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뉴딜과 브레인 트러스트
2020-07-05 21:02 22 이상돈


5월 17일 ·

뉴딜과 브레인 트러스트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나는 미국에서 교수 등 지식인이 국정에 참여하는 모습을 매우 부러워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맥조지 번디, 닉슨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 등이 대표적이었다. 대학원 시절 미국 헌법을 공부하면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이끌어간 지식인 참모 brain trust들과 이들이 만들어낸 법률을 위헌으로 판시한 보수적 대법원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나는 당시 브레인 트러스트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선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유학을 한 시기는 대처와 레이건의 시대였고, 반세기 만에 자유시장주의가 다시 우세해지던 때였다.

루스벨트의 브레인 트러스트로는 컬럼비아대 상법교수였던 아돌프 벌리, 역시 콜럼비아대 경제학교수이던 렉스포드 터그웰, 내무장관을 12년간 지내면서 공공사업을 이끈 해럴드 이키즈, 연방비상구호청을 이끌고 상무장관을 지낸 해리 홉킨스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실패했다고 보고 정부주도의 새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뉴욕타임스 모스코바 주재기자 월터 듀란티가 소련 사회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기사를 보내와서 그런 풍조가 지식인 사회에 팽배했다. 이들은 소련 체제가 대공황에서 허우적거리는 미국 자본주의 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애미티 슐레이스의 책, <잊혀진 사람>이 잘 보여주듯이 뉴딜은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 중에도 해리 홉킨스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매우 가까워서 전시 외교에도 깊숙히 간여했다. 홉킨스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은 얄타 회담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1946년에 암으로 사망한 홉킨스는 소련의 간첩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얄타 회담에는 국무부 고위관리 앨저 히스도 참석했다. 히스는 유엔헌장을 제정한 회의의 사무총장도 지냈다. 히스도 소련의 간첩 혐의를 받았으나 관련된 위증죄로 복역하는데 그쳤다.

루스벨트 행정부 재무부 고위관료이던 해리 화이트는 IMF와 세계은행을 발족시킨 브레튼우드 회의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는데, 1948년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증언을 한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도 역시 소련의 간첩이란 의심을 받았다. 역시 같은 해에 국무부 이코노미스트이던 로렌스 두건은 간첩증거를 잡은 FBI 요원들이 그를 체포하러 사무실로 올라오자 창문을 열고 투신자살했다.

이들이 과연 소련의 간첩이었냐는 20세기 후반기 50년 동안 명백하게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동유럽 공산권이 무너지자 미 국가안보국 NSA은 50년간 비밀로 해왔던, 대통령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던 1942년에서 45년에 이르는 기간 중 감청기록(베노나 Venona 문서)을 공개했다. 이에 의하면 앨저 히스와 해리 화이트는 명백히 소련의 간첩이었다. 그렇다면, 소련의 간첩이 유엔은 물론이고, IMF와 세계은행 설립을 주도한 미국 대표단을 이끌었던 것이다. 한반도 분단을 결정지은 얄타 회담도 마찬가지였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가장 가까웠던 해리 홉킨스는 간첩은 아니었으나 소련을 너무 좋아해서 소련 첩보기관은 그가 부지불식간에 넘겨준 정보와 자료를 요긴하게 써먹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2차대전 당시 소련이 미국의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그처럼 많은 무기와 장비 등 물자가 지원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6.25 때 미군이 노획한 북한인민군 트럭에 포드 엔진이 장착되어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에 기인한다.

당대의 최고 명문대학을 나온 이들은 정말로 자본주의가 운명을 다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나라 경제가 어려워서 한국판 뉴딜을 한다고 해도 국가가 주도했던 경제정책은 한계가 있었음을 알아야 하고, 그럴 때일수록 시장경제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루스벨트 시대의 브레인 트러스트가 우리에 주는 교훈이 아닌가 한다.

사진은 1999년과 2000년에 출간된, 베노나 문서를 정리해 놓은 책이다


1975-1976년 회고 
뉴딜을 제대로 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