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데이비드 탈봇, 케네디 형제 (2007년)
2008-08-27 00:29 2,528 관리자



데이비드 탈봇, 형제 (프리 프레스, 2007, 478쪽, 28달러)

  David Talbot, Brothers – The Hidden History of the Kennedy Years
(Free Press, 2007)

금년(2008년)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된지 45년,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된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케네디 대통령과 그 가족에 관한 책은 무수히 많다. 온라인 신문 ‘살론닷컴(Salon.com)’의 창립자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탈봇이 작년 가을에 펴낸 이 책은 케네디 형제가 죽게 된 배경을 다루고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주변 사람들의 새로운 증언을 많이 담고 있는 이 책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 아님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당시 케네디 형제가 처했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어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 내부 소행이라고 믿은 로버트 케네디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는 댈러스 방문 중 암살당했다. 법무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는 그 소식을 에드가 후버 FBI 국장으로부터 들었다. “후버의 목소리는 케네디의 사망을 즐기는 것 같은 퉁명스러운 調(조)였다”고 로버트 케네디는 나중에 주변에 말했다. 로버트는 정부 내에서 무슨 일이 생겨서 자기의 형이 죽었다고 직감했다. 형의 암살 소식을 듣는 순간에 로버트는 CIA 국장이던 존 매콘과 함께 있었다. 부유한 공화당 정치인 출신인 매콘은 CIA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콘은 케네디 암살자가 두 명이라고 생각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나중에 전했다.

로버트는 형의 죽음이 CIA와 마피아, 그리고 쿠바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에드가 후버는 “오스월드가 아마도 쿠바의 요원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로버트는 후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스월드가 잭 루비에게 살해 당하자 미국이 마치 갱들의 세계로 전락한 것처럼 보였다. 로버트는 측근을 시켜 잭 루비의 배후를 조사하도록 했다. 루비는 시카고 마피아의 멤버임이 드러났다. 로버트는 친구 빌 월튼을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보내서 크렘린이 형의 암살에 관련이 있나 확인해 보았다. 크렘린은 자신들이 관련되지 않았다고 확인해 주었다. 로버트는 형과 자기가 미국 정부 내의 기존 세력과 전쟁을 벌인 결과로 형이 죽었다고 확신하게 됐다.

케네디 형제를 무시한 미 군부, CIA, FBI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는 공화당 후보 닉슨에 대해 간신히 승리했다. 선거 운동 중 케네디는 “쿠바를 공산 압제에서 해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케네디는 ‘민주당은 유약하다’는 이미지를 벗어 버리기 위해 이런 약속을 한 것이다. 조직범죄단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던 케네디의 아버지 조지프는 시카고의 마피아를 움직여서 선거인단 숫자가 많은 일리노이 州에서 케네디가 승리할 수 있도록 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군 지휘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猛將(맹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공군참모총장은 독일과 일본에 대한 무차별 융단폭격 전략으로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 대장이었고, 해군참모총장은 구축함 戰團(전단)을 최고속도로 몰아 붙이는 전술로 명성을 얻은 알레이 버크 대장이었다. 이들은 젊은 대통령이 나치에 대한 宥和主義(유화주의)를 주장했던 그의 아버지 조지프와 마찬가지로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주도하는 합동참모본부는 젊은 대통령과 포드 자동차 전문 경영인 출신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를 공공연하게 무시했다. CIA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과 마찬가지로 앨런 덜레스가 계속 국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케네디 형제는 군부, CIA, FBI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그스 灣 침공 사건

