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도어 골드, 예루살렘을 향한 투쟁 (2007년)
2008-12-26 10:06 1,556 이상돈


  도어 골드, 예루살렘을 향한 투쟁 (2007년, 레그너리 출판사, 372쪽)
 
    Dore Gold, The Fight for Jerusalem (2007, Regnery Publishing, 2007, $27.95)

‘증오의 왕국’(‘Hatred’s Kingdom’ 2003년), ‘쓸데없는 말의 탑’(‘Tower of Babble’ 2004년) 등 베스트셀러를 내어놓은 도어 골드는 2007년에 펴낸 이 책에서 유일신(唯一神) 신앙의 고향이며, 중동은 물론이며 세계의 화약고인 예루살렘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간의 분쟁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분석하고 있다.

도어 골드는 1953년에 미국 코네티컷의 경건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콜럼비아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해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1980년에 이스라엘에 귀환해서 이스라엘 국민이 됐다. 1984년에 콜럼비아 대학에서 중동 정치를 전공해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학위논문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정치와 ×사회구조에 관한 것인데, 2003년에 나온 그의 저서 ‘증오의 왕국’의 기초가 됐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의 연구위원과 연구소장을 지냈고, 1990년대 들어선 이스라엘 정부에 대해 자문을 했다.

도어 골드는 리쿠드당(黨) 대표이던 베냐민 네타나후의 자문으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리쿠드당이 야당일 때에 리쿠드당과 요르단 왕국과의 관계를 증진하는 데 역할을 했다. 당시 집권당이던 노동당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직접 협상을 선호했던 것과 달리 리쿠드당은 요르단을 다시 이스라엘 평화체제로 불러 들이려 했던 것이다.

1996년 선거에서 리쿠드당이 승리해서 네타냐후가 총리가 되자 골드는 총리 자문관으로 일했고, 1997년에는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되어 1999년 까지 근무했다. 미국 출신인 학자풍(風) 대사인 그는 유엔의 안팎에서 이스라엘의 입장을 전파하는데 전념했으며, 그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쓸데없는 말의 탑’을 펴냈다. 1999년 선거에서 리쿠드당이 패배하자 대사직을 물러난 그는 예루살렘 공공문제연구소(Jerusalem Center for Public Affairs) 소장직을 맡아 일하고 있으며, 2001년에 리쿠드당이 다시 집권하자 아리엘 샤론 총리에 대해 자문을 했다.

‘예루살렘을 향한 투쟁’은 예루살렘이 차지 하고 있는 역사적 및 문명적 의미,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의 역사, 이러한 유대인의 역사를 지우고 예루살렘을 장악하고자 하는 이슬람 국가들, 그리고 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통치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책은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순간에 캠프 데이비드로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락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을 초청해서 열었던  평화협상에서 예루살렘을 잃어 버릴 뻔했다는 말로 시작한다. 당시 바락 총리는 동(東)예루살렘의 대부분을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 넘겨 주고, 예루살렘 고성(古城: Old City)의 무슬림 구역과 크리스챤 구역(Christian Quarter)에 대한 통치권과 유대인의 성지(聖地)인 템플 마운트(Temple Mount)에 대한 관할권도 역시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게 넘겨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 군이 예루살렘을 장악한 이래 이스라엘 총리가 이런 제안을 한 적은 없었다.

골드는 유대인의 정신적 고향인 예루살렘을 사실상 포기하는 이런 제안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골드는 특히 군 출신인 노동당 소속 총리인 에후드 바락의 스승격(格)인 이즈하크 라빈 전 총리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런 발상을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라빈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에서 아랍군대에 의해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해냈고, 1967년 ‘6일 전쟁’에선 이스라엘군 총참모장으로서 요르단의 지배 아래에 있던 예루살렘을 수복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평화협상에 관심이 없었던 아라파트는 바락의 이러한 파격적인 제안을 거부했다. 바락의 제안은 이스라엘 국내에서도 큰 반대에 봉착했다. 바락의 제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당시 야당인 리쿠드당 대표이던 아리엘 샤론은 템플 마운트를 방문해서 그 지역이 영원토록 이스라엘에 속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9월에 있었던 샤론의 템플 마운트 방문을 빌미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테러를 지시했고, 그 해 10월부터 ‘인티파다’라고 불리는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2001년 1월, 미국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섰고, 그 해 3월 이스라엘에선 샤론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당 정부가 들어섰다.

