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로버트 케이건, 천국과 힘(2003, 2004)
2008-10-30 12:46 1,462 관리자


  로버트 케이건, 천국과 힘 (2003, 알프레드 노프, 2004, 빈티지)
    Robert Kagan, Of Paradise and Power (2003, Alfred Knopf)
                                                          (2004, Vintage, 158 pages,  $11.00)

로버트 케이건은 예일대학의 저명한 전쟁사(戰爭史) 학자인 도널드 케이건의 아들로서, 예일대학을 나왔고 아메리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때 국무부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있다. 로버크 케이건은 2003년 초에 나온 이 책으로 유명해 졌다.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 벌어진 대립을 명쾌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유럽과 미국이 이제는 세계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갖고 있다는 가식(假飾)을 벗어 던져야 한다는 말로 100쪽 남짓한 작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을 시작한다. 케이건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유럽은 이미 힘(power)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해놓은 법과 원칙의 세계에서 평화와 상대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역사 이후의 천국(post-historical paradise)’에 들어가 있고, 반면 미국은 국제법과 원칙은 신뢰할 수 없어서 오직 군사력만을 믿을 수 밖에 없는 ‘무정부(無政府)적 홉스의 세계(anarchic Hobbesian world)’라는 역사 속에 갇혀 있다.
 
미국인과 유럽인은 이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인은 화성에 왔고, 유럽인은 금성에서 왔다고 할 정도이다. 미국은 세상을 선(善)과 악(惡), 친구와 적(敵)으로 나누어 보는 데 비해, 유럽은 세상을 보다 더 복잡하게 본다. 외교에 대해 인내심이 적은 미국은 보다 쉽게 무력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 국가 중에서는 그나마 영국이 미국을 조금이라도 닮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인 조지 워싱턴, 알렉산더 해밀튼, 토머스 제퍼슨 등도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유럽인들은 냉전 종식을 골치 아픈 전략문제로부터 휴가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1990년대 들어 국방비를 국민 총생산액의 2% 미만으로 제한했다. 반면 미국은 군사기술에 대한 투자를 지속했고, 양면(兩面)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1990년대에 미국과 유럽은 국제안보에 있어서 감내(堪耐)할 수 있는 위험이 어느 정도인가를 두고 견해의 차이를 보였다. 유럽인들은 미국이 너무 지나친 완전한 안보(安保)를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유럽인들은 위험에 대해 보다 인내하는데, 이는 그들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단지 칼만 갖고 있는 사람은 주변 산간(山間)에서 출몰하는 곰을 감내할 수 있는 위험으로 생각한다. 칼만 갖고 곰을 상대하는 것은 곰이 출몰하도록 그냥 놔두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총을 갖고 있다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다. 사담 후세인이 야기하는 위험에 대해 유럽과 미국이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사담 후세인이 야기하는 위험보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위험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9-11 후에도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그들이 다음에 타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동에서 더 이상 중요한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1999년 봄, 나토군(軍)은 코소보에 대해 공습을 감행했다. 그러나 유럽 공군은 어디를 폭격할 지에 대해 알지 못하고 미군이 정해주는 대로 폭격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코소보 사태는 유럽의 한심한 군사적 능력을 노정(露呈)하고 말았다. 유럽이 유엔 안보이사회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럽이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오늘날 더 이상 세력 균형을 필요로 하지 않는, ‘포스트 모던’한 체제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현실주의자들(realists)은 이런 유럽을 비웃는다. 유럽 통합이란 기적은 세력 균형이나 군사적 억제력에 기초해서 이루어 지지 않았다. 유럽 통합은 오히려 군사력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 졌다.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구사(驅使)하려는 미국에 대해 유럽이 위협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미국 없이는 유럽인들이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준 미국의 군사력과 전략적 문화가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9-11이 발생했다. 9-11은 미국이 이미 들어선 길을 가속화했을 뿐이지, 결코 미국이 가는 길을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다. 물론 유럽과 미국이 세계를 보는 관념의 차이를 좁히는 것은 어려울지언정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유럽과 미국이 모두 미국의 헤게모니라는 새로운 현실을 받아드려야 한다. 

오늘날 유럽은 그들이 그렇게 희구(希求)해 왔던 평화라는 천국(天國)을 달성했다. 미국은 그러한 평화를 달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유럽은 미국을 불법자(outlaw)이고 거대한 불량배(rogue colossus)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충분히 강력한 미국은 유럽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노끈에 묶인 거인 걸리버와 같이,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제 그들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유럽 역시 그들이 미국을 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은 다자주의(多者主義)와 법(法)의 지배를 존중해야 하며, 다자주의를 통한 합의 달성이 불가능해서 일방주의에 호소해야 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어느 정도의 국제정치적 자산을 축적할 필요는 있다. 미국이 유럽의 물질적 도덕적 지지를 얻는다면 그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문제일 뿐이고, 오늘날 미국과 유럽 사이에 놓인 깊은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서로간의 작은 이해가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순진한 낙관론일 뿐이다.

