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진 커크패트릭,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2007년)
2009-02-15 09:58 1,746 이상돈



진 커크패트릭,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 (2007, 하퍼-콜린스, 367쪽)
  Jeane J. Kirkpatrick, Making War To Keep Peace 92007, Harper-Collins, $26.95)


진 커크패트릭(Jeane J. Kirkpatrick : 1926년 출생, 2006년 12월 7일 사망)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첫번째 임기 중 유엔 주재 대사를 지내면서 레이건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6년 11월에 오클라호마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진 커크패트릭의 결혼 전 이름은 진 두안 조던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석유 노다지의 꿈을 쫓다가 재산을 탕진한 후 가족을 데리고 일리노이 주(州)로 이사했다. 버나드 여대를 졸업하고 콜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해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딴 후에 국무부 정보분석실에서 일했다. 자기보다 15세 많은 정보국(OSS) 요원 출신인 이브론 커크패트릭을 만나 결혼했다. 콜럼비아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1967년에 조지타운 대학의 부교수로 임명됐고, 이듬해 콜럼비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커크패트릭 부부는 모두 민주당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972년 이후 민주당이 좌경화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이들은 민주당이 해리 트루먼, 휴버트 험프리, 헨리 잭슨으로 이어온 반공(反共)주의 전통에서 멀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진 커크패트릭은 카터 대통령에 대해 특히 실망했다. 그녀는 카터의 인권외교가 실패한 원인을 진단한 평론 ‘독재와 이중기준’(Dictatorships and Double Standards)을 커멘터리(Commentary)지(誌) 1979년 11월호에 기고했다.

이 평론에서 커크패트릭은 카터의 인권외교가 미국의 추락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란의 샤 정권과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 아래에서 있었던 인권유린은 공산체제와 이슬람 독재의 인권유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전통적 독재를 공산주의와 이슬람의 독재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녀는 쿠바, 북한, 앙골라 등 마르크스 전체주의는 민주화의 길을 갈 수 없지만, 브라질 칠레 한국 자이레 등은 점진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갈 수 있는데도 두 부류(部類)의 국가를 동일하게 다룬 카터의 외교는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1980년 초,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로널드 레이건의 참모로 일하던 리차드 앨런은 커크패트릭의 평론을 레이건에게 보여 주었다. 이를 읽은 레이건은 커크패트릭을 만나 보고 싶어했고, 이렇게 해서 만난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레이건이 커크패트릭에게 자기를 도와 줄 것을 부탁하자, 커크패트릭은 민주당원인 자기가 어떻게 공화당 후보를 도울 수 있겠냐고 말했다. 그러자 레이건은 자기도 한때는 민주당원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녀를 설득했다. 

1980년 선거에서 승리한 레이건은 커크패트릭을 유엔 주재 미국대사로 임명했다. 레이건은 커크패트릭이 자신과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 국장, 합참의장이 참여하는 백악관 국가안보기획 팀에 참여하도록 했다. 진 커크패트릭은 미국 최초의 여성 유엔 주재 대사일 뿐더러 최고위 안보정책 팀의 구성원으로서 레이건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자 출신이 유엔 외교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것은 기우(杞憂)였다. 커크패트릭은 유엔에서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들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했다. 유엔에서의 표결통계를 국무부에 보내서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에 대한 원조를 삭감하도록 하였다. 대한항공 007편이 격추되자 유엔 총회장에서 소련의 야만적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1984년 댈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커크패트릭은 “마르크스주의 독재자들이 중남미를 유린하고 있는데, 샌프란시스코 민주당원들(San Francisco Democrats)은 공산 게릴라와 그들의 배후인 소련을 비난하지 않는다. - - - 그들은 항상 미국을 먼저 비난한다.(They always blame America first.)”고 연설했다. 민주당원인 그녀가 민주당을 ‘미국을 먼저 비난하는(Blame America First) 정당’이라고 부른 것이다. 커크패트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당대회를 치른 민주당을 ‘샌프란시스코 민주당원들’로 폄하하고, 자기의 경우를 들어서 “민주당원이 레이건을 지지하는 것은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There is nothing wrong for Democrats to support Reagan)”고 했다.