아라파트 등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템플 마운트에는 유대 성전(聖殿)이 들어선 적이 없다면서, 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들의 역사적 연고권(緣故權)을 부인한다. 그러나 템플 마운트의 땅속에선 그곳에 유대 성전이 있었으며 다윗이 실재(實在)했던 인물임을 보여주는 유물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팔레스타인은 예루살렘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들은 유대 역사를 지우기 위한 조직적인 캠페인을 벌리고 있다. 2000년 10월에 팔레스타인 관할하의 나블러스에 위치한 유태교 성지(聖地)인 조세프의 무덤(Joseph’s Tomb)이 팔레스타인 폭도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정부는 템플 마운트의 지하를 발굴하려는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의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고의로 지하 유적을 파손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파괴는 유대교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다. 2002년 4월에는 하마스 등 이슬람 테러단체의 무장대원들이 베들레햄의 예수 탄생기념 교회를 장악하고 그곳을 지키던 가톨릭 사제(司祭)들을 인질로 잡기도 했다.

저자는 유대교와 기독교 등 다른 종교를 말살하려는 이슬람의 테러행위가 전세계에 걸쳐 조직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은 과격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타깃이 되고 있다고 본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성전을 세운 유대교와 유대민족의 수도이며 성지이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고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교인들을 규합하여 처음으로 교회를 만든 기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슬람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은 마호메드가 하늘로 올라간 성지(聖地)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 예루살렘이 차지하는 위치는 메카와 메디나에 비하면 미미하다. 또한 모하메드가 과연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도 의심스럽게 보는 역사학자가 많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사우디에서 시작된 근본주의적 와하비 이슬람 교리는 마흐디(Mahdi)라고 불리는 구세주가 나타나서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일종의 성전(聖戰)이 되고 말았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 유대교와 기독교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생존할 수 있나 하는 문제는 보다 큰 본질적 문제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예루살렘 등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유대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위해 유대인들이 비록 나라를 잃어 버렸지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오랜 세월에 걸쳐 살아 왔음을 설명하고 있다. 1864년에 영국 영사관이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약 15,000명이었는데, 그 중 유대인이 8,000명, 무슬림이 4,500명, 기독교인이 2,500명이었다. 1차 대전에 시작될 무렵에 예루살렘에는 65,000명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45,000명이 유대인이었다. 1917년 11월 영국 정부는 발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12월 영국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1차 대전에 패배한 오스만 터키 제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토주권을 포기했다.

1919년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참석한 메카의 아랍 토후(土候) 세리프 후세인의 아들이며 나중에 이라크 국왕이 된 파이잘은 시온주의(Zionism) 운동의 창시자인 차임 와이즈먼(Chaim Weizmann)에 보낸 서신에서 오스만 터키가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 국가와 유대인 국가를 동시에 세우는 방안을 지지했다. 당시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당연히 새로 탄생할 유대 국가에 속하게 될 것으로 생각됐다. 반면 유대인들은 항상 예루살렘을 중심지로 생각했다. 1차 대전 후 국제연맹의 위임으로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시절에 유대인 자치기구 역할을 하던 유대기구(The Jewish Agency)도 본부를 예루살렘에 두었다.

2차 대전 중 유대인 600만 명이 나치에 의해 희생됨에 따라 유대 국가의 설립은 전후(戰後)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되 예루살렘은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해서 유엔이 직접 관장하도록 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 99,320명 중 65,000명이 유대인이었고 무슬림이 40,000명, 아랍 기독교인이 25,000명일 정도로 인구 구성에서는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점했다. 유대기구는 예루살렘을 국제화하는데 불만이었지만 우선 독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동의했다. 1948년 5월 15일에 영국의 위임통치는 종료하고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그때까지도 유엔은 예루살렘을 통치할 국제기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예루살렘에 일종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던 바로 그날, 이집트 군은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를 점령하고 베들레햄 부근까지 진격했다. 5월 19일, 요르단 왕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에 도달해서 성곽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 예루살렘은 이집트 군과 요르단 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몇 달 동안 물과 식량의 공급마저  차단된 상태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유엔에 이 문제를 호소했지만 유엔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훗날 이스라엘 군 총참모장과 총리가 된 이즈하크 라빈이 이끄는 유대 민병대 부대가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에 이르는 도로를 탈환함에 따라 비로소 예루살렘 포위상태가 해소되었다.

