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데이비드 프라이스-존스, 배신 (2006년)
2009-03-16 00:03 1,586 이상돈



데이비드 프라이스-존스, 배신(背信) : 프랑스, 아랍, 그리고 유태인
                                  (2006, 엔카운터 북스, 171쪽)
    David Pryce-Jones, Betrayal : France, the Arabs, and the Jews
            (2006, Encounter Books, $ 23.95)

9-11 테러 후 미국과 프랑스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스라엘과 아랍권을 보는 두 나라의 시각이 판이하게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의 뿌리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가인 영국인 부친과 프랑스계 모친 사이에서 비엔나에서 태어난 영국의 소설가이며 평론가인 데이비드 프라이스-존스(1936년 생)는 이 책에서 프랑스의 반(反)유태주의와 친(親)이슬람 성향의 뿌리와 현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책은 2005년 10월에 파리 북동쪽 근교에 위치한 끌리시-수-보아라는 작은 도시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전역을 휩쓴 폭동으로 시작한다. 이 도시에서 두 명의 아프리카계(系) 10대 소년이 담장을 넘어 변전소(變電所)에 뛰어 들어가서 감전사(感電死)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왜 그곳을 들어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해서 다음해 초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자동차 10,000 대가 파괴됐고, 건물 230동이 불탔으며, 5000명이 체포되어 그 중 80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언론은 열악한 주거환경, 소외감, 실업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면서, 폭동을 일으킨 집단을 일종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언론은 폭동을 일으킨 집단을 아프리카계(系) 흑인 이민자들이라고 지칭했고 이들을 아랍계 무슬림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폭동을 일으킨 집단은 아랍 무슬림들이었다.

20세기 초 만해도 프랑스에 무슬림은 살지 않았다. 그러나 아랍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프랑스의 관심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은 1798년에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했다. 1830년에 프랑스 군은 오토만의 술탄이 통치하던 알제리아를 침공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자 프랑스는 지중해 건너편 북아프리카의 아랍세계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프랑스는 자신들이 오토만 제국 내의 가톨릭 신도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북아프리카 출신 아랍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프랑스 식민전쟁에 프랑스를 위해 싸웠고, 프랑스 정부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에 이슬람 대사원(大寺院)을 건립했다.

1962년에 알제리아가 독립하자 프랑스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알제리아인 10만 명이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해 들어왔다. 프랑스의 식민통치는 가혹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통치에 협력했던 현지인들 중 그대로 남아있던 사람들은 새로 들어선 알제리아 독립정부 아래에서 가혹한 보복을 당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다른 나라에서도 똑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프랑스는 그들이 통치했던 나라에서 프랑스에 협력했던 식민지 현지인들의 이주를 승인해야만 했고, 1974년에는 이들에게 영주권과 공민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프랑스는 인구조사를 할 때 종교를 묻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프랑스에 무슬림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온건한 추측에 의해도 프랑스 내의 무슬림 인구는 500만 명에서 600만 명에 달한다. 프랑스 전체 인구의 1/4이 무슬림과 아랍인이라는 추산도 있다. 프랑스에는 약 1,600개의 이슬람 사원(모스크)이 있으며, 소규모의 비공식적인 종교적 장소는 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프랑스에는 현재 이슬람 사제(司祭)인 이맘이 약 1,500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과격한 성향으로 잘 알려진 한 이맘의 아들은 이라크에서 미군에 포로로 잡혀 관타나모에 수용되어 있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이같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무슬림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프랑스인들은 전통적으로 유태인을 싫어했고, 19세기 말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듯이 기회만 있으면 유태인을 속죄양(贖罪羊)으로 삼으려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인들은 자국내의 유태인들과 큰 마찰이 없이 지내왔다. 하지만 급증한 북아프리카계 아랍인들은 유태인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프랑스 내에서의 유태인과 유태인 단체에 대한 아랍인의 공격은 1999년에 69건에서 2002년에는 932건으로 늘어났다. 유태교 사원(시냐고그)에 대한 공격 등 반(反)유태 폭력이 프랑스에서 특히 빈발하는 것은 프랑스 정부가 이를 유태인에 대한 인종적 또는 종교적 박해로 보지 않고 단순한 폭력사안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2003년 11월에는 한 아랍 소년이 이웃에 살던 유태인 청년을 지하실로 끌고 가서 칼로 살해하고 눈알을 포크로 찍어 자기 어머니한테 갖고 가서 “유태인을 죽였다”고 자랑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2006년 초에는 아랍인들이 유태인 청년을 납치해서 3주 동안 폭행하고 결국은 산채로 휘발유를 부어 태워 죽인 일도 발생했다.

