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T. J. 잉글리시, 아바나 야상곡(2008) : 마피아와 카스트로
2008-12-31 09:58 1,686 이상돈


<월간조선 2008년 11월호>

T. J. 잉글리시, 아바나 야상곡(夜想曲) (윌리엄 모로우 출판사, 2008, 396쪽)
T. J. English, Havana Nocturne : How the Mob Owned Cuba ¼and then Lost to the Revolution (William Morrow, 2008, 396 pages, $27.95)

피델 카스트로가 일으킨 쿠바 혁명은 한편으론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쿠바와 마피아와의 관계를 알고 나면 그런 의구심은 사라져 버린다. 쿠바와 마피아에 관해서 말은 무성했지만 그것을 감히 책으로 쓴 사람은 없었다. 한때 쿠바를 주름잡았던 마피아 대부(代父)와 보스들은 모두 세상을 떴고, 구전(口傳)으로만 전해 오던 쿠바와 마피아에 관한 이야기가 햇볕을 보게 됐다. 쿠바와 마피아와의 관계는 ‘케네디 암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논픽션 작가이며 할리우드의 극작가인 T. J. 잉글리시가 펴낸 이 책은 쿠바에서 카지노 천년왕국(千年王國)을 세우려 했던 마피아의 야망이 카스트로에 의해서 무너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찰스 루치아노와 마이어 랜스키

미국에서 추방돼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머물고 있던 마피아 보스 찰스 루치아노는 1946년 가을 나폴리에서 몰래 화물선에 올랐다. 매춘 조직을 운영한 혐의로 미국에서 장기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던 루치아노는 바로 7개월 전에 출국을 조건으로 석방됐다. 루치아노는 뉴욕 등 동부 항구의 부두와 조선소에 잠입해 있던 독일 첩자를 찾아내는데 협력한 대가로 석방됐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나폴리를 떠난 루치아노는 미행을 떨쳐내기 위해 카라카스, 멕시코시티 등을 거쳐 쿠바의 아바나에 도착했다.

아바나에서 루치아노는 마이애미의 마피아 조직을 이끌던 마이어 랜스키를 만났다. 쿠바의 잠재적 가능성에 눈떠서 일찌감치 아바나에 자리잡은 랜스키는 루치아노에게 쿠바를 그들의 도박왕국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 해 12월 루치아노는 아바나의 나치오날 호텔로 미국 각지의 마피아 보스 20여명을 불러서 회의를 열었다.

비토 제네비체, 앨버트 아나스타시아, 프랑크 코스텔로 등 악명 높은 마피아 대부(代父)들이 대거 참석한 이 회의에서 랜스키는 쿠바에 카지노와 호텔을 세운 후에 이를 카리브 해(海)의 다른 나라에 확대하는 원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들은 또한 라스베가스에서 훌라밍고 카지노 호텔을 운영하던 벅시 시걸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시걸이 그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7년 6월 20일 시걸은 베벌리 힐스의 저택에서 총탄 세례를 맞고 죽었다.

루치아노가 쿠바에 잠입해 있음을 알게 된 미국 정부는 쿠바 정부에 대해 그를 추방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1947년 3월 루치아노는 이탈리아로 향하는 화물선을 타고 아바나를 떠나야 했다. 루치아노가 아바나를 떠나게 됨에 따라 랜스키는 독자적으로 아바나에서 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됐다.

1902년 폴란드에서 유대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랜스키는 가족을 따라 어릴 적에 뉴욕에 정착했다. 온갖 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 랜스키는 다양한 불법적 사업을 했다. 루치아노가 시칠리아로 추방되자 그는 남부 플로리다로 거점을 옮겨서 모텔과 카지노를 열었다. 남부 플로리다에서 그는 쿠바의 군인 출신 정치인 풀젠시오 바티스타를 만나게 됐다.

부사관 출신 대통령 바티스타

풀젠시오 바티스타는 1901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바티스타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가 사서 모은 책으로 쿠바에서 가장 훌륭한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다.

