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클러렌스 토머스 (1948-)
2020-08-29 08:23 9 이상돈


클러렌스 토머스 (1948-)


클러렌스 토머스 Clarence Thomas는 서굿 마셜을 이어서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된 두 번째 흑인이다. 그는 1991년 7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지명되었는데, 상원 법사위 인준청문회에서 그의 아래에서 일했던 애니타 힐 Anita Hill 교수가 자신이 토머스한테 성희롱을 당했다고 증언해서 큰 파문이 일었다. 토머스에 대한 청문회는 성희롱 Sexual Harrassment에 대한 경각심을 전세계에 불러 일으켰는데, 비록 애니타 힐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나 힐의 증언은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당시 상원 법사위는 토머스 인준에 대해 찬반이 7대 7로 갈리자, 13대 1로 법사위 의견이 없이 본회의에 회부하기로 결의했다. 상원 전체회의로 회부하게 된 데는 당시 법사위원장이었던 조 바이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상원에서 토머스는 52대 48로 간신히 통과됐다. 토머스는 현재 29년째 대법관을 하고 있다. (모든 미국 연방법원 법관은 종신직이다.) 흑인 민권운동변호사였던 서굿 마셜의 후임으로 토머스를 지명한데 대해선 당시 법무장관도 우려했다는데, 토머스가 흑인우대조치 affirmative action를 부정적으로 보고 낙태 자유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1948년 조지아의 시골에서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토머스는 아버지가 일찍이 가출을 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되자 가축을 키우며 작은 등유 가게를 운영하던 그의 외조부모가 토머스와 어린 동생을 데려와서 키우게 됐다. 토머스는 나중에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외조부라고 그의 회고록 <나의 할아버지의 아들> My Grandfather's Son(2007년)에 썼다. 그 집안에서 최초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토머스는 근처의 가톨릭 고교를 다니고 매사츄세츠에 있는 성십자(Holy Cross)대학에 진학해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당시 대학가를 휩쓸던 신좌파 민권운동을 보고서, 토머스는 남을 비난하기 보다는 자신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던 외조부를 떠올렸다고 회고록에 썼다.

그는 대학을 다닐 때 에인 랜드 Ayn Rand의 <Atlas Shrugged>를 읽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로스쿨을 갈 때 하버드 대신에 보다 진보적인 예일을 택했다고 했다. 예일 로스쿨에 입학원서를 내면서 그는 자신이 흑인이며 빈곤하다는 내용을 썼는데, 나중에 그것을 후회했다. 백인 같으면 들어가지 못했을 예일 로스쿨을 자신이 흑인이었기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는 점은 그를 평생토록 괴롭혔다. 1974년에 로스쿨을 졸업한 토머스는 여러 로펌에 취직원서를 냈는데, 자기가 흑인 우대로 예일을 나왔다고 보고 어느 곳도 자기를 채용하지를 않았다면서, 소수인종 우대로 낙인찍힌 예일 학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던 중 토머스는 미주리 주 법무장관 존 댄포스 John Danforth가 예일 출신 변호사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주리 주 변호사 시험을 보고 주 법무부에 취직을 했다. 공화당원인 댄포스가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자 토머스는 댄포스 의원 보좌관으로 워싱턴에서 일하게 됐다.

토머스는 공화당적을 갖게 됐고,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교육부 민권담당 부차관보를 거쳐서 1982년에 공정고용위원회 EEOC 위원장에 임명됐다. 조지 H. W. 부시는 1989년에 토머스를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고, 1991년에는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로펌에 취직도 못했던 토머스가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된 데는 존 댄포스 상원의원의 영향력이 컸다.

토머스가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됐을 때는 별일 없이 청문회를 통과했는데, 그가 대법관으로 지명되자 교육부와 공정고용위원회에서 일했던 흑인 변호사 애니타 힐이 토머스가 원치 않는 데이트를 요청하고 성적 표현을 했다고 10년 전 일을 들고 나왔다. 당시 애니타 힐은 오클라호마 대학 로스쿨 교수였는데, 그 후 역풍을 맞아서 로스쿨 교수를 그만 두었고 지금은 브랜다이스대학 교수로 있다.

토머스는 자신의 경험으로 소수인종에 대한 우대조치를 반대하고 낙태 자유화 등을 반대해서 흑인과 여권단체의 공적 public enemy이 되었으며, 9명의 연방대법관 중 매우 보수적인 판결을 하고 있다. 그는 대학시절에 만나서 결혼한 첫 번째 흑인 부인과 이혼하고 1987년에 10년 연하의 백인 변호사 버지니아와 결혼했다.

 버지니아는 공화당 로비스트와 헤리티지 연구소 컨설탄트를 지내는 등 보수정치 운동에 적극적이어서 물의를 일으켰다. 토머스는 자기에게 가장 큰 사상적 영향을 준 사람으로 토머스 소웰을 뽑는다. 사실 두 사람의 성장과정은 매우 비슷하다. 미국 사회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 온 두 흑인 리더가 던지는 문제 제기는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입학과 소수인종 배려 
토머스 소웰(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