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브라이언 레이텔, 피델 이후 : 카스트로 형제 (2007년)
2009-04-27 00:30 1,774 이상돈


<월간조선 2009년 2월호>

브라이언 레이텔, 피델 이후 : 라울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의 미래 (팰그레이브-맥밀란, 2007년, 289쪽) 

Brian Latell, After Fidel (Palgrave-MacMillan, Up-dated Paper Ed., 2007, 289 pages, $14.95)

1957년 12월 31일 밤,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는 가족과 함께 비행기 편으로 아바나를 탈출했고, 피델 카스트로가 지휘하는 반군(叛軍)은 1958년 1월 1일 새벽 아바나를 접수했다.

그리고 반세기가 흘렀다. 하지만 한때 전세계의 진보×좌파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쿠바 혁명’의 50주년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경제는 파탄에 처한 지 오래됐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하기만 하다. 반(半)세기 동안 선동과 공포의 통치를 해온 피델 카스트로는 지난 2006년 7월 모든 권한을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했다. 피델의 시대는 저문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에 대해선 많은 책이 쓰여 졌지만 대부분이 카스트로를 낭만적으로 본 것들이다. 인디애나 대학에서 중남미 정치학 교수를 지낸 로버트 쿼크가 펴낸 ‘피델 카스트로’(1993년)가 객관적으로 쓴 책으로 평가된다. 라울 카스트로에 대해선 볼만한 책이 거의 없다. 카스트로 형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이 넘쳐 흐르는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체 게바라를 ‘문화적 우상’으로 만든 체 게바라 전기(傳記)들은 대부분 쿠바 공산당의 선전물에 기초한 것이라서 믿을 것이 못 된다.

지난 2005년에 처음 나온 ‘피델 이후’(After Fidel)은 카스트로 형제의 출생부터 오늘날까지를 다룬 유일한 책이다. 저자 브라이언 레이텔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중남미 분석관으로 1964년부터 30년 넘게 카스트로 형제를 추적해 왔다. CIA에서 은퇴한 레이텔은 조지타운 대학에서 쿠바 정치를 가르쳤고, 지금은 마이애미 대학(플로리다) 쿠바 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있다.

자신의 뿌리를 수치스럽게 생각한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8월에 쿠바 동부 오리렌테(Oriente) 지역의 내륙에 위치한 비란(Biran)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의 동생 라울도 1931년 6월에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카스트로 형제의 아버지 안젤 카스트로는 비란에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란은 매우 거친 마을이었다. 전기도 들어 오지 않았고 자동차도 없었다. 그곳은 자기 자신을 자기 힘으로 지켜야 하는 거친 땅이었다. 피델과 라울의 어머니 리나는 이주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서 안젤 카스트로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안젤과의 사이에 일곱 아이를 낳았다. 그 중 둘째 아들이 피델이고, 셋째 아들이 라울이다. 안젤에겐 정식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피델과 라울은 혼외자(婚外子)인 셈이다.

스페인 북부에서 태어난 안젤 카스트로는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스페인 군(軍)으로 쿠바에 보내 졌다. 스페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안젤도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나 그 이듬해 그는 다시 쿠바에 와서 정착했다.
1941년에야 정식으로 쿠바 시민권을 획득한 안젤은 스페인 군인이었던 자기의 과거를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 안젤이 농장을 소유하게 된 데는 쿠바에 들어와 있던 미국의 청과물(靑果物)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츠(The United Fruits)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식민국가 군인 출신으로 농민을 수탈해서 농장을 일으킨 자기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하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뿌리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피델은 아버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하등의 동정심을 갖지 않았던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안젤의 정실(正室) 부인인 마리아는 학교 선생이었는데, 안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중 둘이 장성했다. 10대인 젊은 하녀 리나가 안젤의 아이를 낳기 시작하자 마리아와 안젤과의 사이는 멀어졌다. 상당히 오랫동안 마리아와 리나는 농장에서 각기 살림을 꾸리고 살았다.
안젤과 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첫째는 딸 안젤라였고, 그 다음이 아들 라몬이었고, 피델과 라울이 그 뒤를 이었다. 라몬은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평생동안 아버지 농장에서 일을 하고 살았다.

