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윌리엄 버클리 2세, 높이 날다 (2008년)
2009-02-23 10:05 1,850 이상돈


윌리엄 버클리 2세, 높이 날다 (베이직 북스, 2008년, 208쪽)

William F. Buckley, Jr., Flying High – Remembering Barry Goldwater
(Basic books, 2008, $25.95)

지난 2008년 2월에 타계한 윌리엄 버클리 2세(William F. Buckley, Jr., 1925-2008)는 러셀 커크와 더불어 20세기 후반기에 미국의 지적(知的) 보수주의 운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러셀 커크가 학술적 저술로서 보수주의의 지적 기초를 닦았다면, 버클리는 정치평론지 ‘내셔럴 리뷰’(‘The National Review’)를 발간하고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들’(‘Young Americans for Freedom’: YAF)이란 대학생 보수단체를 결성하는 등 조직활동도 많이 했다.

버클리는 1966년부터 1999년까지 ‘사선’(射線: ‘Firing Line’)이란 TV 대담 프로를 진행해서 대중에게는 그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버클리는 무엇보다 저술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951년에 모교인 예일 대학의 무신론(無神論)과 진보적 풍토를 비판한 ‘예일에서의 신과 인간’(‘God and Man at Yale’)는 베스트 셀러가 되어 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 후 버클리는 대략 50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에는 2차 대전 중 잠시 CIA 요원으로 지낸 경험에 기초한 스파이 소설도 있다.

  부유한 석유사업가의 형제 자매가 많은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버클리는 그런 환경을 이용해서 보수 지적 운동(conservative intellectual movement)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1964년에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1964년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에서 골드워터가 넬슨 록펠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유명해 져서, 이를 계기로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고, 결국에는 198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의 보수 전성시기를 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의 버클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80세가 넘어서 버클리는 건강이 나빠졌고, 특히 2007년에 부인 패트리셔가 사망하자 심적으로 쇠약해 졌다. 버클리는 버클리의 두 살 아래 누이동생인 패트리셔의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패트리셔와 결혼했고, 버클리의 누이동생 패트리셔는 버클리의 예일 대학의 가장 친한 친구 브렌트 보젤(1926-1997)과 결혼했다. 보젤은 버클리와 ‘매카시와 그의 적(敵)들’이란 책을 같이 냈고 ‘내셔널 리뷰’에서 같이 일했다. 골드워터가 1960년에 펴낸 베스트 셀러 ‘보수주의자의 신념’(‘The Conscience of a Conservative’)는 사실은 보젤이 쓴 것이다.

버클리는 생애의 마지막 작업으로 배리 골드워터와 로널드 레이건을 회고하는 책을 각각 준비했다. 이 책 ‘높이 날다’는 배리 골드워터를 기억하면서 쓴 것인데, 버클리는 머리말도 썼지만 책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레이건을 회고하는 ‘내가 아는 레이건’(‘The Reagan I Knew’)는 그 후에 유작(遺作)으로 출간됐다.

책은 1960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로 시작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정부 부처를 늘리고 연방정부 지출을 늘리자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일단의 공화당 보수파들은 남서부 애리조나 출신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보수파의 기수(旗手)로 옹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이젠하워가 밀었던 리차드 닉슨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 해 9월, 버클리는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운동을 했던 대학생 100명을 코네티컷 주(州) 샤론에 있는 자신의 그랜드 엘름 저택으로 초대했다. 브렌트 보젤, 제임스 번햄 등 ‘내셔널 리뷰’의 멤버들과 대학생들은 며칠 동안 토론을 했고, 버클리가(家)의 여인들은 넓은 정원에서 음식을 준비했다. 이렇게 해서 ‘자유를 위한 젊은이들’(YAF)이란 대단히 성공적인 보수주의 대학생 조직이 탄생했다.

버클리는 누나인 프레실리아와 매부인 브렌트 보젤 등과 자기 집에서 ‘내셔널 리뷰’ 편집회의를 하던 시절을 회고했다. 1959년 한해 동안 보젤은 골드워터를 대통령 후보로 내보내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보수주의자의 신념’이란 책을 썼다. 1962년 1월,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대표인 윌리엄 바루디는 골드워터가 플로리다  팜비치에서 며칠간 머무를 예정이라면서 버클리와 러셀 커크를 초대했다. 브렌트 보젤은 당시 스페인에 머물고 있어서 초대에 응할 수 없었다.

골드워터는 청바지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팜비치의 브레커스 호텔에 나타났다. 버클리와 그 일행은 케네디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골드워터와 의견을 나누었다. 평소에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던 러셀 커크는 골드워터에게 1964년 대선 출마를 종용했다. 그러면서도 커크는 골드워터에게 남부의 인종차별주의 단체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골드워터가 남부 정치에서는 그것이 어렵다고 말하자 버클리는 ‘내셔널 리뷰’를 통해 그런 단체를 비판하겠다고 했다.

