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LEESANGDON

나라와 사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칼럼

글로리아 에스테판
작성일 : 2021-03-12 11:18조회 : 39


글로리아 에스테판

나는 미국에서 두번째 석사를  University of Miami 에서 했다. 1년 동안 남부 플로리다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추억을 담았는데, 돌아와서 대학에 자리잡고 난 후인 85-86년에  마이애미가 AFKN TV 드라마와 대중 음악으로 등장해서 매우 반가웠다. NBC가 제작한 <Miami Vice>라는 새로운 장르의 경찰 드라마와  Miami Sound Machine이란 밴드였다.
우리나라에는 86년 즈음부터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의 히트 곡이 알려졌지만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초기의 라틴 리듬 보다는 80년대 말에 나온 발라드풍 노래가 듣기에 좋았다. 리드 싱거인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이 부각되자  89년부터는 아예 밴드 명칭을 버리고 단지  글로리아 에스테판으로 활동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에는 대학이 뉴스레터를  해외 동문에게도  보내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글로리아가 마이애미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79년에 학부를 졸업했으니까 내가 마이애미에 가기 1년 전에 졸업을 했다. 80년대 후반기에 글로리아 에스테판은 Falling in Love, Cut Both Way 등 빌보드 수위 히트곡을 연거푸내서 인기가 절정이었다.  글로리아는 마이애미 대학이 배출한 매우 유명한 동문인 셈이다. 또한 그녀는 매우 성공한 쿠바계 미국인으로도 뽑힌다.

1957년 9월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난 글로리아는 한 살 때 부모 품에 안겨서 카스트로 공산혁명을 피해 마이애미로 건너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쿠바 바티스타 정부의 군인이었다.  마이애미로 건너 온 후 CIA의 훈련을 받고 피그스 만 침공에 참가했다가 카스트로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미국으로 송환되어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그 후 미군에 입대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고엽제에 노출되어서 오랫동안 고생한 끝에 사망했다. 소녀  글로리아는 아버지 병수발을 하고 어머니는 일을 해서 어렵게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대학에 다닐 때 라틴밴드를 하는 역시 쿠바 출신  에밀리오 에스테판을 알게 되어서 주말에 그 밴드에서 노래를 하다가 두 사람은 결국 78년에 결혼했고,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라틴 댄스뮤직과 노래를 했다. 두 사람은 이제 처음 만난 지가 45년이 되고 아이 둘을 잘 키웠고, 무엇보다 음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업을 해서 큰 호텔 2개와 유명한 레스토랑을 여러개 갖고 있다. 모교 뿐 아니라 여러 대학과 사회단체, 특히 쿠바 교민사회에 기부를 많이 해왔다. 모교 마이애미 대학의 재단 이사가 될 정도이니까 글로리아가 지역 사회에 얼마나 많이 기여 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글로리아와 그녀의 남편 에밀리오가 살아온 과정은 미국과 쿠바의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마이애미와 쿠바에 관심이 많아서 글로리아의 노래를 특히 좋아한다. 혹시 내 생애에 쿠바가 자유의 땅이 된다면 그 때엔 나도 쿠바를 꼭 가보고 싶다.

-사진 : 2007년에 나온 스페인어로 부른 CD 앨범인데, 쿠바와 쿠바 사람들에 보내는 글로리아의 애정을 담고 있다고 한다. 조금은 애잔한 노래들인데, 가사가 스페인어라서 알아 들을 수는 없다. 90 Millas는 스페인어로 90 마일인데, 플로리다에서 아바나까지의 최단 거리이다. 보트로 건너 올 만큼 가까운 거리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