스무 살이 되자 그는 쿠바 군대에 입대했다. 30살이 되자 상사가 되었는데, 책을 많이 읽은 그는 연설을 잘했다. 군 내부에서 인기를 얻은 그는 32세 나이로 부사관 노조의 대표가 되어 1933년에 ‘부사관 혁명’(Revolt of the Sergeants)을 일으켜 군을 장악했다. 그 후 7년 동안 바티스타가 지명하는 사람이 쿠바의 대통령이 됐다. 1940년 그는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서 대통령이 됐다.

바티스타는 철권통치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문맹퇴치 등 개혁적인 국가발전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을 지지했고, 미국 역시 바티스타를 지지했다. 1944년에 그는 대통령 자리를 넘겨 주고 플로리다 州 데이토나 비치의 저택으로 은퇴했다. 그가 44살이란 젊은 나이에 권좌에서 물러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티스타는 마르타라는 젊은 여인과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대통령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르타를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사랑을 위해 대통령 자리를 버린 바티스타는 데이토나 비치에 머물면서 본부인과 이혼하고 마르타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한가해진 그는 뉴욕과 마이애미를 오고 가면서 랜스키 등 마피아들과 어울렸다. 마이어는 바티스타에게 대통령 자리를 다시 장악하라고 부추겼다. 이렇게 해서 쿠바의 권력자와 카지노 마피아 간의 공고한 관계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티스타는 1948년 선거에 출마해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선거를 몇 달 앞둔 1951년 말, 여론조사는 그가 3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선거로 대통령이 될 가망성이 없음을 알게 된 바티스타는 1952년 3월 쿠데타를 일으켜서 스스로 대통령이 됐다. 

                산토 트라피칸트의 부상(浮上)

1952년 4월, 한 젊은 미국 변호사가 쿠바의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다가 큰 돈을 잃었다. 리차드 닉슨 상원의원의 재정 자문이기도 했던 그는 쿠바의 카지노가 사기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미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막 장악한 바티스타는 카지노를 정상화하지 않으면 미국 관광객들이 쿠바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랜스키에게 쿠바의 도박산업을 관리해 줄 것을 부탁했다.
   
1953년 가을, 플로리다 탬파에서 도박과 호텔 사업을 하던 산토 트라피칸트가 쿠바의 산 수시 카지노 호텔을 인수했다. 트라피칸트는 1946년 아바나에서 열린 마피아 회의에 참석한 대부 중 가장 나이가 젊은 보스였다.

혁명의 기운이 팽배한 쿠바

쿠바의 군부와 지배계층에 대한 반감은 쿠바 민중 사이에서 커져 만 갔다. 1953년 7월 26일,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反)정부 무장세력은  쿠바 동부의 산티아고에 위치한 군대 막사를 공격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반격함에 따라 160명 인원 중 16명이 사망하고 80명이 포로로 잡혔다. 카스트로는 다음날 체포됐다. 50여명은 정부군에 의해 처형됐고, 카스트로는 재판을 받고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감방에서 카스트로는 혁명을 촉구하는 책자를 완성했는데, 이 책자는 널리 유포되었다. 카스트로는 최초의 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자신이 이끄는 단체를 ‘7월 26일 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바티스타는 아바나에 대규모 호텔과 카지노를 건설하는 계획을 밀고 나갔다. 건설 붐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당시 쿠바 국민의 평균소득은 카리브 해 지역에서 가장 높았고, 중남미 전체로 보아도 높은 수준이었다. 미국의 항공사가 경쟁적으로 요금을 낮춰서 쿠바 관광비용이 인하되자 많은 미국인들이 쿠바를 찾았다. 아바나의 밤은 도박과 환락으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다. 통치에 자신을 갖게 된 바티스타는 1955년 5월 카스트로 등 정치범을 석방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석방된 카스트로는 멕시코 시티로 가서 후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때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를 만났다. 카스토르는 아바나의 유흥산업을 좋아 하지 않았다. 카스트로가 이끄는 ‘7월 26일 운동’ 본부는 쿠바 내부에 조직원을 확대하고 바티스타 정부 요인을 살해하는 계획을 세웠다. 1956년 10월 28일, 랜스키가 운영하는 몽마르트 나이트클럽에 무장 게릴라가 난입해서 쿠바의 보안경찰대장 마누엘 리코 대령을 살해했다. 바티스타 정권은 반란 동조자를 색출해서 처형하는 등 가혹한 보복을 가했다.

