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데이비드 핼버스탐, 가장 추웠던 겨울 (2007년)
2009-03-10 01:08 2,173 이상돈


        <책의 내용은 시사칼럼 135번 '맥아더의 신화를 벗긴다'에 나온 부분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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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핼버스탐, 가장 추웠던 겨울 (2007년, 하이퍼리언, 719쪽)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2007, Hyperion, $35.00)

베트남 전쟁을 취재해서 퓰리처 상(賞)을 탄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펴낸 이 책 ‘가장 추웠던 겨울’('The Coldest War')은 700쪽이 넘는 대작(大作)이다. 책은 1950년 여름에서 1951년 봄에 이르는 기간 중의 한국전쟁을 그리고 있다. 책의 제목이 말하듯이 1950년-51년간 혹독한 추위 속에서 미군이 치른 전투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책의 앞뒤 표지는 미 해병대 1사단을 따라 장진호 전투를 종군했던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이 찍은 유명한 사진이 장식하고 있어 책의 테마를 짐작하게 해 준다.

1934년에 태어난 데이비드 핼버스탐은 하버드를 졸업했다.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교내지인 ‘하버드 크림슨’의 편집자로 일했다. 졸업 후 지방신문 기자를 지내다가 1960년에 뉴욕타임스로 옮겨서 흑인 민권운동을 취재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베트남 내전 개입을 취재해서 30세란 젊은 나이로 1964년에 국제취재 분야에서 퓰리처 상을 받았다. 1965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글을 모아 ‘수렁을 만들다’(‘The Making of a Quagmire’)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비판적으로 본 첫 책이었다. 1967년에 뉴욕타임스를 그만 두고 하퍼지(誌)의 편집자로 기고했고, 1969년에는 ‘로버트 케네디의 끝나지 않은 여정(旅程)’을 펴냈다.

1970년이 되자 그는 미국에 베트남 전쟁에서 실패할 것임을 확신하고 그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72년에 ‘가장 훌륭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이 출간됐는데, 베스트 셀러가 됐다. 핼버스탐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 전쟁을 기획하고 끌고 간 사람들은 가장 탁월한 브레인들이었지만, 그들은 결국 미국을 희망없는 전쟁으로 이끌고 갔다고 지적했다. 조지 W. 부시가 이 책을 읽었다면 섣불리 이라크 전쟁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책은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 후에 핼버스탐은 주로 스포츠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냈다. 그러면서도 핼버스탐은 자기가 언젠가는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생각했다는데, 2007년 가을에 ‘가장 추웠던 겨울’을 냄으로써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책이 출판되기 전인 2007년 4월 23일, 다음 책을 내기 위한 인터뷰를 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핼버스탐이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한국전쟁은 ‘맥아더의 전쟁’이며 또한 ‘맥아더가 망쳐놓은 전쟁’이란 것이다. 책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한 1년 동안의  전투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책 전체를 통해 흐르는 기조(基調)는 맥아더로 인해 한국전쟁이 필요 이상 오래 끌게 됐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불필요하게 죽게 됐다는 것이다.

6-25 남침이 보고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도쿄에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 지시해서 휘하의 8군을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8군 사령관은 월튼 워커 장군이었는데, 그는 기강도 해이하고 훈련도 되어 있지 않고 장비도 빈약한 8군에 실망해서 의기소침해 있었다. 2차 대전 중 패튼 장군의 3군 휘하의 기갑사단장으로 유럽의 전선을 누볐던 워커로서는 도쿄에서의 생활이 한심하기만 했다. 게다가 맥아더의 사령부에는 맥아더 측근으로 인(人)의 장막(帳幕)이 쳐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군비를 대폭 축소해 버린 탓으로 일본에 배치된 미군의 인력과 무장은 대단히 부실했다. 워커 장군 자신도 “8군은 전투부대가 아니라 보급창에 불과하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맥아더가 총애하는 참모장 네드 앨먼드 소장은 8군이 전투태세가 잘 되어 있다고 공언했고, 맥아더는 그런 앨먼드를 신뢰했다.

