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1979-80년, 한국과 세계에선 무슨 일이...
2020-07-08 11:17 23 이상돈

5월 21일 ·

1979-80년, 한국과 세계에선 무슨 일이...


카터 임기 후반기인 1979년-1980년에는 나는 유학 첫해로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 가을 학기 중에 10.26이 발생했다. 10.26은 큰 사건이었지만 유학생들의 신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 정부가 들어선 이란은 해외유학생에 대해 소환령을 내렸고 이에 대부분 친서방 이란 학생들은 난민 비자를 얻어 취업하려고 했다. 학생 아파트에 살던 이란 유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여학생에게 본국에 돌아갈거냐고 물었더니, “무슨 소리냐, 그들은 우리를 죽일 거라”고 손을 내저었다.

연이어서 일어나 12.12도 큰 사건이었지만 그 중요성은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그러니까 미국 언론에는 12.12는 뉴스 감이 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한국일보 미주판은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에나 있었다. 10.26과 12.12는 단지 하루 뉴스로 그쳐버렸고. 5.18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인들에게는 테헤란 대사관 인질 사태와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이 훨씬 중요했다.

미국인들은 카터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상태였다. 크라이슬러 자동차는 파산 위기에 처해서 구제금융으로 버텼고, 마이애미에 본사를 둔 이스턴 항공은 실제로 파산했다. 미국민들은 자존심을 상실해 버린 상황이었다. 그런 참에 레이건은 미국을 다시 강하게 만들고 경제를 일으키겠다고 약속했다. 더구나 그는 감세 tax cut를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런 생생한 과정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79년에서 1980년에 이르는 동안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때에 오늘날 세계질서의 큰 줄기가 잡혔다고 하겠다.

- 1979년 2월,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란에 귀국을 했다. 이란의 친서방 지도자 팔레비 왕은 가족과 함께 외국 망명 길에 올랐다.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 해 4월,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임을 선포했다. 호메이니는 미국에 대해 석유금수 조치를 취했다.

- 같은 해 2월,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가 괴한에게 납치됭 후 살해됐다.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 시위대에게 유린됐다가 미국의 항의로 원상회복 되는 일도 일어났다.

- 1979년 7월, 나카라과에서 공산 산디니스트 반군이 수도를 장악했다. 친서방 독재자 소모사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산디니스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었고, 그 배후에 쿠바의 지원이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 같은 해 9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서 타라키 대통령이 반대파에 의해 피살되어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친소파인 그가 피살됨에 따라 소련이 개입할 명분과 이유가 만들어 진 것이다.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1979년 11월 4일, 이슬람 급진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 외교관 등 직원 52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444일간 포로로 잡혀 있다가 1981년 1월에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야 석방됐다.

- 1979년 12월 12일, 서울에서 12.12 사태가 일어났다.

- 1979년 12월 24일. 소련군이 국경을 넘어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은 모스코바 올림픽 보이코트를 발표하고 대소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게 된다.

- 1980년 4월 24일, 테헤란에 잡혀 있는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미군의 작전이 헬기 사고로 실패했다. 이 작전에 반대했던 밴스 국무장관은 사임했다.

-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5.18과 일련의 사태가 발생해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생겼다.

- 1980년 9월, 이란군이 이라크를 공격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 198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카터는 레이건에게 참패했다.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 그리고 의원입법 
지미 카터의 외교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