1956년 11월 25일 카스트로와 그의 일당은 그란마 호(號)를 타고 멕시코의 툭스판 항구를 떠나 1주일 동안의 항해 끝에 12월 2일 새벽에 쿠바 동부 오리엔테 지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사람 키 보다 큰 무성한 사탕수수 밭을 숨어서 행군했는데, 지방경찰이 사탕수수 밭에 불을 놓아서 다수가 타죽거나 포로로 잡혀 처형 당했다.

그란마에 타고 온 82명 중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게바라 등 16명만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중에 숨어 들 수 있었다. 전과(戰果)에 고무된 바티스타 정부는 카스트로도 피살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카스트로의 시체를 본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카스트로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란으로 향하는 쿠바

1957년 2월 말 뉴욕타임스의 허버트 매튜스 기자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간에서 카스트로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카스트로와 그가 이끄는 반군(叛軍)이 건재하다는 기사를 특종으로 실었다. 쿠바 정부는 보도 통제를 했지만 여행자들에 의해서 이 소식은 널리 퍼졌다. 쿠바 정부는 뉴욕타임스의 기사가 잘못된 것이며, 매튜스는 카스트로를 만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는 카스트로를 만난 매튜스의 사진을 실었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카스트로와 매튜스의 사진은 바티스타 정권에게 치명적이었다.

바티스타는 반군이 아바나를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갖고 대비하고 있었다. 1957년 3월 13일, 반군은 대통령궁(宮)과 아바나 방송국을 동시에 공격했다. 대통령궁에 공격을 가할 당시 바티스타는 ‘링컨의 암살되던 날’을 읽고 있었다. 보안군과 반란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서 정부군 5명과 반란군 45명이 죽었고, 다수의 반란군이 포로로 잡혀 처형됐다. 그러나 정부군은 아바나 방송국을 지키지 못했다. 방송국을 장악한 반란군은 “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선포했다. 반란군은 방송기재를 파괴하고 거리로 나왔지만 정부군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바티스타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상황을 장악했지만 아바나에 있던 외국인과 마피아들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지노 호텔 건설에 뛰어든 마피아

마피아들은 이제 자기들이 나서서 쿠바 국민의 마음을 되돌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카지노에 돈을 조금 걸고 하는 빙고 게임을 열고, 자동차 등 많은 경품을 걸었다. 쿠바를 거점으로 카리브 해역을 자신들의 도박 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들다운 발상이었다.
플로리다 탬파의 마피아 보스 산토 트라피칸트는 아바나에 14층짜리 디오빌을 완공했다. 디오빌은 랜스키가 짓고 있던 리베라 호텔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대단히 화려한 카지노 호텔이었다. 1957년에 쿠바 영주권을 신청한 트라피칸트는 디오빌 호텔 외에도 코모도어 호텔과 카지노, 산 수시 나이트 클럽과 카지노를 소유하고 있었고, 카프리 키지노 호텔의 준공을 6개월 앞두고 있었다.

랜스키와 트라피칸트는 쿠바를 지키기 위해선 미국 정치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쿠바는 미국 정치인들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미국 정치인들이 쿠바를 방문하면 이들은 마피아의 친절한 영접을 받았다. 당시 젊고 매력적인 상원의원 존 F. 케네디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플레이보이로도 소문난 케네디는 1957년 들어 차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아바나를 자주 들른 존 F. 케네디

케네디는 1957년부터 18개월 동안 아바나를 자주 들렀다. 랜스키와 트라피칸트는 케네디가 아바나에 오면 자신들의 호텔 특실에 묵게 하고 아름다운 창녀 3명을 그의 방에 들여 보냈다. 케네디는 이런 난교(亂交)를 즐겼다. 케네디가 몰랐던 것은 랜스키와 트라피칸트는 옆방에서 투시 거울을 통해 케네디의 난교 파티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바나에서의 케네디의 모든 경비는 마피아가 일체 부담했다. 케네디는 마피아에게 대단히 큰 빚을 진 것이다.