커크패트릭은 1기 레이건 행정부가 끝나자 대사직을 사임하고 조지타운 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비로소 민주당적을 버리고 공화당에 입당했다. 1988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가해 보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1996년에 행한 인터뷰에서 커크패트릭은 “권력은 단지 무기와 돈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신념(personal conviction), 즉 의지(will)에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1980년대 초에 우리는 서방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했으며,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이를 극복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9·11 테러 후 커크패트릭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지지했지만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현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이 지나치게 개입적이지 않은가 하고 우려한다고 말했다. 커크패트릭은 2006년 12월 7일 늦은 저녁 메릴랜드의 베데스다 자택에서 자던 중 사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Making War to Keep Peace)의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군사력 사용을 분석한 名著 

커크패트릭은 오래 전에 자기가 유엔 대사로 있었던 시절을 다룬 책을 낸 적이 있다. 커크패트릭의 사후(死後)에 나온 이 책,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냉전이 종식된 후에 일어난 국제분쟁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다룬 것이다. 걸프 전쟁, 아이티와 소말리아 사태, 보스니아와 코소보 사태 등에 대한 국제사회와 미국의 대응을 분석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커크패트릭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세 개라고 했다. 첫째는 미국 자신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복지를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세계의 민주적 정부를 보전하고 증가시키는 것이고, 셋째는 폭력적이고 팽창을 지향하는 지도자가 중요한 국가의 정부를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커크패트릭은 20세기에 일어났던 볼세비즘, 파시즘, 중국의 문화혁명, 크메르 루즈 등은 당시로선 그 나라 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에 의해 촉발되었다면서, 그런 인물이 등장해서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체제가 무너졌을 때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이제 ‘새로운 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국경을 넘는 문제들이 유엔을 통한 집단행동과 관리로서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꿈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커크패트릭은 말한다. 냉전이 끝난 후에도 유엔은 국제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했으며, 이로서 20세기 100년 동안 국제기구를 통해서 세계평화를 가져오려던 세 번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국제기구를 통해 평화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오히려 군사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지름길이라는 주장이다.

                  걸프 전쟁

1990년 8월 2일에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군대는 쿠웨이트를 점령했다. 냉전 체제가 종식된 후 처음으로 침략행위가 일어난 것이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 660호에서 이라크의 즉각적 철군을 요구했다. 이 결의로서 이라크에 대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안보이사회의 명시적 무력사용 승인 결의가 필요한가 하는 국제법 문제가 제기됐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안보이사회의 명시적 승인을 얻은 후에 군사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부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래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안보 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즉 자신이 주창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현할 기회로 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대처 총리는 결의 660호는 무력을 사용하기에 충분한 근거라고 주장하면서, 부시가 너무 소심하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과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이 불법이라는 결의를 유엔으로부터 얻어 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1990년 11월 29일자 안보이사회 결의 678호는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군하지 않을 경우 모든 수단이 동원될 것이라고 했다. 군사력 사용을 위해 이처럼 국제적 컨센서스를 구한 경우는 전에는 없었다.

대(對)유엔 외교와는 별도로 부시와 베이커는 많은 국가들로 하여금 연합군에 참여하도록 했다. 또한 의회를 설득해서 군사력 사용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거의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부시와 베이커가 국제적 동의를 구축하는 동안에 쿠웨이트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쿠웨이트 국민들은 고통을 당했다.

1월 16일,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미군은 우수한 화력으로 이라크의 방공망을 파괴하고 공군과 지상군을 궤멸시켰다.  2월 27일, 부시는 이라크 전쟁의 종결을 선언했다. 부시는 이라크 내부에서 변화가 생겨서 후세인이 실각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는 이라크에서의 후세인의 장악력을 간과한 것이었다. 물론 부시와 베이커는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하게 되면 또 다른 베트남이 될 우려가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걸프 전쟁은 유엔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지만 본질적으로 미국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후세인 체제를 교체하지 못해서 미완성인 채로 끝이 났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군한 후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대한 봉쇄정책을 폈다. 그러나 자국내의 쿠르드족(族)을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 후세인에 대해 유엔이나 미국은 더 이상 강제적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이라크 문제는 클린턴 행정부로 이관되었고, 후세인은 유엔특별감시단의 사찰을 방해하였다. 후세인은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량살상무기를 숨기는 게임을 계속했다. 후세인으로부터 사우디를 지키기 위해 미군을 사우디에 주둔시킨 부시의 결정은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을 향한 지하드를 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부시 대통령의 ‘새로운 세계 질서’ 구상은 유엔에 보다 많은 역할을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걸프 전쟁은 유엔의 평화유지작전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었지만 부시는 유엔의 권위에 너무 의존했고, 그런 결과로 유엔 사무총장이 국제분쟁에서 보다 많은 역할을 하도록 하는 계기를 조성했다.

