매카시에 대한 견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상원 공화당 원내총무이던 버틀러 의원, 그리고 에버렛 덕슨, 골드워터 등 매카시를 지지하는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은 견책안이 구체적인 증거를 결여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때 민주당 측에서 매카시가 사과성명을 내면 견책안을 철회할 수 있다고 버틀러에게 알려 줬다. 버틀러, 덕슨, 골드워터 등이 실족 사고로 병원에 입원중인 매카시를 찾아가 사과성명을 낼 것을 권했다. 덕슨은 손수 사과성명서를 기초해서 서명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매카시를 달랬다. 하지만 매카시는 “개자식들 !”이라고 소리를 버럭 질렸다. 

매카시에 대한 표결은 12월2일에 이루어 졌다. 결과는 67대22, 가결이었다. 표결에 참석한 민주당 의원 44명은 모두 찬성했다. 다수당이던 공화당이 분열되어 통과된 것이다. 공화당내의 보수파들은 반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초선 상원의원이던 존 F. 케네디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그 핑계로 불참했다. 반공주의자이며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인 매카시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애리조나 출신의 골드워터는 매카시가 ‘워싱턴의 신성한 기득권 세력’(Washington's Sacred Cow)에 도전했다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안타까워했다.

1954년 11월 선거에선 민주당이 승리했다. 매카시 견책을 통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사람은 존슨이었다. 견책을 당했지만 매카시의 임기는 1958년까지 4년이나 남아 있었다. 다만 더 이상 공산당 문제를 거론할 수 없었을 뿐이다. 문제는 매카시 자신이었다. 위스콘신에서 판사로 당선된 이래 매카시는 항상 뉴스의 초점에 서있었다. 1950년 이후 공산당 청문을 주도할 때 온 나라의 미디어가 그를 향해 있었다. 견책을 받자마자 그는 뉴스로부터 한순간에 버림을 받았다. 다혈질인 그는 그것이 가장 괴로웠다. 자연히 술을 많이 마시곤 했다. 아내 진 커가 그를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패배를 견디기 어려운 그는 자폐(自閉) 현상마저 보였다. 지병인 간염이 악화하는 등 건강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1957년 4월28일 매카시는 베데스다 해군병원에 입원했고, 5월2일 마지막으로 그를 찾은 신부(神父)를 보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의 영결식은 의회장으로 치렀다. 의원들 외에도 닉슨 부통령과 후버 FBI 국장 등이 참석했다. 상원의원 21명이 장지(葬地)인 위스콘신 애플턴까지 동행을 했다. 한때 매카시의 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도 장지까지 따라가서 그를 애도했다.

‘매카시즘’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단어를 만든 사람은 오웬 래티모어였다. 래티모어는 1950년에 ‘중상모략에 의한 시련’(Odeal by Slander)라는 책을 내서 매카시가 자기에게 한 선정적 비난을 ‘매카시즘’으로 지칭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1952년에는 매카시 자신도 ‘매카시즘 : 미국을 위한 투쟁’(McCarthyism : The Fight for America)란 제목의 책을 낸 것이다. 이 책은 그 다음 해 매카시와 결혼한 진 커가 쓴 것인데, 여기서 ‘매카시즘’이란 미국 정부 내에서 공산주의자를 몰아내서 미국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매카시의 노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견책을 당한 후 매카시는 ‘매카시즘’이란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이는데 대해 매우 가슴 아파했다. 

매카시는 거침없는 말로도 자주 뉴스에 올랐다. 애치슨 등 동부 출신들이 점잖 피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긴 매카시는 애치슨을 ‘멜빵 바지 입은 x구멍’이라고 불렀다. 젊었을 때부터 매카시는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심각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 두통을 이기기 위해 술을 자주 마셨는데 1952년 들어서 특히 그러했다. 하지만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통제 불능이 될 정도로 술을 먹지는 않았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 진 커에게 매우 자상했다. 그는 일종의 조증(躁症) 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뉴스의 각광을 받으면 며칠씩 잠을 안자고 일을 했는데, 거의 병적(病的)인 수준이었다. 그가 실의에 빠져 사망한 것도 그런 심리 상태와도 관계가 있다. 