케네디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에 CIA가 수립한 쿠바 침공 계획을 승인했다. 1961년 4월 17일 CIA가 이끄는 쿠바 反共 민병대는 쿠바의 피그스 灣(만)을 침공했다. 이들은 늪지에 상륙했으나 쿠바 군의 우세한 화력에 무너졌고, 기대했던 미 공군기는 지원폭격을 하러 오지 않았다.
최근에 공개된 자료는 CIA는 최초 병력만으로는 작전이 실패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케네디에겐 이 사실을 숨겼음을 보여 주었다. 일단 작전이 시작되면 공중 폭격 등 미군의 본격적 개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CIA는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케네디는 공습명령을 거부했고, 침공군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1961년 7월 합참의장 렘니처 대장은 핵 미사일로 소련을 선제공격하는 전쟁계획을 케네디 형제에 대해 브리핑했다. 렘니처는 선생이 학생 대하듯이 대통령을 대했다. 얼마 후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군복 차림으로 뉴욕의 유엔 본부를 방문했다. 케네디 형제는 이들을 일종의 지적 호기심을 갖고 보았다. 군부와 보수층은 이 같은 케네디의 반응에 경악했다.
그 해 가을 케네디는 피그스 만에서의 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CIA의 덜레스 국장과 비셀 부국장을 파면했다. 나중에 CIA 국장이 된 리차드 헬름스 등 CIA에서 뼈가 굵은 사람들이 덜레스 국장과 비셀 부국장을 파면한 케네디 형제를 어떻게 보았을 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케네디는 공공연하게 대통령을 무시한 렘니처 합참의장을 경질하고 학자風(풍)의 맥스웰 테일러 대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마피아를 건드린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으로서 로버트 케네디는 조직 범죄 소탕에 심혈을 기울였다. 법무부 수사관들에게 공갈 협박이 날아 들었고, 로버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피아는 로버트에 대해 대단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버트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는  마피아의 친구였고, 그의 형 존 F. 케네디는 마피아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됐기에 특히 그러했다. 마피아가 케네디 형제에게 분노한 이유는 또 있었다. 마피아는 쿠바의 호텔 카지노 등 위락시설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카스트로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마피아는 케네디 행정부가 쿠바에 침공해서 그들의 재산을 도로 찾아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것이 無爲(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쿠바에 대해 미 군부, CIA 그리고 마피아가 같은 입장을 갖고 있었다. 

1962년 5월 한 흑인 학생이 흑인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 미시시피 주립대학에 등교하려 하자 백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미시시피 경찰은 폭도들을 제어하지 않았고, 흑인 학생을 호송하던 연방 보안관들의 생명이 위협받았다. 로버트의 요청에 따라 케네디 대통령은 육군 부대의 투입을 명했다. 하지만 이런 지시에 불만을 느낀 육군은 출동을 지연시켜서 상황이 거의 끝날 무렵에 도착했다. 백악관에 대한 군부의 불신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10월 미국의 U-2 정찰기는 소련의 미사일이 쿠바에 설치되고 있음을 밝혀냈다. 합동참모본부에선 의장인 맥스웰 테일러 장군만이 온건파였다. 공군참모총장은 르메이 대장은 쿠바를 당장 폭격하자고 주장했다. 소련의 보복이 있지 않겠냐는 케네디의 질문에 대해 르메이는 소련은 달리 취할 조치가 없다고 했다. 케네디는 쿠바 봉쇄에 나선 해군 戰團(전단)이 쿠바에 대해 임의로 작전을 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그러자 앤더슨 해군참모총장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에 대해 “그것은 해군의 영역이지 당신들이 관할이 아니다”고 대들었다.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케네디 대통령은 전쟁을 하자는 장군들을 억제할 수 없게 됐다.

로버트 케네디는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 도브리닌에게 울다시피 하며 미사일 철수를 애원했고, 장군들은 케네디 형제의 이런 모습을 조롱했다. 케네디 형제는 군부 몰래 터키에서 미국 미사일을 철수하고 쿠바에 침공하지 않겠다고 소련에 보장했다. 그러자 비로서 소련은 미사일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수치라고 공공연하게 대통령을 비난했다.

1962년 12월 말 피그스 만에서 쿠바 군에 의해 포로가 됐던 반공 쿠바인들이 석방되어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케네디는 이들을 환영하는 군중행사에 참석해서 아바나를 해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쿠바 난민단체는 쿠바 해방을 위한 조직을 강화했고 CIA는 이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미 소련에 대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케네디는 아바나를 해방할 의사가 없었다.
쿠바 난민단체는 자신들 단체의 뉴올리언스 지부에 가입한 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카스트로를 찬양하는 활동을 하는 리 하비 오스월드라는 전직 해병대원을 수상하게 생각했다. 피그스 만 참전용사로서 쿠바 난민단체를 이끌던 안젤로 무가도는 오스월드가 FBI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로버트 케네디에게 알려 주었다. 형이 암살당한 직후 로버트가 FBI를 의심한 것은 무심히 흘려 들었던 무가도의 말이 기억 났기 때문이었다.