              소말리아

소말리아를 20년 동안 통치해 오던 시아드 바르가 1991년에 반군(叛軍)에 의해 축출되자 소말리아는 내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모하메드 아이디드가 이끄는 세력이 강했다. 1992년 1월, 유엔 안보이사회는 소말리아 군사세력 간의 휴전과 무기 금수(禁輸)를 규정한 결의 733호를 통과시켰다. 같은 시기에 이집트 출신인 부트로스 갈리가 새로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은 알제리 외교관인 모하메드 사흐눈을 특사로 소말리아에 파견했다.

1992년 4월, 유엔 안보이사회는 소말리아에 인도적 지원을 하도록 하는 결의 751호를 채택했다. 한편 사흐눈 특사는 소말리아 사태는 정치적으로 모색해야 하며, 유엔이 소말리아에 지원한 구호물자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고 있는 등 유엔의 활동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했다. 사흐눈은 유엔의 관료체제의 무능을 노골적으로 지적한 탓에 압력을 받고 그 해 10월 사임했다. 부트로스 갈리는 냉전이 끝난 후 새로운 세계질서의 모델로서 대규모 다국적군(軍)을 유엔 지휘 하에 파견해서 소말리아를 재건하려 했다.

1992년 8월, 미국 의회는 부시 대통령에 대해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부시 대통령은 소말리아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미국 항공기를 동원했다. 하지만 식량을 실은 미국 항공기가 공격을 받자 부시는 소말리아에 대한 미국 항공기 운항을 중단시켰다. 부시는 미군이 유엔의 지휘를 받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트로스 갈리와 충돌이 생겼다. 199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했음에도 부시 대통령은 소말리아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할 것임을 밝혔고, 의회 지도자들은 부시의 이러한 결정을 지지했다. 소말리아에 도착한 미군은 모가디시 공항을 장악했고, 이어서 프랑스 터키 이집트 등 다국적 군대가 도착했다. 부시는 소말리아에 대한 미군의 개입은 어디까지나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한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말리아에 파견된 미군은 미국의 지휘를 받았으며, 유엔의 평화유지군이 도착하면 철수할 예정이었다.
1993년 1월 말, 클린턴이 새로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에도 소말리아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고, 미군은 소말리아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유엔이 주관하는 소말리아 평화유지 군사작전에 미군이 참여하기를 원했던 부트로스 갈리는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은 유엔 휘하의 다국적 군대가 미군의 독자적 군사작전 보다 정통성을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효한 목적을 위해선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레이건-부시 행정부와 달리 클린턴 행정부는 독자적 군사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는 소말리아에 미군을 증강하고 파견된 미군들은 유엔의 작전지휘를 받도록 부트로스 갈리와 합의했다.

1993년 5월, 터키의 세빅 비르 중장이 소말리아에 파견된 유엔 다국적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미 육군 소장 토머스 몽고메리는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제 미군은 유엔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8월까지 유엔 평화유지군은 27개국에서 파견된 21,000명 수준이 되었다.
1993년 6월 초, 아이다드의 군대는 파키스탄군을 공격해서 23명을 살해하고 수십 여 명에 부상을 입혔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이 사건을 규탄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부트로스 갈리와 클린턴은 유엔군이 아이다드를 체포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아이다드에 대해 현상금을 걸었다. 소말리아의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어 갔고, 유엔군은 많은 피해를 당했다. 이에 클린턴 행정부는 육군 레인저 부대를 파견해서 아이다드 체포에 나섰다. 소말리아에 도착한 델타 포스와 레인저 부대는 장갑차와 탱크 등 무장차량 지원을 본국에 요청했는데 레스 애스핀 국방장관은 이를 거부했다.

