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토머스 소웰, 블랙 레드넥과 화이트 리버랄 (2005년)
2008-11-21 09:03 2,957 이상돈


토머스 소웰, 블랙 레드넥과 화이트 리버랄 (2005년, 엔카운터 북스, 372쪽)
Thomas Sowell, Black Rednecks and White Liberals (2005, Encounter Books, $25.95)

스탠포드 대학 후버 연구소의 연구위원인 토머스 소웰은 자유주의 경제학자이고 보수주의 평론가이다. 1930년에 태어난 흑인인 그는 고난에 찬 젊은 시절을 보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흑인동네에서 태어난 소웰은 어릴 적에 백인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어머니의 누이동생을 따라 뉴욕시의 할렘으로 이사했다. 그는 자기를 뉴욕으로 데리고 간 어머니의 누이동생이 자신의 생모(生母)로 추측한다고 자서전에 썼다. 맨해튼의 명문 공립학교인 스터비전트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17세 때 가정 사정으로 그만두었다. 그 후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막일을 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해병대에서 복무했다.

군 복무를 마친 소웰은 검정고시를 쳐서 워싱턴 DC에 위치한 하워드 대학(주로 흑인들이 다니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하버드 대학으로 전학해서 경제학을 전공해서 우등으로 졸업했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했고,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소웰은 하이에크, 밀튼 프리드먼과 더불어 자유주의 경제학을 일으킨 조지 스타이글러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소웰은 스타이글러 교수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 컬럼비아로 갔는데 스타이글러 교수가 이미 시카고 대학으로 옮겼기 때문에 박사학위를 하기 위해 시카고로 옮겼다고 한다. 노동부와 AT & T에서 잠시 일했고, 1968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브랜다이스 대학과 UCLA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1980년 이후 스탠포드 대학의 후버 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많은 책을 썼다.

그의 첫 저서인 ‘인종과 경제학’(Race and Economics)은 현재 연방대법원의 유일한 흑인 대법관인 클라렌스 토머스(Clarence Thomas)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8년 가을까지 30권의 책을 펴냈는데, 중요한 것을 들면 ‘경제학과 인종 정치’(1983년), ‘마르크시즘’(1986년), ‘인종과 문화’(1995년), ‘개인적 오디세이’(2002년), ‘응용경제학’(2002년), ‘기초 경제학’(2004년) 등이다. 그는 사회복지가 흑인들을 망쳤으며, 소수인종에 대한 우호적 처우(affirmative action)가 흑인들을 열등하게 만들고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2005년에 나온 이 책 ‘블랙 레드넥과 화이트 리버랄’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흑인 무식쟁이와 백인 진보파’ 정도가 될 것이다. 책의 제목 못지않게 내용도 직설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정확한 논거를 갖고 쓴 책이다. 책에는 ‘블랙 레드넥과 화이트 리버랄’ 등 여섯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인종, 노예 등 웬만한 사람 같으면 감히 다루기도 어려운 테마를 직설적으로 다루고 있어 미국의 인종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데, 그 중 두 편만 소개한다.

‘블랙 레드넥과 화이트 리버랄’

‘레드넥(redneck)’이란 “변방(邊方)에 살고 있는 무식하고 공격적인 촌놈’을 뜻하는데, 미국의 애팔라치아 산간 지역, 오자크 산간지역, 남부, 그리고 중부 캘리포니아와 캐나다 서부에 살던 배우지 못한 백인들을 부르는 용어다. 소웰은 미국에서 백인 레드넥의 유래와 그들의 문화가 흑인에게 전파된 경위를 분석하고 있다.

소웰은 미국 남부의 하층 백인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저속, 무식, 게으름, 비위생 같은 풍조가 영국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식민지 미국에 이주해온 영국인들은 영국에서 살았던 지역에 따라 집단으로 모여서 정착했는데, 매사추세츠에서 정착한 사람들은 이스트 앵글리아 출신이었고, 버지니아에 정착한 사람들은 잉글랜드 남부와 서부 지역 출신이었다. 이들은 당시 영국에서도 교육을 받은 점잖은 계층이었다. 반면 미국 남부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고원(高原) 지대, 그리고 아일랜드의 얼스터 카운티 출신이었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 지역이던 북부 잉글랜드는 중앙정부의 치안권이 미치지 못하던 무법천지 세상이어서 이 지역 출신을 ‘셀틱 변방인’(Celtic fringe)이라고 불렀다. 이들과 스코틀랜드의 시골에 살던 사람들은 가축과 같이 움막집에서 생활하는 등 지저분한 삶을 살았다. 18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이들에게 영국 문화가 전파되었는데, 미국에 이주한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에 영국의 문화가 전파되기 전에 영국을 떴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들의 고향에선 없어져 버린 저속하고 야만적인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남부에 정착했지만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 등 북부에도 집단주거지를 이루고 살면서 자신들의 저속한 행동과 습성이 마치 자랑거리나 되는 듯 행동하며 살았고, 북부의 백인들은 이들을 아주 싫어했다.