안젤은 총명한 아들 피델을 좋아 했지만, 리나는 라울을 가장 사랑했다. 훗날 피델은 고향에 대해 별다른 애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반면에 라울은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리나가 사망했을 때에도 라울이 임종을 지켰다.
라울의 바로 아래 누이동생 화니타는 1964년에 미국으로 망명해서 오늘날에 마이애미에 살고 있다. 화니타에 의하면, 피델은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등 영웅을 존경했고, 10권으로 된 프랑스 혁명사를 탐독했으며, 스페인 내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혼외(婚外) 사생아로 태어난 피델과 라울

리나가 피델 등 일곱 아이를 낳았다고 하지만, 안젤의 정식 부인은 마리아였다. 가톨릭 국가인 쿠바가 이혼을 허용한 것은 1940년이었다. 더구나 마리아는 마을의 학교 선생이란 인텔리 여성이었다. 미천(微賤)한 신분인 리나가 낳은 안젤라, 라몬 그리고 피델은 부근의 초라한 외갓집에서 살았다. 어머니 리나는 아버지 집에서 일을 했고, 외할머니가 이들을 보살폈으니 그 사정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들이 외갓집에서 태어 났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렸을 적의 이러한 경험은 카스트로와 라울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혼외자였던 피델은 여덟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가톨릭 세례를 받았는데, 그 전까지 미사에 참석해도 영성체(領聖體)를 할 수 없었던 피델은 치욕을 느꼈다.
피델과 그의 누나 안젤라, 그리고 형 라몬은 학교도 비란에서 다니지 못했다. 이들은 산티아고로 보내져서 비란에서 그들을 한때 가르쳤던 아이티 출신의 여성의 집에 머물면서 공부를 했다. 본부인인 마리아가 학교 선생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들을 멀리 보낸 것이다. 이들은 오늘로 친다면 홈스쿨 교육을 받은 셈인데, 이들을 가르쳤던 그 여성도 궁핍했기 때문에 이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피델은 아버지 집에서 추방되어 남의 집에서 머물면서 공부했던 당시에 대해 분노했고,  또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1936년 초, 마리아가 드디어 안젤을 떠남에 따라 피델과 그의 형제 자매들은 비로서 아버지 집에 들어와 살 수 있게 되었다.

사립학교를 다닌 피델

안젤은 피델을 아바나에 위치한 명문 고등학교 벨렌 스쿨(The Belen School)에 보냈다. 1854년에 스페인 국왕이 세워서 예수회 신부(神父)들이 운영했던 이 학교는 카리브 지역 전체에서 가장 좋은 학교로 이름이 높았다. 벨렌에서 피델은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피델은 연설과 토론, 경쟁적 스포츠와 등산 등 엘리트 교육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즐겼다.

벨렌에서 피델을 가르쳤던 신부와 피델과 같이 공부했던 동급생들은 피델이 기억력이 탁월하고 남을 설득하는 천부적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피델이 벨렌을 졸업한 해에 라울이 벨렌에 입학했지만, 라울은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고 중퇴하고 말았다. 라울의 학력은 초등학교 8학년 정도에서 끝나고 말았고, 이 같은 지적 천박성은 그 후 라울의 공적 생활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라울의 친부(親父)는 쿠바 경비대 장교 ?

라울이 실제로는 안젤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리나가 낳은 아이들 중에는 아버지가 안젤이 아닌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라울이라는 것이다. 피델과 그의 형 라몬은 닮았지만 라울은 이들과 전혀 닮지 않았다. 라울이 어릴 때 이따금 라울을 만났고, 언젠가는 라울을 아바나에 데리고 여행했던 쿠바 경비대의 비란 지대장(支隊將) 펠레페 미라발 대위가 라울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쿠바 경비대의 장교들은 혁명 후 대부분 총살되었는데, 미라발은 총살 직전에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격리되어서 생명을 부지했다. 당시 처형은 라울과 체 게바라가 지휘했다.

