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에드워드 화이트, 앨저 히스의 거울전쟁(2004)('100권의 책'에서)
2008-08-23 16:36 2,404 관리자


(* '세계의 트렌드를 읽는 100권의 책'에 실린 앨저 히스 평전입니다. 편의를 위해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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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화이트, 앨저 히스의 거울 전쟁, 2004,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297쪽, 30달러
G. Edward White, Alger Hiss's Looking-Glass Wars,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송두율 씨가 간첩인가 아닌가를 두고 재판이 진행되던 2003년 가을, 한겨레신문은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의 칼럼(‘냉전 잔재와 시민사회’ 2003년 10월13일자)을 실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매카시즘의 악령에 대한 걱정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한국의 수구적 논리와 냉전 당시의 현실이 최소한 겉으로는 판박이처럼 닮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 국무부 고위관리와 유엔의 임시 사무총장까지 지낸 지식인이 본인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거물급 공산첩자로 몰려 처벌받았던 반세기 전의 앨저 히스 사건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 현실과의 유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앨저 히스(Alger Hiss)를 매카시즘에 의해 희생된 지식인이라고 보는 것은 조효제 교수 같은 한국의 좌파만이 아니다. 히스는 미국의 좌파에게는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조 교수가 간과한 것은 히스는 정말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히스는 죽는 날까지 자기가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히스는 생애 후반부를 자기가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소모한 것이다. 히스의 이러한 투쟁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좌파에게 하나의 횃불과 같은 존재였다. 히스는 지난 반세기 동안 좌파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히스의 이러한 행동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영국 정부 내에서 암약했던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소련 간첩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폭로되자 소련으로 도망쳤던 것과는 달리 히스는 자기가 간첩이 아님을 주장하는 투쟁을 벌였다. 바로 이 때문에 히스는 미국 지성세계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이른바 진보세력이라는 좌파는 기회만 있으면 닉슨, 후버, 그리고 매카시가 훌륭한 지식인인 히스를 공연히 간첩으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은 선량한 희생자이고 보수세력은 음모로 뭉친 악(惡)의 세력이라고 몰아 붙여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 미국 국가안보국의 특급 비밀문서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 문서가 공개된 후에 이런 논쟁을 대단원을 내렸다. 히스는 간첩이었던 것이다.

히스를 둘러싼 논쟁은 심각한 이념 대립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버지니아 대학의 에드워드 화이트 교수가 펴낸 이 책은 히스에 관한 모든 것을 잘 알게 해 주고 있어 무척 다행이다. 저자는 책 제목에서 ‘거울 전쟁’이란 “스파이는 거울 건너편에 또 하나의 자기를 갖고 있다”고 말한 스파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앨저 히스 : 출생과 성장

책은 앨저 히스의 출생과 성장, 교육부터 시작하고 있다. 히스는 1904년 메릴랜드주(州)의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식품 도매업을 했는데 히스가 두 살 때 자살했다. 히스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상당한 유산과 보험 혜택을 남겼다. 히스의 어머니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다섯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첫째인 애너는 대학에서 체육교육을 공부해서 교수가 됐고, 텍사스에 정착해서 텍사스 주립대학의 체육교육학과장을 지냈다. 그러나 애너는 볼티모어를 뜬 후에 가족과는 별다른 연락이 없이 지냈다. 둘째인 매리 앤은 스미스 대학을 졸업한 후 17세나 나이가 많은 증권 브로커와 결혼했는데, 1929년에 자살했다. 셋째인 보슬리는 큰 아들로서 히스 보다 4살 많았는데, 천성적으로 보헤미안 기질을 갖고 있었고 성적(性的)으로 방탕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을 나온 앨저 히스는 건강이 좋지 않아 직장을 그만두고 쉬다가 20년 연상인 여인과 결혼했지만 1926년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보슬리가 죽었을 때 앨저 히스는 존스 홉킨스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에 막 입학한 상태였었다. 자연히 히스의 어머니는 앨저에게 대해 큰 기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같은 가정적 비극은 앨저 히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앨저 히스 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도널드는 히스와 똑같이 존스 홉킨스를 나와서 하버드 로스쿨을 다녔고, 히스와 마찬가지로 국무부에서 근무하다가 워싱턴의 저명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취직과 결혼