7월 12일, 미군 코브라 공격헬기가 인구밀집 지역을 공격해서 많은 소말리아인들이 사망했다. 8월 8일, 원격조정 지뢰의 폭발로 미군 4명이 사망하자,  8월 22일 클린턴은 아이다드 체포작전을 명령했다. 10월 초, 레인저 부대는 아이다드와 그의 참모들이 집결되어 있는 장소를 파악하고 블랙호크 헬기로부터 레인저 부대를 로프로 하강시켜서 이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로케트 발사 수류탄에 의해 블랙호크 2대가 추락했다. 약 90명의 레인저 부대들은 추락한 헬기에 생존한 부상자와 사망한 장병의 시신을 회복하기 위해 11시간 동안 홀로 아이다드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미군은 18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영화 ‘블랙호크 다운’에 잘 그려져 있다.)

레인저 부대는 공군의 지원은커녕 적절한 무장을 제공받지 못한 채 무모한 작전에 투입되었음이 밝혀져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애스핀 국방장관은 사퇴했다. 이 사건은 클린턴 행정부가 미숙한 정권임을 잘 보여 주었다. 의회는 소말리아에 파견된 미군이 유엔군의 작전지휘를 받아서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했음을 알고 분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클린턴은 소말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하기로 했고, 1994년 3월말까지 모든 미군은 철수했다. 미군을 유엔군 지휘하에 두어서 미군 장병을 불필요하게 죽게 한 클린턴 대통령은 미군을 유엔군 작전지휘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미군을 파견할 때에는 충분한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비교되었다. 모가디시에서 벌어진 전투는 여러 나라 군대로 구성된 유엔 다국적군이 본질적으로 취약한 존재임을 잘 보여주었다. 미군은 지휘체계에 혼선을 겪었고, 여러나라의 소규모 병력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은 기동성과 장비가 부족했고 전의(戰意)를 갖고 있지 못했다.


          아이티

카리브 해(海)의 가난한 나라 아이티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의 개입은 소말리아의 경우와 비슷하다. 부시 행정부는 아이티에 대해서 식량을 제공하는 정도의 제한된 인도적 개입 정책을 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아이티에 민주주의를 재건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서 개입했다.
19세기 초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이티는 1957년부터 1971년까지 파파 독(Papa Doc)이라 불리는 두발리에가 통치했다. 그를 이어서 그의 아들인 장-끌로드 (베비 독) 듀발리에가 통치해 오다가 1986년에 민중봉기로 추방됐다. 그 후 혼돈이 지속되다가, 1990년 말 선거에서 급진적 성향의 가톨릭 신부인 장-버트랑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랜만에 민주적 절차에 의해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카리브 지역에도 민주화의 바람이 부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1인당 국민소득 250달러, 실업률 80%라는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있는 나라 아이티에게 민주주의는 요원한 이야기였다. 아이티는 수입의 61%와  수출의 8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1990년부터1995년까지 아이티의 국민소득은 연평균 6.5%씩 감소해서, 같은 기간 연평균 3.9% 상승한 도미니카와 비교되었다.

1991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아리스티드는 르네 프리발을 총리에, 그리고 라울 세드라스 장군을 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드는 입헌정부를 이끌만한 인물이 못됐다. 취임하기도 전에 그가 속한 가톨릭 교구는 그가 폭력적 계층 전쟁을 주창한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추방했다. 그는 반대자를 관용하는 자세가 없었고 법을 무시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폭도들에게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부추켰고, 실제로 정치적 살인이 성행했다.

1991년 9월 27일, 아리스티드는 “반대자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죽이라”고  연설을 했다. 휘발유를 속에 넣은 타이어에 불을 붙여 사람 목에 끼워서 산채로 태워 죽이는 아이티의 끔찍한 주술적 살인행위를 대통령이 부추긴 것이다. 이틀 후 아리스티드의 정적(政敵)이며 인권운동가인 실비오 클라우드가 의회 앞에서 폭도들에 의해 산채로 불태워서 살해되었다. 아리스티드는 아이티에 와 있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도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 사절은 간신히 도피했다. 이틀 후인 9월29-30일 사이에 세드라스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가 발생했고, 아리스티드와 그의 측근들은 베네주엘라로 망명했다. 이 쿠데타는 부사관과 하급 장교들이 주도했다는 설(說)이 파다했다.