아바나 대학에서의 피델

안젤은 아바나에서 공부하는 아들 피델에 충분한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주었고, 피델은 돈이 부족한 줄 모르고 생활했다. 벨렌에서 가르치던 스페인 출신 신부들은 스페인이 영국과 미국에게 당했던 치욕적 패배 때문에 영국과 미국에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학생이던 피델은 특별하게 미국에 적대적 생각을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사책을 많이 읽은 피델은 영국과 미국을 좋아 하지도 않았다. 등산을 좋아했던 피델은 아바나 근교의 높은 산을 자주 올랐다. 고향에서 가까운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도 자주 올랐던 피델에게 서부 쿠바의 산은 별 것이 아니었다. 피델이 나중에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간(山間)에서 게릴라 부대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벨렌을 졸업한 피델은 1945년 가을에 아바나 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그는 아버지를 졸라서 8기통 포드 새차를 샀다. 학교 부근 아파트에 자리잡은 피델은 그 때부터 정치를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아바나 대학 전체 학생회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성(異性)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댄싱 같은 사교에도 흥미를 갖지 않았으나, 학생들을 만나서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는 열심이었다.
시험은 마지막 순간에 닥치는 대로 외워서 간신히 통과할 정도였지만 대학가 카페에서 정치문제를 토론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릴 적에는 가톨릭 성당(聖堂)을 열심히 나갔던 피델이었지만 대학생활을 하면서 종교와는 멀어졌다. 이렇게 캠퍼스 정치에 열을 올렸지만 피델은 학년 대표를 맡는데 그쳤다.

당시 쿠바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그라우 산 마르틴(Grau San Martin)이었다. 하지만 대통령만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을 뿐이고, 정부는 전과 같이 부패하고 무능했다. 피델은 대학내에서 산 마르틴 대통령에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했고, 이런 소식을 들은 대통령은 피델과 다른 세 명의 대학생을 대통령 관저에 초청해서 환담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대학 재학시 피델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미국-스페인 전쟁 후에 관타나모를 미국에 할양해야 했던 치욕 등으로 인해 쿠바 지식층 사이엔 미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팽배해 있었고, 그들의 영향으로 피델도 미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민중봉기에 관심을 갖은 피델
 
대학 재학 중이던 피델은 친구들과 함께 1948년 봄에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를 여행했다. 그 때 콜롬비아 야당의 지도자 조르지 가이탄(Jorge Gaitan)이 암살되자 이에 분개한 시민들이 봉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피델은 민중봉기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바나로 돌아 온 피델은 그 즈음부터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저술을 읽었다. 이제 피델은 반미(反美)주의자일 뿐더러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피델은 당시 쿠바에서 강력한 조직을 구축한 쿠바 공산당과는 거리를 두었다. 피델은 제도권 정치세력이었던 쿠바 공산당을 좋아 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1950년 9월, 피델은 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는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변호사 업무를 경멸했지만,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아바나에 냈다. 이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리하는 일을 해서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는 못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48년에 피델은 미르타 디아즈 발라르트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피델은 가족을 부양하는데 관심이 없었고, 생활비는 고향의 아버지가 댔다. 몇 년 후 그는 다른 젊은 여인과 혼외정사를 가져서 딸 알리나를 낳았다. 알리나는 나중에 집권자의 딸이란 배경으로 쿠바 패션업계에서 명성을 날렸지만, 1993년에 가짜 여권을 이용해서 스페인으로 탈출한 후 마이애미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피델이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일을 할 때에 쿠바 국민들의 희망은 야당 지도자이던 에두아르도 치바스(Eduardo Chibas)였다. 피델은 치바스를 지지하는 모임에 가담했으나, 1951년 8월에 치바스는 라디오 방송 도중 권총으로 자해한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피델은 보코타에서 일어났던 민중봉기가 아바나에서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바티스타 집안과 카스트로 집안