화이트 레드넥들은 툭하면 결투를 신청해서 서로를 죽이고 죽었고, 생명을 거는 싸움을 예사로 했다. 흑인에게 가해졌던 것으로만 알려진 린치(私刑)도 원래는 이들이 자행했던 풍조였는데, 흑인들이 노예에서 해방되자 린치의 대상이 된 것이다. 백인 인종우월 단체인 KKK가 십자가를 불태우는 것도 스코틀랜드에서 반목(反目)하는 가문(家門)간의 집단결투 때 사용되었던 풍습이었다. 이 같은 저속한 문화는 미국 남부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남부인들은 물건을 만들거나 장사를 하지 못했다. 남부에서 상점을 연 사람도 대개 북부 출신 백인이거나 외국인이었다. 남부의 농장에서도 젖소를 많이 길렀지만 이들은 버터와 치즈를 만들지 못해 버터와 치즈가 귀했다. 반면에 독일계 이민자들이 자리잡은 위스콘신에선 버터와 치즈를 많이 생산했다.

남부 백인들은 투기와 오락을 즐겼다. 투계(鬪鷄)는 흔했고, 그 중에도 배웠다는 버지니아의 농장주들도 분수에 넘친 사치를 해서 빚이 많았다. 남부에선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를 만들지 않고 여울목을 만들어서 말을 타고 건넜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했다. 조지 워싱턴 같은 버지니아의 농장주들은 책을 많이 소장했지만 남부에는 보통 사람들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서점이 거의 없었다. 남부에 들어선 교회도 북부와는 달랐다. 남부를 여행한 북부 사람들은 주로 침례교파와 감리교파인 남부 교회의 목사들의 저속한 웅변조 설교에 혐오감을 느꼈다. 멜로드라마조(調)의 설교는 민권운동 전성기의 흑인 목사들과 북부 게토의 흑인 교회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소웰은 이 같은 남부 백인 레드넥의 저속한 문화 패턴이 남부의 흑인들에게 그대로 전수(傳受)되었다고 본다.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미르달은 인간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흑인들의 문화가 노예 제도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같은 문화는 노예생활을 한 적이 없는 백인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고 소웰은 반박한다. 흑인들의 IQ가 전체 미국인 평균의 85% 밖에 안 되는 이유도 노예제도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해, 북부에 오래 전에 정착한 흑인들의 IQ는 남부 출신 흑인들의 그것 보다 높은 것을 보더라고 인종 보다는 문화가 더욱 영향이 크다고 소웰은 반박한다.

1920년대부터 뉴욕의 할렘에서 장사를 한 흑인들은 남부 흑인이 아니라 카리브 지역에서 이민해 온 흑인들이었다. 카리브 흑인들도 선대(先代)에는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조상이 노예였기 때문에 나쁜 문화를 갖고 있다는 이론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소웰은 지적한다. 즉 카리브와 아프리카에서 직접 미국으로 건너 온 흑인들은 남부 백인의 레드넥 문화에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소웰은 대다수 미국 흑인들에 만연되어 있는 이 같은 레드넥 문화가 20세기 후반기의 복지국가병(病), 그리고 느슨한 법 집행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고 본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미국 전체의 살인사건 건수는 줄어들었지만 흑인이 저지른 살인은 늘어났다. 1960년 전에 15세-55세의 흑인 여성의 51%는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20년이 지나선 단지 31%만 그러했고, 1994년에는 56%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25%만 결혼해서 남편과 살고 있었다. 1960년에 흑인 아동의 2/3가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1994년에는 1/3만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1960년에는 흑인 아동의 22%만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서 태어났지만 1994년에는 70%의 흑인 아동이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서 태어났다. 남북 전쟁 후에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 남성들은 다른 곳으로 팔려나간 자기 가족을 찾기 위해 곳곳을 헤매고 다녔는데, 노예에서 해방된 지 한 세기가 지나서 흑인 남성들이 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는 현상이 보편화된 것은 복지병(病)과 결부하지 않고선 이해할 방도가 없다.

미국 남부에 아프리카에서 노예가 대거 수입되기 전에 이미 자유흑인이 상당수 있었고, 그들의 후예 중에 두 보아, 서굿 마셜 등 흑인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오벌린 대학 등에서 초창기에 대학을 다닌 흑인들 중에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물라토)이 많았으며, 물라토들은 나중에 흑인 엘리뜨 계층을 이루었다. 제1차 대전 즈음해서 남부의 백인과 흑인들이 함께 북부로 이주했는데, 그러자 북부에 자리 잡고 살고 있던 흑인들마저 백인들의 인종차별이 갑자기 심해진 것을 느꼈다. 저속한 흑인들이 늘어나서 백인들의 인종차별 의식이 증가된 것이다.