한국에 급히 파견된 미군들은 훈련도 부족하고 장비도 빈약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동양인들을 사냥하러 간다”는 식의 농담을 하며 부산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들이 맞부딪친 북한군은 강한 군대였다. 미군의 대전차(對戰車) 포(砲)는 북한군 탱크의 장갑을 뚫지 못했다. 38선을 넘은 북한군 정예군은 마오쩌둥 휘하에서 장제스 군대와 싸운 중공군 부대 중 한국인들로 구성된 정예부대였다. [이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부분으로, 한국전쟁이 처음부터 국제적 전쟁이었음을 보여 준다.]

한국군은 전투도 별로 못하고 붕괴했고, 급히 파견된 미군은 대전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미군은 대구까지 순식간에 후퇴했고, 낙동강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미군이 벌인 낙동강 방어 전투 중 가장 위태로웠던 곳은 밀양 서쪽의 창녕과 영산이었다. 창녕과 영산이 무너지면 밀양을 거쳐 부산이 그대로 함락될 판국이었다. 낙동강 전선(前線)의 배후에는 병력이 전혀 없었다. 워커 장군은 맥아더에게 병력증강을 요청했으나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맥아더는 워커의 애절한 요청을 들은 체 하지도 않았다. 절박해진 워커는 그 지역을 지키던 부대장들에게 후퇴하면 부산이 함락된다고 독려했다. 미군은 실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방어선을 지켰다.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젊은 장교들이 낙동강 남부 전선에 치룬 희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9월 15일,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맥아더는 조지 마셜,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 등 유럽에서 싸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인천 상륙작전은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볼 때 무리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합참의장이던 오마 브래들리를 무시하고 인천 작전을 밀어 붙였다. 인천 작전을 두고 하도 말이 많이 돌아서, 도쿄에서는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지휘관으로 앨먼드 소장을 임명했다. 상륙작전의 주역인 해군과 해병대는 이런 맥아더의 조치에 경악했다. 맥아더가 자기의 충복인 앨먼드을 3성 장군으로 승진시키기 위해 앨먼드를 상륙작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는 말이 돌아서, 해군과 해병대는 인천 작전을 ‘앨먼드 진급 작전’이라고 부르면서 빈정거렸다.

맥아더와 앨먼드 소장은 어떻게 하면 서울을 하루 빨리 탈환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빨리 전진하라는 명령이 계속 내려왔지만 미 해병 1사단 지휘관들은 그런 지시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미 해병대 지휘관과 장병들은 전쟁 중임에도 도쿄의 호텔에서 머물고 있는 맥아더 장군과, 후방에서 깨끗한 군복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있는 앨먼드 소장을 경멸했다. 맥아더는 한국 전쟁 중 단 하루도 한국에서 잠을 잔 적이 없다. 앨먼드 소장은 캠핑 카 같은 전용 트레일러 차를 갖고 다니면서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당번병을 시켜서 좋은 음식을 만들도록 했다. 실제로  전투에 참가해야 하는 미군 장병들. 특히 지휘관이 병사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전통인 해병대 장교와 사병들은 그런 맥아더와 앨먼드를 비웃었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미국으로부터 지원병과 새로운 무기가 도착함에 따라 워커 장군이 이끄는 8군은 낙동강을 넘어 진격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북한군이 일사천리로 후퇴를 해서 미군과 한국군은 어려움이 없이 북진(北進)할 수 있었다. 이때 맥아더는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미 해병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일부 병력을 차출해서 10군단을 결성하고 앨먼드 소장이 지휘하도록 했다.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 놀랐다. 한국전쟁 같은 국지전에서 야전군 지휘체계를 양분한다는 것은 군사학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맥아더는 자신의 충복인 앨먼드 소장에 병력을 주어서 워커 장군의 지휘권을 약화시킬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10군단으로 하여금 원산에 상륙해서 장진호 계곡을 거쳐 서부에서 북진해 오는 8군을 만나도록 지시했다. 해군과 해병대는 이런 맥아더의 작전에 경악했다. ROTC 훈련을 받는 대학생도 이런 작전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개했다. 혹한(酷寒)이 닥쳐오는 데 험준한 산간에 부대를 투입하는 발상은 정상이 아니었다.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분산해서 빨리 진군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부대를 결집시키고, 진군을 늦추고 장진호 근처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10군단에 속했던 미 육군과 한국군은 전멸했지만, 미 해병대가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스미스 소장의 이 같은 ‘항명’ 덕분이었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국은 통일될 것이고 미군은 고향에 돌아간다고 상황을 낙관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북진 중이던 미군과 한국군은 중국말을 하는 북한군을 포로로 잡아서 그들이 중공군이며, 중공군이 대거 압록강을 건너서 내려와 숨어 있다는 진술을 들었다. 현지 지휘관은 그런 사정을 도쿄의 맥아더의 사령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은 그런 정보를 묵살했다.