국제사회는 전세계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부는 시점에서 아이티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비난했다. 9월말, 미주연합(OAS)은 아이티의 쿠데타를 비난했고, 10월에 열린 유엔 총회는 역시 이를 비난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10월 말, 미국은 아이티와의 수출입을 전면금지하는 경제봉쇄 조치를 단행했다. 아이티는 연료와 식량이 금방 바닥났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무작정 플로리다 방향으로 향했다. 그 중 절반은 사로잡혀 아이티로 송환되었고, 절반은 바다에서 죽었다. 쿠데타로 장악한 정권을 압박하려는 금수(禁輸) 조치가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1992년 2월 들어서 부시 행정부는 경제봉쇄 조치를 부분적으로 해제했다.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티 사람들의 무모한 해상탈출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미국 정부가 바다에서 익사하거나 굶어 죽는 아이티 난민들을 방치한다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1991년 11월 20일,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탈출한 아이티 사람들에게만 난민 지위를 인정해서 받아드리겠다고 발표했다. 미 해안경비대는 해상에서 구출한 아이티 난민들을 쿠바 동쪽의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해서 심사하기로 했다. 1992년 5월, 관타나모에 수용된 아이티 사람들이 최대 수용인원인 12,500명을 넘어서자 부시 대통령은 심사 없이 아이티로 송환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빌 클린턴은 이런 부시 대통령의 조치를 비난하면서, 아이티 난민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클린턴은 의회의 흑인 의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흑인 의원들은 미국이 개입해서 아리스티드 정권을 회복시키기를 원했다. 1993년 6월, 유엔 안보이사회는 아이티에 대한 석유와 무기를 금수(禁輸)하도록 하는 결의 841호를 채택했다. 국제적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1993년 7월에 유엔의 아이티 특사와 아리스티드, 그리고 세드라스 사이에 그 해 10월말까지 세드라스가 퇴진하고 아리스티드가 복권하기로 하는 합의를 맺었다. 이 합의는 아리스티드가 새 총리를 지명하고 쿠데타 참여자를 사면하도록 했다. 8월 말, 유엔은 아이티에 대한 금수를 해제하고 아이티에 유엔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미군과 캐나다 군 225명을 실은 군함 할란 카운티 호를 아이티에 파견했다. 그러나 10월 11일, 아이티의 포트-오-프린스 항구에 도착한 할란 카운티 호는 작은 배에 나누어 탄 수백 명을 무장집단이 입항을 방해하는 바람에 그냥 미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소말리아에서 미군 18명이 사망한 지 며칠이 지나 발생한 이 사건으로 미군의 체면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이에 클린턴은 아이티에 대한 금수 조치를 다시 발동했고, 유엔 안보이사회는 아이티에 대한 해상봉쇄를 발표했다.

1994년 5월, 클린턴은 미 해군 함정을 아이티 주변 해역에 파견해서 해상을 봉쇄했다. 아리스티드는 유엔이 무력으로 개입해서 자신을 대통령에 복귀시켜 주기를 원했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 940호에서 다국적 군에 의한 아이티 개입을 승인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우방국에게 아이티에 침공할 다국적 군에 참여를 부탁했다. 벨기에, 아르헨티나 등 28개국이 참여해서 2000명의 평화유지군이 구성됐지만 참여국은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방글라데시가 가장 많은 600명을 파견했다.   