앨저 히스는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 존스 홉킨스에서도 우등생이었고, 하버드 로스쿨에서도 그의 성적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인으로 뽑힐 정도로 탁월했다. 졸업을 앞두고 하버드의 펠릭스 프랑크퍼터(Felix Frankfurter) 교수는 히스를 올리버 홈스(Oliver W, Holmes) 대법관의 법률 비서로 추천했다. 당시 한 두해 동안 홈스의 비서를 지내면 일급 로펌들은 그런 사람을 경쟁적으로 스카우트했기 때문에 그것은 대단한 명예였다. 그 즈음 히스는 아이를 갖고 있는 연상의 이혼녀 프레실리아 홉슨(Prescillia Hobson)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 형 보슬리의 성적 방탕이 가져온 결과를 알고 있는 히스는 매우 금욕적이었는데, 아마도 이때 프레실리아와 처음 성(性)경험을 가졌을 것이라고 한다. 1929년 12월 이들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히스의 어머니는 결혼에 반대하면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두 아이가 연상의 배우자와 결혼해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것을 본 어머니로서는 또 다른 비극을 보는 것 같았을 것이다.

프레실리아는 히스에게 배우자나 성적(性的) 파트너 이상의 역할을 했다. 히스는 홈스의 서기 임기를 끝내고 보스턴의 로펌에 취직했으나 프레실리아가 강하게 권하는 바람에 뉴욕으로 이사했다. 히스는 로펌에 취직했지만 대도시 뉴욕에서 공황으로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실업자 집단을 눈으로 보게 됐다. 프레실리아는 히스가 실업과 빈부격차 같은 사회문제에 대해 눈을 돌리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프레실리아에 이끌려서 히스는 노동자와 농민 문제를 다루는 변호사 단체인 국제법률가협회(International Juridical Association)에 가입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 들게 되었다. 이 단체에서 히스는 하버드 동문인 리 프레스먼(Lee Pressman)을 만났는데, 그는 미국 공산당 당원이었다. 자연히 히스는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존스 홉킨스와 하버드 로스쿨에 다닐 때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던 히스는 사회주의자로 탈바꿈하였다. 

간첩이 된 히스

1932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미국의 정책은 급격히 사회주의 성향을 띄게 되었다. 1933년 히스는 농업조정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에 직장을 얻어 워싱턴으로 이사했다. 이때 뉴욕에 있던 국제법률가협회 멤버 몇 명이 같이 워싱턴으로 옮겼다. 워싱턴에서 이들은 당시 농무부의 자문관으로 일하던 해롤드 웨어(Harold Ware)가 이끄는 토론 그룹에 참여했다. 웨어는 미국 공산당의 열성적인 당원이었는데, 웨어가 이끈 이 그룹은 소련의 간첩망으로 발전하게 된다.

자본주의를 혐오하고 소비에트 방식의 집단정책을 좋아했던 프레실리아의 영향으로 히스는 대공황이 사회구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민전선식 방식의 집단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1934년경부터 히스는 소련에 정보를 넘겨주는, 말하자면 스파이 일을 하게 되었다. 어떤 경위로 히스가 공산주의자에서 소련의 첩자로 변신하게 되었나 하는 데 대해선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우선 농업조정기구(AAA)가 농장주들의 반발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서 히스는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는 1935년에야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요소가 히스로 하여금 소련의 간첩이 되도록 했다. 첫째, 1935년에 해롤드 웨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소련을 위해 일할 첩자를 포섭하던 조세프 피터(Joszef Peter)가 웨어 그룹을 직접 통제하게 되었다. 둘째, 히스는 상원의 한 특별위원회에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위원회는 전시 탄약산업 같은 민감한 사안을 조사하고 있었다. 자연히 조세프 피터는 히스를 간첩으로 포섭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셋째, 아버지, 형, 누나를 차례차례 잃어버리고 결혼과 더불어 어머니와도 소원하게 된 히스는 정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또한 명석한 두뇌와 출중한 외모를 갖고 있던 그였지만 그런 가정적 배경과 내성적 성격으로 인해 아이비 리그 문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그런 히스에게 프레실리아는 아내 이상의 사상적 동료였다. 마지막으로 히스는 아마도 첩보원의 비밀스러운 생활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히스는 남이 모르는 행동을 하면서 두 개의 자기를 갖고 살아가는 간첩생활에서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휘태커 챔버스