한편 부사관 출신으로 대통령을 지낸 훌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는 정계에 복귀해서 1948년에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티스타와 카스트로 집안이 아는 사이라는 점이다. 바티스타도 오리엔테 지방 출신으로 피델의 아버지 안젤과 아는 사이였다. 피델의 처남인 라파엘 디아즈 발라르트는 바티스타가 세운 정당에서 활동했다. 처남의 주선으로 피델은 바티스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피델은 바티스타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 말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

피델과 라울과의 관계

피델과 라울과의 관계도 흥미롭다. 많은 관측자들은 피델과 라울과의 관계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고 본다.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한 라울에게 피델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라울이 스스로 인정했다.
실제로 피델은 라울에게 엄격했다. 라울은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피델은 자신은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지만 동생에게 마르크스-레닌의 책을 읽게 하고 또 쿠바 공산당에 입당하게 했다. 피델은 자기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선 폭 넓은 지지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고,  대신에 동생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1953년 3월, 라울은 처음으로 쿠바를 떠나 크렘린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한 공산당 청년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라울은 동유럽 공산국가 수도를 세 곳 들러 보았다. 두 달 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출발한 여객선을 타고 아바나로 돌아 왔는데, 그 여객선에는 니콜라이 레오노프라는 러시아인이 타고 있었다. 레오노프는 나중에 KGB의 중남미 책임자가 되는데, 항해 도중에 라울은 레오노프와 친해졌으며 그 후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바나로 돌아온 라울은 부두에서 체포되어 공산당 책자 등 소지품을 압수당하고 경찰에게 구금되어 폭행을 당했다. 동유럽을 즐겁게 여행하고 돌아오자 마자 경찰에 잡혀가서 구타를 당한 라울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 지는 충분히 상상이 되는 일이다. 석방된 후 라울은 즉시 쿠바 공산당에 입당했다. 공산주의자 라울 카스트로는 이렇게 탄생했다.

1953년 산티아고 군기지 공격

1953년 7월 26일, 피델은 120명의 게릴라를 이끌고 산티아고의 몬카바 군 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반격에 의해 대부분의 게릴라는 피살되거나 생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 간신히 피신했던 피델은 사로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외곽을 지키던 라울은 무사히 도망했다.

정권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바티스타는 관용을 베풀어서 피델 등 이 사건에 연루된 게릴라들을 사면했다. 피델은 처형 직전에 풀려 났다. 이 결정은 바티스타가 내린 가장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석방된 피델은 이 날을 기념해서 자신의 혁명운동은 ‘7월 26일 운동’이라고 명명(命名)했다. 오늘날 7월 26일은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다. 

멕시코 시티에서 혁명을 준비하다

몬카바 사건 후 경찰의 감시에 시달리던 라울은 멕시코 시티로 건너갔고, 그 곳에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보헤미안 공산주의자 체 게바라를 만났다. 석방된 피델도 멕시코 시티로 건너가서 라울과 게바라를 만났다.
당시 멕시코 시티의 소련 대사관에는 유럽에서 라울과 함께 배를 타고 쿠바로 돌아왔던 니콜라이 레오노프가 근무하고 있었다. 레오노프는 집권한지 얼마 안 되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르시쵸프에게 라울을 소개했으며, 그 후 라울과 레오노프는 피델과 흐르시쵸프 사이의 연락창구가 되었다. 멕시코 시티에서 피델과 라울이 혁명을 준비하게 된 데는 레오노프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피델 일당은 멕시코 시티 외곽에 위치한 농장을 빌려 군사훈련을 했다. 그러던 중 피델은 바티스타 정부의 첩자로 의심되는 대원을 발견했다. 피델은 라울에게 그를 처형하라고 지시했고, 라울은 그를 근거리에서 총살했다.
피델은 결코 자기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며, 쿠바에 잠입한 후에도 처형은 라울과 게바라가 도맡아 했다. 일단 피냄새를 맡은 라울과 게바라는 서로 많이 처형하기 위해 경쟁을 했다. 1966년 라울은 산티아고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자신이 처형한 사람들의 유골을 수습해서 콩크리트 궤에 봉한 후에 배에 싣고 카리브의 깊은 바다에 넣어 버렸다.