미 8군은 청천강 북쪽 안주와 근우리에서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미 육군 2사단은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고, 워커 장군은 후퇴를 해야만 했다.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9병단에 의해 포위됐으나 영웅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함흥으로 후퇴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장진호 전투이다. 이로써 맥아더의 신화(神話)는 무너진 것이다. 12월 23일 서울 북쪽에서 워커 장군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8군은 서울을 다시 중공군에 내주고 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사망한 워커 장군의 후임에 당시에 떠오르는 차세대 지휘관이던 매튜 리지웨지 중장을 임명했다. 2차 대전 중 노르만디 상륙작전 때 82 공수 사단장으로 부대원들과 함께 적진에 낙하산으로 뛰어 내린 용맹한 군인 리지웨이는 장병들의 존경을 받는 지휘관이었다. 당시 그는 미군 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장군이었다.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맥아더를 만나고 온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맥아더는 쉽게 파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트루먼이 리지웨이를 8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맥아더에 대한 불신을 표시한 것이었다. 한국에 부임한 리지웨이는 무능한 지휘관을 교체했는데, 이들은 대개 맥아더의 인맥이었다.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리지웨이를 처음 만나서 다시는 앨먼드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고, 리지웨이는 이 요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맥아더는 참된 군인들에 의해 불신임 당한 것이다.

현지의 미군 장병은 맥아더의 무모한 작전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맥아더는 자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워싱턴 때문에 이런 상황이 왔다고 책임을 워싱턴으로 돌렸다. 맥아더는 워싱턴이 중공군을 만주까지 추적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초래됐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트루먼은 대노(大怒)했다. 당시 도쿄에서 맥아더를 취재한 한 기자는 맥아더가 나이에 비해 많이 늙어 있었고, 불면증과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측근들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고 밝혔다. 도쿄의 사령부는 전장(戰場)과 완전히 유리(遊離)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친(親)중국 로비 세력이 한국전쟁은 중국을 공산주의에서 해방시키는 전쟁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미군은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니 트루먼 행정부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다만 리지웨이 장군이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함에 따라 비로소 워싱턴과 현장 지휘관이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 리지웨이는 전쟁의 참혹함을 아는 군인이었다. 그는 사병의 생명도 장군의 생명만큼 고귀하다고 생각한 군인이었다. 3성 장군인 그는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최전선에서 부하 장병을 독려했다. 그는 현실적인 군인으로,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한국 전쟁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다. 

서울을 다시 적군에 내준 미군은 전열을 정비해서 다시 북진했다. 1951년 2월, 미군은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와 강원도 원주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 대부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원주에서는 한국군 1개 사단이 무모하게 전진했다가 궤멸 당해서 뒤이은 미군과 네델란드 군 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한국군 8사단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무리한 명령이나 내리던 앨먼드 중장의 지시로 서둘러 진군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완전히 궤멸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현지에 도착한 리지웨이 장군은 앨먼드를 면전에게 크게 질책했다.

중공군을 물리치고 서울을 수복하는 데는 양평군 지평리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투가 결정적이었다.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는 두 개의 터널을 두고 벌인 쌍굴 전투, 그리고 지평리에서 벌인 전투에서 포위해온 중공군을 상대로 미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데는 프리먼 대령과 트레시 대령의 공적이 컸다. 프리먼 대령은 나중에 4성 장군이 되었지만, 트레시 대령은 포로로 잡혀서 사망했다. 이 두 사람은 공적에 비해서 적절한 훈장을 받지 못했는데, 그것도 리지웨이 장군에 의해서 소외된 맥아더 인맥의 지휘관들이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쌍굴 전투와 지평리 전투에선 폴 맥기 중위라는 사병 출신 소대장이 맹활약을 했다. 저자 핼버스탐은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든 폴 맥기를 찾아가서 긴 인터뷰를 했다.

