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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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뉴욕, 뉴욕
작성일 : 2020-08-07 09:35조회 : 2,621
뉴욕, 뉴욕
1976년에 나온 <마라톤 맨> The Marathon Man이란 영화가 있다. 더스틴 호프만이 컬럼비아 학생으로 나오고, 로이 샤이더가 그 형인 미국 정부 비밀요원, 로렌스 올리비에가 조셉 멩겔레를 연상시키는 남미에 도피 중인 나치 전범으로 나오는 영화다. 나치 전범이 뉴욕의 은행에 숨겨 놓은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숨 막히는 스토리인데, 영문도 모르고 끌려 들어간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가 돋보였고 1970년대 맨해튼의 모습이 볼 수 있다.
장거리 조깅을 좋아하는 컬럼비아 대학생 더스틴 호프만이 사는 집은 할 일 없는 흑인들이 거리에 나와 앉아있는 대학 근처의 쇠락한 동네였다. 그런 곳에 사는 더스틴 호프만한테 오랜만에 말쑥하게 차려 입은 형(로이 샤이더)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왜 이런 데서 공부하느냐, 조지타운으로 와라”였다.
지저분하고 위험해 보이는 맨해튼의 남루한 집에 세 들어 사는 동생이 위험해 보여서 그랬을 것이다. 조지타운 대학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인 조지타운에 자리 잡고 있고, 1970년대 컬럼비아 대학 부근은 위험한 거리였으니까 영화에서 그런 대화가 나왔을 것이다. 미국 대학과 도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 대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1970년대 뉴욕시는 범죄가 성행하고 과다한 복지지출로 시가 파산 위기에 몰리는 등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70년대는 미국 전체에서 도심 탈출과 교외화 suburbanization 현상이 심화될 때였고 뉴욕도 예외는 아니었다. 뉴욕의 경우는 그런 현상을 가져온 큰 책임이 1966년부터 1973년에 이르는 8년 동안 시장을 했던 존 린지 John Lindsay(1921-2000)에 있다고 할 것이다.
진보성향의 공화당원이었던 린지는 인물도 좋고 키가 훤칠해서 케네디를 연상시킨다면서 대통령감으로도 지목되었다. 그는 시장 임기 중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는데,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복지 정책 보다 더욱 강력한 복지 정책을 시행해서 가장 진보적 시장으로 명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린지가 시장을 지낼 때 시민과의 대화 같은 것을 했다는데, 그 때 있었던 일화는 복지정책의 파탄을 상징하는 사례로 알려졌다. 어느 간담회에서 비만형의 흑인 중년 여성이 린지 시장에 대해 “시장, 아이를 낳는 것은 내 일이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당신의 의무이요”(“Mayor, it is my job to have children, it is your duty to take care of them.")라고 일갈한 것이다. 당시는 홀로 사는 사람이 아이를 갖게 되면 아이 한명 당 육아 보조금이 나올 때여서 공공주택에서 일하지 않고 아이들만 데리고 사는 가구가 많았다.
범죄에 대한 법 집행도 느슨해져서 경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건물 벽과 지하철에 그려진 그라피티가 예술이라는 이상한 주장이 성행해서 그대로 방치됐다.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브롱크스 등에 건설된 공공주택단지는 무법천지의 게토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컬럼비아 대학의 월프강 프리드먼 교수가 백주에 대학 근처에서 피살된 때도 그 시기였다.
존 린지가 8년간 시장으로 있었을 때 뉴욕은 ‘관리할 수 없는 도시’ Ungovernable City였다. 그는 퇴임하는 날 혼자 눈물을 참으면서 청사를 걸어 나갔다고 하는데,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현실을 몰랐던 이상주의자의 종말이었다.
린지를 이은 민주당원인 에이브러햄 빔 Abraham Beam 시장 시절(1974-1977)엔 뉴욕시가 파산할 거라는 보도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그렇게 암울하던 1970년대 말, 뉴욕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뉴욕시가 내어 놓은 슬로건이 우리가 잘 아는 <I Love NY>이다.
상공인 단체는 뉴욕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면서 뉴욕을 상징하는 큼지막한 붉은 사과, 즉 Big Apple을 여기저기에 내걸었다. 1978년에 대머리 총각으로 유명한 에드 카치 Ed Koch(1924-2013)가 시장이 되어서 고군분투한 덕분에 뉴욕시는 파산 위기를 넘겼다.
뉴욕시가 본격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연방검사장을 지낸 공화당원인 루디 줄리아니 Rudy Giuliani가 1994년에 시장이 된 후부터다. 유권자들은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공화당 후보 줄리아니를 시장으로 선택했고, 줄리아니는 뉴욕을 안전하게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시장으로 가장 많이 한 말은 “저놈들을 감옥에 넣어 버려” (“Put them in jail.")였다.
뉴욕 거리에는 순찰차가 늘어났고, 그라피티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단속대상인 범죄가 되었다. 그는 살인사건이 나거나 화재가 발생하면 한밤중이라도 점퍼 차림에 캡을 눌러쓰고 현장에 나타났다. 시장이 법과 질서, 그리고 시민의 안녕을 지키는 최전선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2002년에는 역시 공화당원이던 기업인 마이클 블룸버그가 시장이 되어 2013년까지 12년간 재직했다. 줄리아니와 블룸버그를 거치는 동안 뉴욕시는 보다 안전하고 마음 놓고 사업을 할 수 있는 도시로 다시 태어났고, 맨해튼에는 새로운 주거용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1970년대가 도시에서 교외로 인구가 이동하던 시기였다면 1990년대부터는 도시로 다시 인구가 돌아오는 시기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9.11 테러라는 비극도 있었지만 뉴욕은 그것을 극복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나는 뉴욕을 유학 중이던 1982년에 처음 가보았고 1990년대 초에 회의 참석차 몇 차례 방문했었다. 그리고 오랜만인 2010년 여름에 두주일 동안 맨해튼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새로운 건물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컬럼비아 대학 근처에서 밤거리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뉴욕시장을 지내면서 ‘미국의 시장’ America's Mayor라는 칭송을 들었던 줄리아니는 2008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예비선거에 나섰으나 도중에 포기했다. 그는 트럼프와 관련을 맺어서 고문으로 그를 도왔는데,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용해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도록 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서는 등 인생의 마지막을 좋지 않게 보내고 있다.
사진은 9.11 사건 후 뉴욕 맨해튼 시내를 둘러보는 줄리아니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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