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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이애미 1980년
작성일 : 2021-03-14 10:40조회 : 46


마이애미 1980년

1980년 마이애미는 혼돈의 계절이었다. 우선 ‘마리엘 보트리프트’(Mariel Boatlift)가 있었다. 1980년 초, 일단의 쿠바인들이 아바나 소재 페루 대사관에 버스로 밀고 들어 들어가서 망명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대사관측은 쿠바 당국의 송환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카스트로는 아바나 주재 외국 대사관의 경비를 철수해 버렸다. 그러자 아바나에 있는 외국 대사관 구내로 쿠바인 수천 명이 몰려가서 망명을 요구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외국 대사관이 마련한 항공편을 이용한 출국을 허용했다. 보다 많은 쿠바인들이 외국 대사관으로 모여들자 카스트로는 5월부터 6개월간 플로리다 남단 키 웨스트(Key West)와  가까운 마리엘 항구를 개방할 테니 쿠바를 떠날 사람은 떠나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카터 대통령은 쿠바를 떠나는 사람들은 정치적 망명자로서 미국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쿠바가 공산화 된 후에 마이애미 등지에 들어와 살고 있는 쿠바계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친척 친지를 데려오기 위해 보트를 마리엘 항구에 보냈고 쿠바인들을 태운 크고 작은 선박과 보트가 떼를 지어서 키 웨스트에 도착했다. 그 해 5월과 6월 두 달 동안 쿠바인 10만 명이 키 웨스트에 도착했다. 예상 보다 서너 배가 많은 쿠바인들이 몰려들자 비상사태가 생겼다. 가까운 친척 친지를 만난 쿠바인들은 다행이었지만 연고가 없는 쿠바인들은 수용시설에 머물다가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이런 엑소더스는 8월까지 계속되어서 총 12만 5명이 미국에 입국했다. 이것을 ‘마리엘 보트리프트’라고 부른다. 동서 냉전 시대에 있었던 가장 큰 엑소더스였다.

1958~59년에 쿠바를 떠나서 마이애미에 정착한 쿠바인들은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많았지만 1980년에 들어온 쿠바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카스트로는 감옥을 열어서 범죄인들도 방출시켜 버렸다. 카스트로의 이 같은 고단수에 순진한 카터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이 때 미국에 온 쿠바인들은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다. 실제로 1980년에 들어온 쿠바인 중에는 범죄인도 많아서 나중에 미약 갱단을 조직한 경우도 있었다. 무턱대고 미국에 들어와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등 부작용이 컸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아이티인 2만 명이 보트를 타고 플로리다에 상륙해서 이민수속을 받기도 했다. 단기간에 많은 이민자가 들어와서 남부 플로리다는 치안이 불안해 지는 등 문제가 많았다. 카터의 막연한 휴머니즘이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한 것이다.

1980년에 마이애미에선 인종폭동이 일어났다. 1979년 12월, 오토바이를 난폭하게 운전하다가 사고를 낸 흑인 세일즈맨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백인경찰관들이 폭력을 가해서 사망케 한 것이다. 백인 경찰관 네 명은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됐는데, 마이애미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우려해서 탬파에서 재판을 했다. 5월 17일,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은 경찰관 전원을 무죄로 평결했다. 그러자 마이애미 곳곳에서 흑인 시위가 발생했고, 곧 방화와 폭동으로 발전했다. 3일간 계속된 폭동 와중에 백인 10여 명이 흑인 폭도들에게 살해 당했다. 주지사가 방위군을 동원해서 폭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흑인 시위대가 지나가는 백인을 차에서 끌어내서 폭행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일어나서 충격을 주었다. 폭동과 살인은 리버티 시티, 코코넛 그로브 등 흑인거주 지역에서 주로 일어났다. 마이애미 폭동은 한인 교포들이 큰 피해를 본 LA 폭동의 전주곡이었다.

나는 1980년 8월에 마이애미에 도착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쿠바 난민과 흑인 폭동 뉴스를 보고 걱정도 했으나 8월에는 쿠바 난민도 폭동 사태도 수습이 끝난 후였다. 마이애미 남서쪽 부촌인 코럴 게이블스(Coral Gables)에 자리 잡은 캠퍼스는 치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 대도시는 어디나 인종과 치안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마이애미의 흑인은 백인과 쿠바계에 이어 3류 시민으로 대접받기 때문에 인종갈등이 더욱 첨예하다는 말을 들었다. 마이애미는 북쪽의 팜 비치에서 남쪽의 키 비스케인까지 온통 비치라서 해수욕하기에는 천국이지만 나는 바닷가에서 흑인을 보지 못했다. 대서양이 코 앞에 있어도 그것을 즐길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40년이 지난 오늘날 인종갈등이 조금 나아졌는지 궁금하다. 

마이애미 대학은 의대, 로스쿨, 해양대기대학이 경쟁력이 있으나 학부는 스포츠와 연예계에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드웨인 존슨이 마이애미 허리케인 풋볼 선수 장학생으로 졸업했고, 실베스타 스탈론이 드라마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마크 루비오 상원의원이 로스쿨 졸업생이다. 나는 그곳에서 저명한 국제법/해양법 교수인 버나드 옥스먼 교수와 토머스 클린건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당시 대학 전체에 한국학생은 나 혼자 뿐이었는데, 그것이 좋았다.

- 사진은 키 웨스트에 도착한 마리엘 보트 쿠바인들과 폭동 진압차 흑인지역에 출동한 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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