유산(遺産)

저자는 매카시가 남긴 유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매카시가 퇴장한 후 그의 반공노선에 반대하던 세력은 다시 워싱턴 정가를 장악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젠하워 정부가 대공정책을 완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CIA가 중심이 되어 이를 비밀스럽게 수행했다. 1960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가 당선돼서 아일랜드계 가톨릭 대통령이 최초로 탄생했다. 케네디는 베트남에 개입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베트남 개입을 주도한 것은 존슨 대통령과 애치슨 사단(師團)인 맥조지 번디, 윌리엄 번디, 디 러스크 등이었다. 매카시를 파멸시킨 존슨과, 매카시가 파멸시키고자 한 애치슨 사단이 합작해서 일으킨 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으로 파멸했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 같다. 

매카시가 소련의 간첩이라고 몰아붙였던 앨저 히스는 위증죄로 복역한 후 출소해서 변호사 자격을 회복하고 강연활동을 하는 등 명예회복에 나섰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운동, 신좌파 운동 등에 힙 입어 앨저 히스는 좌파의 기수로 등장했다. 좌파들은 앨저 히스를 냉전의 희생물로 치켜세웠는데, 그런 수정주의 수법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매카시즘 논쟁은 미국에서 새로운 보수이념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1955년에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 Jr.)가 창간한 ‘내셔날 리뷰’(National Review)가 바로 그 중심이 섰다. 공화당내의 보수 노선은 골드워터 의원이 계승했다. 1964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공화당 후보로 나선 골드워터를 전쟁광(狂)으로 몰아 세웠고, 그 전략은 성공했다. 하지만 존슨 대통령과 그의 뒤를 이은 닉슨은 국민과 의회를 속여 가며 베트남 전쟁을 끌고 가다가 결국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할리우드의 배우이던 로널드 레이건은 1964년 대선에서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운동을 했다. 얼마 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된 레이건은 골드워터에 이어 공화당 보수파의 명맥을 이었고, 1980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惡)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강경한 외교정책을 폈다. 레이건이 퇴임 한 후 몇 년 지나 소련과 동유럽은 붕괴했다. 그리고 냉전시절의 기밀문서가 드디어 햇볕을 보게 됐는데, 이들 자료에 의하면 히스는 소련의 간첩이었고, 래티모어의 주변인물 중에도 간첩이 많았다. 매카시의 주장이 대체로 진실에 가까웠음이 밝혀진 것이다. 다만 그의 방법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매카시즘’은 없다

이 책은 매카시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바로 잡아 주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매카시즘’이란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 간첩이거나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 진보세력이 매카시즘이라고 들고 나오고, 보수세력은 거기서 말문이 막혀 버리는 현상은 우스운 것이다. 하기야 김학준 총장 같은 식자(識者)마저 매카시가 제기한 의혹이 전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그는 대중선동가라고 했으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매카시는 괴물이 아니었다. 손수 닭을 키우고 젖소에서 우유를 짜본 적이 있는 사람이며, 21세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로스쿨을 마친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이다.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를 나온 위선자들이 행세하는 워싱턴에 최초로 도전장을 던진 용감한 정치인이었다. 매카시는 부유층의 정당으로 치부됐던 공화당을 블루 칼러 계층과 연결시켜 공화당의 저변(底邊)을 확대시킨 공로가 있다. 

하지만 매카시는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공격적이었지만 한편으론 매우 내성적이었다. 그런 성격이 파멸을 재촉했다. 저자도 이야기하듯 단 한 명의 평범한 미국 시민도 매카시에 의해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 매카시에 의해 고통을 겪은 사람은 히스와 같은 간첩, 래티모어와 같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의 위협을 만만하게 보아 중국 본토를 상실하고 한반도 남침을 초래한 정책담당자 들이었다. 1950년대 들어 소련이 미국 내의 간첩망을 상실하게 된 것도 매카시의 공(功)이라면 공이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더욱 냉정하게 검토할 점이 있다. ‘매카시즘’이란 용어를 만들어 낸 래티모어는 한반도가 소련으로 넘어 가는 게 낫다고 말했고, 애치슨은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발언해 남침을 촉진시켰다. 

매카시가 의회에서 공산당 문제로 열을 올릴 때 원자폭탄 기밀을 소련에 팔아넘긴 로젠버그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한 어빙 카우프만(Irving Kaufman) 판사는 “당신들 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고 판결문에 썼다.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의 간첩이었음은 베노나 문서에 의해 입증되었고, 그들을 냉전의 희생자로 치켜세웠던 좌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매카시에 의하여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한국이 아닐까. 냉철하게 생각해 볼 문제일 것이다.

(c) 이상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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