케이건은 이라크 침공 후에 나온 페이퍼백 판(版)에 추가한 50여 쪽에 달하는 후기(後記)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 벌린 미국과 유럽 간의 논쟁은 세계질서(world order)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다른 시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후세인이 심각한 위협을 야기하며, 전쟁을 후세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보다 많은 절대 다수의 유럽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독일의 사민당소속 게르하르트 슈레더 총리는 “미국은 유럽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유럽은 미국이 갖고 있는 힘과 글로벌 리더십의 정당성(legitimacy)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향유했던 이 같은 정당성은 유엔 안보이사회 같은 국제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40년 동안 냉전으로 인해 마비돼 있었다. 미국은 대외 군사행동을 할 때 안보이사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럽도 그들이 중동, 동남아시아, 그리고 남대서양에서 군사행동을 취할 때 안보이사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사력이 갖았던 정당성은 동유럽에 배치되어 있었던 소련의 군사력이었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유럽은 소련에 대해 군사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으로 공동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과 더불어 미국의 정당성은 베를린 장벽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냉전 후 동유럽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위협은 결코 냉전 시대의 소련의 위협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은 이라크, 이란, 그리고 북한이 갖고 있는 대량살상무기에 대해 미국이 갖고 있는 우려에 동감하기 않고 있다. 유럽은 이 국가들이 갖고 있는 무기가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냉전 종식 후에 미국에 향유하고 있는, 전에 없는 글로벌한 힘은 피할 수 없이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오늘날 유럽은 한때 누렸던 영향력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유럽은 이제 파트너가 되기에는 너무 약하고, 희생물이 되기에는 너무나 안전하다. 그래서 유럽은 통제 받지 않는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1999년, 유럽은 그들의 뒷마당인 코소보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에도 미군 지휘관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좌절을 느낀 유럽은 이제 유엔 안보이사회가 정당성의 원천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이라크를 침공하는데 있어 유엔 안보이사회를 거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럽인들이 주장하듯이, 유엔 안보이사회는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성배(聖杯)라도 된단 말인가 ? 물론 그렇지 않다. 

1991년 41대 부시 대통령은 걸프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엔 안보이사회의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50만 대군(大軍)을 준비시켜 둔 다음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안보이사회의 동의가 있던 없던 간에 군사행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8년에 ‘사막의 여우’ 작전이라 불리는 이라크 공습을 할 때에 안보이사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1999년에 유럽국가들은 그들의 뒷마당인 코소보에 개입할 때에 안보이사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외무장관이던 녹색당 소속의 조슈카 피셔도 대량학살을 막기 위한 무력개입은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미국도 안보이사회를 거치지 않고 코소보에 군대를 파견했다.

유럽이 이라크 침공에 앞서 안보이사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이중기준(二重基準)이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자크 시락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4년 전에 유럽과 미국이 합동으로 코소보를 침공했을 당시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단일한 국제법 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세계를 도덕성이나 정의가 결여된 세계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제법 원칙을 너무 경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도덕과 정의를 추구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그 점은 유럽인들이 코소보 사태에서 경험한 바 있다. 유럽인들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국제질서를 갈기갈기 찢었다고 주장하지만, 유럽인들은 1999년에 코소보 사태를 다룰 때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이제 유럽은 ‘영구평화론(永久平和論)’을 주창한 칸트의 기적을 달성했다. 유럽은 웨스트팔리아 평화 체제를 넘어서 ‘포스트 모던한 초(超)국가적 질서’에 이르렀다. ‘새로운 포스트 모던한 유럽의 질서’(‘new postmodern European order’)는 유엔이 세워진 당시의 배경과는 전혀 다른 기초에 서있다. 반면 미국은 웨스트팔리아 체제(體制)의 섬세함 보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더 중시하고 있다. 냉전 시대에도 미국은 결코 소련이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은 항상 압제적 외국은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대량학살무기를 갖고 있는 제3세계의 압제자를 축출하자는 데 대해선 해리 트루만, 딘 애치슨,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심지어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우드로 윌슨도 동의할 것이다.

사전예방적 전쟁(preventive war)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1960년대 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도, 1980년대 초 레바논에서의 미군 기지 폭파 사건 때에도 그런 논의는 있었다. 더구나 대량살상무기가 사용될 수 있는 경우라면 그런 필요성은 더욱 증가한다. 세력균형론을 지지했던 헨리 키신저도 “냉전 이후 시대에 성행하는, 국가를 뛰어 넘는 테러활동에 대해선 예방전쟁이 정당화된다”고 했다. 따라서 예방전쟁 자체가 정당한가 보다는 누가 예방전쟁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유일한 초강대국은 통제될 수 있을 것인가 ?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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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