프랑스의 대외정책은 파리의 세느 강 서안(西岸)에 위치한 꿰 도르제(Le Quai d’Orsay)에 자리잡은 외무부에 의해 좌우된다. 엘리트 의식이 충만한 외무부 관리들은 전통적으로 폐쇄적이고, 반(反)유태적이며, 반(反)개신교적이며, 반(反)의회적이다. 프랑스가 1940년에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후에 들어선 비시 정부는 유태인의 공민권을 박탈하는 칙령을 자발적으로 제정해서 선포한 사례가 그런 성향을 잘 보여준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할 당시 4살이던 저자는 어머니의 시아주버니인 에두아르도 드 칼레욘에 의해 프랑스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주재 스페인 대사관의 참사관이었던 드 칼레욘은 자기의 프랑스인 아내가 소유한 샤토를 스페인 외교건물로 선포해서 소중한 예술품들을 나치로부터 지켰고, 3만 명의 유태인들에게 통과비자를 발부해서 이들이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로 탈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72년에 그가 사망하자 이러한 사실이 알려졌고, 모계가 유태인 혈통인 저자는 자기가 어머니의 시아주버니 덕분에 살아났다고 술회했다.]

1945년 5월에 유럽이 나치로부터 해방되자 알제리아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100명 이상의 프랑스인이 피살됐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군대는 현지인 6,000명 이상을 살해했다. 시리아와 레바논에서도 비슷한 폭동이 일어나서 영국군이 주둔해서 치안을 담당해야만 했고, 프랑스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같은 해 5월, 예루살렘의 이슬람 학자(Mufti)로서 나치와 협력하고 유태인 절멸을 주창했던 하즈 아민 알-후세이니와 그의 추종자들은 독일이 패망하자 스위스로의 입국이 거부당한 후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프랑스 당국은 그를 파리 근교의 빌라에 연금시켰지만 그는 방문객을 만나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는 자기가 유태인 학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변명하다가, 1946년 5월에 가짜 신분증을 갖고 오를리 공항을 통해 이집트로 탈출했다. 그는 프랑스 체류 중에 프랑스 정부가 베푼 환대에 감사하다고 밝히고, 얼마 후 레바논으로 가서 반(反)유태 선동과 공작을 계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외무부 관료들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유엔으로부터 독립을 인정 받자 프랑스는 마지못해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1952년에 이집트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나세르가 이끄는 청년장교단이 정부를 장악했다. 나세르가 프랑스와 싸우던 알제리아 해방전선에 무기와 자금을 공급하자 프랑스 군부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매해서 이집트를 억제하려고 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판매에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국방부과 군부가 외무부를 눌렀다. 1956년 10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이스라엘 군과 함께 수에즈 운하를 점령했다. 1957년, 프랑스는 이스라엘의 디모나에 핵 발전소를 건설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밀월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는 동맹으로 보기 시작했고, 미국을 좋아 하지 않은 드골은 이스라엘을 멀리하게 됐다. 1967년 봄, 중동에 전운(戰雲)이 감돌자 드골은 이스라엘에 대해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드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선제공격을 가해서 이집트 군대를 단숨에 궤멸시켰다. 드골이 이스라엘에 대한 프랑스 무기 판매를 금지시키자, 1969년 말에 이스라엘 첩보원들은 프랑스 남부 세르부르 항에 정박해 있던 미사일을 적재한 경비정 12척을 탈취했다. 이스라엘이 주문한 이 군함들은 대금도 지불됐지만 프랑스 정부가 인도를 거부했던 것들이었다. 프랑스의 체면은 형편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지스까르 데스뗑이 대통령을 지낸 1974년에서 1981년까지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살해한 검은 구월단(Black September)의 수괴(首傀) 아부 다우드가 법망을 벗어나게 된 과정은 프랑스 정부가 테러단체와 한통속이라는 느낌을 준다. 아부 다우드는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대사관이 발부한 비자를 갖고 1979년 1월 1일에 파리에 도착해서 버젓이 프랑스 외무부를 방문했다. 몇 시간 후 인터폴은 아부 다우드를 체포했다. 독일 정부가 인터폴을 통해 그를 수배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흘 후 프랑스 법원은 아부 다우드를 풀어 주었고, 그는 알제리아로 출국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정중하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1979년 11월, 데스뗑은 프랑스를 공식 방문한 야세르 아파라트를 위해 엘리제 궁(宮)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프랑스 외무부는 아라파트 휘하의 테러 집단인 파타가 파리에 연락사무소를 열도록 허용했다. 그러자 파리는 피비린내 나는 암살의 무대가 됐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다른 섹터 간의 살인과 보복 살인이 백주에 일어났다. 자칼이라고 불리는 일리치 산체즈는 파리 한복판에서 두 명의 프랑스 경찰관을 살해하고 베이루트로 달아났다. 

프랑소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있던 1981년부터 1995년까지 프랑스 외무부는 강력한 반(反)이스라엘 로비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1982년에 레바논을 장악한 이스라엘 군대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사무실에서 텔아비브와 다마스커스에 있는 프랑스 외교관들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증거물을 확보했다.
 