리 프레스먼, 해롤드 웨어, 그리고 아내 프레실리아에 이끌려 소련의 간첩이 된 히스는 1934년에 히스는 역시 간첩이던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를 처음 만났다. 챔버스는 1938년에 소련과 관계를 끊고 반공주의자로 변신해서 히스가 간첩이라고 고발하게 된다. 챔버스의 고발과 히스의 부인(否認)은 그야말로 당대의 ‘진실 게임’이었다. 챔버스는 훗날 펴낸 ‘증인’(Witness)라는 책에서 히스는 피터스가 운영했던 간첩 조직 중 소련의 국방정보국(GRU)에 직접 보고했던 세부 조직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히스가 KGB가 아닌 GRU의 첩보조직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히스를 둘러싼 1990년대 들어 일어난 최후의 진실 게임에 있어 중요한 변수가 된다. 챔버스는 히스를 만난 후 히스가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을 위해서 기꺼이 첩보활동을 할 의도가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히스를 소련의 간첩이라고 고발한 챔버스 또한 히스 못지않게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았다. 명문 윌리엄스 대학과 콜럼비아를 다닌 후 챔버스는 ‘일간 노동자’(Daily Worker)라는 신문사에서 일했다. 1925년 경 챔버스는 미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1930년대 들어 챔버스는 ‘새 군중’(New Masses)이라는 잡지사에 취직해서 논평을 썼는데, 그러면서 미국 내 소련 정보기관 요원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조세프 피터와 만나게 되었고 피터를 통해 히스를 알게 된 것이다.

챔버스와 히스

1949년에서 1950년 사이에 열린 히스에 대한 위증죄 재판에서 챔버스는 자신과 히스와의 관계를 소상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히스는 자기가 챔버스를 알지만 그의 이름을 조지 크로슬리로 알았다는 등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챔버스가 진술한 히스의 간첩행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챔버스는 단지 ‘빌(Bill)’이라고 불렀던 워싱턴 주재 소련 간첩조직 책임자의 지시를 받았다. 1936년 GRU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모스코바로 돌아간 ‘빌’은 소식이 단절되어 버렸다. ‘빌’의 후임자로 워싱턴에 나타난 보리스 바이코프(Boris Bykov) 소련군 대령은 챔버스에 대하여 미국 정부의 기밀을 빼낼 수 있는 조직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챔버스가 갖고 있던 미국 정부내의 첩자는 히스 외에도 국무부의 줄리언 웨이들레(Julian Wadleigh), 재무부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 그리고 표준국(Bureau of Standards)의 아벨 그로스(Abel Gross)가 있었다. 1936년 가을 소련 첩보망은 볼티모어에 사진 작업장을 만들었다. 히스 등 정부 내 첩자들이 정부 비밀문서를 가져오면 챔버스는 이 작업장에서 사진을 찍어 뉴욕으로 가서 바이코프에게 전달했다.

얼마 후 히스는 직장을 법무부로 옮겼다.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이 위헌이라는 소송이 제기되자 히스는 이 법률을 구하기 위하여 법무부로 차출됐던 것이다. 1936년 초 대법원은 이 법을 위헌으로 판시했다. 그 해 9월 히스는 국무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해서 히스는 미국의 외교안보 기밀을 마음껏 소련으로 유출하게 되었다. 실제로 챔버스는 히스가 전해 준 기밀문서가 갈수록 많아졌다고 증언했다. 챔버스는 1주일에 한번만 히스를 만났기 때문에 히스가 가져온 문서는 챔버스가 사진을 찍어 뉴욕의 바이코프에게 보내기까지 1주일 동안 챔버스의 수중에 있어야만 했다. 바이코프는 이런 위험성에 대비하기 위해 히스에 대해 기밀문서를 타이핑해서 챔버스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히스는 정부 문서를 자기 집에 있던 우드스톡 타이프라이터로 타이핑해서 챔버스에 전달했다. 나중에 챔버스는 히스가 타이핑한 문서들을 히스가 간첩임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제시했다.
 
히스의 전성시기

히스는 10년 동안 국무부 요직에서 근무했다. 특히 히스는 1945년에 얄타에서 열린 전후 처리에 관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회담에 당시 국무장관이던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Edward Stettinus)와 함께 참석했다. 실제로 국무부에서 얄타 회담을 준비한 사람은 히스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도 소련의 간첩이었다. 스탈린은 얄타 회담에 앞서 미국과 영국의 의중을 파악하고 회의에 임했던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얄타 회담이 끝나고 히스는 모스크바에 들렀었는데 당시 소련 부수상 안드레이 비신스키(Andrei Vishinsky)가 히스를 몰래 찾아 와서 사의(謝意)를 표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히스는 국무부 차관보이던 딘 애치슨(Dean Acheson) 등의 신임을 얻었다. 그런 신임에 힘입어 히스는 유엔을 탄생시킨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임시 사무총장직을 맡기도 했다.