아바나에는 도박 뿐 아니라 섹스 산업도 번창했다. “아바나에선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매춘은 기본이고, 라이브 쇼, 호스트 바, 레스비언 쇼 등 온갖 퇴폐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혼혈 여성, 쿠바 원주민 여성에다 미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백인 여성이 어우러져 벌이는 섹스 산업은 세계의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혁명의 기운이 역력(歷歷)했던 와중에서도 마피아 내부에선 투쟁이 있었다. 뉴욕의 악명 높은 마피아 보스 앨버트 아나스타시아는 아바나에 와서 자기의 지분이 작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 놓았다. 1957년 10월 25일 아나스타시아는 맨해튼의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던 중 총탄 세례를 맞고 죽었다. 마피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이 살인사건은 산토 트라피칸트와 마이어 랜스키가 아바나에서 조종한 것이었다. 뉴욕 경찰은 아나스타시아 피살이 아바나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헤밍웨이도 자주 들른 아바나

쿠바에 마피아와 도박과 섹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의 쿠바에는 미국의 명사들이 드나 들었다. 프랑크 시나트라와 에바 가드너가 쇼를 진행했고, 영국의 문호(文豪) 그레이엄 그린도 쿠바를 좋아 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한 조종(弔鐘)인가?’를 아바나의 한 호텔에서 썼다. 헤밍웨이의 또 다른 명작 ‘노인과 바다’는 아바나 외곽의 코지마 마을을 무대로 한 것이다. 남미의 탱고와 재즈가 어울린 쿠바풍(風) 음악은 미국 본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57년 12월 10일, 아바나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큰 리베라 호텔이 개장했다. 리베라 호텔은 랜스키가 이루어낸 걸작품이었다. 개장(開場) 전야제에는 로렌스 웰크 악단과 에드 설리번 등 당대의 엔터테이너들이 참석했다.

마피아들이 아바나의 호텔과 카지노의 세계에 머물고 있을 때 카스트로는  혁명을 구상하고 있었다. 1958년 2월 카스트로는 미국의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쿠바의 외국 자본을 몰수하거나 국유화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1958년 봄에 들어서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군(叛軍)의 활동은 쿠바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반군은 사탕수수 농장에 불을 질렀고, 아바나에서 열리는 카 레이스의 레이서를 납치해서 경기를 중단시켰다. 아바나 인근의 에소(Esso)의 정유소에 방화해서 항공유 40만 갤런을 불태웠다. 반군은 카스트로가 이끄는 본대(本隊) 외에도 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각각 이끄는 두개의 부대로 나뉘어서 아바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혁명 전야(前夜)로 가는 아바나

1958년 3월 리베라 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아바나 힐튼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아바나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쿠바의 부유층은 그들의 재산을 조용히 처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아바나의 카지노가 자신들의 사업을 저해한다고 생각한 라스베가스의 도박위원회는 쿠바에서 카지노 사업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라스베가스에서 도박업을 할 수 없다고 정관을 고쳤다. 이로 인해 아바나에서 카지노 사업을 접는 업체가 나오기 시작했다.

1958년 3월, 미국 정부는 바티스타 정부에 대한 무기 판매를 금지했다. 이 조치는 바티스타 정권에 치명적이었다. 바티스타는 무기와 탄약을 제3국에서 웃돈을 주고 사야만 했다. 4월 들어 카스트로는 쿠바 전역에서 파업을 종용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고무된 바티스타는 반군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와 오리엔테 지역에 정부군의 공습이 가해졌다. 카스트로는 선무공작(煽憮工作)으로 대응했다. 6월 말 라울 카스트로는 일단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는 다음에 이들을 잘 대접해서 혁명을 당위성을 설명한 후 석방했다. 미국 언론은 이런 카스트로를 우호적으로 썼다. 7월에는 쿠바 육군의 한 부대가 카스트로의 반군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카스트로는 무장을 해제하고 군인들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카스트로 반군에 가담했다. 이제 반군은 혁명군이 되어 아바나 근교까지 진격했다.