평화를 추구했던 케네디 대통령

1963년 6월 10일 케네디 대통령은 아메리칸 대학에서 “미국과 소련이 군사주의의 차가운 魔手(마수)를 벗어나자”고 제안하는 연설을 했다. 그 해 8월 핵실험 금지조약(Limited Test Ban Treaty)이 조인되었다. 세계가 美蘇 핵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케네디가 당면했던 또 다른 문제는 베트남이었다. 케네디가 베트남 문제를  존슨과 달리 접근했을 것인가에 대해선 많은 논쟁이 있다. 근래에 공개된 자료는 케네디의 진심이 완전 철군(撤軍)에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케네디는 1963년 말에 군사고문단 1000명을 철수하고, 1964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에 완전히 철군할 생각이었다. 군부와 CIA는 백악관의 이런 움직임에 강력히 저항했다.

1963년 11월 22일 댈라스

케네디의 진보적 정책에 대해 미국 남부의 백인 유권자들은 분노했다. 196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케네디는 남부 유권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선거인단표가 많은 텍사스를 잃어 버리면 케네디는 재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린든 존슨 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지만 텍사스의 민심은 이미 케네디를 떠나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케네디는 댈라스를 방문하기로 했다.

당시 텍사스 주지사이던 보수성향의 존 코널리는 비록 민주당원이기는 했지만 케네디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진보성향의 야보로 상원의원은 케네디의 방문을 적극 추진했다. 적대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댈라스 시내에서 오픈 카 퍼레이드를 하는 것은 보안 측면에서 볼 때 무모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式(식)의 케네디家(가)의 무모함 때문에 케네디는 11월 22일 오픈 카를 타고 시내를 누비다가 델리 플라자 코너에서 총탄을 맞았다.

사건 후 FBI는 오스월드가 교과서 빌딩 6층에서 케네디를 단독으로 저격했다고 발표했다. 저격범이 12.78달러 짜리 라이플로 6초도 안 되는 순간에 3발을 발사해서 멀리 아래에서 움직이는 차에 탄 대통령을 맞힌 것이다. 형의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로버트는 미국에 ‘보이지 않는 정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형의 죽음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케네디 암살을 조사한 워렌 위원회는 암살이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내렸다. 이에 대해 법무장관이던 로버트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형이 죽은 후 자신의 권한과 영향력이 급속히 줄어 들고 있었음을 느낀 로버트는 달리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다. 워렌 위원회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멤버는 CIA 국장을 물러난 앨런 덜레스였다. 덜레스는 CIA와 쿠바와의 관계 등 CIA에 관한 문제가 위원회에서 거론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음모 이론’

워렌 보고서는 케네디 암살이 거대한 음모의 결과라는 ‘음모 이론’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로버트는 어떤 음모가 형을 죽게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법무차관이던 니콜라스 카첸바흐는 로버트는 “음모가 형을 죽게 했고, 그렇게 된 책임이 자기에 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말했다.

암살 당일 대통령의 리무진을 바로 뒤 따라간 차에는 케네디 형제의 측근인 케니 오도넬과 데이브 파워스가 타고 있었다. 2차 대전 참전용사인 이들은 처음 두발의 총성은 전방에서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이들은 총탄이 모두 오른 쪽 뒤에서 발사됐고, 전방에서 발사된 것으로 들은 것은 혼란 때문이라는 FBI 의 설명에 동의하고 말았다.

1964년 8월, 로버트는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했다. 상원의원이 된 후에도 로버트는 형의 죽음의 진실을 캐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상원의원으로서 로버트는 인종 갈등과 빈곤 문제에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면서 로버트는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야만 형의 암살을 밝힐 수 있다고 주변에게 말하곤 했다.

  1966년 말에는 케네디 암살범은 한명이 아니라 2-3명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몇 권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1996년 11월호 라이프誌(지)는 케네디 암살이 오스월드의 단독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내용을 담은 특집을 내보냈다. 1967년 들어서 한 여론 조사는 미국민의 60%가 케네디 대통령이 음모로 암살됐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67년 초 뉴올린스의 연방검사 짐 개리슨은 케네디 암살을 다시 수사한다고 발표했다. 개리슨은 케네디가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음모로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그 해 2월에 개리슨이 관련자로 지목해서 수사를 받던 사람이 돌연히 죽었다. 3월에 개리슨은 뉴올리언스의 명망있는 사업가 클레이 쇼를 오스월드의 배후로 체포했다. 개리슨은 연일 선정적 修辭(수사)를 동원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개리슨은 오스월드는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해 CIA가 훈련한 요원이며, 단지 케네디 암살을 쿠바의 소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로 분장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개리슨 검사의 배후를 알아 보기 위해 법무부 시절의 동료이던 월트 세리단을 뉴올린스로 파견했다. 세리단은 개리슨이 뉴올린스 마피아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 냈다. 개리슨의 수사에 무리가 많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고, 결국 1969년 3월 클레이 쇼는 무죄평결을 받았다. 개리슨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케네디 암살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여론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로버트 케네디 암살