챔버스의 전향

1938년 들어 챔버스는 간첩 일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챔버스는 FBI 같은 미국의 보안기관에 자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순히 간첩 일을 그만두고 친구의 도움으로 타임지에 서평 전문기자로 취직한 것이다. 챔버스는 퀘이커 신도가 되는 등 과거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히스는 물론 이를 알고 있었지만 챔버스가 소련 간첩에 대해 폭로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련이 나치 독일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하자 챔버스는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챔버스는 친구를 통해 미국내 소련 간첩망에 대해 루스벨트에게 직접 말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챔버스는 단지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면서 국무부 차관보이던 아돌프 벌(Adolf Berle)과 만날 수 있었다. 챔버스는 히스 등 미국 정부내 소련 간첩에 대해 벌에게 이야기했지만 벌은 챔버스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다른 계기로 법무부는 히스에 대해 조사했지만 FBI는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FBI의 후버 국장도 챔버스의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더 이상 히스를 조사하지 않았다. 실의(失意)에 찬 챔버스는 이 문제를 덥고 자신의 생업에 열중하기로 했다.

위기에 처한 히스

1945년 가을 워싱턴의 KGB 첩보조직을 운영하던 엘리자베스 벤틀리(Elizabeth Bentley)는 신변의 위협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FBI에 자수했다. 그녀는 미국 정부 내 소련 간첩 리스트를 FBI에 넘겼는데 앨저 히스와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 후 캐나다 오타와 주재 소련 대사관의 서기였던 이고르 구젱코(Igor Guzenko)가 캐나다 당국에 자수했다. 구젱코가 캐나다 당국에 넘긴 자료에는 캐나다 내의 소련 첩자 리스트와 워싱턴 내의 연락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히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스는 이제 소련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설회의를 준비하던 히스는 FBI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소련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정상일 것인데, 히스는 정반대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자기의 결백함을 입증하기 위해 싸우기로 한 것이다. 간첩으로 보기엔 히스의 외모와 처신은 너무나 깔끔했다. 무엇보다 히스에게는 존스 홉킨스와 하버드라는 동부 명문대학의 인맥이 있었다.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히스는 국무부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히스는 딘 애치슨의 도움을 받아 뉴욕에 위치한 카네기 재단(Carnegie Endowment) 대표직을 맡게 되었다. 애치슨은 히스에게 “이런 사안은 결코 확실해 지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애치슨이 히스를 얼마나 아꼈나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의회의 조사 

히스에 대한 수사는 느리게 진행되었다. FBI는 히스가 간첩이라는 증거를 내놓는데 주저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주었다. 히스는 FBI가 단지 시중의 루머에 근거해서 자신을 조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1948년 7월 하원 비미(非美)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는 엘리자베스 벤틀리를 증인으로 채택하여 진술을 듣기로 했다. 이어 위원회는 챔버스를 증인으로 소환하였다. 챔버스는 10년 간의 침묵을 깨고 히스가 소련의 간첩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히스는 챔버스를 1936년 후에 만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챔버스는 위원회 의원들에게 히스가 새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며 희귀한 휘바람새과(科)를 보았다고 자기에 말했다고 진술했다. 한 의원이 히스에게 그런 새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히스는 워싱턴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그런 새를 포토맥 강가에서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히스는 챔버스가 새 이야기를 의원들에게 한 것을 몰랐던 것이다. 조사위원회에서 젊은 하원의원 리차드 닉슨은 예리한 질문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닉슨은 히스와 챔버스를 대질시켜 진실 게임을 더욱 흥미롭게 했다. 흥분한 챔버스는 히스는 공산주의자라고 언론에 말했고, 이를 이유로 히스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FBI는 히스를 기소하는데 부담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고, 닉슨은 이에 초조감을 느꼈다. 챔버스는 히스가 국무부 문서를 집에서 타이프라이터로 베껴 쳤으며 그것을 자기가 사진을 찍어 소련 첩자에게 넘겨주었다고 증언했다. 1948년 12월 대배심은 히스에 대한 기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챔버스를 심문했다. 대배심은 챔버스에게 왜 10년 동안이나 침묵하고 있다가 뒤늦게 히스를 고발하느냐고 다그쳤다. 고발을 한 자기가 오히려 죄인 같은 대우를 받는데 상심한 챔버스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12월 15일, 대배심은 히스를 위증 혐의로 기소하였다.

이 단계에서 당시 FBI 국장 에드가 후버(Edgar Hoover)는 히스가 위증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간첩이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보안상의 이유로 히스에 관한 증거를 법정에 제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죄입증에 많은 곤란이 따랐다. 법정에서 히스의 변호인단은 딘 애치슨, 펠릭스 프랑크퍼터 같은 저명인사를 증언대에 세워 히스의 성품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진술케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의 실질에서는 검찰측이 우세했다.