1958년 연말 시즌이 닥쳐 왔지만 호텔 예약은 저조했다. 자신들이 건설한 왕국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게 된 랜스키와 트라피칸트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만나서 대책을 협의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아바나의 밤거리를 위험해서 외출을 할 수가 없게 됐다. 12월 17일, 쿠바 주재 미국 대사가 비밀리에 바티스타를 만나서 퇴진을 종용했다. 미국 대사는 바티스타에게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망명할 것을 권했다. 바티스타는 공식적으로는 반군을 격퇴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자기와 가족의 비자를 마련하고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을 달러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지지세력인 마피아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운명의 1958년 12월 31일 제야(除夜)

1958년 12월 31일, 랜스키가 운영하는 리베라 호텔의 객실은 거의 차있었고 식당도 예약이 완료되어 있었다. 정세는 불안했지만 호텔 안은 정상으로 보였다. 그날 밤 9시 랜스키는 조 스타시 형제가 운영하는 플라자 호텔에서 다른 마피아들과 모임을 갖았다. 이들은 카스트로의 혁명군이 승리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런 후 랜스키는 리베라 호텔로 향했다. 리베라 호텔의 나이트 클럽에선 새해를 기다리는 카운트 다운을 하면서 축배를 들었다.

해가 바뀌어서 1959년 1월 1일이 되었다. 밤 1시 30분, 랜스키의 측근인 찰스 화이트가 랜스키에 다가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귀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화이트는 잠시 전에 바티스타가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아바나를 탈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랜스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는 플라자 호텔을 거쳐 산 수시 호텔로 가서 산토 트라피칸트를 만났다. 그 때가 밤 3시였다. 이들은 카지노 지배인들에게 미국 달러를 별도로 모으고 빨리 업장을 폐쇄하라고 지시했다. 지배인들은 미화(美貨)를 황급히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새벽까지 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중은 카지노를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카스트로, 쿠바를 접수하다

1959년 1월 1일 새벽 4시가 되자 바티스타가 쿠바를 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바나의 사람들은 집을 나와서 거리로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바티스카가 떠났음을 알게 된 보안군들은 자취를 감췄고, 거리를 장악한 군중은 아바나 시내 거리 곳곳에 설치된 주차 미터기를 부숴버렸다. 주차 미터기는 바티스타의 처남이 운영하는 것으로 민원의 대상이었다. 그런 다음 호텔 카지노에 쳐들어 가서 도박기기를 부숴버렸다. 플라자 호텔, 산 수시 호텔, 리베라 호텔 등 마피아가 경영하는 호텔은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렸다. 성난 농민이 트럭에 돼지 무리를 싣고 와서 리베라 호텔 로비에 풀어 놓은 것이 그날 아침의 최고의 사건이었다. 군중은 “바티스타에 죽음을 ! 협력자도 죽음을 ! 미국 갱단에게도 죽음을 !”하고 외쳤다. 가난한 쿠바 민중은 독재자와 마피아를 동격(同格)에 놓고 있었다.

바티스타는 가장 가까운 측근에게는 망명계획을 알려 주었다. 내무장관, 보안경찰 책임자 등이 황급하게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은 미국 시민은 물론이고 미국과 관련된 쿠바인들을 항공기와 선편으로 탈출시켰다.  카지노의 운영진들도 가족들과 함께 황급히 아바나를 떴다. 랜스키의 부인과 가족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랜스키와 트라피칸트는 카스트로가 집권하더라도 쿠바의 경제가 살기 위해선 카지노를 운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은 곧 드러나고 말았다.

아바나에 입성한 카스트로는 리베라 호텔에서 혁명의 성공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국민이 승리했다. 국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연설했다. 그리고는 곧 처형 선풍이 불어 닥쳤다. 바티스타 정권 하에서 혁명군을 처형하거나 고문했던 사람들이 총살대에서 무더기로 처형됐다. 카스트로는 국민이 복수할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카지노 소유자들에 대해서 기자가 물어오자, 카스트로는 “그들을 몰락시킬 뿐 아니라 처형하겠다”고 답했다.