1960년대 들어 복지국가 시대가 열리자 흑인들의 저급한 문화가 별안간 정당한 것처럼 대우를 받게 되고, 흑인들의 문제점이 모두 다른 사람들의 책임인 것으로 여겨지는 풍조가 팽배해 졌다. 소웰은 이런 풍조는 백인 진보주의자들(화이트리버랄)이 조장한 것이라고 본다. 1960년대 말에 대도시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나도 뉴욕타임스 등 진보언론은 경찰의 과잉진압을 탓했고, 흑인들이 한국인 같은 다른 소수인종에 대해 집단적으로 적대행위를 해도 진보언론은 모르는 척했다. 소웰은 흑인들 사이에 만연한 레드넥 문화가 1960년대에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다문화(multiculture) 풍조에 의해 정당한 것으로 대우 받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노예에 관한 진실된 역사’

사람들은 ‘노예’라고 하면 미국 남부 목화농장에서 일한 흑인 노예를 연상하지만 노예는 지구상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있었던 현상이다. 노예는 이집트, 아랍 등 많은 지역에 있었고, 1500년-1800년 동안 적어도 100만 명의 유럽인이 북아프리카에 노예로 잡혀 가서 거래되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Roots)는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서 북미대륙으로 강제로 실어 온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노예로 잡은 사람은 보다 강력한 흑인 부족이었고, 이들은 누구에게나 돈을 받고 그들이 잡은 노예를 팔았다.

노예 제도를 없애자는 운동은 유럽의 보수적 종교단체가 처음 시작했다. 유럽에서 제국주의가 등장하자 노예 거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일찍이 노예를 금지했을 뿐더러 자국 해군으로 하여금 공해상에서 노예선을 보면 포획하도록 하였다. 영국은 또한 오토만 터키로 하여금 노예 제도를 폐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미국은 남북전쟁이란 엄청난 비극을 거쳐서 노예를 폐지했는데, 전쟁을 통해 노예를 폐지한 것은 이례적인 경우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점진적 과정을 거쳐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미국에서 노예 제도를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최초로 규정한 집단은 퀘이커 교회였다.

노예를 다루었던 태도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서아프리카와 남미의 마야에선 노예를 제물(祭物)로 사용했다. 북아프리카 노예들은 선박에서 노 젓는 중노동을 했다. 아랍에선 주로 젊은 여자 노예를 성적 노리개로 썼고 남자 노예는 거세(去勢)해서 가사를 돌보게 했다. 많은 노예들이 사막을 이동하고 또 거세되는 과정에서 죽었다. 노예가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자식을 낳는 경우는 아랍이나 북아프리카에선 있을 수가 없었고, 오직 미국 남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며 버지니아의 농장주였던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등도 노예 제도가 악(惡)이며, 언젠가는 사라질 제도라고 생각했다. 남북 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도 그렇게 생각했다. 남부의 지도자들은 노예 제도는 언젠가는 없어져야 하지만 흑인들이 일시에 해방되면 큰 혼란이 일어나서 모두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부를 여행한 알렉시스 토크빌도 노예가 해방되면 남부에서 인종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북부에서 노예해방론자들이 생겨났을 때에 이들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남부의 농장은 노예와 함께 거래되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등도 모두 노예를 소유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던 노예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선물(膳物)하고 세상을 떴다. 자식이 없이 사망한 조지 워싱턴은 유언장에서 자기의 부인이 죽은 후에 자기의 농장인 마운트 버논에 살던 노예들이 해방되도록 했다. 워싱턴은 특히 병들고 장애가 있는 노예는 자기의 유산으로 돌보도록 해서 그의 유산이 소진되게 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워싱턴은 대통령직을 마치면서 대통령 관저에 일하던 노예들이 북부지역에 그대로 남아 자유인이 되도록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존 랜돌프는 자기가 죽은 후에 노예들이 자기의 재산을 갈라 갖고 자유롭게 되도록 유언을 남겼다.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을 지낼 때 알러바마, 미시시피 등 서쪽에 새로 편입되는 영토에서는 노예를 금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노예는 도덕적으로 나쁠 뿐더러 경제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부의 목화 농장이 아닌 다음에야 노예는 오히려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미국에서의 노예 제도는 흑인에게는 모멸감을, 그리고 백인에게는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노예 제도의 유산’(legacy of slavery)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남북 전쟁이 끝나고 100년이 지난 후였다.

흑인들이 갖고 있는 모든 문제점을 ‘노예 제도의 유산’으로 들러 대는 풍조가 뒤늦게 생긴 것이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흑인들이 자유의 몸이 된 후 한 세대가 지났을 때에는 흑인 사회에 오늘날 같은 범죄, 가정 상실 같은 문제가 없었는데, 1960년대 후에 그런 문제가 급증하자 이것을 ‘노예 제도의 유산’이라고 둘러 대는 것은 비논리적이라고 소웰은 지적한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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