1967년 3월 로버트 케네디는 상원에서 북 베트남에 대한 공습 중지와 협상으로 통한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로써 로버트는 존슨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결별했다. 그러자 로버트가 카스트로 암살을 지시했고, 그로 인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음해성 기사가 언론에 등장했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지친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퇴진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맥나마라에게 자기 편에 서줄 것으로 요청했지만 맥나마라는 이를 거절하고 존슨이 마련해 준 세계은행 총재 자리를 수락했다. 

  1968년 초 평화를 내건 유진 매카시 의원은 뉴햄프셔 예비선거에게 존슨 대통령에게 근소한 차이로 따라 붙어 충격을 주었다. 대선 경쟁에 더 이상 국외자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로버트 케네디는 뒤늦게 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3월 31일 존슨은 출마 포기를 선언했고, 민주당 예비선거는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과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의 3파전으로 진행됐다. 민주당의 진보진영은 로버트가 오히려 진보 표를 분산시킨다고 비난했다.

1968년은 분노와 폭력이 함께하던 해였다. 4월 4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멤피스에서 피살됐다. 로버트는 인디애나와 네브라스카 예비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5월말에 치러진 오리건 주 예비선거에선 유진 매카시가 승리했다. 문제는 대의원 숫자가 많은 캘리포니아였다. 만일에 캘리포니아에서 패배하면 케네디家의 신화는 끝나는 것이었다. 로버트와 케니 오도넬, 피에를 샐린저 등 그의 보좌관들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심을 움직였다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로버트는 캘리포니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6월 5일 로스앤젤레스의 앰바서더 호텔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나오던 로버트는 서한 서한이라는 24세의 팔레스타인 청년에게 저격됐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 다음날 운명했다. 총에 맞은 로버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잭, 잭”이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형을 불렀던 것이다. (‘잭’은 존 F. 케네디의 호칭이다.)

진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사라져 버렸다. 케네디의 남은 가족들 자신들도 암살될 수 있음을 알고 진저리 쳤고, 재키는 특히 그러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후 의회는 베일에 가렸던 CIA의 불법적인 첩보활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프랑크 처치 상원의원이 이끄는 특별위원회는 CIA의 국내외 정치사찰과 외국 지도자들의 암살 활동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이 과정에서 CIA와 마피아, 그리고 쿠바 망명단체와의 관계가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암살활동을 조사하던 게리 하트 상원의원은 이 삼각연대가 갖고 있던 ‘반(反)케네디 구조’를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하트 의원은 “CIA의 어느 하부 조직이 독단적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1975년 6월에 상원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할 예정이던 시카고의 마피아 代父(대부) 샘 지앙카나가 피살됐다. 1976년 7월에는 CIA와 마피아 사이의 중개인으로 알려진 자니 로실리가 소환을 앞두고 처참한 시신으로 마이애미에서 발견됐다. 두 사람은 마이애미의 대부 산토 트라피칸트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생각됐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의회의 조사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1990년대 들어서 케네디 암살에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받던 사람들이 하나둘 씩 죽음을 맞게 됐다. 리차드 헬름스, 제임스 앵글턴 등 국장과 부국장을 지낸 간부들은 죽음까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현장에서 활동했던 요원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케네디 암살에 관여했음을 암시하고 죽음을 맞았다. 반공 쿠바 군(軍)과 관련을 맺었던 데이비드 필립스는 1988년에 사망하기 전에 가족에게 자기가 그날 댈러스에 있었다고 말했다.
피그스 만 침공작전에 참가했던 하워드 헌트는 2007년 초에 사망하기 전에 케네디 암살이 CIA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두 번째 암살범이 전방에 있었다는 내용의 구술 증언을 남겼다. 헌트는 1970년에 CIA를 퇴직한 후 백악관 비밀 팀에 의해 고용돼서 민주당 선거본부가 있던 워터게이트 빌딩에 침입했다가 발각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왜 미국의 언론이 이 사건을 집유하게 추적하지 않은 부분이다. 주요 신문은 오히려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여론으로 몰고 갔다. 저자는 1960년대만 해도 CIA가 언론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CIA의 간부들이 예일 등 명문대학 출신이라서 주요 언론사의 간부들의 협조를 얻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월간조선 2008년 4월호)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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