혁명을 일으키다

1956년 12월 2일, 피델 일당 82명이 탄 그란마 호(號)는 쿠바의 남동부 해안에 도착했고,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입했다. 1959년 1월 1일, 드디어 이들은 아바나를 접수했고 바티스타는 항공기로 황급하게 아바나를 떴다.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미국의 정보당국은 카스트로 정권이 궁극적으로는 중도적 성향을 띨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피델은 “새로운 쿠바는 문명적이고 민주적 정부체제를 갖출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러나 피델은 점차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피델은 1961년 4월에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임을 인정했고, 그 해 12월에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선언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피델의 누이동생 화니타는 피델이 멕시코 시티에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피델은 이미 1940년대에 이미 레닌주의자가 되었다고 본다. 피델은 태생적으로 반미주의자이었고, 공부를 통해 젊은 시절에 레닌주의자가 되어 있었으나, 혁명을 위해서 이를 숨겼다는 것이다.
혁명에 성공한 피델은 라울을 쿠바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얼마 후에 라울은 부통령이 되어 2인자로 군림했다. 피델과 달리 라울은 외부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해서 그에 대한 정보는 드물었다. 피델이 50년 가까이 권좌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라울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라울은 쿠바의 좋은 집안 출신으로 미국 MIT에 유학해서 화공학을 공부하고 쿠바 혁명군에 뛰어든 빌마 에스핀과 결혼했다. 빌마 에스핀은 쿠바의 여성단체 회장을 지냈다.

1960년대 아바나

1960년대에 아바나는 사회주의 운동의 성지(聖地)였다. 전세계의 좌파 진보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아바나를 성지순례 하듯이 들렀다. 카스트로가 이룩한 혁명은 사회주의자들이 그렇게 고대(苦待)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유럽 등지에서 쿠바를 보러 온 사회주의자들은 카스트로의 실험이 성공하기를 기원했다. 카스트로는 “쿠바에선 불의(不義)와 불평등이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쿠바의 구(舊)질서는 신속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1959년 5월, 혁명정부는 농지개혁을 시행해서 농장주가 가지고 있던 농지를 농민들에게 무상 배분하였다.  카스트로 형제의 아버지 안젤이 평생토록 일구어 일으킨 비란의 농장도 국가에 몰수되었다. 피델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라울은 마지막으로 비란을 방문해서 자기와 형제들이 자란 농장과 집을 감회 깊게 살펴 보았다.

케네디 행정부가 시도한 피그스 만(灣) 침공은 미국의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피델 카스트로는 의기양양했다. 많은 쿠바인들은 북쪽 이웃에 대해 100년 동안 갖고 있었던 패배의식에서 비로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바의 부유층과 전문직업인 계층은 쿠바가 더 이상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됐다. 이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쿠바를 탈출했다.

1965년, 피델은 예상을 뛰어 넘는 조치를 발표했다. 피델은 쿠바를 떠나고 싶은 사람은 북쪽 항구에서 떠나라고 했다. 수천 명이 작은 보트를 타고 마이애미를 향했다. 미국 정부가 나서서 항공기 편을 마련했고, 그러자 수십만 명이 아바나 공항에서 마이애미를 향하는 비행기를 몸을 실었다. 피델은 쿠바를 떠나는 사람들은 ‘버러지’라고 불렀다. 피델은 “쿠바의 혁명은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이루어갈 것”이라고 했다.

당시 미국과 서유럽에는 신좌파(New Left)라고 부르는 사조(思潮)가 유행했다. 프랑스의 부부 지식인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보브와르는 아바나를 방문해서 카스트로 형제와 게바라를 만나고 감격했다. 미국과 서유럽의 대학가에선 체 게바라의 인기가 특히 높았다. 당시 미국 대학의 기숙사에 게바라의 사진이 붙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피델은 게바라의 그러한 인기를 질투하고 또 경계했다. 게바라가 가망 없는 해외혁명에 나섰다가 죽게 되는 원인은 이 때 이미 조성된 것이다.

