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왕적 대통령제?

작성일 : 2020-07-09 08:53조회 : 1,569

5월 25일 ·

제왕적 대통령제?

1970년대 중반기에 지금은 청계광장 조형물이 서있는 곳에서 프레스센터 쪽에 있던 건물 1층에 영어 책과 잡지 중고를 팔던 아주 작은 책방이 있었다. 나는 그 책방을 이따금 들러서 이런저런 책과 잡지를 사곤 했다. 주로 주한 미군 장교들이 보던 책을 사서 팔았던 것 같았다. 거기서 우연하게 산 책이 제임스 브라이스의 <미 공화국>American Commonwealth 인데, 1950년 경에 마지막으로 나오고 절판되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이 국내 유일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대학 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던 1971년-74년은 베트남 전쟁 국방부 비록 The Pentagon Papers과 워터게이트 사건이 미국을 흔들던 시기였다. 두 사건은 모두 중요한 소송으로 발전해서 미국 대법원의 최종판결로 닉슨 대통령이 패배하게 되어 결국 닉슨은 사임하게 되는데, 나는 두 판결문 원문을 몇번이나 읽었다.

그 시절 그 책방에서 산 국방부 비록과 워터게이트를 정리한 포켓 북 두권과, 역시 그 때 나온 아서 슐레진저 2세 Arthur M. Schlesinger, Jr.의 <제왕적 대통령 > The Imperial Presidency 포켓판은 아직도 내 서가에 꽂혀 있다. 출판된지 거의 50년이 되어서 책 상태는 좋지 않다. 역시 책은 하드커버라야 100년을 가는 것 같다.

아서 슐레진저는 하버드 교수를 하다가 케네디 백악관에서 특별보좌관을 지냈고, 케네디가 사망한 후 케네디 백악관 1000일 기록을 책으로 남겼다. 워터게이트로 한창 시끄러울 때 나온 <제왕적 대통령>에서 그는 미국 헌법의 원래 구상과 달리 대통령이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2차 대전을 거치고 냉전 시대에 접어 들어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대통령이 대외문제에서 지나치게 포괄적인 권한을 휘두르더니 결국 내정에서도 권력남용이 이루어져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했다면서, 이런 현상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차라리 잘 터졌다면서, 이제는 대통령의 권한이 헌법합치적으로 행사되도록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할 뿐더러 국민의 부단한 감시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이 책으로 인해 제왕적 대통령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됐고, 의회는 전쟁권결의를 통과시켜 대통령의 전쟁권한에 제한을 가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이재오 의원이 난데없이 우리가 제왕적 대통령제라면서 개헌을 하자고 해서 그 용어가 쓰이게 됐다. 2016년 늦가을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자 당시 한국당 의원들이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면서 개헌만이 살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원래 슐레진저가 의미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이야기이다. 이명박-박근혜는 부패하고 독선적이고 무능해서 문제가 됐던 것이니까, 슐레진저가 제기했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또한 영어로 presidency는 대통령직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것이 제도로서 대통령제라고 번역할 수는 없다. 대통령 권한이 비대해져서 남용된 것은 현상이지 그것을 제도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원들이 제왕적 대통령제가 어떻고 떠든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다. 그런 말을 하려면 슐레진저에 의해 그런 용어가 나오게 된 배경이라도 알고 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임기가 끝났으니까 이제 하는 말이다.)

아서 슐레진저는 역시 케네디 정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낸 맥조지 번디와 마찬가지로 박사학위가 없는, 학사학위 하버드 교수였다. 1940년 전후로 박사학위는 너무 좁은 연구를 한다면서 하버드가 폭 넓은 연구를 하는 펠로우 제도를 운영했는데, 두 사람 모두 그 출신이다. 맥조지 번디는 자신이 시작한 베트남 전쟁이 잘못된데 대한 번민과 후회로 여생을 보낸데 비해 슐레진저는 뉴욕시립대 교수와 강연 칼럼집필 자문 등으로 바쁘게 살다가 2007년에 90세로 사망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교수 출신으로 케네디 백악관에서 일한 번디와 슐레진저를 정말 부러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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