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나라와 사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칼럼

2012~14 안철수
작성일 : 2020-12-26 15:08조회 : 116


2012~14 안철수

안철수 대표가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라는 이름이 한국 정치권에 회자된 지가 벌써 10년이 되는 셈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2011년 말 박근혜 비대위의 비대위원이 됐을 때부터 안철수는 중대한 변수였다.

내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시점은 2010년 4월이었고, 각별해 지기는 그보다 1년 후인 2011년 4월부터였다. 2011년 여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등판을 하게 되면 나를 부를 것임은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4대강 소송 등 대학 밖의 일로 지쳐있던 나는 교수직을 65세까지 끌고 가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와중에 박근혜 비대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당내 사정은 간단치 않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국회의원이 스스로 물러나는 법은 없기 때문에 친이(親李) 세력을 정리하는 일은 진통이 있기 마련이다. 박근혜 비대위는 나를 위시한 신박(新朴)이라고 불리는 멤버들이었다. 그 때 우리가 제일 걱정했던 바는 서울시장을 양보한 안철수가 창당을 해서 2012년 총선에 나서는 시나리오였다. 만일에 안철수가 창당을 하고 박근혜 비대위원장으로부터 공천을 받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친이(親李) 의원들이 그 정당에 대거 참여한다면 새누리당은 고전을 할 것이 분명했기에 우리는 안철수의 동향을 주시했다. 하지만 무소속으로 대선을 나갈 생각이었는지 어땠는지, 안철수는 창당을 하지 않았으니 천만 다행이었다. 그런데, 당시 친박 입장에서는 안철수를 이명박이 갖고 있던 카드라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를 차기에서 배제하기 위해 키운 카드가 정운찬, 김태호, 안철수였다는 설(說)이 당시 제법 유력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으니까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서울대 융합대학원장이라는, 전에 없는 자리를 만들고 부인도 서울대에 임용한 일은 청와대의 뜻이 아니고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안철수가 ‘이명박의 아바타’라는 시선은 친박(親朴)에서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당시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는 팬 클럽 멤버들은 그런 말을 SNS를 통해 전파시키기도 했다. 안철수가 2012년 대선 후보를 두고 문재인 의원과 야권 단일화 경쟁을 하게 되자 친노/친문 세력이 안철수는 ‘MB 아바타’라고 입소문을 냈던 것 같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도 똑 같은 이야기가 SNS나 입소문을 타고 유포된 것 같다. 그렇게 입소문으로만 떠 돌던 ‘MB 아바타’라는 호칭은 2017년 대선 TV 토론 때 안철수 본인이 “내가 MB 아바타입니까?”하고 묻는 소극(笑劇)을 연출해서 역사의 공식기록으로 남게 됐다.

여하튼 이명박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대항마로 생각했던 정운찬은 국무총리를 하면서 우습게 되어 버렸고 김태호 의원은 총리 임명과정에서 낙마했다. 그러다가 2011년 가을 오세훈 서울시장이 느닷없이 사퇴하고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의원이 패배하자 박근혜 전 대표가 비대위원장으로 등판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을 차지해서 단독 과반수라는 과업을 달성했다.

2012년 총선 승리 후는 나는 여러 곳에 인터뷰를 했는데, 대선에서 대항마가 안철수로 보느냐 문재인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당시 대통령 후보 지지도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30%대였고, 안철수가 20%대, 문재인 의원이 7%, 김두관 의원이 5% 정도 할 때였다. 총선 후 처음으로 가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를 위시해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문재인 의원과 상대할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내 논리는 간단했다. 민주당은 뿌리가 깊은 정당이기 때문이다. 그해 5월에 경기고를 나온 언론인 모임이 나를 초대해서 점심을 같이 했는데, 모두들 민주당은 끝났고 안철수와 상대할 거라고 해서,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정색을 하고 반박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은 담판을 하더니 안철수가 느닷없이 사퇴를 선언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같은 이벤트는 불발한 것이다. 그 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와 같이 배석한 오직 박영선, 박선숙만 알 것이다. 하지만 그 내막은 밝혀지지 않을 것이고, 혹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 진위는 검증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그 때 안철수 대표가 무언가 상처를 받았다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1년 세월이 흘렀다. 2013년 늦가을, 윤여준 장관님이 잠시 보자고 하시더니 안철수가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창당을 하자고 해서 안 도울 수가 없다면서 나도 도와달라고 하셨다. 그 때 나는 창당 시기가 아니라고 했다. 즉, “김종필 총재 같이 충청에 기반을 둔 제3당이라면 지방선거를 앞두고 창당을 할 수 있지만 안철수처럼 ‘새정치’라는 가치를 내세운다면 비례대표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총선을 앞두고 창당을 해야지 어떻게 지방선거를 앞두고 합니까?”고 내가 말씀드렸더니, 윤 장관님은 “그러게 말이야, 2012년 총선을 앞두고 했어야 했어”라고 말씀하셨다.

더구나 당시 안철수의 ‘새정치’ 약속에는 기초단체 선거는 정당 공천을 폐지하자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면 창당을 해서 광역단체장만 공천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러고야 정치지망생이 모여들 수가 없었다. 결국 광역단체장 후보를 구하지 못했고, 민주당과 합당해서 새정치민주연합이란 정당을 만들어서 지방선거에 임하더니 세월호 사건 후라는 좋은 여건 속에서도 경기지사와 인천시장을 새누리당의 남경필과 유정복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이것이 내가 지켜 본 2012~14년간 안철수 정치였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