피델과 게바라에 이어 가장 널리 알려졌던 카밀로 시엔후에고는 1959년 10월에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게바라 못지않은 대중적 인기가 있었던 시엔후에고는 카스트로 형제의 위상을 위협했기 때문에 제거된 것이었다. 피델과 라울에게 공산주의로 기울지 말라고 항의했던 혁명 동지 후버 마토스는 2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대중을 움직이는 연기자로서의 피델

피델은 대중에게 자기를 각인(刻印)시키는 데 소질이 있었다. 멕시코시티에 머물 때 피델은 연기 스터디오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군복을 입고 턱수염을 기른 피델은 대중 앞에서 절대로 가족이나 여성을 대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는 오직 조국 쿠바 밖에 없다는 것을 국민에게 각인시키려 했고, 그런 노력은 성공했다.

항상 대중과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연기를 해온 피델이지만 자신의 신변은 철저하게 챙겼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간에서 게릴라 전투를 벌일 때도 피델은 결코 앞장 서는 법이 없었다. 그는 후방 본부에 머물거나 안전한 후미에서 지휘했다. 혁명군을 이끌 당시 피델은 조준경이 달린 고성능 라이플을 들고 다녔다. 체 게바라는 피델이 그 총으로 정부군을 사살한 적이 있다고 썼다.

집권 후에 피델이 외국을 방문할 때면 쿠바 경호원 수백 명이 동원됐고, 모든 음식은 아바나에서 만들어서 공급했다. 자신의 안전은 그처럼 챙겼던 피델이지만 부하들에게는 조국을 위한 순교(殉敎)를 요구했다.
1983년 10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카리브의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에 미군을 보내 섬을 점령하도록 했다. 당시 그레나다에는 건설근로자 등 약 800명의 쿠바인이 있었다. 피델은 이들에게 미군에 대해 죽음으로 항전하도록 명령했다. 쿠바인 수십 명이 미군과의 전투 끝에 사망하자 나머지는 항복했다. 크게 분노한 피델은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이들을 앙골라로 보내서 대부분 전사하도록 했다.

혁명을 수출하다

피델은 미국의 자치령인 푸에르토 리코의 해방을 내세우는 테러단체를 후원했다. 대부분의 푸에르토 리코 사람들은 미국의 자치령으로 지내는 것을 좋아 하기 때문에 푸에르트 리코를 해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논리였지만, 이 단체는 이슬람 테러가 성행하기 전까지는 미국에 가장 위험한 테러단체였다.

이 단체는 1970년에 푸에르토 리코에서 미 해군 버스를 공격해서 미군 몇 명을 죽게 했다. 1983년에 이들은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웰스파고 현금호송차를 납치해서 700만 달러를 탈취했다. 이 돈은 쿠바 대사관의 외교 파우치로 아바나에 보내졌다.

피델은 미국 정부의 고위직에 간첩을 심는데 성공했다. 2001년 9월, FBI는 국방정보국(DIA)의 중남미 책임자이던 애너 몬테스를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푸에르토 리코 출신인 몬테스는 1985년부터 국방정보국에 일하면서 미국의 중요한 중남미 첩보를 아바나에 전달하고, 쿠바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상부에 보고했다.

소련은 쿠바에게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했다. 1970년대에 소련은 쿠바에 매년 약 50억 달러를 경제원조로 제공했다. 소련은 또한 매년 10억 달러 규모의 군사장비를 제공했고, 수천 명에 달하는 민간 기술자와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그 대신 쿠바는 앙골라, 이디오피아, 수단 등지에 군대를 파견했다. 엘살바도르의 공산혁명군은 쿠바에 와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수천 명에 달하는 쿠바의 군사고문단원이 니카라과에 파견되어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렸다.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혁명을 수출하는데 성공한 피델은 자신을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이 비견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적지 않았다. 쿠바의 공군 사령관을 지내다가 1987년에 미그기(機)를 몰고 미국으로 망명한 라파엘 델 피노는 “해외에서 적어도 쿠바군 1만 명이 전사했다”고 말했다.