검찰은 1937년에 챔버스가 중고차를 사는데 히스가 돈을 댔음을 입증해서, 1936년 후로는 챔버스를 만나지 못했다는 히스의 주장은 빛을 잃었다. 한편 FBI는 히스가 집에서 국무부 문서를 베끼는데 사용한 타이프라이터를 찾는데 성공했다. 히스는 그 타이프라이터를 자기 집에서 오랫동안  하인으로 일했던 사람에게 주었는데 FBI가 이것을 찾아 낸 것이다. FBI가 찾아낸 오래 된 타이프라이터의 서체는 챔버스가 제출한 문서의 서체와 꼭 같았다. 배심은 히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히스는 이렇게 해서 위증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 그는 반역자(traitor)로 단죄된 것이다.

수감과 출옥

히스는 상소했으나 기각되었다. 1951년 3월 22일 히스는 연방법원에 출두해서 수감되어 5년 간 펜실바니아 주 루이스버그의 연방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교도소에서 히스는 매사에 모범적이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음모에 희생된 사람인 것처럼 행세했다. 1953년 6월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탄 기밀을 소련에 넘겨준 혐의로 사형집행을 당하자 교도관들은 히스에게 너도 그런 운명을 맞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히스는 방첩법 위반사범과는 접촉을 피했다. 그러면서 히스는 출옥 후 자신의 명예를 찾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954년 11월 히스는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다. 그러나 히스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냉엄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상실했다. 취직을 할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히스는 아내 프레실리아와 큰 견해의 차이를 갖게 되었다. 프레실리아는 히스와 함께 세상의 이목(耳目)으로부터 사라져 버리길 원했다. 하지만 히스는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별거하게 됐다. 간첩활동이란 공통된 일이 없어진 상황에서 이들 부부는 같이 할 일이 없었다. 히스는 이혼을 원했지만 프레실리아는 이를 거부했다.

명예회복에 나선 히스

히스가 명예회복 운동을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챔버스는 그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자가 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로젠버그 부부 같은 소련의 간첩들은 사형장에서 죽어 가면서도 그들이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최후까지 거짓말을 해서 미국민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자의 수법인 것이다.

히스의 전략은 효과가 나기 시작했다. 1956년 봄 프린스턴 대학의 한 학생서클이 히스를 연사로 초청했다. 히스는 제네바 협정에 대해 강연을 했는데, 그것은 단조롭고 지루했다. 하지만 그것은 히스가 사회활동을 다시 시작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히스가 간첩이며 반역자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서 케스틀러(Arthur Koestler)와 시드니 후크(Sydney Hook) 등 과거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다가 전향한 지식인들은 히스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1957년에 히스는 ‘여론의 법정에서’(In the Court of Public Opinion)이란 책을 냈지만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히스는 작은 회사에 취직해서 잠시 일했지만 회사가 기울자 그만 두고 말았다. 의회가 국가안보 사건으로 위증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연방정부 연금을 박탈하는 법률을 통과시킴에 따라 히스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곤궁하게 됐다. 의회가 이 법률을 통과시킨 것은 히스를 타깃으로 한 것이라서 이 법을  흔히 ‘히스 법’(Hiss Act)으로 불렀다. 연금마저 끊긴 히스는 문구를 파는 직업을 구해서 근근이 생활을 해 나갔다.

히스를 옹호하는 사람들

1953년에 영국의 저명한 법률가인 얼 조윗(Earl Jowitt)은 ‘앨저 히스의 이상한 사건’(The Strange Case of Alger Hiss)란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자기는 히스 재판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면서 영국과 달리 미국은 형사재판에서의 증거채택 기준이 엄격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 좋은 명성을 갖고 있는 히스에 대해 유죄판결을 하기 위해선 검찰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를 제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평했다. 특히 만일에 히스가 정말 우드스톡 타이프라이터로 타이핑했더라면 히스가 바보가 아닌 한 챔버스가 전향한 것을 안 후에는 그 타이프라이터를 파괴해 버렸을 것이라면서, 타이프라이터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조윗은 히스가 아마 반공 히스테리에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했다.

  1958년에는 프레드 쿠크(Fred Cook)가 ‘끝나지 않은 앨저 히스의 스토리’(Unfinished Story of Alger Hiss)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한 술 더 떠서 FBI와 CIA는 히스를 희생양으로 삼을 충분한 정치적 이유를 갖고 있으며, FBI는 챔버스가 제출한 문서의 서체와 똑같은 타이프라이트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쿠크는 히스가 ‘미국판(版) 드레푸스’(American Dreyfus)라고 결론 내렸다. 좌파 평론지인 네이션(The Nation)은 쿠크의 책을 요약해서 게재했다. 캐리 맥윌리엄스(Carey McWilliams), 빅토 네이버스키(Victor Navasky) 등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논객이 이끄는 이 잡지는 이후 히스의 명예를 복구하기 위하여 앞장서게 된다.