미국내 진보 세력과 다른 카리브 국가들로부터 아이티에 개입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던 클린턴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샘 넌 상원의원, 그리고 합참의장을 물러난 콜린 파월로 구성된 대표단을 아이티에 보내 세드라스와 담판을 짓도록 했다. 이들은 9월 17일에 아이티에 도착해서 세드라드와 회담을 갖았고, 세드라스와 군부 지도자들은 권좌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9월 19일, 미군은 평화롭게 아이티에 상륙했고, 그 후 약 20,000명의 미군이 파견됐다. 클린턴은 이 작전을 ‘민주주의 유지 작전(Operation Uphold Democracy)이라고 명명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군사개입 위협 덕분에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한 아리스티드는 약속했던 선거를 1995년 6월에 되어서 실시했다. 그러나 그 동안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군 장교들을 축출하는 등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아리스티드에 반대하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연이어 암살되어서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통령 연임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1995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아리스티드가 지명한 르네 프리발이 당선됐다. 2000년 대선에 아리스티드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반대파에 대한 암살과 실정으로 인해 2004년 초 쿠데타가 일어나서 아리스티드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망명했고, 치안을 다스리기 위해 미군이 주축이 된 평화유지군이 다시 진주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아이티에 군사 개입을 강행했던 것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태에의 군사 개입을 꺼렸던 것과 대비된다. 클린턴은 아이티에 대한 군사 개입을 레이건 행정부의 그레나다 침공에 비유하곤 했다. 하지만 그레나다는 아이티와 그 상황이 전혀 달랐다. 1983년 10월 19일, 그레나다에 유혈 쿠데타가 발생해서 그곳에서 공부하던 미국 대학생 약 1000명이 사실상 포로가 되어 안전을 위협 받고 있었다. 또한 당시 그레나다에는 쿠바의 군사고문단과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군사 활주로가 건설 중에 있었다. 10월 25일, 카리브 지역안보 협정을 내세운 미국은 그레나다에 침공해서 쿠바 군대를 제압하고 미국 학생들을 구출했으며, 친공(親共) 정권을 붕괴시켰다. 당시 미군은 해방군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반면 아이티에 대한 군사 개입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도 못했고, 미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미국의 그레네다 침공을 비난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던 유엔 총회는 아이티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은 승인해서 묘한 대조(對照)를 이룬다. 유엔이 과연 누구 편에 서있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발칸 전쟁

요시프 티토는 인종적으로 복잡한 유고슬라비아를 하나의 연방국가로 묶어서 소련에 예속되지 않도록 이끌어 왔다.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하고 1989년부터  동유럽에서 자유의 바람이 불자 유고슬라비아에는 큰 변화가 닥쳐왔다.
1974년에 개정된 유고슬라비아 헌법은 유고슬라비아을 구성하는 6개의 공화국(슬로바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과 2개 자치령(코소보, 보호보디나)의 대표 8명이 1년씩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담당하는 집단적 대통령 제도를 채택했다. 1989년, 헝거리 등에 자유화 바람이 불자 유고슬라비아에서도 개방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같은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선동해서 코소보와 보호보디나에 주어진 대표권을 세르비아가 행사하는 데 성공했다.

1990년 1월, 유고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했고, 그 해 가을 자유선거가 치러졌다.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에선 민족주의 정당이 승리했지만, 세르비아에선 밀로세비치가 이끄는 공산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밀로세비치는 그가 통제하는 유고 군대로 하여금 다른 공화국의 민병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코소보에 거주하는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을 추방하도록 명령했다. 슬로바니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보스니아 정부 관리들은 이 같은 상황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인들이 유고 연방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공화국의 분리독립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91년 6월, 크로아티아와 슬로바니아가 독립을 선포하자 크로아티아 군대와 세르비아가 주축이 된 유고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포하자 전쟁은 보스니아 지역으로 번졌다. 세르비아 군대는 크로아티아의 비무장상태인 부코바와 도브로브니크에 포격을 가해서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크로아티아는 11월에 세르비아 군대에 항복하고 말았다.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가 세르비아 군대에 장악되었고, 보스니아의 이제트보고비체 대통령이 세르비아 군대에 납치되었다. 세르비아 군대는 ‘인종청소’라고 불리는 잔악한 학살과 파괴를 일삼았다. 

당시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유럽이 해결할 문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유럽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이집트 출신인 브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은 소말리아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유고 문제는 세르비아와 다른 공화국 간에 화해로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한 잣대로 보았던 것이다. 유엔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유엔군을 파견하기로 결의했지만, 유엔군의 역할은 인도적 지원을 보호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1992년 들어 보스니아 현지를 취재한 서방기자들은 세르비아 군대의 대량살상의 죄악상을 보도했다. 특히 젤렉과 스레브레니카에서 일어난 학살은 충격을 주었고, 이에 따라 미국 의회에서도 세르비아를 응징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1992년 말에 유럽연합의 데이비드 오웬경(卿)과 사이러스 밴스 전(前) 미 국무장관은 오웬-밴스 플랜을 중재안으로 제시하였으나 어느 쪽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1993년 초에는 유엔군의 차량에 타고 가던 보스니아 투라이줄릭 부총리가 보스니아 군대에 의해 유엔군이 보는 앞에서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다.