‘마리엘 보트리프트’

카스트로의 운(運)은 1980년에 들어서 기울기 시작했다. 1979년 말,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피델은 공산주의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제3세계의 비(非)동맹국가들의 친구로 행세했다. 그런데 소련이 쿠바에게 알리지도 않고 비동맹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이다. 모든 비동맹국가들이 소련을 비난했지만 쿠바는 소련을 지지하는 수 밖에 없었고, 피델은 제3세계의 지지를 잃어 버렸다.

1980년 4월 1일, 아바나 시내에 위치한 페루 대사관에서 일어난 일은 피델의 위상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그 날 젊은이 다섯 명이 버스가 몰고 페루 대사관 게이트를 부수고 들어가서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대사관저를 지키던 쿠바 경비원 한명이 사망했다. 화가 난 피델은 페루 대사관에 대해 이들을 살인죄로 재판하겠다면서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페루 대사관이 이를 거절하자 피델은 그러면 대사관 주변의 경비원을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했다.

4월 4일, 실제로 페루 대사관을 경비하던 쿠바 경찰이 철수하자 이 소문이 쿠바 전국에 퍼졌다. 그러자 부활절 일요일까지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페루 대사관저로 몰려 왔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황급하게 몰려 들었다. 온가족이 함께 몰려 온 경우도 많았다. 경찰관이 대사관 앞에서 경찰 헬멧을 던져 버리고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기도 했다. 대사관 건물 내는 물론이고 마당에도 사람이 서 있을 자리도 없어 지자 사람들은 정원의 나무 위와 지붕 위로 올라갔다. 사태가 심각함을 뒤늦게 알아차린 쿠바 정부가 경찰을 동원해서 대사관 건물을 포위했다.

피델은 측근들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결정을 내렸다. 쿠바 북서쪽 끝에 있는 마리엘 항구를 열 것이니 쿠바를 떠나가고 싶은 사람은 떠나라고 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쿠바계 미국인들은 미국 전역에서 마이애미와 키웨스트로 몰려와서 요트와 보트를 빌려 그들의 친지를 구하러 마이엘로 향했다. 쿠바에선 전국에서 사람들이 마리엘로 모여들었다. 그 해 9월까지 12만 5천 명이 마이애미와 키 웨스트로 향하는 보트를 탔으니, 이것이 바로 ‘마리엘 보트리프트(The Mariel Boatlift)’ 사건이다.

세계의 언론이 지켜 보는 가운데 보트 탈출이 이어지자 쿠바의 보안책임자와 내무장관은 적어도 200만 명이 쿠바를 탈출하려고 한다고 피델에게 보고했다. 화가 잔뜩 난 피델은 “감옥에 있는 죄수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정신병자를 마리엘을 통해 미국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것이 피델이 미국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미국 이민 당국은 그 때 들어온 12만 5천 명 중 2700여명을 범죄인으로 분류해서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고 격리 수용했다.

공포정치로 체제 붕괴 막아 

‘마리엘 보트리프트’ 사건은 쿠바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였다. 피델의 측근들은 이 사건을 다룬 피델의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라울의 가까운 친구이며 앙골라에서 게릴라 전쟁을 지휘했던 아르날도 오초아 장군은 피델에 대한 불평을 사석(私席)에서 늘어 놓았다. 오초아의 그러한 언동(言動)이 오래가자 인내를 다 한 피델은 그를 체포했다. 피델은 그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라울을 경악했고, 쿠바 주재 소련 대사마저 오초아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무위(無爲)로 돌아갔다. 1989년 7월 13일, 오초아는 처형대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얼마 후에는 존경받던 내무부의 고위 정보장교가 처형됐다. 이어서 군과 보안계통에 일하던 중견간부들에 대한 숙정이 뒤따랐다.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피델과 라울의 통치는 강화됐다. 이 때문에  동유럽에서의 공산정권 붕괴는 쿠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피델과 라울은 체제 붕괴는 막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소련의 경제원조가 사라진 쿠바의 경제는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었다. 1990년 니카라과 국민들은 선거에서 공산주의 산디니스트 정부 대신 우파 정권을 지지했다. 앙골라에서도 내전이 종식되어 쿠바 군대는 빈손으로 쿠바로 돌아왔다. 엘살바도르의 공산 게릴라도 평화협상에 응하고 말았다. 세계 혁명을 이루려던 피델의 꿈은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다.