신좌파 운동

1960년대 들어서 미국과 서구에는 신좌파(New Left) 운동이 일었다. 미시건 대학의 일단의 학생들이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들’(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란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는 곧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다. 반체제(Anti-Establishment)를 내건 신좌파 운동은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등 세력을 불려 나갔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미국의 대학들은 외부인사를 초청하는 강연 모임을 열었다. 1967년에 진보적 성향이 강한 뉴욕의 뉴 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은 히스를 연사로 초청했다. 이를 계기로 히스는 대학가에 초빙연사로 빈번하게 등장했다. 히스는 이러한 강연 행각을 통해 자기가 반공 이데오르기에 의하여 희생되었음을 주장했는데, 무리한 반공 외교정책이 베트남에서 좌초하는 것을 본 청중은 그의 주장에 공감했다. 

1970년대 초 들어 히스는 하버드, 존스 홉킨스 등 전국의 유명 대학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했다. 그는 얄타 회담, 매카시즘, 냉전 등 많은 분야로 강연 주제를 넓혀 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엄청난 피해자이면 성스러운 지식인인 것처럼 이미지를 관리했다. 강연 활동으로 히스는 상당한 고정 수입을 확보했다. 게다가  미국민권협회(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은 안보 사건에서 위증한 사람의 연방연금을 박탈한 ‘히스 법’을 법원에 제소해서 위헌 판결을 받아 냄에 따라 히스는 11년간의 연금을 한꺼번에 받는 행운도 누렸다.

사회로 복구한 히스

1970년대에 들어서 히스를 둘러싼 상황은 반전되고 말았다. 히스를 고발한 챔버스는 1961년에 사망했다.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에서 히스를 몰아 붙였던 닉슨은 1968년 선거에 승리해서 대통령이 됐지만 워터게이트로 파멸해 버렸다. 이제 히스의 명예는 거의 회복된 것으로 보였다. 히스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자기의 명예회복 전쟁에 동원했다. 히스는 자기 아들 토니 히스로 하여금 자신과 가족에 관한 책을 쓰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1977년에 나온 것이 ‘드디어 웃다’(Laughing Last)이다.

토니는 이 책에서 자기 아버지는 어머니 프레실리아가 한 공산주의 활동 때문에 책임을 뒤집어 쓴 것 같다고 썼다. 진실을 말한다면 히스와 프레실리아는 간첩 동지였다. 그런데도 히스는 자기의 결백을 위해서 자기의 아내이며 사상적 반려자였던 프레실리아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의 이런 주장이 모두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자기 아들에게 그런 거짓말을 책으로 쓰도록 했다. 한편 1975년에 매사추세츠 대법원은 히스의 변호사 자격을 박탈한 결정을 번복해서 그의 변호사 자격을 회복시켜 주었다.

앨런 와인스타인

1976년 스미스 대학의 앨런 와인스타인(Allen Weinstein) 교수는 정보공개법에 의거해서 히스의 수사기록을 받아 보았다. 30대의 유망한 역사학자이던 그는 1971년에 히스에 관한 논문을 쓴 적이 있었다. 그는 히스 사건은 냉전 체제와 더불어 보아야 한다고 보았고 히스 판결에는 의문점이 많다고 지적했었다. 와인스타인은 히스에 관한 보다 객관적인 책을 쓰고자 했다. FBI 파일을 면밀히 연구한 와인스타인은 FBI가 히스 사건을 조작했다고 볼 의문은 전혀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히스를 변호했던 변호사들을 만나 보았다. 히스가 챔버스를 상대로 제기했던 명예훼손 소송을 담당했던 에드워드 맥클린(Edward McClean) 변호사는 히스가 많은 부분을 숨기고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특히 프레실리아가 히스 못지 않은 공산주의 활동가임을 알게 되었는데 히스는 이를 숨기려 했다고 와인스타인에게 전해 주었다. 맥클린은 타이프라이터가 위조되었다는 주장은 재판 당시에는 제기되지 않았는데 히스가 나중에 그런 주장을 했다고 지적했다. 와인스타인은 히스와 인터뷰를 하면서 타이프라이터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어 보았는데 히스의 답변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와인스타인은 히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1978년 와인스타인이 쓴 ‘위증’(Perjury)이 서점가에 나왔다. 와인스타인은 히스가 간첩이며 위증을 범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 대한 신문의 서평은 대체로 우호적이었지만 위증과 간첩 여부에 대해선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와인스타인을 향해 좌파 평론가들은 곧바로 비난을 퍼부었다. 빅토 네이버스키는 네이션지(誌)의 논평을 통해 와인스타인이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파당적(派黨的) 입장을 갖고 접근했다고 비난했다. 게다가 와인스타인은 동명이인을 혼동하는 사소한 착오를 범했음이 밝혀져서 출판사가 사과를 하고 손해배상을 하는 일마저 있었다.

