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1975-1976년 회고
2020-07-06 07:30 21 이상돈

5월 19일 ·


1975-1976년 회고


어제는 5.18 40주년이었다. 10.26, 12.12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1년 동안 나는 미국 유학 1년차였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무너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거의 절대권력이었으니까.. 더구나 1차 오일쇼크 후 중동 특수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는 당시 호황이었다. 여의도에 지금 보아도 웅장한 국회의사당이 들어섰고, 나날이 시내에 자동차가 늘어났다. 시중에 돈이 넘쳐 흘러나서 여의도 아파트 분양에 투기가 성행해서 그것을 가라 앉히느냐고 정부는 주택청약제를 급하게 도입했다. 고위공직자 정치인들에게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특혜분양한 일이 드러난 것도 그 즈음으로 기억된다. 어찌됐든 당시 우리는 매년 두자리 성장을 계속 했던 시기였다.

1975년 4월에 월남이 공산화된데다가 경제가 그렇게 호황이었으니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도 수면하로 내려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76년 여름, 내가 초임장교로 임관할 즈음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했다. 전군에 데프콘 2가 발령됐으니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북한이 뒤로 물러나서 상황은 진정되었다. 그 즈음 미국은 대통령 선거 예비선거가 한창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여파로 정권은 민주당으로 넘어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한밤중 교통사고로 여비서가 익사한 사건이 생겨서 대선을 포기했고, 민주당은 헨리 잭슨 상원의원이 대선 후보로 유리한 듯했다.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30년 넘게 한 잭슨 의원은 워싱턴 출신으로, 민권법을 지지하고 국가환경정책법을 제안한, 내정에서는 진보적이되 대외문제에선 강경한 성향이었다. 나중에 네오콘이라고 불리는 리차드 펄 등은 원래 잭슨 의원의 보좌관을 지냈기 때문에 잭슨 의원을 네오콘의 원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하튼 그는 소련에 대한 강경노선을 주문하고 군비확장을 주장해 온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지역구에는 최대 군수업체인 보잉이 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잭슨 의원을 좋아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잭슨 의원을 젖히고 조지아 주지사를 역임한 알려지지 않은 지미 카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역시 대중, 특히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새로움을 좋아했다. 1972년에도 민주당은 본선경쟁력이 있던 에드먼드 머스키가 아닌 조지 맥거번을 지명해서 본선에서 참패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워터게이트 때문에 민주당 집권이 유력하지 않은가. 결국 카터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20세기 후반기 가장 무능한 대통령 4년이 시작됐다. 나는 10.26에서 5.18로 이르는 우리 상황도 카터의 무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쓰고자 한다.

지미 카터, 무능의 상징 
뉴딜과 브레인 트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