독립하자 마자 발생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당시 전국민의 1%에 달하는 6,000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는데,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만 1,500명이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벤구리언 총리는 예루살렘을 유엔의 통제 아래에 두는 방안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모든 종교를 위해 지킬 신성한 의무를 갖고 있다고 선포했다.

1949년 4월에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분할되었다. 즉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 속하고 동(東)예루살렘과 고성(古城: Old City)은 요르단에 속하게 된 것이다. 히브리 대학과 하다사 병원이 있는 마운트 스코포스(Mt. Scopus)는 이스라엘에 속하고, 요르단 정부가 통로를 보장하도록 되었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그들의 최고(最古)의 성지로 생각하는 유대의 고도(古都)인 헤브론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고성 안의 ‘통곡의 벽(壁)’으로의 접근도 허용되지 않았다. 기독교의 성지인 성묘(聖墓)교회(Church of Holy Sepulcher)와 올리브 동산(Mount of Olives)도 모두 요르단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요르단은 예루살렘 고성 안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정책을 공공연하게 폈다. 1964년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요르단이 관장하던 예루살렘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설립되었다. 1968년에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 의장으로 취임했는데, 카이로에서 태어난 그는 팔레스타인 출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가 예루살렘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1967년 6월 5일, 이집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린 이스라엘을 선제공습을 가해서 이집트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스라엘 군은 요르단 정부에 대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요르단 군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이스라엘 군은 요르단 군을 공격했고, 6월 8일에 이스라엘 군은 예루살렘 고성을 장악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통치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또한 웨스트뱅크와 가자, 그리고 이집트 영토이던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다.

1967년 11월, 유엔 안보이사회는 이스라엘에 대해 점령지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 242호’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 결의는 결코 이스라엘에 대해 모든 점령지로부터 철수하라고 하지는 않았으며, 예루살렘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1993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간에 체결된 오슬로 협정은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행사에 후퇴를 가져왔다. 팔레스타인 자치기구를 탄생시킨 오슬로 협정에서도 예루살렘 문제는 다루어 지지 않았지만 동(東)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아랍계 주민들이 부재자 투표를 통해 팔레스타인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서 예루살렘 문제가 향후 팔레스타인과의 협상과제가 될 수 있게 하고 말았다. 이런 우려는 2000년에 클린턴 대통령이 초청한 캠프 데이비드 회의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바락 총리는 동(東)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파격적인 양보를 하였으나 아라파트는 이를 거부했다. 이슬람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노동당 정부가 치명적인 외교 군사적 실수를 저질렀다고 본다. 첫째는 1993년 9월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체결한 오슬로 협정이다. 오슬로 협정에 의해 설립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웨스트뱅트 지역을 대부분 통치하게 되었으나 평화를 담보 받고자 했던 이스라엘의 희망은 전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오슬로 협정은 당시 외무장관이던 시몬 페레스가 당시 총리이던 이즈하크 라빈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아라파트에게 비밀리에 양보를 해서 탄생했는데, 저자는 오슬로 협정은 ‘트로이 목마’와 같은 형상이라고 비판한다. 이스라엘의 노동당 정부가 저지른 또 다른 실책은 바라크 총리가 2000년 5월에 남부 레바논에서 일방적으로 철군한 사건이다. 저자는 아리엘 샤론 총리가 가자 지구에서 일방적으로 철군한 조치도 결국은 가자 지구를 하마스와 알 케이다에 넘겨주어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과격 이슬람 세력의 주된 타깃이 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슬람 세계는 그들의 메시아인 마흐디(Mahdi)가 예루살렘에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퍼뜨리고 있다. 이란의 아흐마디엔자드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파괴해야만 마흐디의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전세계 정복계획을 위해 반드시 딛고 일어서야 하는 디딤돌인 셈이다. 하지만 만일에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수중에 떨어지면 유대-크리스챤 문명의 고향은 파괴되고 말 것이고, 그것은 곧 유대-기독교 문명의 패배를 상징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통치해야만 모든 종교에 대해 자유로운 예루살렘을 항구히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이상돈
(* 책 표지는 첨부를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갤러리의 자료사진에 관련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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