좌파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와인스타인은 자기가 ‘위증’을 집필한데 참고한 5만 페이지의 정부 문서가 의회 도서관과 해리 트루만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고, 또한 자신이 집필에 사용한 문서를 그가 설립한 ‘민주주의 센터’(Democracy Center)에 비치했으며 누구든 이 문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샘 타넨하우스(Sam Tanenhous)라는 젊은 학자는 1997년에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를 출간했다. 와인스타인이 수집한 문서 등 많은 자료를 이용해서 연구한 타넨하우스는 챔버스가 진실을 말했다고 결론내렸다.

계속되는 진실 게임

와인스타인으로 인해 히스의 명예회복운동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면서도 히스는 자신에 대한 위증죄 판결을 뒤집기 위해 재심을 신청했다. 1982년 연방지방법원은 히스에 대한 재판에 불공정한 점이 없다는 이유로 히스의 신청을 기각했다. 이듬해 연방항소법원은 지방법원의 판결을 인정했고, 연방대법원은 히스의 상고를 기각했다.

1981년에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히스를 둘러싼 진실 게임은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기가 반공 보수주의자가 된 데는 챔버스의 영향이 컸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레이건은 1984년에 챔버스에 대해 민간인에 주는 최고의 명예인 ‘자유의 메달’(President Medal of Freedom)을 추서했다. 1985년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가 운영하는 ‘내셔날 리뷰’(National Review)  30주년 기념호에 레이건은 챔버스를 추모하는 글을 기고했다.

한편 히스의 사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1985년에 프레실리아가 사망함에 따라 히스는 1960년경부터 동거했던 이사벨 존슨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1988년 히스는 자기의 지나온 세월을 회고한 책 ‘삶의 기억’(Reflections of Life)을 출간했다. 주로 사적 신변 이야기를 주로 썼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히스는 닉슨, 후버, 그리고 챔버스를 ‘불신성한 3위1체’(Unholy Trinity)라고 불렀다.

구(舊) 소련 문서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었고 소련 공산당은 해체되었다. 이듬해 러시아 대통령이 된 보리스 엘친은 구 소련의 기밀문서를 사방의 학자들에게 공개할 의도가 있다고 밝혔다. 1991년 8월 히스는 러시아의 몇몇 관리에게 구 소련 문서 중 그가 “소련을 위해 돈을 받고 일했던 첩자(paid agent)가 아님을 밝혀 줄 수 있는 증거”가 있나 확인해 주도록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히스는 자기가 88세이며 단지 진실을 밝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했다. 히스의 부탁을 받은 존 뢰벤탈(John Lowenthal)은 과거 소련의 외교 안보 문서를 관장하고 있는 디미트리 볼코고노프(Dimitri Volkogonov) 장군을 만나서 그가 관리하고 있는 KGB 문서에서 히스에 관한 것을 찾아 주도록 부탁했다.

두 달 후 뢰벤탈은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해서 볼코고노프를 만났다. 볼코고노프는 뢰벤탈에게 한 장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거기에는 “히스가 소련의 정보기관을 위한 첩보원으로 일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볼코고노프는 챔버스 또한 소련의 첩보원이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는 단지 미국 공산당원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1992년 10월29일 히스는 이 서신을 공개했고, 뉴욕 타임스는 히스가 반세기만에 누명을 벗었다고 대서특필했다. ABC, CBS, NBC 등 네트워크 뉴스도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소련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와 보수 평론가들은 이에 대해 의구심을 즉각 제기했다. 윌리엄 버클리는 단 한 명의 소련 장성의 이야기가 타이프라이터 등 많은 물적 증거를 뒤집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와인스타인의 반응은 보다 더 정교했다. 와인스타인은 볼코고노프가 단지 KGB의 문서만을 관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챔버스는 자기와 히스가 모두 소련의 국방정보국(GRU)를 위해 일했다고 증언했음을 상기시켰다. 사실 히스는 GRU를 위해 일했는데, 그는 보수를 받지도 않았다. 히스는 자기의 이념에 근거해서 소련을 위해 간첩이 되었던 것이기에 히스가 ‘돈 받은 첩자’(paid agent)가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와인스타인의 논평은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스미스 대학을 떠난 후 ‘민주주의 센터’(Democracy Center)를 세운 와인스타인은 구 소련 문서를 연구해서 출판하기로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와인스타인이 볼코고노프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향하자 볼코고노프는 자기는 단지 이틀 동안 KGB 문서고의 작은 일부만 보았으며, 히스의 대리인인 뢰벤탈이 “히스는 단지 평화롭게 죽고 싶을 뿐”이라면서 자기에 그런 발표를 하라고 종용했으며 자기가 사안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경솔하게 발표했다고 물러섰다. 그는 뉴욕 타임스의 모스크바 특파원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신문과 방송은 볼코고노프가 말을 바꾼 것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베노나 문서

