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이라크 : 네오콘의 오만과 실패
2020-07-27 20:48 21 이상돈

7월 10일


이라크 : 네오콘의 오만과 실패


1990년대는 냉전과 테러와의 전쟁 사이에 있었던 평화의 10년이었다. 전후 세대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베트남 전쟁 때 병역을 기피한 전력이 있어서 미군 총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이 서툴렀다. 취임 초에 있었던 북한 핵 위기는 카터가 평양을 방문하는 바람에 협상을 하게 되어 제네바 협정 체결로 위기를 넘기나 했지만 북한은 이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말리아에 어설프게 지상군을 투입했다가 혼쭐이 나서 클린턴은 그 후에 군사력 사용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1994년 들어서 구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가 내란을 일으켜서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학살하는 상황이 심각해지자 나토는 공습을 결의했고 미 공군기도 나토군의 일원으로 공습에 참여했다. 1995년 7월, 보스니아의 스레브니카에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주민 8000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 해 8월 30일부터 3주 동안 나토군은 세르비아 군 거점을 맹렬하게 폭격했다. 이 결과 결국 세르비아 군이 보스니아 지역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데이턴 협정 Dayton Agreement이 체결됐다.

1998년 들어서 코소보 지역에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자치를 요구하자 세르비아 군대가 무차별하게 주민들을 학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세르비아 정부와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자 나토는 또 다시 공습을 가하기로 결의했다. 1999년 3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나토군 항공기 1000대가 동원된 맹렬한 공습 끝에 유고슬라비아는 코소보에서 철군을 약속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됐다. 오래 지속된 공습으로 유고슬라비아는 군사시설 뿐 아니라 사회 인프라도 파괴됐으며,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자 결국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실각하게 됐다. 밀로세비치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다가 자살을 했고, 코소보는 자치령 지위를 획득하고 2008년에는 독립을 선포하게 됐다. 나토의 공습이 세르비아에 레짐 첸지 regime change를 가져온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처음에는 공습에 미온적이었으나, 이 문제를 다룬 의회 청문회 등에서 울포비츠는 군사적 개입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특히 1999년 공습은 공군력만으로 유고슬라비아를 굴복시키고 정부 교체, 즉 레짐 체인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폴 월포위츠가 주장했던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대외적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는, 1992년에 월포위츠가 작성한 국방계획지침 Defence Planning Guidance (흔히 ‘월포위츠 독트린’이라고 불린다)을 따른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예일대의 저명한 역사학자이면서 정치학자인 존 개디스 John Louis Gaddis 교수는 “아이러니 하게 클린턴 행정부가 월포위츠 독트린을 따랐다”고 평한 바 있다.

보스니아 공습과 유고슬라비아 공습은 나토군이 합동으로 실시한 것이지만 주력은 미 공군기와 해군기였다. 당시 공습에 참여한 영국 공군의 해리어, 독일 공군의 토네이도, 프랑스 공군의 미라지는 미 공군의 F-15, 미 해군의 F-18에 비해 성능이 너무 떨어졌다. 또한 유럽의 공군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해서 미군이 첩보위성과 첨단 정찰기로 획득한 정보에 따라 폭격지점을 정해주어야 출격하는 정도였다. 이로 인해 유럽의 군사력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미국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식의 자만심을 네오콘에게 심어주었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자 포드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는 각각 부통령과 국방장관이 됐고, 콜린 파월은 국무장관이 됐으며 폴 월포위츠는 국방부 2인자인 국방차관이 됐다. 9-11 사태가 발생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부시 독트린을 선포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공식화 했다. 9-11에 대한 동정적 여론을 등에 업고 미국은 특수부대를 앞세워서 북부동맹군과 연합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막강한 공군력의 지원 하에 카불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모아서 이라크를 침공했으나, 이라크에 새로운 레짐을 세우기는커녕 20년이 되어가도록 혼란만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대량학살무기를 제거하고 민주적 정부를 세우겠다는 이라크 전쟁의 목적 자체가 퇴색하고 말았고, 오히려 미국을 위협하는 이란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부시 대통령이 전쟁을 성급하게 결심한데는 그 자신이 외교 안보에 대한 경험과 식견이 부족해서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에 너무 의존했기 때문이다.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했을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에 의존하고, 군 수뇌부의 반대의견을 묵살하고 전쟁을 밀어 붙인 데 1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월포위츠 같은 정부 내의 네오콘, 정부 밖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네오콘 이론가들, 그리고 폭스 뉴스 같은 보수 언론도 책임이 적지 않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에릭 신세키 Eric Shinseki 대장은 이라크를 점령하고 국경을 봉쇄하는 데는 지상군 50만 명이 필요하다면서 기동력 있는 지상군 15만 명으로 침공하려는 럼스펠드 장관에 반대하다가 경질되고 말았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보다 강력하게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지 못한 데는 1991년 걸프전쟁 때 후세인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데 책임이 있다는 비판 때문에 발언권이 줄어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재선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은 폴 월포위츠를 세계은행 총재로 지명했으나 이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2년 후 다른 문제가 생겨서 월포위츠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임했다. 네오콘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국회를 나오고 한 달이 지나갔다 
미완으로 끝난 1991년 걸프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