리지웨이와 그의 군대가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을 때, 명목상 유엔군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도쿄에서 리지웨이의 작전이 잘못됐다고 비난하는 성명이나 발표하고 있었다. 워싱턴은 그런 맥아더를 한심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전세계를 도청하던 국가안보국(NSA)가 우연하게 도쿄의 스페인 대사관과 포르투갈 대사관의 전화를 도청했는데, 두 대사관이 본국 정부에 대해 맥아더가 한국전쟁을 중국과의 전쟁으로 확대시킬 것이라고 확언했다고 보고 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정부참모였던 윌로비 소장은 도쿄 주재 미국 대사관보다 독재자 프랑코과 살라자르가 통치하는 스페인 대사관과 포르투갈 대사관을 더욱 자주 접촉하고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저자들은 반역을 하고 있어 !”하며 화를 냈다. 하지만 맥아더를 파면하면 정치적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트루먼은 당분간은 참고 보았다.

1951년 4월 9일, 트루먼은 애치슨 등 주요 참모들에게 맥아더를 파면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애치슨은 “맥아더가 벌써 파면되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조지 마셜은 “신중해야 한다”면서 사실상 반대했다. 함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는 3군 총장 등 합참 스태프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브래들리와 3군 총장이 파면에 동의하자 마셜도 이에 동의했다.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 파면을 발표했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후임으로 리지웨이를 임명했고, 8군 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장군을 임명했다.

맥아더는 자신이 해임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트루먼이 자기를 파면하면 여론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은 당장은 여론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겠지만 결국에는 자기가 옳았음이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화당의 보수파 의원들은 맥아더 파면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리차드 닉슨 의원은 맥아더를 원상회복시키라고 요구했다. 윌리엄 제너 의원은 트루먼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도쿄를 떠나 귀국 길에 올랐는데, 일본인 25만 명이 나와서 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가 경유한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도 많은 군중이 그를 지지하러 나왔다. 뉴욕에선 700만 명이 거리로 나와서 맥아더의 행진을 구경했다. 맥아더는 의회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맥아더는 “‘노병은 죽기 않고 단지 사라져 간다’는 말이 있다. 그런 말대로 본인은 오랜 군 경력을 접고 이제 사라져 간다”고 했다. 그 연설을 들은 트루먼은 “빌어먹을 헛소리”라고 퉁명스럽게 말했고, 애치슨은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안도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사라져 갈 의도가 전혀 없었다. 맥아더는 자기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맥아더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자기가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백악관은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그렇게 말한 기록을 언론에 공개했다. 의회는 맥아더 청문회를 열어서 맥아더 해임이 정당한가를 다루게 됐다. 처음에 공화당의 보수파 의원들은 이 청문회가 그들의 입지를 강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는 곧 무산되고 말았다. 맥아더가 진실을 외면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합참이 자기를 지지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합참은 정반대로 진술했다. 합참은 맥아더가 군을 무모하게 멋대로 운영했다고 증언했다. 맥아더에 대한 가장 불리한 진술은 국방부와 합참의 중견 장교들로부터 나왔다. 맥아더의 무모한 작전 때문에 자신들의 사관학교 동기생과 후배들이 청천강과 장진호 부근에게 죽어갔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이들은 맥아더를 증오했다. 이들은 의회에 의원 보좌관들에게 맥아더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증언대에 선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맥아더가 미국을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적과 싸우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6일간에 걸친 오마 브래들리의 증언에 이어 3군 총장이 증언대에서 서서 맥아더가 자의적으로 무리한 전쟁을 벌였다고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이 끝나자 더 이상 청문회를 진행할 필요가 없음이 분명해 졌다. 트루먼 대통령이 승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라는 노병(老兵)은 사라져 버렸다. 핼버스탐의 책도 여기서 끝난다.
&copy;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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