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공화당
2020-11-09 23:47 22 이상돈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공화당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연초에 존슨 대통령이 불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민주 공화 양당의 예비선거부터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해 6월에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됨에 따라 민주당은 유력한 대선 주자를 상실해 버렸고,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 그리고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이 부통령 후보가 됐다. 1968년 대선은 1965년에 의회가 흑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한 투표권법 The Voting Rights Act를 통과시킨 후 치러진 첫 대선이었다.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자 의회는 미루어 놓았던 공정주택법 The Fair Housing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주택시장에서 흑인을 차별하는 관행을 금지하는 조항을 담고 있어서 남부 지역에서는 반대가 거셌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는 미네소타 출신,  부통령 후보는 동북부 끝에 있는 메인 주 출신을 지명했다. 험프리와 머스키는 민권법을 지지한 진보성향이었지만 미네소타와 메인은 백인인구가 90%를 훨씬 넘는 white state였다. 자신들이 소외됐다고 느낀 남부 백인들은 앨라배마 출신인 인종차별주의자 조지 월러스가 제3후보로 대선에 뛰어 들자 그를 지지했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선 리차드 닉슨이 선두주자였고 뉴욕주지사를 오래 해온 넬슨 록펠러 Nelson Rockefeller(1908-1979 : 1959-73 뉴욕 주지사)가 추격을 했으며 조지 롬니(미트 롬니의 부친이다)와 로널드 레이건이 그 뒤를 따랐다. 닉슨은 공화당 내에서 중도파로 인식이 되었고, 넬슨 록펠러와 조지 롬니는 당내 진보파, 그리고 레이건은 당내 보수파로 인식이 되었다. 당시 공화당은 민권법과 공정주택법, 베트남 전쟁, 복지 등 많은 사안에 대해 중도, 진보, 보수로 갈려서 혼란을 빚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닉슨은 동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별로 알려지지 않은 메릴랜드 주지사 스피로 애그뉴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대선 본선에서 닉슨은 일반투표 43.4%, 선거인단 301표를 얻어 당선됐다. 험프리는 일반투표 42.7%. 선거인단 191표를 얻었고, 조지 월러스는 일반투표 13.5%, 선거인단 46표를 얻었다. 월러스는 ‘딥 사우스’ Deep South라고 부르는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아칸소에서 승리했다. 월러스가 몇 개 주에서 더 승리했더라면 하원이 대통령을 선출할 뻔 했다. 닉슨이 당선됨에 따라 록펠러로 대표되는 공화당내 진보파는 입지가 좁아져 버렸다. 근소한 표차이로 당선된 닉슨은 공화당이 더 이상 동북부에서 지지를 확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공화당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남부를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초선 하원의원 조지 H. W. 부시는 닉슨을 지지했다. 부시는 공정주택법에 찬성하는 등 민권 분야에선 진보적 성향을 보였다. 부시가 닉슨을 지지하자 레이건을 지지하는 보수적인 텍사스 공화당원들이 불만을 표출했다. 이때부터 레이건과 부시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은 배경부터가 너무 달랐다. 레이건은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스스로 일어난 사람이고, 그래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한테 인기가 좋았다. 레이건을 지지한 기업인들은 금융 같은 대기업이 아니라 가족이 경영하는 독립기업의 소유주들이었다. 이런 가족기업인들은 세금에 대해 가장 취약했기에 이들은 세금을 적대시하는 레이건을 지지했다. 1964년 대선에서 골드워터를 열렬히 지지했던 보수성향의 풀뿌리 공화당원들이 레이건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반면에 부시는 전형적인 동부 엘리트 출신이었다. 부시가 하원에 입성하자 부친인 프레스콧 부시와 모친인 도로시 여사는 워싱턴의 클럽에서 당선 축하연을 열었는데, 워싱턴 포스트 사주(社主)인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 부부 등 거물급 친지들이 대거 참석했다. 부시는 특히 자신의 외가인 허버트 워커 가문과 가까웠다. 부시의 외조부인 조지 허버트 워커는 코네티컷의 막강한 금융가였는데, 그는 사위인 프레스콧 부시가 상원의원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부시가 사업을 시작할 때도, 또 선거에 나설 때마다 워커 가문의 외삼촌들은 전도가 유망한 조카의 미래를 위해 아낌없이 도왔고, 그것이 결국 2대에 걸친 대통령이 나오게 되는 원동력이 됐다.   

부시는 대가족의 지지가 큰 힘이었지만 레이건은 자식들이 오히려 부담이었다. 낸시 여사와 사이에서 낳은 딸 패티는 일찍이 집을 나가서 히피처럼 떠돌아 살았고 대학도 중퇴해 버렸다. 공화당을 저주한 패티는 레이건이 주지사가 되자 성(姓)을 낸시 여사의 결혼전 성(姓)인 데이비스로 바꾸고 아버지와는 사실상 절연(絶緣)을 해버렸다. 패티가 부모에게 한 마지막 복수는 1994년 플레이보이 잡지에 완전 누드로 등장한 것이었다. 레이건과 부시는 이처럼 달랐고, 이들이 대표하는 공화당내의 보수파와 실용중도파 간의 갈등은 이후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진은 1968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을 다룬 타임지 표지


민주당 당헌개정을 보면서 
공화당 전성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