클린턴 행정부도 보스니아에 대한 식량지원을 하는데 그치고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고려하지 않았다. 유엔과 유럽, 그리고 미국의 제재가 없을 것을 알고 있는 세르비아는 인종청소를 계속 밀고 나갔다. 보스니아에 파견된 유엔 평화유지군은 무장도 빈약했고, 싸울 의지도 없었다. 또한 갈리 사무총장은 유엔군이 자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엔군에게 세르비아 군에 대해 중립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1994년 말에 평화유지군의 일원인 방글라데시군이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서 여러 명이 사망했다. 1995년 6월엔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유지군 400여명이 세르비아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1995년 6월, 세르비아 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스레브레니카로 진격해오자 그곳을 지키던 화란군 지휘관은 공중지원을 요청했다. 공중지원은 오지 않자 화란 군대는 철수해 버렸고, 세르비아군은 8000명의 스레브레니카의 남자와 소년 8000명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무차별 강간했다.
1995년 8월 말, 세르비아 군대가 사라예보르 공격하자 비로소 유엔은 안보이사회는 세르비아에 대한 제재를 결의했고, 9월에 다국적군은 세르비아 군에 대해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다. 그러자 밀로세비치는 협상에 응할 의도가 있음을 내비쳤다.

1995년 11월, 오하이오 주 데이턴의 공군기지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의 대표가 모여 ‘데이턴 협정’을 채택하였다. 이로서 발칸에서의 무력충돌은 끝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91-95년간 벌어졌던 발칸에서의 전쟁을 이렇게 종식되었지만, 나치 이후 최대의 인종학살에 대해선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못했다. 특히 발칸 전쟁에서 보여준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의 행동은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소말리아 사태에서 큰 대가를 치룬 클린턴 대통령은 군사적 개입을 꺼려했다. 소말리아와 아이티가 불필요한 군사개입으로 인한 비극이었다면, 발칸은 필요한 군사개입을 하지 못해서 초래한 비극이었다. 


        코소보

코소보 사태는 보스니아 사태의 연장이었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와 접해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자치령으로 주민의 대다수는 알바니아계였다. 1989년 초, 밀로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공산당은 코소보의 자치령 지위를 교묘하게 박탈하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재산권을 박탈하는 등 코소보에 대한 인종청소를 시작했다. 이듬해 초, 밀로세비치는 코소보가 유고 연방의 대통령에 참여하는 자격을 박탈했다. 이에 반발한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1990년 9월에 코소보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공화국이라고 선언하고 독자적으로 선거를 치렀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평화주의자이고 시인인 이브라힘 루고바 교수를 그들의 지도자로 뽑았다.

미국과 유럽은 코소보에서의 혼란과 인권침해를 유고슬라비아의 국내문제로 간주했다. 또한 보스니아 사태에 가려서 코소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95년 데이턴 합의에서도 코소보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루고바 교수는 정치적 협상으로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세르비아 군인들의 공격이 잦아지자 코소보 해방군(KLA)이라는 단체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다. 1997년 10월, 코소보의 수도 프리스티나에서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 2000명을 세르비아 경찰이 공격하자 코소보 해방군은 세르비아 경찰서 몇 군데를 공격했다. 그러자 1998년 2월, 세르비아 군은 무장 헬기와 장갑차를 동원해서 드레니카 지역을 공격해서 민간인 수십 명을 살해했다. 3월 들어서 세르비아 군은 코소보 해방군의 간부이던 아뎀 자스하리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러자 비로소 클린턴 행정부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코소보 사태에 대해 우려를 피력했다. 3월 31일, 유엔 안보이사회는 코소보 사태를 건설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유엔이 또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천명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5월 말, 클린턴 대통령은 루고바와 밀로세비치를 만나서 보스니아 사태가 코소보에서 재현되지 않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코소보에서 세르비안 군대의 주민 학살은 계속됐고, 이를 피해서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로 들어갔다. 6월 들어 세르비아의 탱크부대가 코소보에 진입해서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고, 이를 피해 수만 명이 또다시 알바니아로 피난을 갔다. 유엔 안보이사회가 결의문을 계속 통과시키고 있을 때 세르비아 군은 코소보 마을을 파괴하고 남자들을 처형했다. 세르비아 군대의 목적은 분명했다. 청장년 남성을 처형해서 나머지 주민들이 알바니아로 도망가도록 해서 코소보를 세르비아계가 장악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비로소 밀로세비치와는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1999년 3월 24일, 나토군은 창설 후 처음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작전을 벌였다. 웨스트 클라크 미군 대장이 지휘하는 나토군의 공군기들은 세르비아의 군사시설을 폭격했다. 3월 27일부터는 나토의 공군기들은 발전소와 정유소 등 산업시설을 폭격해서 세르비아를 사실상 마비시켜 버렸다. 