데스뗑과 미테랑 아래에서 총리를 지내고 1995년에 대통령이 된 자크 시라크는 이라크를 중무장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사담 후세인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 덕분에 1980년대 초부터 프랑스는 이라크에 각종 무기와 항공기 및 자동차를 팔고, 공항과 식수 플랜트를 건설했다. 프랑스는 이라크에 에그조세 미사일을 팔았고, 프랑스 공군이 사용하고 있던 슈퍼 에땅드르 전폭기 5대를 이라크에 팔아 먹었다. 사담 후세인이 1990년에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미테랑은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대한 영토적 주장은 정당한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미국이 쿠웨이트 해방을 위한 다국적 군을 구성하고 유엔이 군사력 사용을 허용하자 프랑스는 마지 못해 항공모함 한 척을 파견했다. 그러나 그 항공모함에는 평소에 싣고 다니던 슈퍼 에땅드르 전폭기가 한대도 없었다.

1977년 10월 6일,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파리에 도착했다. 이란의 국왕 샤 팔레비를 싫어하는 프랑스의 좌익 진영은 호메이니의 입국을 반겼고, 그를 위해 파리 근교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1963년에 이란을 떠난 호메이니는 터키를 거쳐 이라크의 시아파 근거지인 나자프에서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파리에서 정착한 호메이니는 방송녹화를 하고 인터뷰를 하는 등 선전활동을 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호메이니는 1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았고, 많은 헌금을 받았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프랑스에 대해서 일말(一抹)의 관심이 없었다. 파리에서 그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호메이니에 쫓겨 망명한 팔레비 국왕은 데스뗑이 자기에게 “위기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자서전에서 말했다. 프랑스 정부가 호메이니를 파리에 입국시킨 것은 호메이니가 조만간 이란을 통치하게 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1979년 1월, 호메이니는 이란에서의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다고 선언했고, 2월 1일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에어 프랑스 전세기 편으로 테헤란에 도착했다.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취한 첫 조치는 이란 국민들의 시민적 자유를 제한한 것이었다. 팔레비 국왕 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샤푸르 박티아르는 파리로 망명했는데, 1980년 7월 일단의 이란인들은 그를 암살하려다가 경비를 서고 있던 프랑스 경찰관과 행인을 죽였다. 범인들은 재판을 받았으나 이란 정부의 요청을 못이긴 미테랑은 이들을 석방했다. 1991년 8월, 박티아르는 파리의 자택에서 누군가에 의해 결국 살해됐다.

1980년 9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했다. 프랑스는 이란에도 무기를 팔아서 양측은 똑 같은 프랑스제(製) 무기로 싸웠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프랑스 자체가 중동 테러의 대상이 됐다.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대사가 암살되고, 프랑스의 평화유지군 58명이 자폭테러로 사망하는가 하면, 프랑스 전역에서 호메이니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던 이란인 17명이 암살됐다.

1996년 시라크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곤궁에 빠진 아라파트를 지원하기 위해 이스라엘 방문을 강행했다. 파리 주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표를 동반한 시라크는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에 머물면서 이스라엘 경찰의 경호를 거부했다. 시라크는 에루살렘의 십자군 시절에 세운 성(聖) 안나 교회를 방문한 후 프랑스 영사관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초대해서 리셉션을 열었다. 시라크의 행동은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십자군을 연상시켰다. 그 다음날 그는 헬기 편으로 아라파트의 본거지인 라말라에 도착해서 아라파트와 그의 각료들을 만나 “팔레스타인의 민주주의가 아랍세계에 전파되기를 바란다”고 연설했다.

사담 후세인은 유엔이 인도적 견지에서 허용한 ‘석유와 식품 교환’(‘oil for food program’)을 이용해서 불법거래를 하고 돈을 빼돌렸는데, 거기에는 프랑스가 깊숙이 관련돼 있었다. 2003년 초,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려고 하자 시라크와 그의 외무장관 빌레빵은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2004년 여름에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봉기(인티파타)를 일으키자 프랑스 외무장관 바르니에는 라말라를 방문해서 아라파트를 격려했다. 그 해 10월, 쇠약해진 아라파트가 치료차 파리에 오자 시라크는 그를 군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도록 했다. 아라파트가 결국 사망하자 시라크는 국가원수의 예(禮)를 갖추어 시신을 라말라로 운구하도록 했다. 이 과정을 지켜 본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는 프랑스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에게 차라리 이스라엘로 이주해 오라고 했다.

저자는 유태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프랑스의 적대심은 아랍과 이슬람 세계의 그것과 똑같다고 본다. 팔레스타인과 이슬람의 자폭 테러에 대해선 침묵하고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해선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2중적 자세를 취하는 자크 시라크는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이란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과 다를 것이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프랑스가 사담 후세인과 아라파트를 지지함으로써 도덕적 권위를 포기했다고 강력하게 비난한다.

(c)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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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