카지노 왕국의 몰락

랜스키와 트라피칸트 등은 이런 카스트로의 발언을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쿠바를 떠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혁명당국에 알려지게 했다. 카스트로는 카지노와 복권을 ‘사회악(惡)’이라고 선언하고, 모든 카지노를 폐쇄시켰다. 그러나 몇 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카스트로는 카지노 영업을 다시 허용했다. 카지노를 열지 않으면 쿠바 경제가 당장 무너질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업을 재개해도 카지노는 장사가 되지 않았다.

혁명정부의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체 게바라는 카지노가 돈을 숨기고 있다면서 카지노의 회계업무를 장악했다. 이제야 마피아들은 쿠바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게 됐다. 랜스키 등은 아바나를 맨몸으로 탈출했고, 남아 있기를 고집하던 트라피칸트는 6월 8일에 체포됐다. 트라피칸트는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10만 달러를 몸값으로 주고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1959년 10월에 트라피칸트는 쿠바를 떴다.

1960년 10월, 쿠바 정부는 마피아가 운영하던 모든 호텔과 카지노, 그리고 유나이티드 프루트가 운영하는 농장, 텍사코 등 165개 미국 기업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마피아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카지노 제국은 이제 쿠바 정부 소유가 되었다. 바티스타는 쿠바 국민으로부터 약 3억 달러를 털어갔던 것으로 알려 졌다. 대통령궁(宮)을 장악한 혁명군은 3백만 달러에 달하는 미화를 발견했다. 바티스타가 카스트로에게 팁으로 남겼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쿠바 내의 은행에 바티스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구좌에만 2천만 달러가 남아 있었다. 카스트로 당국이 압수한 장부는 리베라 호텔의 카지노에서만 연간 3억 달러의 이익이 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힐튼, 코모도어 등 다른 마피아들이 운영했던 카지노도 모두 큰 수익을 내고 있었다. 마피아는 그들의 역사상 쿠바에서 가장 쓰라린 패배를 맛 본 셈이다.

트라피칸트는 고향인 탬파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쿠바에서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파산상태였다. 쿠바에서 철수한 다른 마피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몇몇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 갖고 있던 작은 지분으로 생활을 했다. 랜스키는 영국령 바하마에 작은 카지노를 운영하며 지냈다.

피그스 灣 침공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존 F. 케네디는 공화당 후보 리차드 닉슨이 쿠바에 대해 미온적이라고 비난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케네디는 카스트로 정부에게 대해 자유선거를 치르는 등 민주화를 하라고 압박했다. 케네디는 쿠바에 대해 경제봉쇄 조치를 취했다.

1961년 4월 15일, 쿠바 망명군이 미 중앙정보국(CIA)과 합동으로 쿠바의 피그스 만(灣)에 침공했다. 하지만 약속했던 미 공군의 지원이 오지않아서 침공군 1500명 중 115명이 피살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 피그스 만 사건은 케네디 행정부에 타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아이젠하원 행정부 말기에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비밀계획이 있었음이 알려졌다. 랜스키가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돈을 지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피아와 CIA가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해 함께 일했다는 사실이 알려 진 것이다.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CIA가 접촉한 사람은 다름아닌 트라피칸트였다. 

케네디 암살은 마피아의 복수 ?

도미니카 공화국을 거쳐 스페인에 도착한 바티스타는 외부와 연락을 끊고 살다가 1973년 8월에 사망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린 트라피칸트는 분노의 화살을 존 F. 케네디로 돌렸다.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강력한 두 그룹을 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피그스 만 침공시 약속했던 공군기를 보내지 않아 쿠바 망명단체를 배신했다. 이들은 또한 조직범죄에 대한 수사를 강행해서 자신들을 도운 마피아를 배신했다.

트라피칸트는 쿠바 망명단체와 마피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조사한 많은 연구자들은 트라피칸트가 암살음모의 핵심에 있었다고 의견을 모았다. 트라피칸트는 1987년 3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랜스키는 마이애미 비치에 살다가 1983년 1월에 암으로 사망했다. 오늘날에도 이들이 세운 호화로운 호텔들은 쿠바 정부 소유건물로서 위용(威容)을 자랑하고 있다.
&copy; 이상돈
* 책 표지는 첨부를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관련 사진은 갤러리의 자료사진에 있습니다.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