골드워터가 펴낸 ‘보수주의자의 신념’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비대한 연방정부와 비대한 노조가 미국의 앞날을 가로 막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골드워터의 주변에 모여 들었다. 골드워터가 1964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이들은 자연히 골드워터 선거운동 진용을 형성하게 됐다. 1964년 공화당 예비선거는 전에 없이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억만장자 넬슨 록펠러가 엄청난 자기 돈을 풀어서 선거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할리우드에선 로널드 레이건과 존 웨인이 골드워터의 선거 캠프에 참여했다. 일리노이 주(州) 앨튼에 살고 있던 필리스 슐라플라이도 선거 캠프에 가담했다. 슐라프라이가 쓴 ‘반향이 아닌 선택’(‘Choice Not an Echo’)가 캘리포니아 예비선거를 이들 앞두고 나와서 좋은 반응을 일으켰다. 6월 4일에 열린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골드워터는 112만 표를 얻어서 105만 표를 얻은 록펠러를 눌렀다.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골드워터가 공화당 후보 지명에 성공하게 됐다.

캘리포니아 선거운동 기간 중 샌프란시스코의 허브스트 극장에선 ‘자유를 위한 젊은이들’이 주관한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당시 한 여론조사는 예일대 교수 1600명 중 단 두 명만이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이 큰 극장으로 꽉 메우고 열렬하게 골드워터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 날 골드워터는 “보수주의가 우리 시대의 정치적 현상이 될 것”이라고 연설해서 갈채를 받았다. 버클리는 국가복지주의, 반(反)반공주의, 회의주의, 반미주의에 사로잡힌 당시의 대학가를 고려한다면 그날의 행사는 레닌연구소 학생들이 러시아 황제의 묘소를 참배한 모습이었다고 돌아 보았다. 

7월에 골드워터는 공화당 후보로 지명됐고, 8월에 존슨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무난하게 지명됐다. 존슨은 순교자로 사망한 케네디의 후광을 십분 이용했고, 덕분에 골드워터는 케네디의 유령과도 싸워야 했다. 공군 조종사 출신인 골드워터는 선거 운동 도중에도 자주 조종간을 잡았다. 버클리와 그의 동료들은 애리조나를 방문해서 골드워터가 조종하는 그의 경비행기를 타고 그랜드 캐년을 하늘에서 구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골드워터는 선거운동 중 B 727도 직접 조종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골드워터가 제기한 도덕성, 국가안보, 국가과 종교 등 여러 쟁점은 공감을 얻었지만 여론조사는 존슨이 골드워터에 2 대 1로 승리할 것을 예상했다. 골드워터의 선거캠프는 이러다간 고향인 애리조나에서도 패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골드워터는 애리조나 뿐 아니라 미시시피, 앨러바마,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 남부 벨트에서 승리했다.

대통령 선거를 1주일 앞두고 로널드 레이건이 한 골드워터 지지연설을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고, 그로 인해 레이건이 1966년에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연설이 방송되기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골드워터의 측근 참모들은 레이건의 방송 녹화를 보고, 레이건의 연설이 방송되는 데 반대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방송은 골드워터의 선거본부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넛츠베리 팜의 창업자인 억만장자 월터 놋트는 골드워터의 TV 홍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는 레이건의 연설을 대단히 좋아 했다. 골드워터의 측근들이 이에 반대하자, 놋트는 그렇다면 골드워터에 대한 홍보지원을 모두 그만 두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정작 골드워터는 레이건의 연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낸시 레이건은 자기 남편이 무시당했다고 매우 분노했다. 방송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골드워터의 득표에 크게 기여했지만 정작 골드워터는 레이건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지 않았다. 197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골드워터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지지하고 레이건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감정의 골을 이루어서, 레이건이 대통령을 지내는 동안 골드워터는 단 한번도 백악관에 초대 받지 못했다. 레이건 대통령 임기 중 윌리엄 버클리는 물론이고, 러셀 커크,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보수주의 지식인들은 백악관으로 초대되어 레이건 부부의 따듯한 환대를 받았지만 정작 골드워터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낸시 레이건은 자기 남편을 무시한 사람은 결코 그대로 넘긴 적이 없었다.) 1979년에 나온 자서전에서 골드워터는 당시 선거운동을 주도했던 윌리엄 바루디가 자기에게 ‘내셔널 리뷰’ 사람들과 거리를 두라고 했었다고 회고했다.

골드워터는 1998년에 89세 나이로 사망했다. 버클리는 골드워터 만큼 솔직하고 용기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고 돌이켜 보았다. 친구들을 자신의 비행기에 태우고 그랜드 캐년의 계곡을 낮게 나르던 골드워터는 독특한 사람이었으며 그렇게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라는 말로 버클리는 책의 끝을 맺었다. 
©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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