1990년대 들어 1940-50년대 미국 공산당 활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졌다. 1995년에 하베이 클레르(Harvey Klehr)와 존 얼 헤인스(John Earl Haynes)는 ‘미국 공산주의의 비밀세계’(The Secret World of American Communism)란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미국 공산당은 소련에 의해 조종된 꼭두각시 전위조직이었다고 결론내렸다. 1995년 7월 미국 정부는 국가정보국(NSA)이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소련의 무선 교신을 해득한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 문서를 공개했다.

베노나 문서는 소련이 워싱턴에 암호명이 알레스(Ales)인 첩자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는데, 알레스의 행적은 영락없이 히스였다. 1985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 요원 올레그 고르디에브스키(Oleg Gordievsky)는 히스의 암호명이 알레스였다고 진술한 바 있었다. 와인스타인은 1997년에 나온 ‘위증’의 수정판에서 베노나 문서를 인용했다. 이제 히스가 간첩이었음은 명백해 진 것이다.

히스, 사망하다

1996년 11월, 히스는 92세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전하면서 ABC의 앵커 피터 제닝스는 “KGB 문서는 히스의 주장을 지지했다”고 논평했다. 제닝스는 1992년과 1995년에 밝혀진 엄청난 진실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의 조지 윌(George Will)은 신랄한 평론을 썼다. 그는 “앨저 히스는 교도소에서 4개월을 보냈고, 남은 생애 42년을 자기가 결백하다는 픽션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충성이란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히스가 전체주의에 무조건적으로 맹종함에 따라 히스의 추종자들이 치룬 대가는 컸다. 히스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진보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를 추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지적(知的) 타락으로 끌고 내려갔으며, 이로 인해 미국 좌파의 도덕적 파산을 앞당겼다”고 했다.

공산주의 간첩의 정신세계

  히스에 관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무엇으로 하여금 그가 그렇게 철저한 가식(假飾)과 위선(僞善)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했나 하는 점이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자식에게도 거짓을 주입해서 자기를 옹호하도록 했다. 저자는 히스가 거울 속에 있는 또 다른 자기가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 간첩의 심리 상태를 가졌다고 지적한다.

1930년대 소련 정보기관은 미국 내 첩자들에게 어느 경우도 자백을 하지 말도록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다. 사형을 당한 로젠버그 부부도 결코 자백하지 않았고 히스도 그러했다. 저자도 지적하듯이 히스는 자기가 간첩임을 고백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추종하는 좌파들로 하여금 그들이 바보가 아니라 역사의 희생자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반세기에 걸쳐 히스가 벌인 진실 게임은 미국 지성계에 엄청난 부작용을 남겼다. 더구나 소련 공산체제가 무너진 후에도 히스의 위선이 계속됐다는 사실에 대해선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히스가 미친 해악(害惡)은 미국에 한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 인용한 조효제 교수의 칼럼에서 보듯이, 히스는 한국 좌파에게도 ‘영웅’이다. 조 교수는 히스를 ‘지식인’으로 치켜세우고 그를 간첩으로 몬 사람을 ‘수구세력’이라고 말하지 있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좌파의 병적(病的)인 정신상태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에게는 우드스톡 타이프라이터의 서체라든가, 휘태커 챔버스의 논리적인 증언, 그리고 베노나 프로젝트 문서가 보여주는 엄숙한 진실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에 불리한 모든 것이 음모이고 계략인 것이다. 우드스톡 타이프라이터는 FBI가 날조한 것이고, 베노나 프로젝트 문서는 CIA가 변조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대학교수가 되어서 순진한 학생들에게 역사를 제멋대로 왜곡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스를 역사의 무대로 복구시킨 것은 대학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사실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히스 사건은 잘 보여 준다. 만일에 휘태커 챔버스가 없었으면, 앨런 와인스타인 같은 헌신적인 학자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진실은 영원히 묻혀 질 수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히스를 옹호한 좌파의 논리는 백화점의 회전문 같은 것이었다. 한 좌파가 다른 좌파의 글을 인용하고, 그러면 또 다른 좌파가 그 글을 인용하는 식이다. 백화점 회전문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은 영원히 뱅뱅 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좌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엄연한 사실(Hard Facts)이다. 오직 사실만이 회전문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을 밝히고 또 사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c) 이상돈
(끝)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