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군인, 지식인 그리고 전쟁
2020-07-26 08:13 18 이상돈

7월 7일


군인, 지식인 그리고 전쟁


전쟁은 군인한테만 맞겨 둘 수는 없다고 어떤 프랑스 정치인이 이야기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을 뽑으라면 맥조지 번디 안보보좌관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들어야 할 것이다.

30대 초에 하버드 대학원장을 지낸 뛰어난 수재였던 맥조지 번디 McGeorge Bundy, 그리고 포드 가문이 아닌 최초의 전문경영인 CEO로 포드 자동차를 이끌었던 전략경영의 귀재라는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는 기가 막힌 환상의 콤비였다. 하지만 그들이 시작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으로, 미국 사회를 분열시켰고 그 경제적 여파는 1980년대 들어서야 치유가 될 정도였다.

 2차 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을 지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패배하고 나오자 그 군사적 공백을 미국이 메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매튜 리지웨이 Mathew Ridgeway 장군을 베트남에 보내서 상황을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아이젠하워가 총지휘한 노르만디 상륙작전시 82공수사단 82nd Airborne을 손수 이끌고 후방에 낙하해서 치열한 전투를 했고, 6.25 전쟁 때는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에 후임으로 부임해서 전쟁을 지휘했으며 맥아더가 해임 된 후에는 유엔군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마무리한 인물이다.

리지웨이는 베트남을 방문한 후에 베트남에 미군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아이젠하워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를 읽은 아이젠하워는 미군을 파견해야 한다는 CIA와 펜타곤의 먹물들의 주장을 묵살해 버렸다. 전쟁을 치뤄 보았기에 전쟁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전쟁을 결심했지만 2차 대전을 태평양 최전선에서 경험한 그는 전쟁이 신속하게 끝나야 하고 아군 희생자가 최소화돼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부시는 19세 나이에 해군 조종사가 되어 어뢰 폭격기 torpedo bomber를 몰고 태평양 전쟁에서 싸웠다. 부시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조종사와 항공모함에서 룸메이트였던 조종사는 출격 후 항모로 돌아오지 못했다. 부시 자신도 격추되어 바다에 떠 있다가 지나가던 미군 잠수함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의 폭격기 뒷좌석에 탔던 폭격수는 실종되고 말았다. 이 경험은 부시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군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결정한 부시는 구체적 시행은 콜린 파월 합참의장이 이끄는 군 수뇌부에 맡겼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콜린 파월은 전쟁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는 미군의 눈부신 승리였고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탄생이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과정에서 이른바 네오콘의 역할은 독특한 것이었다. 유태인인 그들은 나치라는 사악한 집단에 대한 관용으로 유태인이 당했던 그 경험이 사고 체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프랑스와 영국이 나치 독일을 선제공격했으면 유태인 600만 명이 죽을 이유가 없었고, 폴란드 등 동유럽이 공산치하에서 반세기 동안 고생할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은커녕 총 한번 쏴보지 않은 지식인 집단이 미국을 전쟁으로 이끌어 가는 과정의 한 복판에는 네오콘으로 불리는 얽히고 얽혀있는 일단의 유태인 지식인 그룹이 있었으니, 지식이란 때로는 위험할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핵심인물인 폴 월포위츠를 중심으로 풀어가기로 한다.(계속)

네오콘 인맥 : 리차드 펄과 폴 월포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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