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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비판법학, 1986-87년 하버드 로스쿨
작성일 : 2020-10-06 21:47조회 : 1,746
비판법학, 1986-87년 하버드 로스쿨
칼 르웰린 등이 전개한 법현실주의 Legal Realism 운동은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을 강조해 왔던 미국의 법학계와 법조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말에 이르기까지 워렌 대법원The Warren Court은 중요한 민권 판결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끌었다. 하지만 대법원이 사회변혁을 가져온다는 명분하에 사법부의 덕목인 원칙과 논리를 무시했다는 비판이 컬럼비아 대학의 허버트 웩슬러 Herbert Wechsler 교수와 예일대의 알렉산더 비켈 Alexander M. Bickel 교수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1970년대 말, 하버드 로스쿨에선 30대 초에 테뉴어 교수가 된 로베르토 웅거 Roberto Unger와 던큰 케네디 Duncan Kennedy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움직임을 태동시켰는데, 이것이 비판법학 Critical Legal Studies이다. 웅거(1947- )는 브라질 출신으로 하버드에서 박사를 하고 곧 교수가 됐는데 철학 사회학 등 방대한 이론을 집대성한 연구를 내어놓아서 주목을 샀다. 던큰 케네디(1942- )는 법이론 Legal Theory 등을 가르치면서 비판법학을 하나의 운동으로 이끌고 나갔다.
비판법학은 기존 법학이 현상유지 status quo를 도모하고 있다면서 자신들은 휴머니즘, 평등, 소외계층을 고려한 새로운 법 운동이라고 내세웠다. 이들은 큰 주목을 받았고 학파로서 세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학술회의를 열고 저널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여기에 속한 교수들은 럿거스, 노스이스턴, 조지타운, 스탠포드, 미시건 등에 있었지만 하버드에는 마크 투스넷 등 여러 교수들이 가담해서 일종의 진지를 구축했다.
비판법학은 처음에는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의 주장이 현실성이 없으며, 좌파 계급론에 근거한 현학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거기서 파생된 비판인종이론 Critical Racial Theory 등은 상식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을 담아서 빈축을 샀다. 무엇보다 비판법학은 몇몇 대학에 국한돼 있었고, 이들이 가르치는 대학에서도 해당 과목이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없었다.
문제는 하버드 로스쿨이었다. 던큰 케네디 등 비판법학파들이 세력을 이루자 하버드 로스쿨은 교수 채용 때마다 내분을 겪어서 신규 채용이 중단되다시피 했다. 결국 기존 교수들(전통파 traditionalists)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1986년 1월, 저명한 헌법학자인 폴 베이터 Paul M. Bator 교수가 20년간 몸담았던 하버드 로스쿨에서 사임하고 시카고 대학으로 옮겼다. 그는 비판법학이 하버드에 ‘절대적 재앙’ absolute disaster라고 비난하고, 비판법학 교수가 없는 시카고 대학 로스쿨로 이적한 것이다. 그러자 몇몇 유명한 교수들이 대학 당국이 비판법학파들의 행태를 억제하지 않으면 자기들도 다른 대학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내전이 발생한 것이다.
폴 베이터 교수가 폭탄선언을 하고 하버드를 떠난 후 비판법학파 조교수이던 다니엘 태룰로 Daniel K. Tarullo가 테뉴어 심사에서 탈락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테뉴어 탈락은 1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87년에는 역시 비판법학파인 클레르 돌튼 Clare Dalton 조교수가 테뉴어 심사에서 필요한 전체 교수 2/3에서 3표가 부족해서 탈락했다. 위스콘신대학 교수로서 하버드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데이비드 트루벡 David Trubek에 대한 교수 임용은 교수회의를 통과했음에도 당시 총장이던 데릭 보크 Derek Bok (1930- )가 이를 번복해서 무산되고 말았다. 단과대학의 인사에 대해 총장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에 이는 충격이었다. (데릭 보크는 노동법학자로 1968-71년간 하버드 로스쿨 학장을, 1971-91년간 하버드 총장을 지냈다.)
뿐만 아니라 하버드 로스쿨은 은퇴가 예정된 저명한 비교법학자이자 법사학자인 아서 폰 메렌 Arthur von Mehren의 후임으로 전통주의자인 보스턴 칼레지 로스쿨 교수이던 메리 앤 글렌던 Mary Ann Glendon(1938- )을 임용했다. 1986-87년간에 있었던 하버드 로스쿨의 내전은 글렌던 교수 임용으로 끝을 장식하게 됐다, 글렌던 교수에 대해선 이어서 쓰기로 한다.
(비판법학은 우리나라 법학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안경환 교수가 2002년부터 2004년간 서울법대 학장으로 있으면서 새로 도입한 교과목과 새로 임용한 교수진은 비판법학의 영향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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