나토의 공군기들이 세르비아를 폭격할 동안에도 세르비아의 지상군은 코소보의 마을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공습 만으로서는 코소보 주민들을 보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공군력이 취약해서 미국은 미주리의 기지로부터 B-2 스텔스 폭격기 편대를 발진시켜 폭격을 해야만 했다. 러시아와 핀란드의 외교관들이 세르비아에게 코소보에서의 철군과 나토의 공습중지를 엮은 협상을 진행시켰다. 1999년 6월 10일, 세르비아 군대는 비로소 코소보로부터 철군을 하기 시작했다. 밀로세비치가 비로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나토군의 공습으로 타격을 입은 세르비아인들은 2000년 선거에서 밀로세비치를 권좌로부터 축출했다. 새로 구성된 세르비아 정부는 2001년 6월 밀로세비치의 신병을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겨주었다. 2001년 11월, 코소보에선 선거가 치러졌고 루고바가 이끄는 정당이 승리했다.
코소보 사태는 클린턴 행정부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성공을 거둔 유일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협상을 통한 해결에 매달린 나머지 나토군(軍)이 공습을 시작했을 때에는 코소보 주민의 90%가 난민이 되어 알바니아 등지로 피난간 후였다. 나토군이 공습을 결정할 때에도 유럽의 나토회원국 중에는 유엔안보이사회의 결정이 없었다는 이유로 법적 정당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의 명시적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공습을 가했다.

        결론 :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1990년대에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했던 다섯번의 경우를 상세히 분석한 후 진 커크패트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진 커크패트릭은 자기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은 지지하지만 이라크에 대한 공격은 지지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봉사했던 레이건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의 반소(反蘇) 게릴라를 지원해서 소련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소련이 철수한 후의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 국민들이 관장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대체로 정당했다고 본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미군이 떠나자 아프가니스탄에는 군벌(軍閥)간에 내란이 발생해서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알 케이다의 근거지가 되고 말았고, 결국 9-11 사태로 이어졌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한 것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커크패트릭은 총소리가 울리지 않고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안도했던 미국은 있지도 않은 ‘거짓 평화’에 안주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커크패트릭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한데 대해선 많은 유보(留保)적 의견이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커크패트릭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 불법이라고 말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은 잘못이라고 반박한다. 유엔 안보이사회의 결의를 무시한 이라크를 제재하지 못한 아난 총장이 미국을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며, 부트로스 갈리에 이어 코피 아난도 군사력 사용은 마치 유엔 사무총장의 동의가 있어야 합법적이라고 보는 것은 유엔 헌장을 위반하는 월권이라는 것이다.

커크패트릭은 미국은 군사력을 행사하는데 있어 유엔의 허가를 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라크 공격은 비록 현명하지는 못하지만 정당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커크패트릭은 ‘레이건 독트린’을 설명하고 있다. ‘레이건 독트린’은 어느 압제적 정부에 대항하는 반대세력이 있는 경우에 미국이 그런 내부 반대세력을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도덕적 법적으로 정당하며, 이러한 지원이 그 나라의 국내문제에 대한 부당한 간섭은 아닌가 하는 점을 고려했다고 돌이켜 본다. 그러면서 커크패트릭은 미국인들은 세계의 많은 나라에선 민주주의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고 또한 평화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며, 그런 나라에 미국이 군사력을 투입해서 민주주의를 세우려는 것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고 자유를 곧 달성할 수 있는 나라를 돕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진 커크패트릭은 21세기에 국가안보를 지키고 민주적 가치를 증진하는 미국 외교의 양대 목표를 균형있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하며, 총 한방 쏘지 않고 냉전에서 승리한데서 보듯이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힘은 혼돈과 폭력이 난무하는 지역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이해하여야 하며, 군사력을 유지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는 진정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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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