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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얼 워렌 대법원장
작성일 : 2021-02-12 16:53조회 : 32


얼 워렌 대법원장

미국 역대 대법원장 중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대법원장을 뽑으라면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연방 대법원의 지위를 확립한 존 마셜(John Marshall : 1755~1835, 1801~1835 대법원장)과 얼 워렌(Earl Warren : 1891~1974, 1953~1969 대법원장)을 드는 게 보통이다.

얼 워렌은 대법원장 재임 기간 중 흑인과 백인을 학교와 공공시설에서 분리한 남부의 인종차별 제도를 위헌으로 철폐했고(Brown v. Board of Education), 선거구 인구 불평등을 위헌으로 판시했고(Reynolds v. Sims),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확립했으며(Gideon v. Wainwright), 형사 피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Miranda v. Arizona) 등 일련의 기본권 판결로 미국 사회를 뿌리부터 바꾸어 놓았다. 이들 판결은 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해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이 기간을 ‘판사들에 의한 혁명“(Revolution by the Judge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 워렌은 노르웨이에서 캘리포니아로 정착한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워렌은 아버지한테 왜 자기는 미들 네임이 없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너무 가난해서 너에게 미들 네임을 지어줄 수 없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근면성실한 워렌은 UC 버클리에 입학헀고, 로스쿨로 전입해서 졸업하고 변호사가 됐다. (당시에는 학부 2년을 마치고 로스쿨을 들어갔다.) 군 복무를 마치고 알메이다 카운티 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일했고, 지방검사장 선거에 당선되면서 공화당 정치에 간여하게 됐다. 워렌은 부패한 경찰 등을 기소해서 명성을 얻었고, 1938년에 공화당 후보로 주 법무장관에 당선됐으며, 1942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돼서 3선을 기록했다. 워렌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의 전쟁정책은 지지했다.

진주만 공습 후 일본군의 본토 상륙을 우려한 루스벨트 행정부는 캘리포니아 등 서부해안 지역에 사는 일본계 주민들을 강제수용소에 수용했는데,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과 주지사로서 워렌은 이 조치를 시행에 옮겼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이런 강제수용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시해서 미국 대법원 역사에 오점(汚點)을 남겼다. 이 같은 인권유린을 시행한 당시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과 주지사가 나중에 민권보호의 기수가 된 대법원장이 됐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1952년 대선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공화당원이면서 캘리포니아의 역사상 유일한 3선 주지사이던 워렌을 중요한 지위에 등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1953년 9월, 당시 대법원장이던 프레드 빈슨(Fred Vinson : 1890~1953, 1946~53 대법원장)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별안간 대법원장이 사망하자(‘역사적인 심장마비’ historic heart attack라고 부른다) 아이젠하워는 현직 캘리포니아 주지사이던 얼 워렌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고, 의회는 쉽게 인준했다. 아이젠하워는 얼 워렌이 대법원장이 되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조정해서 무난하게 대법원을 이끌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일단 대법원장이 된 워렌은 흑인을 분리해서 차별하는 관행을 위헌으로 판시하는 등 미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워렌이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면서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을 후회했다.

워렌은 흑백통합 같은 사안에서 대법원이 전원일치 판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역사적인 브라운 판결은 대법원 전원 일치로 내려졌다. 그는 법률가로서의 논리는 별로였으나 입법부가 하지 못하는 시대적 과제를 대법원이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대법원을 이끌어 갔다. 그래서 그를 위대한 대법원장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법률가나 법관 보다는 시대적 요구를 파악해서 대법원을 이끌었던 수장(Chief)이었다.

1968년 대선에서 닉슨이 당선되자 대법원은 전환점을 맞게 됐다. 그가 후계자로 생각했던 에이브 포터스가 사임하자 자신도 사임했으며 닉슨은 보수적 법률가를 대법원장과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대법원에서 루스벨트에 의해 임명돼서 대법원의 진보적 기둥으로 역할을 했던 휴고 블랙 대법관은 1971년에, 윌리엄 O. 더글라스 대법관은 1975년에 각각 은퇴했고, 닉슨과 포드 대통령은 후임으로 보수 성향 법률가를 임명했다. 대법원은 갈수록 보수 색깔을 진하게 띠게 됐다. 한 시대가 끝난 것이다.

얼 워렌은 사망하기 석 달 전 미국변호사협회지에 “대법원을 약화시키지 말라”( "Let's Not Weaken the Supreme Court")라는 글을 써서 연방중앙항소법원을 신설하려는 구상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양승태가 도입하려 했던 상고법원과 같은 구상이었다.)

1974년 7월 9일, 워렌은 심장병으로 사망했는데, 임종하기 몇 시간 전에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과 윌리엄 더글라스 대법관이 그를 마지막으로 보러 왔다. 워렌은 두 대법관에게 워터게이트 관련 백악관 녹음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명령하는 대법원의 판결이 전원일치로 이루어졌냐고 물어 보았다. 두 대법관이 “그렇다”고 답하자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감았다. (United States v. Nixon 판결은 7월 8일에 구두진술이 이루어졌고 7월 24일에 판결문이 나왔으니까 닉슨이 임명한 버거 대법원장과 블랙먼 대법관을 포함한 8명의 대법관은 구두진술을 마치고 그 날로 전원일치로 닉슨의 주장을 배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진은 1963년 대법원 대법관 사진.
앞 왼쪽부터 톰 클라크(보수), 휴고 블랙(진보), 얼 워렌 대법원장, 윌리엄 더글라스(급진), 존 할란(보수), 뒷줄 왼쪽부터 바이런 화이트(중도) 윌리엄 브레넌(진보), 포터 스튜어트(중도), 아서 골드버그(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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