쿠바의 경제는 갈수록 나빠졌다. 젊은이들에게 줄 직장도 없고, 발전기와 자동차를 움직일 연료도 바닥이 나버렸다. 1991년 초, 피델은 “자전거 시대가 오고 있다”고 선언하고 자전거를 타자고 했다. 하지만 쿠바는 자전거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쿠바는 중국으로부터 자전거 70만 대를 수입해야만 했다.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된 도시민들은 먹거리를 찾으러 농촌으로 돌아갔다.

라울은 “중국과 같은 제한된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피델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1993년에 아바나 등지에서 소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1994년 8월, 아바나 시내에서 수천 명이 모여서 ‘피델 퇴진’을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피델은 이에 대해 또다시 항구 개방으로 대응했다. 쿠바를 탈출할 기회가 생기자 약 4만 명이 보트를 타고 플로리다로 탈출했다.

라울로 넘어간 권력

라울과 군 장성들은 이러한 피델의 방식을 좋아 하지 않았다. 이들은 국내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라울은 외국인 관광객을 받아 들여 외화를 벌기로 결정했다. 마피아가 일으킨 도박과 매춘(賣春)을 사회악으로 생각했던 피델은 외국인을 관광객으로 끌어 들이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자 군 고위 간부들이 관광시설을 운영해서 달러를 벌어 들였다. 국방을 뒷전이고 각기 외화벌이에 나선 것이다. 일반인들도 달러를 소유할 수 있게 되자 의사와 교수 등 지식인들도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겠다고 달라 들었다. 외국인들로부터 팁을 얻기 위해 대학생들이 학업을 팽개쳤다.

피델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끝없이 연설하는 것이 장기였다. 그런 피델이 2001년 6월에 연설 도중 할 말을 잃어 버리고 거의 주저 않을 뻔했다. 2004년 10월엔 연설 도중 쓰러져서 오른 팔과 왼쪽 무릎을 부러뜨렸다.

2006년 7월 중순, 피델은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를 방문해서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 볼리비아의 에보 모라헤스 대통령을 만났다. 겨울의 추운 날씨 때문에 피델은 기침을 많이 했다. 쿠바에 돌아 온 피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가 소수의 반군(叛軍)을 이끌고 정부군을 처음 공격했던 동남부의 바야모를 방문했다. 7월 27일, 피델은 비밀리에 큰 수술을 받았다. 7월 31일, 피델은 자신의 권한을 임시로 라울에게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2008년 2월, 쿠바의 인민의회는 라울을 쿠바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피델에 비한다면, 라울은 예측이 가능한 인물이다. 라울은 중국식의 경제개혁을 지지하고 있지만 그도 나이가 80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의 체제가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다. 라울은 그의 손으로 직접 처형한 사람들이 많아서 마이애미의 쿠바계 미국인들은 그를 ‘살인자’로 보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쿠바의 지난 50년은 카스트로 형제에게는 ‘영욕(榮辱)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킨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던 ‘혁명’은 대부분의 쿠바 국민에게 영광은커녕 좌절과 절망만을 안겨 주었다. 그것이 ‘쿠바 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copy; 이상돈, 월간조선
* 책 표지는 첨부를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관련 사진이 갤러리 자료사진에 있습니다.


게일 쉬슬러, 조국과 해병대를 위하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